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08화 (208/258)

208화. 심연의 성전 - 해협 돌파 (3)

프랑지아의 수도, 뤼미에르.

나는 말에서 내려 수도에 걸맞은, 거대한 대성당을 바라보았다.

400년 전의 성녀가 신성력을 발휘하며 조국을 지켜낸 이래, 프랑지아는 언제나 경건하게 신을 섬기는 국가였다.

비록 긴 시간 동안 그 신앙이 빛바래고 부패하여 교회 그 자체를 시대에 뒤처진 옛 유산으로 치부하던 이지도르 같은 자들도 나오기도 했으나, 아직까지도 프랑지아 내에는 많은 신자들이 있다.

그리고 오늘 뤼미에르의 대성당에는 그 어떤 때보다도 무수한 이들이 모여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다.

혁명 프랑지아 왕국이 어비스 코퍼레이션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했기 때문이다.

신의 앞에서 이번 전쟁에서 남편을 지켜달라고, 악마들에게서 아들을 보살펴 달라고 기도하는 이들.

그들을 지나쳐 대성당의 안쪽으로 들어서자 요한 대주교가 나에게 말없이 목례하며 맞아주었다.

나도 그에게 말없이 목례하고,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대로 안으로 들어서자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기도하고 있는 여왕을 볼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 기시감이 든다.

포화로 가득 차 있던 도시, 바후아의 허름한 교회에서는 내가 앉아 있었고 에리스가 찾아왔었지.

이전 생의 나는 에리스와 마주친 적도 없다.

그럼에도 에리스라면 최후를 맞이하는 날 아침에도 저러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막연한 생각이 들어서...

나는 침묵을 지킨 채 잠자코 에리스가 기도를 끝마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에리스가 나를 돌아보곤 보랏빛의 눈을 휘며 미소 지었다.

“라파예트 후작님.”

“여왕 폐하.”

에리스는 천천히 나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때가 되었군요.”

“그렇습니다, 여왕 폐하.”

내 말을 들은 에리스는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언제나처럼 같이 가보자고 하고 싶은데…….”

“이번만큼은 참아주십시오.”

에리스는 당연하게도 상륙작전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이전까지와는 다르다.

지금까지 에리스가 참전한 전쟁은 위험하더라도 최소한 퇴로는 있었다.

하다못해, 인간의 국가끼리 벌이는 전쟁에서 최악의 경우 에리스가 포로로 잡힌다고 한들 존경받는 여왕이자 성녀를 함부로 해코지하려고 들 국가는 없었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대한 적인 악마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고, 악마들이 성녀를 존중해줄 리가 없는 데다 상륙하고 나면 퇴로 따위는 없다.

이미 전 국민의 정신적 지주가 된 에리스가 그런 위험을 무릅쓰겠다니 국민의회는 결사반대했고, 심지어 신성 교국의 성기사단과 교황마저 기겁하며 절대로 안 된다고 나섰다.

당장 400년 전의 성녀도 끝내 전쟁 막바지에 악마들에게 사로잡혔고, 그녀의 운명이 어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별로 좋은 운명일 리 없다는 것만 막연하게 추측할 뿐이지.

신성 교국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공인받고 기적을 펼치며 그 자체로 신도들을 끌어모으는 상징이 된 에리스가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가게 둘 순 없겠지.

“……그래요. 안 되는 이유는 질릴 만큼 들었고, 더는 떼쓰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에리스는 그렇게 답하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역시, 다른 이들이 똑같이 무릅쓰는 위험에서 저만 특별 취급 받는 기분은 그리 좋지 않네요.”

“여왕 폐하께서 내려주시는 축복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비록 바다를 건너 직접 전투에 참여할 수는 없다고 해도, 에리스는 분명히 출정지까지 따라와서 그녀의 국민들을 지키고자 할 것이니.

“네, 네. 온 힘을 다해서 가장 강력하게 걸어드릴게요.”

쓴웃음을 지으며 답한 에리스는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나를 바라보더니 물어왔다.

“라파예트 후작님.”

“예, 여왕 폐하.”

에리스는 슬며시 웃으면서 물었다.

“이제는 신께 감사드리시나요?”

“…….”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신앙의 증거인 성녀의 물음에, 나는 조금 전까지 에리스가 기도하고 있던 신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심했었다.

숱한 피와 혼란으로 가득했던 공화국을 보았다.

누구보다 경건한 신의 사도여야 했을 신성 교국이 에리스가 마녀로 몰려 처형당하도록 조장했다.

악마, 서큐버스가 에리스에 비견될 수준의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신성력으로 회귀했을 나조차도 결국 내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무수히 많은 적, 결국은 같은 신을 섬기는 인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여전히 확신은 못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있을 때 신성력을 사용할수록 강해진다던 에리스는 실제로 고작해야 수십 명을 구하는 것에도 허덕이던 어린 방랑자에서, 숱한 이들을 구할 수 있는 희망이자 신앙의 상징이 되어 눈앞에 있다.

나 또한, 신성력의 가호인지 뭔지 몰라도 놀랄 만큼 성장했지.

