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심연의 성전 - 해협 돌파 (2)
프랑지아 서부, 군항 브레스트.
소식을 받기가 무섭게 뤼미에르에서 급히 출발해, 군항 브레스트에 도착한 우리는 크게 놀랐다.
브레스트 항구는 동방 제국의 함대가 꽉꽉 들어차 남는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 최대의 군함 리브레에 견주어보아도 밀리지 않을 크기의 함선이 5척은 되어 보이고, 그 외에도 전열함 급으로 보이는 함선이 30여척, 그 외에도 호위함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경악한 것이 첫 번째고…….
크리스틴이 입항해있는 함선들을 눈으로 슥 훑더니 한마디 했다.
“……피해가 적지는 않아 보이는데, 잘도 기한을 지켜서 여기까지 왔네요.”
함선들 상당수에는 여기저기 부서지고 망가진 걸 어떻게든 응급처치로 수리해서 왔음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상태로도 어떻게든 기한 내에 도착했다는 것이 우리를 두 번째로 놀라게 했다.
“남대륙 근해는 폭풍우가 자주 친다던데, 저 상태로 용케 무사히 도달했군요.”
정확한 피해야 당사자에게 보고받아야 알겠지만, 함선들의 수리에도 시간은 좀 들겠군.
그건 그렇고, 선수상이 화려한 형태의 거북이 머리처럼 생긴 건 저들의 현무인지 뭔지를 형상화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옆에서 굉장히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이것 참. 굉장한가 보군요.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탈레랑 총재…….”
“두 군의 수장께서 꼭두새벽부터 총재를 납치하다시피해서 데려오다니, 이건 좀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흐암…….”
“그건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국내에 저들의 언어를 제대로 통역할 수 있는 자가 드물다 보니…….”
저들도 목적지가 우리니까 통역사 정도는 데려왔겠지만, 엘시온 대공과 콘스탄티노프의 전례를 생각해 보면 그 통역을 고스란히 신뢰하는 건 곤란하다.
외교적 수사야 그럴 수 있다 쳐도 군사공조를 하는데 저쪽이 한 말과 우리가 전달받은 내용이 다르면 결과는 파멸적일 것이 뻔하거든.
탈레랑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제게 빚지신 겁니다?”
“……중앙당 차원은 아니고, 제 개인적으로 가벼운 보상이라면…….”
“별로 수지가 안 맞는데…….”
탈레랑은 쭉 기지개를 켜더니 이내 픽 웃으며 덧붙였다.
“뭐, 일단은 그 정도로 봐드리도록 하죠. 이게 다 후작님과 혁명당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서인 것 아시죠?”
“아, 예…….”
하여간 말은 잘해, 말은.
* * *
마주한 제독은 나와 키가 비슷한 데다 검고 긴 수염을 기른 당당한 풍채의 중년 남성이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붉은 제복에 활을 등에 맨 채 허리에는 긴 장검을 찬 것이…….
엘프가 아니라 인간인 건 의외지만 확실히, 비범해 보이는군.
먼 극동 출신이라더니, 중앙 대륙의 인간들과는 생긴 것도 꽤 다르고.
내가 그야말로 엄격과 근엄, 진지함을 모아서 조형한 것 같은 남자를 마주 보자, 그는 눈을 휘며 씩 웃었다.
어.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데. 의외로 살가운 태도다.
“반갑습니다. 현무 함대의 지휘를 맡고 있는 리라고 합니다.”
……심지어 그는 발음은 좀 이상해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중앙 대륙의 공용어로 말했다.
이걸 어떻게 알아? 극동에서 제독하고 있었다며?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리 제독의 명성은 익히 들었지요. 프랑지아 혁명군 총사령관 피에르 드 라파예트입니다. 그건 그렇고, 공용어를 아신다니 놀랍군요. ”
리 제독은 나와 악수하며 간단하게 답했다.
“공동작전을 수행해야 하는데 의사소통에 지장이 있으면 문제가 있을 테니, 먼 뱃길을 오는 김에 공부했습니다. 아직은 다소 부족하니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길, 나도 저들 말 공부나 해둘 걸 그랬나.
민망하네…….
그래도 우리를 지극히 존중해 주는 태도의 리 제독은 엘시온 대공 덕분에 내가 동방 제국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을 완전히 깨주었다.
그 먼 바닷길을 제대로 함대 건사해서 기대도 안 한 일정에 맞추고 우리 말을 배워가면서까지 공조를 신경 쓰는 걸 보니, 이 사람은 신뢰할 만하겠어.
