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심연의 성전 - 구원
전속력으로 내달려온 전열함의 충각.
대비하고 있었어도 버티기 어려울 압도적인 질량의 폭력이 몸을 그대로 덮치고-나는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고 있는 바르바토스의 몸과 함께 그대로 튕겨 나갔다.
몸이 부유하는 감각.
그리고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수면.
‘크리스틴.’
엉망진창인 몸이 수면에 내리꽂히는 순간, 내 의식은 그대로 끊어졌다.
* * *
“푸른 피를 죽여라!”
적의와 살의로 가득한 외침.
번들거리는 악의.
아아, 또.
10년이 넘게 지나고, 완전히 다른 미래를 맞이하고서도.
결코 잊을 수 없고, 결코 떠나지 않는 악몽.
전생의 죽음을 맞이한 광장을 가득 메운 피비린내가 가득한 장소.
나의 실패, 나의 최후.
“더러운 마녀를 죽여라!”
마녀?
나는 그제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이 나의, 피에르 드 라파예트의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죽음을 맞이하며 본 광장이나, 내가 보지 못한 날의 풍경.
같은 길을 걸어가 죽음을 맞이한, 다른 사람의 기억.
에리스.
자각한 순간.
그녀가 느낀 기분이, 그녀가 하는 생각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내전과 혁명이라는 혼란의 시대에 왕녀라는 신분 때문에 언제나 마음을 놓지 못한 채, 끝없이 해야만 했던 도피 생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보답하기 위해, 또는 그저 천성적인 선량함으로 그들을 도우려 했던 모든 행동들.
그러나 그 결과가.
“하, 성녀라고? 악독한 마녀 같으니!”
“저주받을 왕족 주제에 웃는 얼굴로 우리 모두를 속였어!”
멋대로 그녀를 성녀라고 부르며 자신을 구해달라고 매달리던 이들의 입은 비난을 퍼붓고.
“부패하고 타락한 왕실의 3왕녀이자 프랑지아 민중을 기만한 마녀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본 법정은 피고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이름으로 사형을 선고한다.”
저들만의 정의의 이름으로 죽음을 내렸다.
보답받지 못한 선의에 치밀어 오르는 억울함과, 그럼에도 그들을 원망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햇빛에 반쯤 타버려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된 눈을, 볼 수 없으니 원망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처연한 감정이.
도피 생활 끝에 변해버려, 에리스를 원망하던 어머니의 변모와 저들의 변모를 동일시하는 심상이.
결국 그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 끝에서 원망과 저주를 내뱉는 대신, 그저 눈물 흘리며 체념하고 단두대로 향하는 과정이.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영혼까지 물들여버릴 듯한 피비린내와 차디찬 목재의 감촉에 닿고서.
차오르는 검고 질척한 원망.
한없는 회한.
차라리 자유롭게 살며, 최선을 다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면 신의 앞에서 어머니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그 감정이 나 또한 눈물 흘리게 한다.
그리고 에리스가 마침내 체념하며 눈을 감은 순간.
그녀가 보았던 환각이 나에게도 보였다.
마치, 오늘처럼.
악마들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군대.
그리고 그들의 앞에서 사람들을 이끄는, 금빛 눈동자에 금발의 성녀.
……그레모리?
자각한 순간, 그레모리와 눈이 마주쳤다.
바로 다음 순간, 에리스가 눈을 뜨고-
천천히, 어둠이 내려앉는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
에리스의 마지막 심상이 스며들었다.
회귀 전의 에리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녀로서 신께 바치는 기원.
이토록 억울한 죽음 끝에도, 자신이 그저 벌을 받는 거라고 여기며.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자신에게 소중한 이조차 아니라.
그저 이런 결말을 바꾸려고 할, 누군지도 모를 다른 이에게 기회를 내려달라고 비는 기도.
그 이타심에 단 한 조각의 이기심조차 없어서.
그렇기에 더 간절하고, 그렇기에 한없이 기적에 맞닿은.
칼날이 떨어져 내리는 섬뜩한 소리 속에서도 미소 지으며 끝을 맞이한 성녀의 마지막.
* * *
커튼처럼 완연히 내려진 어둠 속에서.
아릿한 고통이 몸 전체를 찌르듯이 스며든다.
그 고통이 번지는 몽롱한 감각 속에서, 이제야 알게 된 깨달음.
그렇게 된 거였나.
