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03화 (203/258)

203화. 심연의 성전 - 개전 준비 (4)

노던 연합 왕국, 수도 노르트리히.

연합 왕국의 주민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수도 항구에 입항한 프랑지아의 해군 기함 ‘리브레’의 거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노던 연합 왕국의 왕성에서는 그들의 국왕 구스타프 12세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짐의 귀한 시간을 그대에게 할애하는 것도 이번이 두 번째로군.”

“영광입니다, 국왕 폐하.”

눈앞의 여자가 보여주는 태도는 짐짓 예의 바르지만, 표정은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아키텐 백작 크리스틴.

아니, 이제는 라파예트 후작부인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구스타프 12세는 심기가 굉장히 불편했다.

귀족 여성이 왕성에 입궁하기 위해서 예를 갖추어 당연하게 입어야 할 드레스가 아니라 칙칙한 검은색의 군복 차림인 것부터 심기에 거슬린다.

게다가 프랑지아의 외교 총괄자인 모리스 탈레랑 총재 없이 그녀만 달랑 혼자 와서 그와 독대하고 있는 이 상황까지.

구스타프 12세의 입장에서는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상대가 아직 젊은 여자건 뭐건 프랑지아라는 강대국의 해군 제독이자 외교 사절로 방문한 자다.

어느 정도의 격식은…….

“짐이 그대에게 두 번째 독대 자리를 허락한 것만으로도 최대의 인내임을 알라, 아키텐의 검은 마녀.”

차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구스타프 12세는 당장 눈앞의 이 빌어먹을 마녀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크라프테전에 뛰어들었다가 전비만 지출하고는 체면을 구겨야 했으니.

아키텐의 검은 마녀라는, 외교적 수사고 뭐고 때려치운 호칭에 크리스틴은 오히려 미소 지으며 답했다.

“국왕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용건을 말씀드려도 될지요?”

구스타프 12세는 그런 행동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꿈틀거렸지만, 이내 나직하게 말했다.

“허하노라.”

크리스틴은 가볍게 목례한 뒤 입을 열었다.

“혁명 프랑지아 왕국은 노던 연합 왕국이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전쟁에 참전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

“하. 으하하하하!”

구스타프 12세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한참을 웃었지만, 크리스틴은 여전히 입가에 우아한 미소를 건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웃음을 뚝 그친 구스타프 12세가 들끓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감히, 짐을 이용만 한 그대들이 또다시 짐을 이용하려고 들어?”

크리스틴은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입을 열었다.

“외람되나 국왕 폐하. 우리는 폐하께 약조 드린 것을 모두 지켰습니다. 해상 봉쇄를 해제했고, 제국과의 거래가 끊긴 광물 매입도 제대로 진행해 드렸으며, 약조 드린 크라프테 내부의 반란 세력까지 연결해드렸습니다.”

애초부터 프랑지아가 약조한 건 거기까지였다.

“그뿐 아니라 크라프테의 ‘대왕’이 이끄는 본대를 제대로 붙잡아둠은 물론 승리까지 거두어, 저들이 노던 연합 왕국 전선에 집중할 수 없게도 만들었으니 동맹으로서는 기대받은 그 이상을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짐의 왕국이 고토를 회복하기 전에 전쟁을 끝낸 것도 그대들이지.”

구스타프 12세가 쏘아보는데도, 크리스틴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 말씀이 옳으십니다만, 폐하. 최소한 우리는 동맹으로서 맡은 역할을 전부 해냈습니다.”

크리스틴은 어디까지나 여상한 시선을 보냈지만, 구스타프 12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런데도 5만의 병력으로 고작해야 2만에게 참패한 너희가 문제 아니냐.’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메시지는 확실하게 전해졌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노던 연합 왕국의 국왕 폐하께서도 협상장에서 승전국으로서 서명할 기회를 드렸죠.”

“하! 승전국? 얻은 것도 없이 승전국?”

“최소한, 단독으로 강화해서 폐하의 왕국이 크라프테의 복수 앞에 짓밟히게 두진 않았으니까요. 정말로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고도 억울하지 않으려면 그 정도는 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구스타프 12세는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크리스틴을 노려보더니 씹어뱉듯이 말했다.

“썩 꺼져라, 마녀. 짐의 왕국은 그대들과 더는 볼 일이 없다.”

