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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13화 (213/258)

213화. 심연의 성전 - 최초이자 최후의 성전 (1)

프랑지아 북서부, 군항 브레스트.

출발해서 전장으로 이동할 때까지는 고작해야 2시간가량이 소요되었을 뿐이었지만, 나포한 함선과 심각한 손상을 입어 침수가 발생한 함선을 응급수리하느라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바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귀환한 항구에는 에리스가 마중 나와 있었다.

“여왕 폐하, 이렇게 친히 나와주시-”

크리스틴은 에리스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추려다가, 그대로 덥석 안겨온 에리스를 받아내느라 휘청거려야 했다.

“폐하, 예법…….”

“수고하셨어요!”

베일을 쓰고 있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기쁨에 차서 활짝 웃고 있다는 걸 알겠다.

한 소리 하려던 크리스틴도 결국 픽 웃어버렸다.

제독의 검은 제복을 입은 크리스틴에게 안겨 있는 하얀 로브의 에리스라...

그림 좋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에리스가 내 쪽으로 시선을 휙 돌려서, 나는 움찔해야 했다.

“아, 라파예트 후작님도 수고하셨어요. 음, 죽다 살아나셨다는 보고를 받아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멀쩡하시네요.”

어째 이 대사 꽤 자주 듣는 것 같은데.

이번엔 크리스틴이 아니라 에리스에게 들어서인지 기분 묘하네…….

절로 머쓱한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해야만 할 말을 했다.

“감사드립니다, 여왕 폐하.”

“네? 갑자기요? 뭐가요?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기만 했는데요…….”

크리스틴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에리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신성력 증폭 수정을 썼다고는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강력한 축복을 걸어주고서도 자신은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양 완전히 잊어버린 얼굴.

회귀 전,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는 와중에도 완전한 타인을 위해 기원을 올렸던 성녀 다운 모습.

정작 에리스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질색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웃으면서 다시 덧붙였다.

“성녀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신께도.”

에리스는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매우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물어왔다.

“후작님이 그런 말씀을 다 하시고. 좋은 일인 것 같긴 한데, 괜찮으신가요? 주마등이라도 보신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던졌을 그 말이 너무 적절해서,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예, 그랬습니다. 덕분에 제독님께 아주 크게 혼이 났죠.”

에리스는 으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크리스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으신가요? 보통 라파예트 후작님이 상태가 안 좋으면 백작님이 더 괴로워하시던데.”

크리스틴은 슬며시 웃으며 답했다.

“폐하께서 제 마음을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것참, 듣는 사람 뼈아프네.

어쨌거나…….

크리스틴과 내가 동맹과 함께 위험을 무릅써가며 간신히 길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 결실을 봐야지.

“전령은 파견되었겠지요, 여왕 폐하?”

내 말을 들은 에리스는 씩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죠. 이제야 제대로 연합군의 전쟁이겠네요.”

* * *

중앙 대륙의 다른 국가들은 프랑지아에게 이런저런 약조를 받고 참전 결정은 했지만, 섣불리 먼저 파병했다가 군비만 나갈까 봐 우려하는 중이었다.

일단 해전에서 승리나 하다못해 양패구상은 이끌어 내야 상륙 시도가 가능한데, 대부분은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우세를 점쳤으니까.

그런 상황에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함대 결전에서 대륙의 연합함대가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순식간에 전 중앙 대륙을 휩쓸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지금껏 그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했던 ‘라스’ 사의 공포스러운 함대가 무너지고, 인류가 단 한 번도 발을 들여 보지 못한 섬으로의 바닷길이 열렸다.

반신반의하고 있던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맞선 승리가 손에 잡힐 듯하자, 중앙 대륙의 국가들은 앞다투어 군대를 출정시켜 프랑지아로 보내왔다.

제일 먼저 브레스트에 도착한 군대는 크라프테 왕국의 것이었다.

“연합군에 참여하고자 멀리 와주신 것에 감사드려요, 국왕 폐하.”

환영하는 에리스의 앞에서 하인리히 1세는 말에서 내리며 간단하게 답했다.

“선대 국왕께서 정식 조약으로 체결하신 내용입니다, 준수해야지요.”

“그러신 것치고는, 가장 먼 곳에서 가장 빨리 와주셨네요.”

에리스가 작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자, 하인리히 1세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답했다.

