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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16화 (216/258)

216화. 심연의 성전 - 해가 뜨지 않는 섬 (1)

군항 브르타뉴에서 출발한 지 겨우 2시간.

그 짧은 시간 만에, 우리는 안전한 영토에서 보랏빛의 안개로 뒤덮인 악마들의 영역에 도달했다.

보랏빛의 안개로 둘러싸여 불길하기 그지없는 해안의 모습에 모두가, 심지어 성기사단장 알레한드로조차도 마른침을 삼킨다.

크리스틴과 리 제독이 최대한 해안지형을 정찰했음에도 고작해야 해안 이상을 파악하지 못한 이유기도 하지.

저 안개 때문에 기본적으로 시계가 제한되고, 시계가 제한되는 전장에 발을 디딘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군사들에게 부담이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저 안개가 해안으로 올수록 옅어지는 형태라서 적어도 해안가에서는 제대로 시계가 확보된다는 건데…….

반대로 말하면 해안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저 안쪽이 어떨지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지.

“음, 저 안개는 린제이 제독의 천상 마법으로 어떻게 흩어놓지 못하는 겁니까?”

“시도는 해봤는데, 정말 순간뿐이고 금세 다시 안개로 뒤덮이더군요.”

“쯧, 그것참 성가시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해안을 뒤덮은 것은 그 공포스럽던 악마들의 함대가 아니다.

프랑지아와 동방 제국, 이베리카 형제국과 노던 연합 왕국의 전열함이 해안가를 뒤덮다시피 한 광경은 명백한 우리의 우위를 보여준다.

“포격 준비!”

“전 포문 개방, 포격 준비!”

크리스틴의 명령을 뒤헝이 복창하고, 깃발 신호가 각 함에 전달되었다.

내 우려가 틀리지 않았는 듯, 해안가에는 적지 않은 수의 드론들이 도열해 있었지만-

“발사!”

육군의 대포와는 격이 다른 구경의 함포, 그것도 전열함들이 동시에 쏟아내는 수백 문의 포화 앞에서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연이은 포격에 피이잉- 소리를 내며 날아간 로켓까지 퍼부어지자 엄폐 행동 따위도 할 줄 모르는 드론들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난다.

“오, 오오오……! 장관이군!”

이건, 확실히 괜찮다.

뭣도 모르고 상륙하자마자 뛰어오는 드론들부터 봤으면 제아무리 정보로 알고 있어도 그 기괴한 움직임을 처음 보는 군사들은 당장 시각적인 공포부터 느꼈겠지.

그러나 지금도 상륙선에 타고 있는 군사들은 전열함들의 포화에 드론들이 산산조각 나는 걸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

저들이 파괴할 수 있는 적이라는 걸 미리 보고 들어가는 건 심리적인 공포를 많이 줄여줄 거다.

전열함들의 해안 포격을 진행하며, 상륙을 준비하는 시간이 십여 분.

“라파예트 후작 각하, 첫 상륙 부대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첫 상륙 부대.

데미앙 드 미르보와 성기사단장 알레한드로가 앞장서 상륙한다.

“형제님, 정말로 첫 상륙의 영광을 양보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저는 유사시의 판단을 위해서라도 두 번째 상륙 부대와 함께 가겠습니다. 섣불리 먼저 상륙했다가 해군과의 명령 하달이 늦어지면 큰일이니까요.”

“오오, 이 어찌나 책임감이 넘치시는지……! 이 영광을 양보해 주신 것은 꼭 기억하겠습니다. 그러면, 형제님을 믿고 먼저 가지요.”

상륙하는 걸로 영광은 무슨 놈의 영광, 이겨야 영광이지.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내가 일선에 나가있어서야, 전체를 지휘하기가 어려워지니 그런 것뿐인데.

그나마 내가 단신으로 바르바토스와 싸워서 이긴 전적 덕분인지 최소한 총사령관이 겁쟁이라 앞장서지 않는다는 생각은 아무도 안 하네.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나는 저 멀리로 시선을 돌려, 여기서 보기에도 불안해 보이는 모습의 데미앙 드 미르보와 그 옆에 탄 채 망원경으로 열심히 해안선을 살피는 지젤 다비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열심히 망원경으로 이곳저곳을 살피는 크리스틴을 보고 작게 말해주었다.

“루이스는 저와 함께 상륙합니다.”

“아, 네.”

크리스틴은 조금 움찔하더니 멋쩍게 웃었다.

루이스야 다비와 함께 상륙하고 싶었겠지만, 첫 상륙 부대는 위험도가 상당히 높아서 마도사단은 전부 두 번째로 뺐다.