과연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맞서 함대를 건사한 사람이라고 할지.
“대단하시군요. 저는 육군 담당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옆으로 물러서고 제독 복장의 크리스틴이 앞으로 나서자, 리 제독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프랑지아 해군 제독 크리스틴 다키텐-라파예트입니다. 리 제독과 공조하게 되어 기쁘군요. 잘 부탁드려요.”
리 제독은 크리스틴이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았지만 이내 힘주어 악수하며 답했다.
“반갑습니다. 현무 함대 제독 리입니다. 양국 수군의 명운이 우리에게 달렸으니 가능한 모든 협조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네. 자세한 사항은 별도로 논의해야겠네요. 특히나 현무 함대 함선들 상당수가 수리를 필요로 해 보이니, 그것부터 적극 지원해 드리도록 하죠.”
“그러지 않아도 그 점이 걱정이었는데 미리 나서서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미소 지은 채 크리스틴과 말을 주고받은 리 제독은 탈레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탈레랑은 저들의 언어로 말을 건넸고, 리 제독도 조금 놀란 얼굴을 했지만 이내 살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좋은 걸 보니 나쁘지 않아. 최소한 이 사람은 엘시온 대공보다는 상대하기 편하겠다는 확신이 온다.
그러고 나서, 리 제독은 옆으로 비켜섰다.
우리는 그제야 리 제독의 존재감과 풍채 때문에 보지 못한 인사를 볼 수 있었다.
리 제독의 붉은 제복과는 전혀 다른, 해군이라기보다는 마법사처럼 보이는 푸른 로브를 차려입은 사람.
실루엣으로 보면 여성인데, 부관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그녀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긴 금발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며 길쭉한 귀가 드러났다.
“오…….”
탈레랑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릴 정도로 시선을 사로잡는 수려한 미모다.
아니, 잠깐 당신 유부남이잖아.
나도 정신 차려야지. 옆에서 크리스틴이 무슨 표정 짓고 있을지 무섭다.
그보다, 엘프?
그녀가 입을 열자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느긋하고 부드러운 어조의 언어가 흘러나왔고, 리 제독이 통역해 주었다.
“청룡 함대의 린제이 제독이십니다.”
어, 청룡 함대?
라스 사의 본 함대와 접전을 벌여서 패배하고 잔존 함대는 현무 함대와 합류했다고 했는데, 제독이 살아 있었나?
일단 함대의 규모도 규모고 린제이가 엘프인 이상 리 제독의 상급자일 텐데, 자연스럽게 리 제독을 앞에 내세워서 생각도 못 했다.
함대가 사실상 전멸에 준하는 피해를 입어서 지휘권을 빼앗긴 거라고 보기엔 둘의 표정이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린제이가 무어라고 더 말하자 리 제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청룡 함대가 큰 피해를 입은 후, 린제이 제독께선 현무 함대에 지휘권과 잔존 함선을 이양하고 저를 지원해 주고 계십니다. 강력한 천상 마법사로서 기후를 통제하실 수 있어 폭풍우를 헤치고 이곳까지 도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번 작전에 함께 하게 되어 기쁘다고 하시는군요.”
……천상 마법사?
뭘 통제한다고?
어째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고 있자, 린제이는 싱긋 웃으며 느긋하게 걸어와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째 신비한 느낌을 주는 녹색의 눈동자에서 엘시온 대공과 같이 깔아보는 듯한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다.
……엘시온 대공이 이상했던 건가, 아니면 이쪽이 특이한 건가.
내가 그녀의 악수를 받자, 린제이가 재차 입을 열고 리 제독이 통역해 주었다.
“제국의 고위 귀족이시지만 전쟁의 승리를 위해 기꺼이 모든 협조를 하실 테니, 너무 우려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십니다.”
“영광입니다, 린제이 제독님. 혁명군 총사령관 피에르 드 라파예트입니다. 연합군과 동방 제국의 승리를 위해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리 제독에게 내 말을 전해 들은 린제이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크리스틴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서 탈레랑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래서, 실제로는 뭐랍니까?”
“패장인 자신이 엘프랍시고 자존심을 내세워 협조하지 않아서야 차르에 대한 불충이니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거라고, 안심하고 마음껏 부려먹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오.
오히려 리 제독이 린제이 제독의 위신을 고려해서 완화해 준 거였네?
이건 진짜로 놀라운걸?
그 오만한 동방 제국의 엘프 중에 저런 정상인이 있을 줄이야.