“이거야, 아무래도 성녀왕 폐하의 앞에서 크라프테가 이날을 기다려왔다는 걸 숨기기는 어려운 모양입니다.”

과연 크라프테 왕국이라고 해야 할지.

상비군을 전부 투입한 전쟁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아직 3년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제법 엄정훈 군기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군대, 그리고 지난 전쟁을 경험하며 정예화된 장교단을 데리고 도착했다.

“으…….”

그들에 맞서 싸웠을 때의 기억이라도 떠올리는지, 어째 데미앙 드 미르보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는 픽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이번엔 우리 편이야.”

“……그것참, 무시무시하게 든든하네요. 하, 하하…….”

그 든든한 자들과 함께 더 끔찍한 악마들에 맞서려 갈 참인데, 가끔 보면 데미앙 이놈은 위험을 느끼는 감각이 어딘가 이상하단 말이지.

뭐, 굳이 이 말을 해줘서 그러지 않아도 불안한 심리를 부채질할 필요야 없겠지.

다음으로 도착한 것은 이베리카 형제국의 군대.

엄청난 덩치의 오크들과 그 뒤를 따르는 고블린, 그리고 인간과 수인의 이색적인 행렬에 구경 나온 이들이 가득한 가운데-

“왕과 왕의 형제를 뵙습니다!”

일제히 도열한 형제국의 군사들이 시가지가 떠나갈 듯한 기세로 외쳤다.

“으하하하, 어서 오라!”

크록스야 뭐, 그렇다 치더라도.

나는 절로 에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빤히 여왕인 에리스도 있는데 이런 식으로 나를 더 우선하는 건 좋지 못한데.

다행히 에리스는 괜찮다는 듯이 손짓을 했지만, 역시 이렇게 다국가 연합군이 되니 문화 차이는 곤란하네.

그래도 애꾸눈의 오크 카로크가 이끄는 오크들은 저 악마들에 맞선 든든한 증원군이 되어 주겠지.

그다음 군대는 그로부터 며칠 뒤에나 도착했지만, 그 존재감만은 굉장했다.

“오오, 저들이 바로…….”

“살아 있는 신앙의 군대…….”

정작 교황은 보낼 생각이 없었고 에리스가 직접 찾아가서 반쯤 멱살 잡아끌고 온 성기사단이지만, 그들의 위용은 심지어 나조차도 감탄하게 만들었다.

검은 십자로 장식된 백은의 풀 플레이트를 두르고, 손에는 신성력으로 축성되어 눈이 부시도록 번쩍번쩍 빛나는 랜스와 방패를 들고 새하얀 백마에 오른 자들.

기사의 왕국이라던 프랑지아 왕국조차 전복되고, 신에 대한 믿음이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대륙에서도 신앙과 기사도에 목숨을 건 마지막 기사 집단.

그런 기사들이 무려 500명에 달하고, 그들의 종자들까지 하면 수천에 달한다.

종교의 힘에 빌려 떼돈을 벌어들이는 신성교국이니 저 정도 규모의 기사 집단을 아직도 유지할 수 있는 거겠지.

정작 저들을 유지하는 것이 부담되어 전열함 하나 없는 구시대적인 국가라는 건 어떤가 싶지만…….

그래도 번쩍이는 랜스를 든 자들이 일제히 백마에서 뛰어내려, 햇빛을 반사하는 백은색 갑옷을 철컹이며 움직이는 것은 위압감이 대단하다.

그 대단한 기사들이 일제히 투구를 벗으며 무릎 꿇고, 단 한 명의 여성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광경.

정작 그 대상인 여성은 대조적으로 단조로운 흰색 로브를 입었을 뿐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시가지의 모두가 반쯤 홀려서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성기사단이 살아 있는 신앙의 증거, 성녀왕 폐하를 뵙습니다!”

“먼 길을 와주신 성기사단을 환영합니다. 이번 전쟁에서 그대들의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세상에나. 상황 때문인지, 심지어 에리스의 목소리마저 성녀답게 숭고하고 위엄 있게 들린다.

과연 광신도인 성기사들은 감동이라도 했는지, 완전히 합창하듯 답했다.

“이 몸이 가루로 스러지는 순간까지, 성녀왕 폐하를 위해 신앙과 명예를 노래하겠나이다!”

……그것참. 수백 년 전에나 볼법한 광경이군.

어쨌거나 신앙의 힘이 많이 약해진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신성 교국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게 만든 최강의 기사 집단이다.

