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그림자 평화 - 어제, 그리고 오늘.
우중충한 하늘 아래, 백색의 소녀는 힘없이 걸었다.
아니, 그건 차라리 끌려간다는 말이 맞았다.
무거운 족쇄를 차고 비척비척 걷는 발목이 끊어질 듯 아프지만, 그녀의 양팔을 단단히 붙잡고 걷는 군인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더러운 마녀를 죽여라!”
“푸른 피에 죽음을!”
광장을 가득 메운 이들이 퍼붓는 날 선 비난.
적의로 가득 찬 눈초리와 혐오하는 얼굴.
사람들의 악의 그 자체가 어떤 칼날보다도 더 날카롭게 피부를 찌를 수 있다는 걸, 에리스는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랑하는 우리 딸, 우리가 궁에서 이렇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건 모두 백성들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그들에게 감사하는 법을 알아야 해.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다.
비록 어머니는 죽어버렸지만, 그래도 지키려고 노력했다.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부패하고 타락한 프랑지아 왕실의 3왕녀라는 신분을 숨기고 성녀를 가장해 뒤에서는 왕당파를 부추기며 반혁명적인 음모를-”
그런 적 없다.
왕녀라는 신분을 숨긴 건 맞아도, 왕당파 같은 자들은 만나본 적도 없다.
애초에, 그녀는 저들이 말하는 반혁명적인 음모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이해할 수 없다.
“하, 성녀라고? 악독한 마녀 같으니!”
“저주받을 왕족 주제에 웃는 얼굴로 우리 모두를 속였어!
멋대로 그녀를 성녀라고 부르며 자신을 구해달라고 매달리던 이들의 입에서 비난이 튀어나온다.
그녀는 하지도 않은 일들, 그녀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행위를 그녀가 한 것처럼.
그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저들의 태도가 변한 것이 서글프다.
궁에서 따스하고 자상하게 그녀에게 사랑을 주고, 가르침을 내려주던 어머니가.
-차라리 네 아버지의 눈에 들지 않았더라면. ……네가 없었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아직 사교계의 꽃이었을까?
궁을 떠나 빈곤한 도피생활 끝에 지치고 병든 얼굴로 그렇게 말해버리던 것이 떠올라.
서글프고, 서글퍼서.
에리스는 최후에 주어진 변론 기회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렸다.
온갖 비난 속에 질질 끌려가, 단두대 앞에 세워졌다.
에리스는 흐릿한 눈동자로 그녀에게 죽음을 선사할 도구를 내려다 보았다.
오랫동안 햇빛에 노출된 그녀의 보랏빛 눈은 이미 반쯤 빛을 잃어, 그 형태만을 대략적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씻고 씻어도 도저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피비린내만큼은 그녀의 영혼에 파고드는 듯했다.
둔탁하고 차가운 목재의 감촉이 목에 닿고서야, 에리스는 현실감 없이 그저 멍하니 생각했다.
원망스럽다고.
원망스럽지는 않다고 애써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검고 질척한 기분만이 피어오를 것만 같다.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사람들을 원망하는 그녀가 원망스럽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신성 교국을 따라가, 성녀로 칭송받으며 고상하게 위선이라도 떨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답답하고 맞지 않는 옷을 입어 지치고 힘들 망정, 이렇게 끝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어머니는 지옥에 가 있을 것이라고 단언해 버리는, 그들과 함께 하고 싶지는 않았는걸.
괜히 왕녀라는 사실을 신경 쓰며 조심하고 다닌 게 오히려 마녀 혐의로 돌아올 줄 알았다면, 차라리 마음껏 원하는 대로 살기라도 해볼걸.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을 여행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병자가 보이면 치료해주고, 숨어 다니지 않고, 그저 마음 가는대로, 손 가는대로.
정말 성녀라고 불려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열심히 사람들을 구하고 힘껏 발버둥 치다가 죽었다면.
그랬더라면, 최소한.
죽어서 신을 만나면 당당하게 자신은 최선을 다했노라고, 당신이 양심이 있다면 어머니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마녀에게 죽음을!”
“혁명 만세!”
에리스는 이미 반쯤 빛을 잃어, 그녀를 죽이라 소리치는 사람들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눈을 다행으로 여겼다.
원망하고 싶지 않은데.
원망스러워서.
저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면.
분명, 저들을 저주하고.
후회할 테니.
에리스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그리고 환각을 보았다.
악마들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군대.
그들의 앞에서 사람들을 이끄는, 금빛 눈동자에 금발 머리칼의 성녀의 환영을.
400년 전, 판데모니움의 위협으로부터 프랑지아를 지킨 성녀일까?
