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심연의 성전 - 최초이자 최후의 성전 (3)
프랑지아 북서부, 군항 브레스트 인근 중앙 대륙 연합군 집결지.
마탑의 마도사단이 섬과 연결될 ‘문’의 설치에 한창인 집결지에는 중앙 대륙의 연합군이 속속들이 모이고 있었다.
상륙전을 치를 선발대는 프랑지아와 이베리카 형제국, 게르마니아 제국, 크라프테 왕국, 그리고 신성 교국의 성기사단 등 정예군 일부고 이들은 이미 출발할 준비를 마쳤지만, 문이 연결되면 그보다 훨씬 많은 병력은 물론 노던 연합 왕국과 마도 왕국의 육군도 파병된다.
선발대의 출진을 앞두고, 그 엄청난 규모의 원정군이 모두 도열한 자리.
“후작 각하.”
“총사령관 각하!”
내가 앞을 지날 때마다 경례하거나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는 이들.
회귀 전에 받은 저주와 비난, 야유는 이미 아득하여 꿈처럼만 느껴지고, 나에게 표하는 경의와 칭송만이 가슴 벅찬 현실이 되었다.
나는 숱한 이들을 지나 단상에 섰다.
벌써 여러 번, 이 자리에 섰다.
프랑지아의 왕위 계승 내전, 혁명, 제국과의 전쟁, 이베리카 반도 전쟁, 크라프테와의 전쟁까지.
숱한 전장에서 이들을 이끌었고, 그때마다 저들을 독려하며 전장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또 전쟁을 반복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는 나에게로 쏠린 무수한 시선을 느끼며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제군. 중앙 대륙 연합 원정군 총사령관,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고한다. 우리는 어비스 코퍼레이션, 악마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모였다.
그러나 그대들 중에는 우리가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서로 피 흘리며 싸웠음을 기억하며, 어째서 또 다른 전장에서 피 흘려야 하는지를 의심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고향도, 국가도 서로 다른 그대들에게 국가를 위한 정의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신, 나는 그대들이 자각해 줄 것을 요구한다.
400년. 인류가 악마들에게 맞서 살아남기 위해 100년을 싸운 전쟁으로부터 400년이 지났다. 인류는 숱한 희생 끝에 그 전쟁에서 살아남았으나, 그 싸움을 잊었다.
그저 살아남았다는데 기뻐했으며, 악마들이 말하는 공존을 믿으며 살아왔다. 저들이 웃는 낯으로 뱉는 말을 사실로 믿으며 보낸 400년의 세월 사이 흘러내린 피는 잊히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무기를 들어왔다.
그러나 제군, 우리는 이제 진실을 알고 있다. 저 악마들이 우리의 불행 속에서 번영해왔음을. 앞에서는 평화와 공존을 논하며, 뒤에서는 대륙의 불화를 부추기고 혼란의 씨앗을 뿌려 왔음을 알고 있다.
저들이 우리 이웃의, 동족의 육신으로 얼마나 끔찍한 피조물을 만들었는지 보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악마들의 저런 만행조차 사실이 아닌 헛소문으로 치부되었다.
도저히 감출 수 없을 만행조차 그랬을진데, 400년의 긴 세월 동안 알려지지도 않은 저들의 만행은 얼마나 많았을지 그대들은 감히 짐작할 수 있는가?
우리의 선조가, 그대들의 아버지가, 그리고 그대들 모두가 깨닫지도 못한 사이 악마들의 꼭두각시로서 놀아나 왔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우리가 서로를 헐뜯으며 적대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저들이 그것을 원하며 대륙의 분열을 조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얼마나 많은 인류가 저들에 의해 희생되고 고통받아야 하는가.
영원히. 영원히다, 제군.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일어서지 않는다면 영원히, 무수한 인류가 같은 운명을 반복할 것이다.
저 400년 전의 성전이 잊혔듯, 언젠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고통과 분노마저 세월 속에 잊힐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가, 제군?
영원히 사는 악마들의 비웃음 속에, 분열되고 갈라진 채 살아갈 후손들의 미래를 원하는가?
우리의 아이들이, 그 후손들이, 인류가 영원히 저들의 노예인지조차 모른 채 노예로서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등을 돌려 떠나도 좋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지금껏 우리가 겪어온 모든 수모와 고통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고, 저들의 영원한 간계로부터 인류를 해방하고자 할 결의가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그 기회다.