비록 어비스 코퍼레이션에게 패배했다지만 그건 저 라스 사의 주력함대를 상대로 겪은 패배고, 그 이후로도 잔존 함대를 살려서 현무함대에 합류하고 저 정도 배포를 보여준다라…….
기후를 통제한다는 천상 마법은 반신반의긴 하지만, 나는 이미 내 눈으로 폭풍의 마녀를 봤다.
실제로 그 먼 여정 동안 함대를 멀쩡히 살려서 올 정도면 기대해 볼 만하겠지.
솔직히 동방 제국에는 영 기대가 안 되었는데, 막상 온 제독들은 느낌이 아주 좋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린제이가 크리스틴에 이어 탈레랑과 인사를 마쳤다.
그리고 그 수려한 금발 녹안의 엘프가 난데없이 품속에서 병을 하나 꺼내더니 뚜껑을 열고 그대로 마시기 시작했다.
……저거, 동방 제국 사절단이 즐겨마시던 보드카인가 뭔가 아니었나?
미칠 듯이 독한 술…….
그걸 병 채로 벌컥벌컥 들이켠 린제이가 유쾌한 얼굴로 뭐라고 하자, 리 제독이 전해주었다.
“그럼, 이렇게 만난 김에 친목 도모를 위한 술자리를 열자고 하십니다.”
…….
전언 철회.
역시 동방 제국의 엘프 중에 정상인은 없어.
* * *
동방 제국의 두 제독과의 첫 대면은 프랑지아의 총재와 육군 총사령관, 그리고 해군 제독이 린제이의 무한 보드카 권하기에 격침당하는 초유의 사태로 끝났다.
리 제독도 동방 제국 사람이라고 린제이와 주거니 받거니 하고도 다음날 멀쩡하게 업무를 보던데, 나와 크리스틴은 진심으로 죽는 줄 알았다.
덕분에 우리는 다음 날 오후가 되고서야 본격적인 실무 논의를 할 수 있었고, 프랑지아의 모든 건선거와 조선소는 그동안 하던 모든 작업을 보류하고 동방 제국 함대의 수리에 집중하게 되었다.
다행히 미리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크리스틴이 사전에 준비해둔 것도 있지만, 내 우려와 달리 동방 제국 함대의 수리는 한 달 이내로 끝낼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오히려 동방 제국의 함대를 살피러 온 우리 측 장인들이 놀라워했다.
저들의 기함과 주력함은 전열함의 선체에 철판을 덧대어 방어력을 더욱 보강한 철갑선이었고, 호위함 중에는 이베리카에서 본 로켓을 발사하는 로켓함이 있는 등 프랑지아보다 확실히 진일보한 기술력의 함대다.
게다가 장인들의 말로는 그 정도 장거리 항해에 폭풍우가 가득한 해역을 지나서 왔다면 원래 이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아야 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기후를 통제하는 천상 마법사라는 거, 내 생각보다도 더 강력한 존재일지도 모르겠어.
하긴, 긴 세월을 사는 동방 제국의 고위 귀족이 강력한 마법사인 건 이상할 것도 없긴 하다.
……그게 숙취로 두통에 시달리는 나와 크리스틴 옆에서 멀쩡한 얼굴로 대낮부터 보드카를 퍼마시는 엘프라서 문제지.
아니, 애초에 그 먼 길을 오면서 보드카는 뭐 저리 많이 싣고 온 거야.
하도 어이가 없어서 물어보자, 린제이는 물론이고 심지어 리 제독마저 정색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부상자의 통증을 가라앉힐 때도,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때도, 동기부여나 포상을 줄 때도 필요한데, 술이 없이 어떻게 항해를 합니까?”
심지어 이들이 그 먼 항해 동안 식량난에 시달리지 않은 이유가 걸작이었다.
저들은 오직 보드카를 맛있게 마시기 위해 주요 함선마다 마법적인 냉장 시설을 설치해두었고, 이건 당연히 식량 장기 보존에도 큰 도움이 된다.
그것도 모자라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린제이가 비 좀 내려주고 보드카 몇 병 주면 바로 십년지기처럼 친근해진 현지인들이 아낌없이 식량을 판매해 주었다고.
“……항해 때마다 머리 싸매고 보급 관리해온 제가 바보 같아지네요…….”
크리스틴의 한탄에, 나도 헛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저들의 마법 냉장 시설이나 배워서 우리도 도입해 보죠.”
……술이 저렇게 만능일 줄은 나도 몰랐지.
아무튼, 마지막 패가 도착했다.
이제 문제는 저 비좁지만 한없이 먼 해협을 돌파하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