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심연의 성전 - 거짓된 성녀
서큐버스, 그레모리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마족 특유의 눈은 빠르게 시야를 되찾았지만, 오랫동안 꿈속에 잠겨 있던 정신은 한참이 지나고서야 현실감을 찾을 수 있었다.
꽤 긴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린 그레모리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서, 발을 디뎠다.
맨발에 닿는 다소 서늘한 감각은 여전히 조금 멍하던 머리를 확 깨워준다.
그레모리는 이런 감각을 제법 좋아하는 편이었다.
현실을 딛는 시간보다 꿈속에서 유영하는 시간이 더 긴 그녀에게, 이런 감각은 확실하게 현실감을 제공해 주니까.
타박타박 거리는 발소리를 즐기며 걸어간 그레모리는 찬물로 몸을 씻고, 단장하고, 언제나처럼의 수녀복을 차려입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환영으로, 마법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들.
원하기만 하면 손짓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것에 굳이 시간과 공을 들이는, 무척이나 비효율적인 행동.
그래도 그레모리는 이런 순간을 사랑했다.
잃어버린 순수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몸단장을 마친 그레모리는 느긋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제법 화려하고 웅장한 저택이지만, 인기척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일족들은 대개 그녀보다도 더 오래 꿈속에 잠겨 있으니까.
그녀의 일족.
그레모리는 슬며시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녀가 그럴 입장인지는 잘 모르겠으니까.
그레모리는 대략 430년 전쯤, 기나긴 전쟁으로 불타오르던 프랑지아에서 태어났다.
정확히는, 판데모니움의 마왕군에게 점령당한 지역에서.
서큐버스들은 대개 꿈속을 유영하며 인간의 정기를 탐식하지만, 그런 종족이니만큼 싫어도 인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미약하게나마 감정적인 교류를 가지게 된다.
그러다보면 ‘가축’에게 제법 애정을 품게 되는 경우도 간혹 있기 마련.
그레모리를 탄생시킨 서큐버스가 그런 부류였고, 그레모리의 아버지는 인간이었다.
운이 좋았던 건 그 변덕을 부린 서큐버스가 제법 고위 마족이어서, 아버지의 간청을 받아들인 그녀의 조치 덕에 마을의 취급이 꽤 괜찮았다는 거였다.
운이 나빴던 건, 정작 그레모리가 미처 다 자라기도 전에 그 서큐버스가 전사해버렸다는 거지만.
그 결과 그레모리는 한동안 방치되었고, 그래서 아버지의 밑에서 자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의 딸에게 제법 애정을 쏟으며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어린 그레모리는 인간의 가치관과 문화를 배우며 자랐다.
어린 시절, 그레모리는 서큐버스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에 가까웠다.
그래서였을까.
역병에 걸려 죽어가던 아버지를 살려달라는 간절한 기도에 신이 응답해 준 것은 지금의 그레모리가 생각해도 희극에 가까웠다.
그레모리는 아버지를 살려내고 무척 기뻐했으나, 그래도 인간의 시간은 덧없다.
겨우 30년이 지난 뒤 아버지가 어쩔 도리 없는 수명의 한계로 죽어버렸을 때, 그레모리에게 남은 건 고향을 떠나는 길밖에 없었다.
수십 년간 변하지 않은 외관은 그녀가 마족의 아이라는 걸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내주었고, 그레모리의 가치관이 무색하게 아버지라는 매개를 잃은 그녀는 주민들에게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기에.
고위 서큐버스에게서 탄생한 그레모리는 방대한 마력을 가진 만큼, 마왕군은 그녀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서큐버스로서의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레모리가 신성력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정작 마족으로서의 암흑의 힘은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치 인간처럼 행동하고 쓸 수 있는 거라곤 적인 인간은 구원하고 도리어 마족에게 치명적인 힘뿐.
그런 반쪽짜리 마족이 힘이 전부인 마왕군에서 소외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레모리는 차라리 그런 신세를 위안으로 여기기로 했다.
서큐버스로서 지낸 시간보다 인간으로 지낸 시간이 더 긴 그녀로서는 마왕군으로서 살육을 벌이라는 명령을 받는 쪽이 더 꺼려졌으니까.
그저 정기와 마력을 모으는 하급 서큐버스 취급을 받으며 그렇게 다시 또 30년.