인류 최초로, 우리가 저 저주받을 악마들의 섬에 발을 들일 기회.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기회가 눈앞에 있다.
제군, 이것은 전쟁이다. 그대들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임무이며, 생존은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단 한 가지만큼은 보장하겠다.
이 전쟁은 군주를 위한 것도, 국가를 위한 것도 아니다.
인류가 서로 피 흘리는 전쟁이 아니라, 인류를 지키기 위해 악마들에 맞설 전쟁.
바로 우리의 자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를 위한 성전이다.
저 해가 뜨지 않는 섬에서 맞이할 전장에서, 그대들이 흘릴 피와 땀 한 방울조차 낭비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 어째서 싸우는지도 모른 채 지금껏 피 흘려온 인류의 군대여.
부디 이 성전에 동참하여, 그대들 자신을 위해 피 흘려 달라.
그리하여 먼 훗날, 이 대륙에서 악마들의 그림자가 사라졌을 때.
후대의 인류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전쟁을! 최초이자 최후의 성전이었다고 부르게 하자!”
* * *
프랑지아와 어비스 코퍼레이션 사이의 해협.
프랑지아 해군 기함, ‘리브레’의 갑판.
“라파예트 후작님. 저는 후작님의 평소부터 전공과 무예에 대해 무척 흥미가 깊었습니다. 후작님께서 이전에 명예 성기사단원직을 고사하신 점이 못내 아쉽기도 했지요. 말 나온 김에 다시 성기사단에 입단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후작님처럼 고결한 기사시라면 교황 성하께서도 기꺼이 받아주실 겁니다.”
나는 옆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성기사단장 알레한드로 덕분에 혼이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이건 비밀입니다만, 성기사단 내에는 후작님을 존경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 극악무도한 할파스를 직접 사로잡아 교단에 보내주신 것 뿐 아니라 성녀왕 폐하를 알아보신 안목하며, 무엇보다도 저 ‘라스’사의 대악마 바르바토스를 단신으로 처단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역대 어떤 성기사도 이런 위업을 혼자 해내진 못했습니다.”
하다못해 비밀이라고 할 거면 막 흘리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성기사들은 방구석에서 수도자이자 기사로서 단련만 하느라 과묵한 것 아니었어?
나는 반쯤 기진맥진한 채 알레한드로의 별 의미도 없는 헛소리를 듣고 있다가, 옆을 지나가는 리브레 선장 뤼도빅 뒤헝을 보곤 열심히 손짓했다.
‘이리 와봐, 선장!’
댁도 열심히 떠드는 거 좋아하잖아. 떠드는 거 좋아하는 둘이서 신나게 좀 떠들어 봐. 난 좀 내버려 두고.
그러나 뒤헝은 손으로 목 쪽을 잡는 시늉을 하더니, 손을 엑스자로 들며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목?
아, 에리스가 걸어준 십자가 목걸이.
……종교랑은 안 친하다 이건가.
아니, 알 바냐. 난 뭐 종교랑 친해서 이걸 들어주고 있겠어?
신이나 에리스에게 감사하는 거면 몰라도 교국의 꽉 막힌 광신도들은 질색이라고!
냉큼 이리 오지 못해!
그러나 뒤헝은 내 필사적인 손짓을 못 본 척하며 달아나버렸다.
“어떻습니까, 라파예트 후작님? 저는 물론이고 성기사단의 형제들 모두가 후작님을 형제로 부를 영광스러운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명예직일 뿐입니다. 프랑지아 혁명군 총사령관을 교국으로 모셔가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아, 물론 와주신다면 더없이 기꺼운 일이기야 하겠습니다만, 하하하!”
나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열심히 억누르며 눈치고 외교적 수사고 없는 성기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영광이군요. 저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오오, 정말이십니까? 교황 성하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하, 그래.
기왕 시달리는 것, 건설적으로라도 써보자고.
“그런 의미에서, 아무래도 혁명군과 성기사단의 건설적인 제병협동을 논해볼 필요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병 협동, 말씀이십니까…….”
알레한드로의 목소리는 바로 떨떠름해졌다.
아니, 이 인간이 진짜.
“최소한 적지입니다. 기병대가 무작정 돌진하고 후퇴도 없이 교전하는 그런 사태는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 성기사가 악마들과의 싸움에서 물러선다니요.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형제님!”
누가 당신 형제야! 고려해 본다고만 했지!