원래라면 주어질 리 없을 두 번째 기회, 그 근원.
이전 생에 얼굴조차 마주친 적 없던, 그저 내가 죽기 전날 같은 자리에서 처형당했을 뿐인 성녀의 기원이 일으킨 기적.
그런 기적을 받아서.
크리스틴을 살려내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모든 원흉인 악마들을 미처 몰아내기도 전에 이렇게 쓰러질 수는 없는데.
나는 시선을 내려, 아직도 내 배에 박혀 있는 바르바토스의 검을 보았다.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피.
총상을 입은 어깨와 다리에서부터 번져가는 한기.
지금 바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싫어도 자각해 버린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 속에 빛이 나타났다.
나는 멍하니 시선을 돌려-
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공간 속이기에, 더욱 찬연하게 빛나는 금색의 악마를 바라보았다.
검은 수녀복을 차려입은 서큐버스.
“……그레모리.”
“오랜만이네요, 라파예트 후작님. 그간 잘 지내셨냐고 묻는 건…… 지금 상황에는 조금 아니죠?”
나는 무의식적으로 왼손을 들어 눈가를 덮으려다가, 검지와 중지가 날아가 버린 손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봤나?”
그레모리는 천천히 어둠을 부유해 내게 다가오더니, 나직하게 답했다.
“네, 전부 봐버렸답니다. 죄송해요. ……그래도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던 후작님의 기억도, 어떻게 그런 신성력이 후작님의 몸에 남았는지도.”
나도, 심지어 에리스조차 몰랐던 신성력의 간섭을 제일 먼저 눈치챈 악마.
-후작님의 어린 성녀보다는, 아직은 제가 조금 더 능숙하거든요.
“네가, 400년 전의 성녀?”
그레모리는 조용히 미소 지을 뿐, 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아니, 어째서?”
마왕군에 맞서 프랑지아와 인류를 이끌고 최후까지 싸우다가, 마지막 전투에서 악마들에게 사로잡혀버린 비운의 성녀.
그 성녀가, 서큐버스가 되어 있다고?
아니, 인간이 악마가 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종족이 다른데?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처음부터 반쪽짜리 악마였어요. ……당신들에게 성녀라고 불리던 그 시절에도요.”
“그게 무슨…….”
서큐버스가 성녀로 칭송받으면서 인간들을 이끌고 마족들에 맞서 싸웠다고?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내용에 혼란에 빠져 있자, 그레모리가 손을 뻗어 내 왼손을 잡았다.
이내 강렬한 빛이 어둠뿐인 공간을 뒤덮고-
나는 고통 속에 사라졌던 무언가가 자라나는 생소한 느낌에 몸서리쳤다.
그레모리가 손을 떼고, 왼손을 들어 올린 나는 언제 반이 날아갔냐는 듯 멀쩡해진 손을 보았다.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와 혼란 속에, 내가 간신히 내뱉은 건 의문이었다.
“왜?”
그레모리는 금빛의 눈을 휘며 웃었다가,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낮게 읊조렸다.
“글쎄요, 왜일까…….”
나를 현혹시키려는 수작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내버려 두기만 해도 죽을 몸이었다.
이 서큐버스는 대체 뭘 바라는 거지?
그레모리는 쿡쿡 웃으며 다시 손을 뻗어, 총탄에 맞은 어깨와 다리를 고쳐주며 덧붙였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우리는 너희를 멸망시키겠다고 전쟁을 일으킨 거다. 모르는 건 아니겠지.”
“알고 있어요, 라파예트 후작님.”
“줄을 바꿔 잡으려는 거라면 의미 없어. 인류 전체의 연합국인 이상 나 하나 살려준다고 해서-”
내 말은 그레모리가 왼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으며 멈췄고-그레모리는 그대로 오른손으로 내 배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
끔찍한 격통 속에 절로 터져 나온 비명이 서큐버스의 손에 막히는 사이, 다시 빛이 뿜어져 나오며 고통이 사그라 들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마침내 그레모리가 내 입에서 손을 떼고 거칠어진 숨을 토해내고 있자, 그레모리는 가볍게 날개를 펄럭여 허공을 유영해 조금 멀어졌다.
“……나는 네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고마워…… 해야겠지만, 솔직히 나는 네 의도를 의심하고 있다.”
그레모리가 나에게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다.
악마라는 점이 문제일 뿐 잘해주었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은인에 가깝겠지.
