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심연의 성전 - 개전 준비 (1)
결국은 올 것이 왔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정식으로 선전포고하고 동방 제국과의 전쟁에 돌입하자 중앙 대륙의 모든 국가들은 숨을 죽이고 400년 만에 시작된 악마들의 전쟁을 주시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인류의 국가들이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중앙 대륙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동방 제국의 중앙 대륙 영토에는 저들의 수도 차르그라드가 있지만 정작 함대는 변변하지 않아 라스 사의 함대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고, 마찬가지로 어비스 코퍼레이션도 막강한 해안 요새로 보호받는 차르그라드를 직접 공격하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
결국 개전하고도 오랫동안 변변한 소식이 전해지지도 않고 전쟁을 실감하기에는 너무나 고요하자, 자연스럽게 중앙 대륙 국가들의 관심도 멀어졌다.
……어쩌면 악마들이 이래서 의도적으로 동방 제국의 중앙 대륙 영토들을 공격하지 않은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혁명 프랑지아는 중앙 대륙내에서 유일한 동방 제국의 수교국이었고, 크리스틴의 국가 정보국을 통해 전쟁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래서 우리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 * *
개전으로부터 반년 후, 프랑지아의 수도 뤼미에르.
국민의회에서는 동방 제국의 전황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운용 중이라는 드론이 대체 얼마나 많은 겁니까?”
국민의회 의원의 질문을 받은 크리스틴은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느릿하게 답했다.
“정확하게 추산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동방 제국에서는 전황을 가급적 숨기려고 하고, 국가 정보국의 요원들은 우수하지만 그들의 보고가 도달하기까지 시간차가 무척 크니까요.”
우리는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한 루트를 통해 동방 제국에 파견된 국가 정보국 요원들을 통해 슬슬 동방 제국의 실체를 파악해가고 있었다.
저들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저들의 국토는 이베리카 반도에서 동방제국의 서쪽 끝에 달하는 것보다도 더 거대하며, 인구 또한 감히 프랑지아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거대한 국가다.
덕분에 크리스틴이 잠입시킨 요원들로부터 받는 보고가 도착할 때쯤 현지와는 이미 2달 가까운 시간차가 벌어지고, 이게 우리의 현황 파악과 대응이 늦어지는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위신 때문인지 자꾸만 우리가 파악 중인 전황과 다른 주장을 하는 동방 제국의 태도도 혼동을 더했다.
솔직히 정보전의 전문가인 크리스틴이 없었다면 우리가 제대로 사태를 파악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거다.
아니면 동방 제국 말만 듣고 완전히 전황을 오판하고 있던가.
“하지만 지금까지의 보고를 추산한 결과로 볼 때,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최소 50만에 달하는 드론 군대를 운용하며 동방제국 동부를 초토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디까지나 마지막 보고를 받은 시점 기준이므로 지금은 더 늘어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50만……! 드론들은 이베리카 반도에서 전부 파괴된 것 아니었소?”
“적어도 이베리카 반도에 출현한 드론들은 전부 파괴되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제 눈으로 봤고, 혁명군에도 증인은 무수히 있으니까.”
국민의회의 의원들도 보고는 받았겠고, 내가 직접 크록스의 형제들과 함께 드론들과 사투를 벌였다.
그 실패로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드론 기술 자체를 포기하는 걸 바랬건만.
그레모리가 나를 속인 게 아니라면 그 서큐버스도 그렇게 기대했던 모양인데,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럼 저만한 병력이 대체 어디서 났단 말이오? 이베리카 반도에서도 축출되었을 텐데, 저토록 끔찍한 존재를 만들어낼 재료를 어디서 구할 수 있지?”
니콜라 브리소 총재는 혐오감을 숨기지 못한 채 물었다.
비교적 온화하고 온건한 그로서는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저런 병기를 좋아할 수가 없겠지.
직접 겪어본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상정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2가지 있습니다.”
크리스틴은 특유의 깊고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첫째.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드론의 복제에 성공했다. ……애석하게도 이 경우, 우리가 대응할 방법이 없습니다. 저런 병기를 무한히 생성할 수 있는 국가와의 전쟁이라, 냉정하게 승산이 보이지 않네요.”
의원들 전부가 침음을 흘리곤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적대하는 방침을 재고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잘난 척은 다 하더니 동방 제국도 순식간에 멸망하겠군.”
저들끼리 중얼거리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크리스틴은 손에 든 부채로 탁- 소리 나게 손바닥을 내리쳐 다시 주의를 끌었다.