90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 속에 무수한 인간과 마족이 죽고, 전선이 밀고 당겨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그레모리의 고향은 흔적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불타버렸다.
어릴 적 사이좋게 지낸 친구들이 자라지 않는 그녀를 보며 점점 경계하고 냉소적으로 변해가던 태도를 기억하는데, 아버지를 잃은 그녀를 반쯤 추방하다시피 내치던 것도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그레모리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고향에서 남몰래 눈물 흘렸다.
이유도 모른 채로 서럽게 울었다.
바엘을 처음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네가 서큐버스 그레모리인가? 인간들 사이에서 자라 그들을 잘 알고 있고, 신성력을 쓸 수 있다고 들었다. 인간과의 전쟁도 지긋지긋해한다지.
-……그런데요? 지고하신 고위 마족께서 반쪽짜리 서큐버스에게 무슨 볼일이시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 전쟁을 끝내고자 한다. 협력할 생각이 있는가?
바엘은 이 전쟁을 더 이상 이어나갈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인간의 국가들은 감히 판데모니움의 세에 비할 바가 아니나, 중앙 대륙 전체가 모인 성전군은 숱한 시체의 산을 쌓아올리면서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그 기나긴 전쟁 기간 그들에 맞서는 동안 무수한 마족이 죽어나가고 진척은 없는 상황임에도, 마왕은 이 전쟁을 그저 유희의 일종 정도로 여기므로-마왕을 처단하여, 이 전쟁을 끝낸다.
그러나 당장 그러기엔 마왕의 힘은 지극히 강대하고 친위세력의 규모도 크다.
-지금 당장 정면 승부로는 가망이 없다. 그러니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마왕의 주의를 분산시킬 필요가 있지. 따라서, 인간들을 지원하여 마왕군의 전력을 분산시켜야 한다.
-인간이요? 제가 그들 사이에서 자라서 아는데, 그들 눈에 마족은 다 똑같이 증오의 대상이거든요? 적의 적이랍시고 손잡는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하다못해, 그녀가 나고 자라 수십 년 머무른 고향에서도 악마의 자식이라며 배척당했는데?
의구심을 숨기지 못하는 그레모리에게, 바엘이 명했다.
-그 역할을 네게 맡기겠다. 우리가 은밀하게 도와줄 테니 인간으로서 저들을 이끌어라, 그레모리.
그리하여 인간으로 자라 인간에게 배척당하고, 마족에게도 완전히 어울리지 못한 서큐버스는 다시 인간으로서 그들에게 숨어들었다.
신성력을 발휘하여 인간들을 치유하고 돕기를 반년.
인간들이 그녀를 희망의 상징으로 여기며 성녀라고 부르게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레모리는 성녀로서 인간의 군세를 이끌고 마왕군에 맞서 싸웠다.
마왕군을 쳐부수며 지지부진한 전황을 바꾸고, 어쩔 수 없게 된 마왕이 그의 친위세력을 전선에 투입하게 만들기 위하여.
그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역할.
기만으로 시작되어 기만으로 끝난,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된 성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의 가슴속에 넘실대던 희망.
터질 듯 벅차오르는 모두의 경애.
성녀를 상대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면서도, 은밀하게 품던 이들의 불순한 욕망까지도.
서큐버스인 그녀에게 그 무수한 감정의 파도는 마약과도 같았다.
어느새 목적은 상실되고, 수단이 목적이 되었다.
구원에 감사하며 찬미하는 이들은 그녀의 기쁨이 되었고, 그녀의 힘이 부족하여 스러지는 이들로 인해 눈물 흘렸다.
진심으로 그들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필사적으로 마왕군을 막아내며 희망을 노래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행복한 꿈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깨어날 수밖에 없는 법.
바엘이 마왕을 처단하고, 그녀의 역할이 더는 필요 없어졌을 때.
그녀는 결국 꿈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그레모리는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으며, 금빛의 눈동자를 돌려 벽 한편에 놓여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다른 서큐버스들은 백년 전쟁 당시의 전리품 정도로 여기는 검.
-제 목숨이 다 하는 순간까지, 아니 그 이후라도 영원토록 성녀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녀가 영원토록 기억할 맹세를 바친 기사의 검.
기억은 영원한데, 기사는 이미 없다.
그의 맹세를 받는 순간 서큐버스 그레모리는 없고, 인간들의 성녀만이 있었을 터인데.
