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그림자 평화 - 폭풍전야 (3)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동방제국의 정박권 제공 및 참전 요구는 파란을 불러왔다.
바로 다음 날 열린 국민의회에서는 노성이 가득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크라프테와의 전쟁에서 저들이 보내준 건 고작해야 1개 연대 규모의 포병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증원군도 아니고 아예 전면참전을 하라고?”
솔직히 나도 동방 제국이 저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는데.
끽해야 내가 지휘하는 육군이 파병되어서 방어전을 도와줄 줄 알았지, 아예 어비스 코퍼레이션 본토에 전면침공을 가하려고 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프랑지아 본토 사이의 바다는 전열함이 건너는데 반나절도 안 걸립니다! 여기서 정박권을 내놓으라는 건 아예 프랑지아를 주전장으로 삼겠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제일 큰 문제는 이쪽이다.
프랑지아를 이용하면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본토 공략이 굉장히 용이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역습도 용이하다는 거다.
“정박권을 내어준다고 칩시다. 저들의 그…… 청룡함대가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함대에 맞서 승리할 수는 있소?”
게다가 상대는 다름 아닌 바다의 지배자, 라스 사의 함대.
전쟁 기간부터 종전 후 2년 간, 프랑지아가 함대 증강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오긴 했지만 크리스틴은 아직도 우리 함대가 라스 사 함대 전력의 반의 반이나 따라갈까 말까라고 평가했다.
동방 제국이야 청룡함대와 프랑지아의 함대가 연합하면 능히 격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는 있는데, 전쟁 당사국이 늘 그렇듯 자신들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고 믿으면 곤란하다.
하물며 동방제국이 지금까지 보여준 태도를 보자면 있던 신뢰도 없어질 판이니…….
“저들의 함대 규모는? 그리고 저들의 함대는 동방 제국 남부와 동부에 있다고 하지 않았소? 저들의 영토가 그토록 넓으면 대체 여기까진 어떻게 온답니까?”
“말로는 옛 포르투의 상인들이 이용하던, 남부 대륙을 돌아가는 희망봉 항로를 이용한다는데…….”
“오, 그 불모지를 지나오시겠다고. 프랑지아에 도착할 때쯤이면 함대가 아니라 난파선단이겠군.”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솔직히 나 같아도 별로 믿기진 않는데. 오는데만 몇 달은 걸릴 여정 동안 함대가 전력을 유지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이런 미친 계획을 세우다니 이게 대범한 거야, 무모한 거야.
“한때 향신료 무역 루트로 많이 쓰였고, 실제로 상선단이 오간 적도 있는 항로입니다. 여정을 마친 후 재정비에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론상 가능은 합니다.”
해군 책임자이자 상행 전문가인 크리스틴이 말하자 분위기가 비교적 누그러지긴 했지만, 국민의회의 여론은 여전히 지극히 회의적이다.
“뭐 그래, 가능하다고 칩시다. 전쟁이 끝나고 겨우 2년 지났소. 내전부터 10년이 넘는 전쟁을 치른 끝에 단 2년의 평화.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전쟁에 우리가 굳이 최전선을 감당해가며 끼어 들 필요가 있소?”
이건 누구도 섣불리 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할 수 없다.
당장 그 긴 전쟁을 어렵게 끝내고 상처를 회복하고 있는 프랑지아에서 누가 함부로 바로 전쟁을 치르자고 할 수 있겠나.
나도, 크리스틴도 그런 주장을 함부로 할 수는 없다.
결국 니콜라 브리소 총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동맹이니, 일단은 답을 유보하는 것으로 해두는 게 좋겠소.”
모리스 탈레랑 총재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대사관을 통해 저들의 소위 청룡함대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전력을 보유했는지 조사해보도록 하지요. 일단 승산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판단하지 않고서는 논의가 진행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죠.”
결국 첫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 * *
국민의회 참석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어떻게 생각해요, 피에르?”
크리스틴의 질문을 받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비스 코퍼레이션.
두말할 나위 없는 위협, 특히나 프랑지아에 대한 위협이다.
다른 건 몰라도 산업혁명의 촉발과 혁명과정, 거기에 이베리카 반도에 엮인 내막을 알고 있는 나는 저들이 위협이라는 것에 대해서 재고의 여지조차 없다고 여긴다.