“하지만 저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가정이며, 설사 저런 기술이 있다고 해도 어떤 자원도 쓰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어쨌든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현재 우리가 추정하는 드론의 ‘재료’가 가장 많은 국가와의 전쟁을 우선해서 벌이고 있고, 동시에 중앙 대륙의 주의를 끄는 일을 피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건 객관적인 사실이죠.”
크리스틴은 약간 뜸을 들였다가 덧붙였다.
“둘째로 우리가 추정한 출처는 신대륙입니다.”
서쪽 대양 너머에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발견했다는 대륙이 있다.
중앙 대륙이 서로간의 전쟁으로 열을 올리는 사이 저들은 신대륙을 발견했고, 초기 얼마간은 현지에서 찾은 새로운 특산품이나 원주민들의 정보가 흘러들어왔었다.
어느 순간부터 뚝 끊겨서 허황된 소리거나 기대보다 건질 것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들이 독점하며 전초기지로 개발해왔던 모양이지.
“신대륙에 거주하는 원주민들로 드론을 보충하고, 또 동방 제국의 점령지에서 주민들을 ‘드론화’시키고 있다고 하면 저만한 병력을 운용 중인 것이 설명 가능합니다.”
“흠, 저걸 희망적이라고 해야 할지.”
“확실히 차라리 그 편이 말이 되겠구려.”
의원들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가운데, 모리스 탈레랑 총재가 입을 열었다.
“동방 제국에서는 벌써 3번에 걸쳐 원군을 요청해왔습니다. 저들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증거겠죠.”
“쯧! 그러면 뭘 하나! 정보국의 조사에 의하면 동부에서 참패를 거듭하고 있다는 데도 이길 수 있다면서 참전을 요구하고 있지 않소?”
“저들이 ‘단독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자기네 입으로 말할 정도면 알 만하긴 하지요. 문제는…….”
탈레랑은 쓴웃음을 짓더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참전하면 저 악마들의 군세에 맞서 이기는 것이 가능합니까?”
“지상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나는 딱 잘라 말했고, 의원들의 안색은 더 어두워졌다.
“현실적으로 혁명군을 이동시킬 수단도 없고 보급할 길은 더 요원합니다. 동방 제국과 우리의 군사체계가 다르니만큼 보급도 우리가 해줘야 할 텐데, 우리가 참전하는 즉시 바닷길은 라스 사의 함대가 가로막을 테니까요.”
게르마니아 제국도 적이 어비스 코퍼레이션이면 육로를 틀어막진 않겠지만, 보급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거리가 멀면 멀수록 필요한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보급병도 밥은 먹어야 하며 물자를 싣고 가기 위해서는 말 같은 가축이 필요하고, 가는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들을 먹일 양은 폭발적으로 증가하니까.
그런데 그걸로 대륙 횡단? 가능할 리가.
제아무리 위대한 장군이나 야망 넘치는 전쟁광도 굶주리고 지친 군대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동방 제국에 진입하는 것이 가능하다쳐도, 지금 유린당하고 있는 저들의 극동 영토까지 부대를 이동시키는 건 더 어렵습니다. 아마 지금 동방 제국이 연전연패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서 기인하겠죠.”
동방 제국의 수도는 중앙대륙 동부에 있지만 저들 기준에선 완전히 극서에 치우친 셈이다.
저렇게 거대한 국가가 균형 잡힌 발전을 했다는 건 말이 안 되고, 주요 인프라도 전부 서부에 있을 테니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전장에서는 무력하게 당하고 있는 거겠지.
동방 제국의 인구와 육군의 규모는 엄청난 모양이지만, 그 대단한 전력을 극동으로 제대로 투사할 수 있는 역량은 또 별개의 문제니까.
자기네 있는 전력도 제대로 투사 못하는데 혁명군을 보낸다고 뭐 달라질 리가 있는가?
“동방 제국도 그걸 모를 건 아니겠고, 그러면 역시나 예의…….”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앙쥬 백작은 슬며시 미간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 본토 공략에 협조해 달라는 거겠군?”
“맞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전황으로 볼 때 혁명군이 동방 제국에 파견된다고 해서 당면한 전황을 뒤집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제 모두의 시선은 크리스틴에게로 쏠렸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본토 공략.
이걸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라스 사의 함대를 뚫어야 한다.
동방 제국은 그걸 위한 연합함대 작전을 제안했었지.
크리스틴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선, 개전 전 동방 제국이 제안한 것과 크게 달라진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전에 지대한 문제가 생겼다.
“동방 제국의 태도와 정보국이 파악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동방 제국이 프랑지아 영토로 보내주겠다던 청룡함대는 사실상 전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무슨…….”
“그게 동방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함대가 아니었소?”