적어도 회귀 전에는 이 정도의 강함을 가져보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스치는 것만으로도 죽어야 정상일 악마의 독을 어떻게든 중화시켜가며 나를 살려낸 신성력의 기적을 직접 느꼈다.

“하지만, 해야만 할 일은 알겠습니다.”

단두대의 이슬로 허무하게 사라졌던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서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것에 어떠한 사명이 있다면.

악마들이 개입해서 일어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유혈 혁명.

그걸로도 모자라 어떻게든 대륙의 혼란을 더하려고 부렸던 그 모든 수작들.

이 숱한 희생과 피로 물든 길이 결국 이 종착점을 위해서였다면.

내가 처형당한 미래에서 결국 악마들의 수작에 놀아나다가 파멸해버릴 대륙을 구하고, 더 나은 미래를 얻어내기 위함이었다면.

그것이 나의 사명이라면.

그렇다면-

“그러니 신께서 바라신 것이든, 혹여 아니라면 그 어떤 무엇이 바란 길이라 해도.”

이 길은 결국, 최후의 순간 내가 그토록 바랐던 길과 겹쳐져 있으니까.

“기꺼이 행할 생각입니다.”

에리스는 한동안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더니, 신상으로 돌아서 두 손을 모은 채 짧게 무어라고 중얼거린 후-

“그래요,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웃으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 전쟁을 무사히 끝마치고, 우리 모두 편한 마음으로 신께 진심으로 감사드릴 수 있기를.”

나도 가볍게 마주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에스코트하며 답했다.

“저 또한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왕 폐하.”

* * *

수도 뤼미에르에서 혁명군의 동원령이 하달되고 군대가 조직되는 사이, 나는 참모들만을 데리고 미리 브레스트로 이동했다.

육군의 동원과 상륙 계획의 수립도 중요하지만 그건 드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진짜 중요한 건 결국, 가장 핵심적인 문제.

어떻게 저 해협을 돌파하고, 어디로 상륙할 것이냐.

그리고 그걸 결정지을 사람 중 하나는 내가 누구보다도 우선해서 지켜야 할 사람이니까.

“프랑지아 해군의 전력은 86문급 전열함 3척, 74문급 전열함 11척입니다. 이중 기함 ‘리브레’는 홀란트제의 마력 공학 기관을 장착해 비대칭 전력으로 활약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틴이 브리핑하고, 바로 리 제독이 받는다.

“현무 함대 전력은 80문급 철갑함 5척, 86문급 전열함 5척, 74문급 전열함 8척, 62문급 전열함 13척입니다. 보조함 중에서도 적 주력함에 실질적인 타격을 줄만한 로켓함도 6척 보유하고 있습니다.”

과연 동방 제국이라고 할지, 청룡 함대의 잔존 함선을 규합했다고는 해도 동방 제국의 전력은 가히 규격 외다.

솔직히 차르나 엘프들이 워낙 허당이어서 반신반의했는데, 적어도 저들의 해군은 진짜다. 저런 대함대를 여기까지 비교적 온전하게 데려온 리 제독이나 린제이 제독의 실력도 확실하고.

“철갑함이라는 건 뭡니까?”

노던 연합 왕국의 함대를 지휘하기로 한 안드레아스 스벤손 제독이 묻자, 리 제독은 제법 정중하게 답해주었다.

“포탄으로부터 버티기 위해 선체를 철판으로 보강한 전열함입니다. 면적 문제로 포문 수는 줄었지만 함대결전에서는 일반적인 전열함 이상의 능력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 기술자들은 저걸 보고 아주 극찬을 해댔다.

나는 그냥 철판 덧대면 끝 아닌가? 싶었는데 항속거리나 많은 대포를 탑재하면서도 저걸 하려면 선체를 디자인하는 능력이 아주 우수해야 한다나 뭐라나.

“그렇군. ……노던 연합 왕국은 74문급 전열함 1척, 62문급 전열함 3척이오.”

스벤손 제독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뭐, 어차피 우리도 노던 연합 왕국에게 대단한 해군 전력을 기대하고 부른 건 아니다. 저들은 수송임무나 열심히 하면 되니까.

어차피 다른 연합국들은 전열함 한 척 못 보냈는데 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베리카 형제국은 74문급 전열함 3척이오!”

이 회의장에서 혼자 이질적인 거구의 오크, 크록스가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공교롭게도 포르투 항구에서 나고 자란 크록스가 그나마 항해를 어깨 너머로라도 보고 들은 바가 있고, 그 외 왕의 심복들은 대부분 내륙에서 자란 이들이라 왕인 크록스가 직접 제독으로서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 크록스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만족감이 서려 있다.

그래. 자랑스럽겠지, 형제.

이베리카 통일 전쟁 때만 해도 변변한 배 한 척 없던 이들이 프랑지아의 기술지원을 받아 제대로 된 주력급 전열함을 3척이나 보유했으니...

심지어 전열함이 없던 신성 교국마저 이교도 야만인들이 전열함을 보유했다는 사실에 충격 받아서 우리에게 압력을 주는 건 물론, 부랴부랴 전열함을 건조 중이란다.