크리스틴은 축객령에도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대량의 광물을 납품하고 계시죠, 국왕 폐하?”

“감히 내정 간섭을 하겠다는 겐가!”

“아니요, 국왕 폐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다소의 우려를 하고 있을 뿐이랍니다.”

“우려?”

“이제 곧 중앙 대륙과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폐하.”

구스타프 12세는 미간을 구겼다.

굳이 프랑지아가 아니라 중앙 대륙을 지칭했다.

빈말이 아니라면, 상당수의 국가들이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전쟁을 치를 예정이라는 말.

“이건 단순한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닙니다, 국왕 폐하. 마족들, 저 심연의 위협에 맞선 인류의 성전이죠. 종족의 명운을 건 전쟁에서 소위 ‘중립’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통용될지는 외람되나 저조차 장담할 수가 없군요.”

“지금 감히 짐을 협박하는 건가?”

“아니요, 폐하. 그저 사실을 말씀드리는 거랍니다. 더군다나 이번 전쟁의 적은 바다 너머에 있습니다. 중앙 대륙에 남아 있을 상당수의 지상군은 언제라도 어딘가에 투입될 수 있다는 말이죠.”

벌게진 얼굴로 입가를 씰룩거리기만 하는 구스타프 12세의 앞에서, 크리스틴이 칠흑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덧붙였다.

“외람되나 국왕 폐하. 저는 폐하께서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리라 여겨, 감히 조언을 드리는 겁니다.”

“조언? 마녀, 그대가 감히 이 짐에게?”

구스타프 12세의 살벌한 어조에도 크리스틴은 여전히 태연한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폐하, 악마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태평성대가 찾아올까요? 모두가 악마들에 맞선 대륙의 정의를 부르짖으며 위협을 제거하고 평화를 지키자고 주장하지만,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

“공적이 사라진 대륙은 오히려 이전만큼, 또는 더 불안정해질 수 있습니다. 하물며, 그때 유일하게 성전에 참여하지 않고 도리어 적국인 악마들에게 자원을 제공하던 국가가 있다면…….”

구스타프 12세는 크리스틴이 더없이 우아하게 짓는 미소가 악마만큼이나 섬뜩하다고 생각했다.

“국왕 폐하. 폐하께서는 더 강대한 국력으로 그런 명분을 쥐고도 그 나라를 가만히 두실 것이신지요?”

* * *

크라프테 왕국의 수도, 미텔마르크.

크라프테를 강대국으로 성장시켜 선왕은 전성기에 대왕이라 불리며 온갖 칭송을 받았으나, 말년에는 패배한 전쟁을 일으킨 원흉으로서 인기를 잃은 채 죽었다.

하인리히 왕세자, 아니 이제는 국왕이 된 하인리히 1세의 새로운 거처는 크라프테 왕국의 상징과도 같았던, 오직 연병장으로 둘러싸인 대왕의 별궁이 아니었다.

새로운 국왕의 거처는 다시 행정 중심지이자 수도인 미텔마르크에 위치한 변경백의 궁이었다.

왕의 궁이라기보다는 저택에 가까운 소박한 처소.

그곳에 기거하며 바로 인근에 있는 정부 청사를 늘상 드나드는 것으로 유명해진 근면하고 젊은 군주의 통치 아래, 크라프테는 짧은 시간 동안 격변을 겪었다.

거의 모든 국가 예산을 잡아먹던 군대는 축소되었고, 군대의 병역 기간도 10년에서 4년으로 대폭 단축되었다.

다양한 인재를 채용하고 행정을 개혁한 끝에, 하인리히는 크라프테를 짧은 시간 만에 ‘군사가 모든 것인 국가’에서 ‘혁신적인 관료 국가’로 불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크라프테가 전쟁을 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인리히 1세는 마차에서 내려 세련된 신축 건물로 들어섰다.

“국왕 폐하.”

“국왕 폐하!”

마주치는 이들은 전부 군복을 차려입은 젊은 장교들이다.

그들의 경례를 받아주며 걸음을 옮기던 하인리히는 이내 제법 큰 문을 열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섰다.

마력등의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 자욱한 담배연기가 국왕의 코를 찌른다.

하인리히 그 지독한 냄새에 추억을 떠올리며 픽 웃자, 의자에 앉아 있던 군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했다.

“어서 오십시오, 국왕 폐하!”