마도사단을 잃어버리면 애초에 문을 건설하는 것부터가 실패니 별 수 없지. 물론, 크리스틴이 뭔가를 잃어버리는 경험을 또 겪게 하고 싶지도 않고.

우리는 포격을 가할 때마다 흔들리는 전열함의 갑판 위에 서서,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

해안가에 있던 드론들은 거의 다 산산조각 나버렸지만, 그래도 해안으로 접근하다가 박살 나는 것들이 산발적으로 보인다.

“……긴장 되는군요.”

해안에 거의 다 닿은 상륙선들을 보며 내가 나직하게 입을 열자, 크리스틴이 슬며시 내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답했다.

“저도요.”

마침내 상륙선이 닿고, 데미앙 드 미르보가 움찔거리는 사이 성기사단장 알레한드로가 신성 교국을 깃발을 들고뛰어내리더니 그걸 해변에 박아버렸다.

그걸 보고서야 뒤늦게 미르보와 혁명군이 헐레벌떡 내려 프랑지아의 깃발을 박더니 환호하는 광경이 보였다.

“……하.”

이제 시작인데 호들갑들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와 안도가 함께 흘러나온다.

첫 상륙 부대가 속속 상륙을 마치는 가운데에도 수상한 징후 같은 건 전혀 없다.

그래도 최소한 해안가에는 별다른 함정 같은 건 없었나 보군.

“라파예트 후작 각하, 첫 번째 상륙 부대의 상륙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우리도 상륙하도록 하지.”

“옛!”

참모가 뛰어가고.

“……피에르.”

크리스틴이 나를 나직하게 불렀다.

그녀는 나름 나에게 웃어주려고 한 모양인데, 잘 되지 않은 것이 눈에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정치인, 상인, 그리고 제독. 그녀는 맡은 모든 역할에서 이 이상은 없을 정도로 잘해주었다.

사실상 그녀가 끌어들인 노던 연합 왕국부터 시작해서 혁명군의 전쟁 수행에는 그녀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더 적을 수준이지.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강적을 상대로 한 해전에서 승리했고, 정치적인 문제로 지지부진하던 상륙 작전은 물론이고 상륙 후의 지휘권 문제까지 깔끔하게 정리해 나를 도와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또 나를 사지로 보낸 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을 그녀에게.

어떻게 안심시켜줘야 하나.

잠시 생각하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레온과 플뢰르가 우리 얼굴은 기억할지 모르겠네요.”

크리스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픽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요.”

듀몬트와 유모가 어련히 잘 길러주고 있겠지만, 막상 부모인 우리는 공사가 다망해서 좀처럼 얼굴을 비추질 못했지.

“그래도, 크리스틴. 그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나면, 우리를 자랑스러워할 수는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아이를 가진다면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저를 자랑스러워하며 자랄 수 있게 해주고 싶어서.

일찍부터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며 자란 그녀가 나와 결혼할 때 세웠던 목표.

크리스틴도 그걸 떠올렸는지 슬며시 웃으며 답했다.

“당신은 저를 사랑해 주셨고요.”

-위로해 주지 않아도 돼요, 피에르. 대신, 사랑해 주세요.

“예. 앞으로도 더 많이 사랑해 줄 겁니다. 우리 아이들도. 그러니…….”

나는 크리스틴을 끌어안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자연스럽게 눈을 감은 그녀에게 새가 부리를 부딪히듯 가볍게 입만 마주치고 떨어지자, 크리스틴이 슬며시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눈을 떴다.

“끝내고, 이어서 해드리죠.”

크리스틴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한참 보더니, 작게 답했다.

“그럼 그때 혼 내드릴게요.”

나는 그녀에게 웃어준 후 상륙선으로 뛰어내렸다.

* * *

크리스틴과 리 제독은 정말로 약속을 지켜, 전 부대가 상륙을 마칠 때까지 해안 포격을 퍼부어 주었다.

덕분에 상륙 부대는 가끔 빗발치는 포화를 뚫고 해안까지 도달하는 너덜너덜한 드론 몇 기와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는 것 외에는 무사히 상륙을 끝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상륙 단계에서 상당한 병력 손실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상륙 중인 부대만큼 공격에 취약한 것도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처구니없을 만큼 쉽게 상륙에 성공해서 오히려 더 의문이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악마들도 상륙 중인 부대를 공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터다.

크리스틴이 괜히 열심히 정찰해가며 가장 해안포격으로 지원해 주기 좋은 전장을 골라 비싼 포탄을 마구잡이로 퍼부어 준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상륙을 쉽게 허용한 거지?

해안 포격으로 인한 피해를 우려해서 그런 건가?

“이거야 원, 군마부터 내렸어도 영광스럽게 돌격할 기회는 없었겠군요. 악마 놈들도 우리 성기사단이 두려워 내뺀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하하하!”