아니, 그보다.
“전장에서 작전 상 후퇴라는 건 전술적인 필요에 의해 언제라도-”
“형제님, 구성서 제4장 1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이 굳건하면 거룩한 은총이 함께 하사, 능히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니 적의 앞에서 물러섬이 없느니라. 성기사단의 단원들은 모두가 성녀왕 폐하와 신의 이름으로 굳건히 나아갈 것이며, 단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적들을 분쇄할 것입니다.”
……안 되겠어, 이 자식.
이런 놈들을 데리고 제병협동을 할 생각을 하다니, 내가 미쳤지!
내가 황당해서 입을 떡 벌리고 있자 알레한드로는 그걸 자기 식대로 해석했는지, 인자한 얼굴로 웃었다.
“너무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형제님. 아직 성기사단원으로서의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하신 분께서 성서의 가르침을 모르신다고 하여 탓할 수야 없지요. 앞으로 천천히 배우신다면 새로운 길에 눈을 뜨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길 사양하고 싶은데.
……어째 교황이 왜 그렇게까지 성기사단을 보내기 싫어했는지 알 것 같네.
그나마 단장이면 개중에선 정치적 수완이 있는 놈이거나 아니어도 가장 유능한 자를 올려뒀을 텐데 단장이 이 모양 이 꼴이어서야 볼 것도 없지.
이놈들의 기사로서의 강함이야 물론 의심할 필요가 없겠지만, 전력 보존이라거나 전략적 사고 같은 건 아예 머릿속에 없다.
악마들과 싸우다 장렬하게 죽으면 순교라며 기꺼이 싸우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소름이 다 끼친다고.
나는 알레한드로를 상대하느라 골머리를 썩고 있었지만, 다행히 이 배에는 내 최고의 아군이 타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라파예트 후작님, 성기사단장님.”
“크흠, 제독님.”
알레한드로는 크리스틴이 나타나기가 무섭게 방금까지의 부담스럽게 살갑던 태도를 거두고 한발 물러났다.
확실히 느낀 건데, 성기사단은 크리스틴의 존재 자체를 부담스러워한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면서 군사 지휘관이고, 저들이 은근히 경멸하는 상인에 심지어 ‘아키텐의 검은 마녀’라는 뒤숭숭한 칭호로 대표되는 어두운 영향력까지.
저 소위 ‘고상한 수도자’들이 꺼릴만한 요소는 다 가지고 있거든.
그런데, 하다못해 나한테 잘 보일 생각이면 크리스틴을 노골적으로 꺼리는 티를 내면 안 된다는 최소한의 발상조차 못하는 거냐.
“부득이하게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네요. 상륙 작전에 다소 문제가 생겼어요.”
“음? 무슨 일입니까, 크리스틴?”
“사전에 조사한 상륙지 해안의 넓이에 비해, 성기사단이 요구로 하는 운송량이 더 크더라고요. 특히, 군마가요.”
아, 군마.
하긴, 경기병도 아니고 풀 플레이트 갑주를 입은 기사 500명이 탈 대형 군마다.
심지어 저들은 종자들 중에도 기병을 상당수 보유했으니, 저걸 상륙시키는 것이 수월하면 더 이상…….
……하지만 그걸 미리 계산 못했을 리가 없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리스틴이.
알레한드로의 표정은 완전히 뭣 씹은 것처럼 변했다.
“그래서, 상륙이 지연된다는 겁니까?”
“네, 아무래도 군마가 상륙시키는데 가장 큰 인원과 시간을 잡아먹을 걸로 보여서 부득이하게 다른 부대를 우선해서 하선시켜야겠네요.”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설마 혁명군이 성기사단보다 먼저 상륙하기 위해-”
아, 이쯤 되면 크리스틴의 의도를 알 것 같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단장. 성기사단은 혁명군과 함께 첫 번째로 해안을 밟게 될 겁니다. 부득이하게 군마는 나중에 내리게 되겠지만요. 이 정도는 협조 가능하시겠죠, 제독님?”
“물론 가능합니다.”
크리스틴은 냉큼 답했고, 알레한드로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라파예트 후작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내가 크리스틴에게 입 모양으로 감사를 표하자, 크리스틴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완벽해.
이제 최소한 저 뇌까지 근육과 신앙으로 가득 찬 성기사들이 다른 부대들이 상륙 끝마치기도 전에 돌격부터 하는 꼴은 안 봐도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