무엇보다도, 다름 아니라 나 자신이 실제로 어비스 코퍼레이션 때문에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저들은 루이 왕을 부추겨 라파예트를 공격하려 들었고, 급진파 의원들을 부추겨 크리스틴을 거의 죽일 뻔했으며, 프랑지아와 전쟁 중인 국가들의 뒤에서 암약하며 나를 위기에 빠트렸다.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전쟁은 필요합니다.”
저들이 프랑지아의 적이라는 건 명백하며, 저들이 쓰던 드론을 봐선 대륙 전체의 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지.
애초에 압도적인 기술력을 가지고 적의를 품고 있는 존재를 마냥 내버려둔 다는 것부터가 경솔하다.
모든 전쟁을 끝낸 뒤 군비를 축소한 시점에도 프랑지아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잠정 적국으로 상정하고 해군을 강화해왔다.
그 모든 움직임에 육군 총사령관인 나와 해군 제독인 크리스틴의 입김이 작용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너무 이르군요.”
프랑지아가 내전부터 시작한 긴 상처에서 회복하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10년이 넘는 전쟁을 치렀으면 그 회복에도 최소한 그만큼의 시간은 필요로 하는 법.
“지금 프랑지아에서 섣불리 전쟁을 하자고 주장했다간 온갖 비난의 화살을 뒤집어써야 할 겁니다.”
프랑지아는 다시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긴 전쟁 끝에 어렵게 되찾은 평화인데 다시 전쟁을 벌이자는데 찬성할 사람은 거의 없을 테고…….
심정적 이전에 물리적으로도 막대한 전비지출과 무수한 희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인지도 모르죠.”
“무슨 말입니까, 크리스틴?”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내부에서 이루어진 개편, 내지 대숙청의 규모가 엄청나요. 외부에서 제한적으로 관측할 뿐인 우리가 보기에도 그런데, 실제 내부는 더 심각할 가능성이 높죠. 이 정도 규모의 급진적인 조직개편은 반드시 후유증을 남길 수밖에 없어요.”
“후유증이라…….”
크리스틴은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듯 하더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유증을 미처 다 회복하기도 전에 동방 제국과의 전쟁이라는 강수를 뒀죠. 지금까지 자신들의 대전략에 따라 느긋하게 움직이던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태도와는 달리, 움직임에 명백한 초조함이 보여요.”
“초조함. 그 악마들이, 초조함.”
육군 총사령관으로서의 나는 전장에서의 움직임으로 그런 걸 판단한다.
하지만 크리스틴에게는 그것 뿐 아니라 정략적인 무언가가 보이는 거겠지.
“생각하기 어렵군요. 저들만큼 강대한 세력, 그것도 수명의 걱정이 없는 자들이…….”
동방 제국의 지도층인 엘프들도 수백년에 달하는 삶을 살지만, 악마들은 그 이상이다.
물리적으로 죽임당하거나 하지 않으면 거의 영원히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고, 실제로 그에 기반한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국력은 냉정하게 봐도 대륙의 다른 국가들보다 몇 발은 앞서 있다.
“그런 자들이 초조해질 만한 이유라. 그게 뭘까요.”
“글쎄요, 우리로서는 그것까지는 알 수 없죠.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하나예요.”
“음?”
“저들은 지금 프랑지아, 아니, 중앙 대륙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 급진적인 조직개편의 후유증을 안고서도 가장 강대한 적인 동방 제국과의 전쟁을 벌이려고 하고 있어요.”
“조금 역설적인데, 중앙 대륙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으니 더 강대한 동방 제국과 싸운다?”
“동방 제국은 강대하지만 오만하고, 폐쇄적이니까요. 저들이 동방 제국을 공격한다고 해도 중앙 대륙의 국가들이 참전하지는 않을 거라고 기대한 거겠죠. 게다가 실질적으로 저들이 어비스 코퍼레이션 본토를 타격하기에는 거리가 있고요.”
확실히.
당장 나름 동맹국인 우리에게도 이러는데, 어느 나라가 동방 제국을 도우려고 들겠어?
만약 동방 제국이 악마들에게 박살 나더라도 대부분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내심 통쾌해하는 자들도 있을 터다.
“반면 중앙 대륙은 프랑지아의 혁명전쟁에 다양한 나라들이 엮이면서 전쟁의 후유증을 겪고 있지만, 악마의 위협이라는 거대한 적에 맞서서는 뭉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거든요. 중앙 대륙, 특히 프랑지아는 어비스 코퍼레이션 턱밑에 있으니 저들의 입장에선 최악의 상황이죠.”
“...당신 말이 맞습니다, 크리스틴. 당장 중앙 대륙의 국가들은 전부 군제개혁을 진행하고 있으니까요.”