알레한드로는 저렇게 생각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최소한 내가 마주친 대악마들은 인간의 기사 정도를 두려워할 그런 존재들이 아니었는데.

“라파예트 후작 각하! 전 부대 집결 완료되었습니다!”

나는 시계 거리가 길어야 100m도 될까 말까인, 보랏빛의 안개로 뒤덮인 대지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죽어라 고민해 봐야 답도 안 나온다.

군사들도 저 기묘한 안개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불안해하는데, 나까지 우유부단하게 굴면 더 동요하겠지.

“후, 좋아. 목표지점은 합류가 예정된 언덕, 진격한다.”

“옛, 전 부대 진격 명령 하달합니다!”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군악대가 북을 두드리며 행군을 시작한다.

“기분 나쁜 땅이야, 형제.”

크록스의 말을 들은 나는 시선을 내려, 황량하기 그지없는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하늘을 뒤덮은 옅은 보랏빛 안개 때문인지, 마치 오염이라도 된 것처럼 보라색으로 보이는 대지에 제대로 된 초목 따위는 거의 없다.

이끼들로 뒤덮인 대지는 보는 것만으로도 어딘지 으스스 해지는 불쾌감을 선사한다.

“미르보 사령관, 일단 전령부터 먼저 파견하지. 안개 때문에 육안으로는 확인이 안 되니,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합류할 시간을 조정해 보자고.”

“아,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데미앙 드 미르보가 바로 지시를 내리고, 이내 말을 탄 전령이 파견되어 우리를 앞질러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30분.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았다.

……해군의 관측으로는 이 안쪽까지 볼 수가 없긴 했지만, 지형 상 특별히 크게 돌아가고 있거나 하지 않다.

지도상으로 보면 우리가 합류지점으로 정한 언덕은 저쪽이나 이쪽이나 상륙 후 늦어도 2시간 이내로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인데.

저쪽 지휘관은 게르마니아 제국의 질 폰 레온하르트, 그리고 크라프테의 샤른호르스트 장군.

국왕인 하인리히 1세가 직접 선발대로 오지 못한 건 아쉽지만, 질이야 말할 것도 없고 샤른호르스트 장군도 젊은 유망주라고 들었는데.

최소한 안개 좀 끼었다고 시간 내에 행군도 못 마칠 인사들은 아니다.

상시 유지되는 안개 때문인지 자꾸만 찐득거리는 듯한 불쾌감이 목을 자극한다.

“……미르보 사령관. 전령 한 번 더 보내.”

“아, 알겠습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데미앙 드 미르보는 살짝 겁에 질린 얼굴로 전령을 다시 보냈다.

이번 전령은 자꾸만 뒤를 돌아 우리 쪽을 보며 말을 내달려,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헙!”

“뭐, 뭐야!”

이런, 제기랄!

“동요하지 마라! 전 부대, 전투 대형으로! 전투 준비!”

“저, 전투 준비! 전투 준비!”

행군 대형으로 길게 늘어서 있던 군사들이 헐레벌떡 뛰어다니고, 포병들이 정신없이 대포를 내려놓으며 난장판이 펼쳐진다.

젠장,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이 빌어먹을 섬은!

나는 바로 말을 박차, 조금 앞으로 나아갔다.

“헉, 후, 후작 각하! 위험합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기사의 시력으로도 저 빌어먹을 안개 너머를 볼 수는 없다.

다만 조금 더 가시거리가 늘어났을 뿐-

척.

그러나 예민한 귀는 확실한 소음을 잡아냈다.

멀리서.

척.

익숙하고, 규칙적인.

척.

살아있는 군대의 행군으로는 결코 낼 수 없을 법한, 불쾌하도록 정확한 소리.

“전 포병대, 산탄 사격 준비!”

“예, 예?”

척.

“전 포병대, 산탄 사격 준비!”

미르보가 당황하는 와중에도 지젤 다비는 빠르게 내 명령을 복창하며 포병대를 준비시킨다.

“루이스 다키텐!”

척.

“예, 옛! 라파예트 후작 각-”

“전방으로 바람 불러내!”

“아, 알겠습니다!”

루이스가 정신없이 마법진을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자, 이내 바후아 시가지에서 잔해더미를 날려버리던 것과 같은 바람이 안개를 흩날려 버렸다.

그리고, 그제야 모두의 눈에 적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척.

“허, 허어억!”

수천은 족히 되어 보이는 드론의 군세가 안개 너머에서 발을 딛는 모습이.

규칙적인 발소리가 일제히 멈추고, 다음 순간.

“돌격에 대비하라!”

내가 외치기가 무섭게, 드론들이 두 팔을 흔들며 전력으로 질주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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