다 좋은데, 제발 옷이라도 좀 입어줬으면.

크록스가 움직이거나 숨 쉴 때마다 터질 듯한 근육이 춤을 추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럽다...

심지어 크록스를 처음 본 린제이는 기겁해서 마법을 쓰려고 했다고.

“함급의 편차는 있지만 도합 전열함만 52척입니다. 작전 중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겠죠. 함대의 혼선을 줄이기 위해, 현무 함대의 로켓함을 제외한 보조함은 적함대의 색적과 정찰에만 운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당한 판단이십니다.”

크리스틴의 말을 들은 리 제독은 선선히 답했다.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배들끼리 동선이 엉킬 상황이니 불가피한 조치려나.

리 제독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틴은 이내 새로운 지도를 꺼내 회의 탁자에 펼쳤다.

“정찰 함대의 보고로 라스 사의 함대도 섬 남부와 중부에 집결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정확한 건 아닙니다만, 추정되는 적 함대 규모는 전열함급 50척 이상입니다.”

“크흠…….”

사실상 전 대륙의 해군을 다 긁어모았는데도 수적 우위 같은 건 없다.

역시나 어비스 코퍼레이션…….

“개쌔키들.”

모두의 시선이 확 쏠렸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받은 린제이 제독은 보드카를 들이키더니 한마디 더했다.

“개쌔키들 다 때려뿌숩시다!”

“…….”

린제이 제독은 여러모로 파격적인 엘프였다.

업무 시간은 물론이고 작전 회의 중에도 보드카를 대놓고 퍼마시는 것 하며, 리 제독이 업무를 다 하니 자신은 할 일이 없다며 아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무나 붙잡고 술자리를 권하는 것이 일상이다.

생판 처음 보는 금발 녹안의 아름다운 엘프가 술 권하는데 그거 마다할 인간이 얼마나 있겠나?

그렇게 무한한 보드카 권하기로 무수한 희생자를 내며, 린제이는 한 달 사이 중앙 대륙의 공용어를 빠르게 습득했다.

뱃사람들 특유의 험한 단어들 위주로 이상하게 배워서 문제지…….

“하아…….”

오, 나 리 제독이 한숨 쉬는 거 처음 봤어.

리 제독이 저들의 언어로 무어라 무어라 하자, 린제이는 아주 활짝 웃으며 답했다.

뭐라는 지는 모르겠는데 만족하고 보드카나 마시는 거 보니 신경 꺼도 되겠군.

여러모로 통제 불가능한 엘프지만 리 제독의 말은 잘 들어주는 것 같고, 그 리 제독이 비교적 상식인인 것이 다행이지.

조금 정리된 것 같자, 크리스틴이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리 제독님과 미리 정찰과 지도를 보며 상의한 내용이지만, 새로 오신 분들이 계시니 재차 설명하겠습니다. 프랑지아와 어비스 코퍼레이션 사이의 해협은 비좁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단 하루만 제해권을 유지할 수 있다면 상륙에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준비만 충분하다면, 제해권을 얻어낸 시점부터 상륙에 필요한 시간은 단 6시간가량이다. 보급품 운송과 다급하게 진행하느라 빚어질 혼선을 감안해서 넉넉하게 잡아도 하루면 넘치지.

“따라서 해협으로 진출, 함대 결전을 유도합니다. 저들은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 최우선이므로 응해오겠죠. 최상은 승리하는 거지만, 만약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양패구상으로만 밀어붙일 수 있다면 연합함대로 많은 보조함을 보유한 우리가 일시적으로라도 제해권을 잡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해전에서 동률만 내도 우리가 유리해진다.

악마들은 분명 강력하지만 인간보다 개체수가 적다. 드론으로 그걸 만회하겠지만, 지금 동방 제국에 공세를 퍼붓고 있는 드론의 수를 보면 본국에 남은 병력이 넘쳐나진 않겠지.

어떻게든 상륙해내고 문을 건설할 때까지만 버티면 승산이 있다.

“으으음…….”

스벤손 제독은 미간을 좁히며 신음을 흘렸다.

노던 연합 왕국 입장에서야 몇 척 안 되는 전열함을 가능한 보존하고 싶을 테지.

“으하하하, 화끈해서 좋구만!”

반면 크록스와 리 제독에게 전해들은 린제이는 아주 만족해하는 눈치.

솔직히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해군을 상대하면서 함선 피해가 적을 거라는 발상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결국 스벤손 제독도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함대 결전의 필요성엔 동의하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작전이 아니겠소? 우리 함대 규모가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밀리지는 않지만, 그래봐야 연합함대고 경험도 저들보다 부족할 텐데.”

오, 노던 연합 왕국이 육군은 좀 하자가 있어도 해군은 그래도 나름 괜찮은 건가.

스벤손 제독의 말을 들은 크리스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리 제독에게로 옮겼다.

“스벤손 제독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따라서…….”

리 제독은 깃펜으로 지도에 죽- 선을 그으며 답했다.

“우리는 약자에 걸맞게 싸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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