에리스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아주 아주 어릴 적, 어머니가 읽어준 책의, 흐릿한 기억.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구국의 성녀 이야기.
이제 와서, 이런 순간에, 왜?
사람들에게 성녀라고 칭송받는 순간, 그녀는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런 걸 동경했던 걸까?
천천히 눈을 뜨자, 환각은 사라졌다.
그저 그녀를 죽이라고 아우성치는 자들의 고함소리와.
……하늘에서 그녀를 비추는 빗줄기만이 보였다.
그녀의 약한 피부와 눈을 불태우는 햇빛일 텐데, 따가움이나 뜨거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쩐지 그 빛이 처연하게 자신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아서.
에리스는 처음으로, 성녀로서 기원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과분한 선물을 받았는데.
어머니를 그렇게 데려가신 것이 원망스러워서.
왕녀라는 신분이 발각되는 것이 두려워서.
어느 것 하나, 마음껏 해보지 못했어요.
저는 나쁜 딸이니까, 나쁜 아이니까. 그래서 벌을 받은 거겠죠?
하지만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이 피비린내 나는 도시가, 숱하게 죽어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이었나요?
저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아요.
저는 여전히 당신을 원망하지만, 여전히 당신을 이해할 수 없지만.
최소한 이게 당신께서 바라신 모습이 아니라면.
제가 정말로 성녀라면, 당신이 제게 주신 힘에 어떤 뜻이 있다면.
저는 아니라도.
부디, 이런 결말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에게 힘을 빌려주시기를 청합니다.
기원을 마친 순간.
에리스는 그녀의 몸 안에 남은 신성력이 순식간에 전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그녀에게 답을 준 것만 같아서.
금속의 칼날이 떨어지는 섬뜩한 소리와 그에 열광하듯 환호하는 군중들의 아우성 속에-에리스는 미소 지으며 삶의 끝을 받아들였다.
* * *
“…….”
25세의 에리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목을 매만져보았다.
차갑고 섬뜩한 틀의 감촉도.
영혼까지 물들여버릴 듯한 피비린내도 없다.
입고 있는 것은 몸조차 제대로 가려주지 못하는 넝마가 아니라 그녀 취향의, 움직이기 편하고 단조로운 디자인의 백색 로브.
그리고 하다못해 이거라도 두르라고 조르는 앙쥬 백작에게 마지못해 져주며 두른, 왕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띠.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자, 햇빛에 노출되지 않은 자색의 눈동자는 선명하게 방을 비추어주었다.
프랑지아 왕의 알현실.
그녀가 앉아있는 곳은 옥좌.
천천히, 현실감이 돌아왔다.
어제 처형당한 마녀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가 아니라.
오늘 살아있는 프랑지아의 여왕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가 이곳에 있다.
에리스는 그제야 멈춰있던 숨을 토해내었다.
거친 호흡을 토해낸 끝에.
“여왕 폐하.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 각하께서 드셨습니다.”
에리스는 가슴 속에서 터져나오는듯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들어오세요.”
* * *
“……여왕 폐하, 괜찮으십니까?”
“네? 뭐가요? 저 완전 괜찮은데요?”
에리스의 상태가 이상하다.
그것도 굉장히, 이상한데.
얼굴은 창백하고 미미하게 땀냄새까지 나는 것이 어떻게 봐도 악몽이라도 꾼 사람의 모습인데.
정작 에리스 본인은 기분이 좋은지 아주 방긋방긋 웃고 있다.
……대체 뭐지?
“……. 아닙니다. 괜찮으시다면…….”
“후작님.”
“예?”
에리스는 정말 묘할 정도로 해맑게 히죽히죽 웃고 있다.
“크흠, 폐하. 웃으시는 얼굴이 무슨 여왕이 아니라 시골 어린아이 같습니다. 체통을 좀…….”
보다 못한 내가 주의를 주자, 에리스는 아예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아, 뭔데 진짜.
나도 좀 알자.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에리스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하하,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니, 이 성녀가 뭘 잘못 먹었나.
에리스는 손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더니,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오늘은 또 무슨 근심거리를 들고 오셨는지 들어볼까요?”
“……어째 여왕 폐하께서 저를 어떻게 취급하시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만.”
에리스는 피식피식 웃으며 답했다.
“자업자득이세요, 전 후원자님.”
“하하…….”
나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에리스가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이 되자 입을 열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동방 제국이 전쟁을 준비 중이라는 것, 알고 계시지요.”
“아, 네. 물론 알아요. 나름 프랑지아의 동맹국이잖아요? 그런데, 지상군 부대 파병이 아니라 정박권을 달라고 했다던데. 국민의회는 난리가 났겠네요. 당연히 반대겠죠.”
나는 피식 웃었다.