상대도 다름 아닌 저들의 주적 악마들이니, 도움이야 되겠지…….

새삼 저 뇌까지 신앙과 근육으로 찬 것 같은 자들을 끌어들인 에리스에게 감탄하고 싶은 기분인걸.

솔직히, 베일 들쳐내고 에리스가 무슨 표정 짓고 있는지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

게르마니아 제국에서 도착한 군대의 지휘관 중에는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인물이 있었다.

“질, 드 리오넬?”

반쯤 굳어있는 나에게, 질은 가볍게 악수를 청하며 답했다.

“이제는 질 폰 레온하르트입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님.”

“대체 어떻게 당신이 제국군에…….”

질 드 리오넬, 아니 질 폰 레온하르트는 픽 웃으며 악수하고 말했다.

“제국에서 군제 개혁을 시행하며 외국인 장교들을 영입하는 건 알고 계셨겠죠? 크라프테와 프랑지아에서의 전투 경험과 교리를 바탕으로 작성한 군제 개혁안을 제출하고, 귀족 작위와 개혁안의 시행을 요구했습니다.”

“……허.”

내가 얼이 빠져 있자, 질은 씩 웃으며 답했다.

“체칠리아 황태후 폐하께서 직접 불러서 독대하시더니, 귀족 작위와 군제 개혁안의 시행 둘 다 받아들여주시더군요.”

……그래서 제국군의 지휘관, 그것도 제국의 귀족이 되셨군.

-……지켜보겠습니다. 아버지에게 경의를 표했다는 나의 원수. 후회는 해도 속죄는 할 수 없다는 당신이,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라는 당신이.

포화와 비명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언젠가 옛 동맹을 팔아치우고 산 자리로 부패한 평민들의 정부와 권력을 누리며, 입바른 말을 했을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그 날. ……내가 그대를 찾아갈 것입니다.

빗줄기 속에서 그 말만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던 남자가, 나를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인생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같은 깃발 아래에서 이런 식으로 다시 싸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당신이 이런 식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래도, 최소한.

“제가 아직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내 질문을 받은 질은 픽 웃으며 답했다.

“목숨 걸고 ‘라스’사의 제독을 단신으로 처치하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게 최선이 아니라면 군대에 있는 인간들은 다 옷 벗어야겠죠.”

“아키텐 백작의 기함에 얻어 타고 있다가 어쩌다 보니 그런 것뿐인데요.”

“하하…….”

질은 나직하게 웃음을 흘리다가, 이내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죠, 라파예트 후작.”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리, 아니, 레온하르트 장군.”

마지막으로…….

“아이고, 아키텐 백작! 아~~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늙은이가 해전에서 혹시라도 아름다운 백작의 몸이 상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어찌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환영합니다, 마탑주님. 그래도 우선은 여왕 폐하께…….”

“오, 오오, 그렇지, 그렇지! 직접 뵙는 건 처음이구려, 프랑지아의 여왕 폐하! 여왕 폐하께서 비록 우리 마탑의 후원자는 아니시지만, 신성력 증폭 수정의 주 고객으로서 마탑의 재정에 큰 도움-”

“스, 스승님, 제발!”

대책 없이 속물적인 마탑주 앞에서, 에리스가 당황하는 걸 보다 못해 말리던 루이스는 호통만 들어야 했지만.

“떽! 어디서 스승이 말하는데 끼어들어!”

여러모로 폭풍과 같은 마탑주가 마도사단을 대동하고 합류하며, 중앙 대륙의 전 군세가 집결했다.

혁명 프랑지아 왕국, 크라프테 왕국, 게르마니아 제국, 이베리카 형제국, 마도 왕국 홀란트, 신성 교국, 그리고 동방 제국에 이르기까지.

정치체제는 물론이고 종교, 심지어 종족까지 완전히 다른 군대가 한데 모여서-최초로.

서로 피 흘리며 싸워왔던 중앙 대륙의 국가들이, 그 모든 원흉이자 악에 맞서 싸울 전쟁.

“지금 이 순간, 중앙 대륙 연합군의 대 어비스 코퍼레이션 원정 전쟁을 선포합니다!”

“와아아아아-!”

에리스의 선언에 일제히 무기를 들어 올리며 함성을 내지르고-반드시 최후여야 할 전쟁.

저 심연의 위협에 맞선 성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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