전쟁이 끝나자마자 대대적으로 조직 개편을 하고 군을 재정비하고 있는 것은 내 혁명군만이 아니다.
전쟁에서 망신당한 게르마니아 제국도 프랑지아나 크라프테의 전훈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당수의 외국인 출신 베테랑 군인들을 대거 영입하며 대대적인 군제 개편을 진행 중이다.
이제는 하인리히 1세가 된 하인리히 왕자에게 참패한 노던 연합 왕국도 이 악물고 군대를 강화하는 중이라고 들었고, 군사국가 그 자체인 크라프테 왕국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
프랑지아를 둘러싼 혁명전쟁은 중앙 대륙에 상당한 피해를 일으켰지만, 동시에 어느 나라도 적국에게 본토가 유린당하는 일을 겪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 전쟁이란 대개 많은 전훈을 남기고, 후대에게 이어질 군사적 전통이 되는 법이지.
중앙 대륙의 국가들은 상당한 피를 흘렸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강해졌다.
동방 제국의 놀라운 규모와 국력은 우리를 경악하게 만들긴 했지만, 군사력으로서는 글쎄.
저들은 극도로 오만하고 폐쇄적인 데다 심지어 지도층이 수백년을 사는 종족이기까지 하다.
저런 이들이니만큼 프랑지아의 자부심 넘치는 기사들이 그랬듯, 그만큼 옛 전통을 고수하고 새로운 교리와 전훈을 받아들이는데 둔감할 터.
심지어 동방 제국은 꽤 긴 시간 제대로 된 전쟁을 치른 적이 없다.
나는 프랑지아 단독이면 몰라도 중앙대륙 전체라면 저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한다.
악마들이 지금껏 보여준 탁월한 정보력이라면 이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도 이상할 것 없지.
“……그렇다고 생각하면 저들은 가장 최적의 순간에, 제대로 허를 찌른 모양이군요.”
“네, 맞아요. 저들은 지금이 놓쳐서는 안 되는 적기라고 판단하고 내부의 문제를 무릅쓰고 전쟁을 서두르고 있는 거겠죠.”
크리스틴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가 저들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건 내키지 않습니다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국민의회는 물론이고 국민들도 전쟁을 원하지 않아요. 하물며 동방 제국도 사태 파악을 못하고 오만하게 굴고 있으니…….”
크리스틴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원래 발등에 불 떨어지면 자존심이라는 건 금방 시궁창에 처박히는 법이에요.”
“하하, 그건 그렇겠죠.”
동방제국이 화포기술이나 건함기술에서 프랑지아보다 우월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겠지만, 결국 전쟁은 병기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이다.
실제로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동방 제국의 군대가 맞붙었을 때 동방 제국이 우위를 점한다는 경우의 수는 없겠지.
“그리고 우리는 군사령관이고요. 주어진 예산과 재량권 내에서 전쟁에 대비하는 정도는 어렵지도 않죠.”
“흠, 그리고?”
어째 육군 총사령관이 해군 제독을 참모로 둔 기분이지만, 이럴 때 만큼은 크리스틴만큼 든든한 사람이 없지.
“우선 그렇게 준비하고 있다가 동방 제국이 우는 소리를 하기 시작하면, 뭐라도 받아낼 수 있겠죠. 그러면 적어도 국민의회의 의견은 돌릴 수 있을 거예요.”
“국민의회는 그렇다 치고, 국민 여론은…….”
나는 말하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절로 쓴웃음이 지어진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여왕 폐하라면 어떻게든 가능은 하겠죠.”
크리스틴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여왕 폐하의 설득은 당신 몫이에요, 피에르.”
“아, 어려운 걸 시키시네요.”
그렇지 않아도 피 흘리는거 싫어하는 에리스에게 또 전쟁을 들고 가야 한다니. 이거야 원...
크리스틴은 쿡쿡 웃더니 답했다.
“저는 탈레랑 총재와 움직일 건데요?”
“탈레랑 총재와? 뭘 하시려는 겁니까?”
크리스틴은 슬며시 머리칼을 쓸어 넘기더니, 어두운 미소를 흘렸다.
“저, 사실 아직도 그때 총탄을 맞은 곳이 쓰리거든요.”
“……아.”
생각해보니 크리스틴도 원한은 잊지 않는 타입이었지.
“……악마들은 중앙 대륙이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전쟁을 벌였어요. 그러면, 우리는 저들이 가장 원하지 않을 최악의 시나리오로 보답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