그 벅차오르던 감동도, 눈물 젖은 기쁨도 어느새 흩어져.
400년이 흐르고 가슴속에 남은 것은 그저 희미한 잔재뿐.
그레모리는 느릿하게 시선을 돌려, 발코니로 나서-
그대로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마왕에게 마족의 안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저자에겐 왕의 자격이 없어.
마족들을 위해 일어선, 마족의 ‘용사’가 말했다.
음울한 보랏빛 안개로 가득한 하늘을 가르며, 그레모리는 시가지에 가득 찬 영혼 없는 인형들과 그들의 앞에 건설 중인 ‘문’을 바라보았다.
이미 생명 따위 진작에 잃어버리고, 마력이라는 동력에 기대어 움직일 뿐인 인형에게서는 감정의 잔재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 오크, 엘프, 수인…….
아니, 저걸 그런 종족으로 통용할 수 있을까?
이미 죽어버린, 고깃덩이에 불과한 자들에게 그런 분류가 가치가 있나?
심지어 저 인형들 사이에는.
대륙의 종족들을 한껏 깔보며 우월감을 과시해온 마족들의 시체마저 함께 하고 있다.
똑같이 마력이 남김없이 빨려 나가, 공허하게 멈춰 있는 허수아비는 마족도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레모리는 날개짓을 하며 가속해, 판데모니움 중심지의 가장 높은 첨탑으로 날아올라-그녀의 용사와 마주했다.
“왔군, 그레모리.”
바엘은 팔짱을 낀 채, 눈동자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레모리는 그 얼굴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 보여준 열정과 신념을 찾아보려고 애썼으나, 실패했다.
400년이 지나는 사이 그것들이 씻겨 내려간 자리에 남은 것은 집념과, 교만뿐.
“아하하, 늦잠 자버린 것입니다아-”
질척질척하고 어두침침한 심상을 감추듯 장난스럽게 내뱉은 그레모리는 날개를 퍼덕여 그의 뒤에 착지했다.
“‘러스트’는 나한테 넘기고 ‘슬로스’나 가져가는 게 어때, 그레모리.”
“자꾸 러스트 사의 권한을 넘보면 재미없는 것입니다, 파이몬.”
이죽이는 파이몬의 목소리에 벌레 보는듯한 시선을 흘긴 그레모리는 옆에서 들리는 호들갑에 눈살을 찌푸렸다.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음! 라스 사는 러스트 사에 항의하는 바임!”
“하아, 바르바토스…….”
이 머저리 전쟁광 마냥 머리를 비우고 살 수 있다면 차라리 좀 나을까.
실없는 생각을 한 그레모리는 시선을 다시 바엘에게로 돌렸다.
분명히, 같은 등일 터인데. 그레모리는 전혀 생소한 다른 무언가를 보는 기분을 느꼈다.
마왕으로부터 마족을 해방한 용사의 상징. 그의 양 어깨에 장식되어 있던 마왕의 쪼개진 관은 이제 없다.
그 대신, 다시 하나가 되어 그의 머리 위에 씌워져 있다.
그레모리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거짓된 성녀도, 그 성녀를 지키던 기사도 이제는 없듯이.
마왕의 압제에 맞서 싸운 용사도 더는 없다.
그레모리는 바엘이 마왕을 참살한 검을 뽑아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마족을 이끈 자가.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지금 이 시간부로 동방 제국과의 전쟁에 돌입한다.”
마족을 이끌고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마침내, 마침내! 전쟁! 드디어 전쟁! 라스 사의 바르바토스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음을 알림!”
“아아,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질서가 끝장나는군. 아하하하…….”
그레모리는 차마 바르바토스나 파이몬처럼 기뻐할 수 없었다.
그저 무해하고, 우스꽝스럽고, 멍청한 서큐버스답게 바보 같은 가짜 미소나 입에 걸고 있을 뿐.
광장을 가득 메운 채 죽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군대가 일제히 삐걱이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400년 전 마족의 용사가 지켜낸, 그를 따른 마족들도 저 안에 있다.
400년이 지나고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영혼 잃은 꼭두각시로 전락해 버린 자들이 진군한다.
그레모리는 느릿하게 시선을 돌려, 바엘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마족을 위해 투쟁했던 자.
새로운 마왕은 흡족하다는 듯, 오만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