확실히, 에리스가 어딘가 맹하니 별세계에서 사는 것처럼 굴긴 해도 판단력에서 기본 이상은 한다.
이런 주군은 모실만하지.
“예. 그런데, 아키텐 백작과 저는 이번 전쟁에서 프랑지아가 나설 필요는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음…….”
그제야 에리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잠시간의 침묵 후, 에리스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어째서요?”
“아키텐 백작의 보고서는 읽어보셨으리라 여깁니다.”
“네, 물론이죠. 제가 여기 앉아서 하는 일이라곤 구호활동 허락 기다리는 거랑 서류 결재하는거 밖에 없잖아요?”
은근슬쩍 불만을 담아 말하는 에리스의 태도에 웃음이 나올 뻔해서,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 대숙청이라 부를 정도 규모의 내부 개편이 있었던 것이 불과 몇 달도 되지 않았습니다. 대개 저런 경우 재정비를 위해서라도 휴식기를 가져야 정상인데, 저들은 바로 전쟁을 터뜨리려고 하고 있죠.”
“음…….”
“아키텐 백작-”
“제 앞에서 정돈 편하게 부르셔도.”
“……크리스틴은 저들이 동방제국을 빨리 굴복시켜야만 한다는 초조함에 쫓기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지아 혁명전쟁의 후유증에서 중앙 대륙이 회복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 한다는 거죠.”
에리스는 곰곰이 생각해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리가 있네요. 사실, 크리스틴 언니보다 똑똑한 사람도 없으니까요. 적어도 저는 확실히 아니니까.”
“그리고, 드론 문제도 있습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이베리카 이후로도 드론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면, 동방 제국의 붕괴는 자칫하면 중앙 대륙 전체를 파멸시키고도 남을 드론의 군세를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에리스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이제부터가 고비인데.
“프랑지아가 지난 전쟁의 후유증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여왕 폐하. 저와 크리스틴도 당장 전쟁을 하자기보다는, 동방 제국이 절박하게 구원을 청하는 시점이 올 때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사전 준비를 조금이라도 해두려는 겁니다.”
에리스는 눈을 들어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물론 프랑지아 단독도 아닙니다. 이베리카 형제국은 기꺼이 우리와 함께 해줄 것이고, 크리스틴은 탈레랑 총재와 함께 중앙 대륙의 국가 대부분을 끌어들일 준비를 하게 될 겁니다.”
으음, 우리 여왕이 이렇게 조용한 사람이 아닌데 왜 반응이 없지.
나는 조금 머쓱한 기분을 느끼며 덧붙였다.
“국민의회야 동방 제국이 발등에 불 떨어져서 이런저런 조건을 내밀면 달랠 수 있을 텐데, 국민 여론이 문제가 되겠죠. 그리고 거기서 여왕 폐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왕 폐하만큼 국민 전체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분이 없으시니까요.”
에리스는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질문을 해왔다.
“혁명의 전개 과정에 악마들이 개입했다고 하셨죠?”
“예, 맞습니다만…….”
“혁명을 일부러 더 과격하게 일으키려고 했다고도 하셨고요.”
“……그렇습니다, 여왕 폐하.”
에리스는 안이 들여다보일 것처럼 투명한 자색 눈동자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슬며시 미소 지으며 나를 불렀다.
“후작님.”
“예, 여왕 폐하.”
“우리, 더 나아진 것 맞죠?”
……?
뭘 말하는 걸까.
혁명 이전을 말하는 걸까, 혁명 이후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나는 조금 생각해본 끝에 답했다.
“……적어도 우리 모두가 협력해서 조금은 나아졌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전쟁을 벌이자는 입장에서 말씀드리긴 민망하지만, 적어도 저는 이걸 벌이지 않았을 때보다는 나은 길이라고 생각하기에 부탁드리는 겁니다.”
나름 초조하게 뭐라고 설득해야 잘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에리스가 선선히 답했다.
“좋아요. 도와드릴게요.”
……도와준다니 좋기는 한데, 이렇게 쉽게?
내가 얼떨떨한 심정으로 에리스를 바라보고 있자, 에리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후작님, 행복하세요?”
……나름대로 에리스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종잡을 수가 없네.
그래도, 뭐…….
“여전히 문제는 산적해 있지만, 그래도.”
회귀 전.
나는 오늘, 같은 날짜에 죽었다.
나보다 먼저 이미 죽어버렸을 크리스틴도, 가스통도, 에리스도 나와 함께 있다.
그 외에도 무수한 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 지금이…….
“행복한 것 같습니다.”
내 답을 들은 에리스는 나와 처음 만난 이후 가장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조금 놀라서 멍하니 있는 가운데, 에리스가 말했다.
“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