“수고들 하는군.”

하인리히는 테이블 위의 재떨이에 쌓인 담배의 산 만큼이나 가득가득한 작전지도와 온갖 군대를 형상화한 말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방 안에 가득 찬 서류더미들을 시선으로 훑었다.

크라프테는 분명히 군의 규모를 상당수 축소했다.

애초에 희생도 컸고, 당분간은 국가 재건에 집중해야 할 시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하인리히는 프랑지아와의 전쟁에서 경험을 쌓은 유능한 장교들의 옷을 벗기지 않았고, 대신 군대를 직접 지휘하지는 않더라도 전쟁을 전문적으로 연구할 집단을 만들었다.

후일 최초의 근대적 참모본부라고 불리게 될 전쟁부에는 지난날의 온갖 전투기록들과 군사정보, 그리고 각 전투의 전개에 따라 장교들이 머리 싸매고 진행한 모의전의 기록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저 안에는 프랑지아의 라파예트 후작에 맞서 치렀던 전투들과, 그 전투에서 어떤 식의 다른 전개가 가능했을지, 또 그 대응은 어떻게 나올지를 상정한 무수한 경우의 수와 예측되는 결과들이 평가되어 있다.

당연히 프랑지아와의 전투만을 분석한 것이 아니며, 역사에 존재했던 거의 모든 전투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그들이 세운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하여, 실제 군사들을 동원한 모의전도 무수하게 치러졌다.

대왕의 선율에 맞추어 움직이던 기계 같은 강병 대신, 수는 적어졌으나 질적으로 더욱 정예화된 장교단이 개인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무수한 경우의 수를 상정한 싸움을 이어왔다.

그리고 그들이 상정한 시뮬레이션의 대상에는 어비스 코퍼레이션, 특히나 드론의 군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다름 아닌 국왕 하인리히 본인의 명에 의해서.

국왕 하인리히는 장교들이 2년간 쌓아올린 막대한 실험데이터와 각종 의견서, 제안서들을 슥 둘러본 후 등을 돌렸다.

그에 맞추어 전쟁부의 수장이자, 미텔마르크 전쟁대학의 창설자이기도 한 샤른호르스트 장군과 그의 수하들이 일제히 국왕에 대한 예를 갖추어 보인다.

하인리히는 그들 하나하나를 눈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하인리히 1세는 군사적 역량에서 카를 2세에게 감히 미치지 못한다.

프랑지아의 라파예트 후작을 상대로도 이길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영웅으로서의 자신을 부각시키려고 애쓰는 대신, 국가의 혁신과 조직의 구축을 우선해왔다.

그렇게 보낸 2년. 시간으로는 짧다.

그러나 가장 치열했던 전쟁으로 다져진 세대가 그 전훈을 가장 치밀하게 받아들여 가장 예리할 순간 맞이한 첫 기회다.

“제군, 그간의 성과를 선보일 시간이 왔다.”

하인리히는 열의로 이글거리고 있는 장성들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흔히들, 대왕이 없어진 크라프테는 군사국가로서의 영광을 잃었다고들 한다지.”

“하하하하…….”

자리에 있는 장성들과 장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 말해보라, 제군. 우리가 싸우는 법을 잊었나?”

“아닙니다!”

“우리의 날개가 꺾였나?”

“아닙니다!”

하인리히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공교롭게도 적은 악마들, 아무리 압도적으로 박멸한다 한들 그대들은 두려움이 아니라 찬사를 받을 것이다.”

-비텐펠트는 악마였

작열통의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처절하게 새겼을 글씨는 아직도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그의 조국이 감당해야 했던 무거운 전쟁.

그가 결사의 각오로 노던 연합 왕국과 반기를 든 공작들에 맞서 국가를 지키던 순간의 치열함도.

-짐은 책무를 다했노라, 하인리히.

최후까지 그저 전쟁광이었음에도, 크라프테를 강대국으로 올려두고 책임을 저버리지 않은 선왕의 운명도.

그 모든 것이 저 악마들의 필요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면.

“크라프테의 국왕이자 그대들의 후원자로서, 짐이 명한다.”

하인리히는 차갑게 웃으며 선언했다.

“자비는 필요 없다. 압도적인 힘(Krafte)을 보이도록!”

“Jawohl!”

저 악마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사생아의 분노를 맞이해야 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