“역시 라스 사의 함대와 대결을 벌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소!”
크리스틴은 의원들이 다시 시끄러워지기 전에 부채로 탁- 소리를 내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만, 그 교전으로 라스 사의 함대도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은 확실합니다.”
“대륙 반대편에서 일어난 해전인데 그걸 어찌 확신하시오, 아키텐 백작?”
바로 날아든 의문에, 크리스틴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왜냐하면, 저들의 극동을 담당하는 현무함대가 초전에서 승리하고 청룡함대의 잔존함선들을 흡수해서 아직까지 제해권을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현무함대? 흠. 극동 방어 함대였지?”
동방 제국이 가장 자랑하는 함대는 저들의 남부 해안선을 방어하는 청룡함대였지만, 극동을 방어하는 현무함대도 있었다.
정작 그 자랑하던 청룡함대는 박살났는데 현무함대만 살아남았다니 무슨
“동방 제국이 제해권을 지키고 있는데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50만이 넘는 병력으로 공세를 가하고 있다는 건 말이 됩니까?”
“그 원리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청룡함대와의 함대결전에서 승리하여 처음으로 상륙에 성공한 이후로는 해상을 통해 보급하려는 어떠한 움직임도 취한 적이 없으니까요. 마탑에 자문을 구해본 결과 저들이 일종의…….”
크리스틴은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덧붙였다.
“……대륙 간 순간이동 마법진 같은 걸 통해 보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정 중입니다.”
“허허, 50만의 병력을 운용할 물자를 순간이동으로? 그것도 대륙 너머에?”
니콜라 브리소 총재가 헛웃음을 흘리자, 크리스틴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라파예트 후작님이 보고하신 드론의 특징상 보급에 그리 많은 물자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니까 가능하겠죠. 그래도 분명히 해상이 가로막혀있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이 계속 재보충되며 공세가 이어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의원들은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믿을 수가 없군. 그런 기술력이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보여준 걸 생각하면…….”
잠시 소란스러운 끝에, 탈레랑 총재가 물었다.
“중요한 건 이겁니다. 그래서 승산은 있습니까, 프랑지아의 해군 제독님?”
“현무함대는 리 제독이라는 자가 이끌고 있고, 최초의 해전에서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함대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물론 라스 사의 주력이 청룡함대 쪽에 몰려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청룡함대의 대패 이후에도 아직까지 제해권을 지키고 있는 걸 보면 능력이나 함대 유지능력은 검증되었다고 봐야 하겠죠.”
크리스틴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동방 제국도 동부 제해권을 지키는 것이 이미 의미를 잃었다는 건 알고 있을 테니, 당초 예정과 달리 살아남은 모든 함대. 즉 리 제독과 현무함대의 주력 전체를 프랑지아로 보낼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동방 제국의 모든 잔존 해군과 프랑지아의 함대가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은 라스 사의 함대와 맞붙게 된다.
게다가, 단순히 우리만이 아니다.
크리스틴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동방 제국을 먹어치우면 그때야 말로 누구도 저들을 막을 수 없게 될 겁니다.”
“크음…….”
벌써 드론이 50만이다.
동방제국을 다 먹어치우면 대체 얼마나 될까. 100만? 아니 최소 1000만은 아득히 넘어서겠지.
고통도 공포도 없이 움직이고 지치지도 않는 수천만의 군대. 그걸 대체 어떤 국가가 막아낼 수 있지?
저들은 여기서 멈춰 세워야 한다.
“프랑지아와 동방 제국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이베리카 형제국은 이베리카 반도를 통일한 뒤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주적으로 선포했고, 프랑지아 해군과의 기술교류 협정을 통해 꾸준히 해군을 양성해 왔습니다.”
“음, 그들도 참전시킬 수 있다는 거요?”
“예. 저들의 왕 크록스의 형제로서, 저는 저들이 우리에게 손을 보태주리라 확신합니다. 그들 뿐만은 아니죠, 탈레랑 총재님?”
내 시선을 받은 탈레랑이 픽 웃으며 답했다.
“예. 지난 반년 간, 외교부는 가능한 다른 국가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밑 작업을 해두었습니다. 완전히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조금 더 노력해야겠습니다만, 동방 제국의 함대가 중앙 대륙에 도달하는 동안 시간은 있으니 잘만 하면 400년 만에 악마들에 맞선 대륙 국가들의 협력을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탈레랑이 시선을 돌리자, 국민의회 의원들의 시선이 전부 크리스틴에게로 쏠렸다.
크리스틴은 그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동안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칠흑 같은 눈동자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승산은 있습니다.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가 저 악마들에게 맞서서 승리할 기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