그러나.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매수된 각국 상류층에는 먼 이교도 반도와 불온한 혁명 국가의 증거도 없는 외침을 공허하게 만들 정도의 영향력은 충분히 있어요.
결국 그레모리도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일원으로서 이 모든 비극에 일익을 담당해 왔다.
애초에, 자기 입으로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너는 네 입으로 공존을 원하는 온건파라고 말했지만, 지금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벌이는 짓은 아무리 봐도 대륙과 멸망전을-”
“후작님.”
내 말을 끊은 그레모리는 슬며시 웃었다.
“저도 알아요. 결국 이해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제 입장에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결과적으로는 당신들에게는 용납 받을 수 없는 일들을 꽤 벌였으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그런 것조차 자각하고 있다면, 왜?
“그냥…….”
그레모리는 자조적인 미소를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악마도 인간도 되지 못한 반쪽짜리니까. 겨우 그뿐인 이유로 다 포기하고,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긴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봐버려서요. ……싫어도 그 어린 성녀와 저를 비교하게 되네요.”
서큐버스는 슬며시 웃으며 덧붙였다.
“처음부터 기만뿐이었던 거짓된 성녀가, 이제 와서 추억을 되새기며 자기 위안이나 삼고 있다고 생각해 주세요.”
그레모리가 말을 마친 직후, 어둠뿐인 세계가 흔들렸다.
-에르!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굳이 싸우지도 않으려는 자들까지 전부 절멸시키려고 들 생각은 없다. 네가 책임질 자들을 데리고 섬을 떠나.”
내 말을 들은 그레모리는 멈칫하더니, 미소 지었다.
어딘가 처연해 보이는, 전혀 악마답지 않은 얼굴로.
금빛의 악마가 작별을 고했다.
“그럼 가보세요, 기사님. ……덕분에 기억도 잘 나지 않던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답니다.”
그걸 끝으로 어둠의 세계가 무너졌다.
* * *
“피에르!”
꿈속의 세계에서 나를 끄집어낸, 비명 같은 외침을 듣고.
“커헉!”
나는 입에서 물을 토해내며 현실로 돌아왔다.
온몸이 차갑고, 축축하게 젖어 있다.
아, 이런.
사랑하는 레이디의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잖아.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 손이 멀쩡하다는 것에 감사하며 크리스틴의 뺨을 매만졌다.
원래라면 제대로 서로를 알기도 전에 죽어버렸을 약혼녀.
이름조차 모를 사람에게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한 성녀의 기원으로 지켜낸 기적.
“……걱정을 끼쳐 드렸군요.”
크리스틴은 무어라고 답하지도 못한 채 눈물을 쏟더니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매번, 매번. 이럴 거면 차라리, 차라리 내가……!”
통곡하는 목소리에, 나직하게 답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듯,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당장 크리스틴이 위험한데 정석으로는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어서, 그래서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크리스틴이 나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다고 생각하면.
나 또한 이만큼 괴롭겠지.
“죄송합니다.”
내 사죄를 들은 크리스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오열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는 것뿐.
그러고 있자 아직 흐릿한 시야로, 바다에는 어울리지 않는 금빛과 검은 색이 섞인 독특한 날개의 나비가 날갯짓하며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거짓된 성녀라고 했던가, 그레모리.
진짜 성녀였던 에리스마저 마녀로 몰려 죽었는데, 성녀가 서큐버스라는 것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최소한, 역사에 남은 모든 이들은 그녀를 성녀로서 찬미하며 따랐다.
서큐버스인 그레모리가 어째서 인간들의 성녀로서 싸웠는지 나는 모르지만, 최소한 그들에게 그레모리는 진짜 성녀였을 터.
구원받은 나 또한, 감사해야 도리에 맞겠지.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옷이 엉망이 된 채 머쓱한 얼굴을 하고 딴청을 피우고 있는 리브레 선장 뤼도빅 뒤헝과, 거대한 몸에 온통 피칠갑을 한 크록스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이겼다, 형제.”
크록스는 내가 묻기도 전에 원한 답을 내주었고, 나는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나직하게 내뱉었다.
“신께 감사를.”
나도 모르게 한 말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쓴웃음이 나와, 머쓱하게 덧붙였다.
“……우선 항구로 돌아가죠.”
돌아가면.
에리스에게.
그리고 신에게.
이 기적에 감사를 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