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그림자 평화 - 폭풍전야 (2)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동방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 중이라고 추정된다는 크리스틴의 경고로부터 정확히 한 달 뒤.
그리고 몸을 추스른 크리스틴이 다시 국민의회에 출석하여 국가 정보국장으로서 동방 제국과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전쟁 가능성을 보고하고 이 주 뒤.
동방 제국에 파견되어 있던 프랑지아 대사관으로부터 명백한 전쟁의 징후들이 속속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편? 그거 의료품 아니오?”
“강력한 중독과 환각작용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거기다가,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 만든 아편은 악마의 마력을 섞어서 더 강력한 중독성과 환각성을 가진다고 하더군요.”
“쯧, 악마 놈들 아니랄까 봐 저들 같은 거나 팔아 먹었구만.”
“그런 것이 있었다면 중앙 대륙에는 왜 안 팔아치운 거지? 모르긴 몰라도 중앙 대륙에서도 꽤 잘 팔렸을 것 같은데.”
의원들의 의문에는 탈레랑 총재가 답했다.
“중앙 대륙에는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판데모니움에 대한 적개심이 남아있고, 국가도 여럿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국가가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거래에 부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으니, 저런 마약을 팔아서 적개심을 심어주는 건 기피한 거겠지요.”
“동방 제국의 콧대 높은 엘프들은 국가 차원의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거래에는 적극적이지 않으니, 민간에 마약을 푼 거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중앙 대륙에서는 이미지 관리를 하면 도움이 되니까 고상한 척하면서, 어차피 단일국이고 폐쇄적인 동방 제국에서는 악마들답게 굴고 있던 거죠.”
공존 좋아하시네, 역시나 악마 놈들 아니랄까 봐.
하긴, 중앙 대륙에서도 앞에서 대놓고 하지만 않았을 뿐 뒤에서 벌인 수작들을 보자면 거의 만악의 근원이 어비스 코퍼레이션이었지.
“대략 동방 제국이 프랑지아와 교류를 시작한 뒤쯤부터 차르가 공개적으로 아편을 금지하고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 아편을 밀수하는 자들을 극형에 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걸로 어느 정도 관리가 되는 줄 알았는데…….”
그랬다면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논의하고 있을 필요도 없었겠지.
“그런데 동방 제국 대사관에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주로 동방 제국의 행정력이 전부 미치지 못하는 남부나 극동 영토에서 아편이 대량으로 밀수되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개중에는 악마들의 무기로 무장한 밀수 조직이 제국의 치안군을 격퇴하고 도시를 점거하는 일도 있었답니다.”
탈레랑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
“차르가 토벌령을 선포하자,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는 동방 제국 내부의 어비스 코퍼레이션 직원과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경고를 보냈다고 합니다.”
말이 경고지, 사실상 차르가 아편 밀수 조직을 토벌하려고 들면 전쟁하자는 소리다.
거기까지 말한 탈레랑은 크리스틴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크리스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가 정보국에서는 최근 2년간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침묵과 내부 정리 작업이 끝나고 동방 제국과의 전쟁을 벌일 준비를 다 끝내고 벌인 움직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크흠…….”
의원들 사이에선 침음이 흘렀다.
판데모니움이 무너지고 400년,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단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적어도 중앙 대륙에서는 그랬다. 저들이 발견한 신대륙에서 야만족들을 소탕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있었지만, 그건 완전히 남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힘을 무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상대적으로 폐쇄적이고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육로로 이어진 국가가 공격받는다는 것은 나름의 경각심을 줄법하지.
“……아직은 논하기 시기상조가 아니겠소? 정말로 전쟁이 벌어질지도 미지수니…….”
“동방 제국은 굽히지 않을 테고, 어비스 코퍼레이션도 400년 만의 직접적인 군사행동입니다. 어느 쪽도 물러나지 않을 테니 전쟁은 이미 기정사실이라는 것이 정보국의 판단입니다. 그리고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기술력과 정보력을 토대로 추정해 볼 때, 저들은 최소한 동방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섰겠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아키텐 백작, 크리스틴의 단언이다.
의원들도 그 사실을 반박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의견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한들 우리 일은 아니지 않소? 프랑지아는 기나긴 내전과 연이은 전쟁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소. 남의 나라 일에 관여할…….”
“하지만 동방 제국과 프랑지아의 국교는 악마들에 맞선 공동전선을 전제로 수립되었습니다. 어쨌든 이베리카 형제국과 함께 단둘뿐인 동맹국인데 아주 무시하기는 어렵습니다.
탈레랑 총재가 말하고, 나도 거들었다.
“저들은 크라프테와의 전쟁에서 실제로 증원군을 보내주었고, 화포 기술을 전수해 주기도 했습니다. 당장 우리가 여력이 없다면 모를까, 평화를 누리고 있었으니 저들이 도움을 청한다면 지원도 고려 정도는 해봐야겠죠.”
“으으음…….”
솔직히 나로서도 프랑지아가 뭐 아주 대단한 지원을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아무튼 무작정 외면하는 건 더 곤란하지.
어차피 동방 제국에서도 사절단을 보내올 테니 자세한 건 논의해 봐야겠지만…….
의원들이 그래도 고민하는 모양이자, 크리스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더 있습니다.”
“뭐요, 아키텐 백작?”
“드론, 보고받아서 알고 계시겠지요.”
의원들은 대번에 미간을 구겼다.
국제적으로는 부정당했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의회에서도 내 보고를 무시한 건 아니다. 이들에겐 악마들의 입김이 그나마 덜 닿아 있으니까.
어느 정도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있는지 몰라도, 최소한 드론의 존재조차 부정하는 자들은 없다.
크리스틴은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가져온 자료를 천천히 읽었다.
“이건 동방 제국의 주장과 대사관의 보고를 취합하고, 국가 정보국에서도 별도로 조사한 보고서에 따른 내용입니다만. 동방 제국의 추정 영토 면적은 최소 프랑지아의 10배, 인구는 4배 이상입니다.”
“하, 저들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
“국가 정보국에서 최대한 보수적으로 판단한 기준이니, 실제로는 저 이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크리스틴의 단언에 회의장이 조용해지자, 크리스틴이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입니다만,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동방 제국의 광활한 영토에서 일부나마 점령하고 저들의 인구를 드론으로 바꿔내기 시작하면…….”
가장 끔찍한 시나리오지만.
“……중앙 대륙 전역을 정복하고도 남아돌 만한 병력을 수급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게 충분히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라는 것이 문제지.
* * *
크리스틴의 경고는 국민의회에서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지만, 동시에 상당부분 부정당하기도 했다.
특히나 국민의회에서는 크리스틴이 해군 제독이자 내 아내이기도 한 점을 중점적으로 보고 있다.
나나 크리스틴이나 전쟁에 대비한 군비증강이 곧 권력 상승으로 이어지는 입지를 가지고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국민의회의 의원들은 직접 드론과 대면해 본 적이 없다.
실제로 드론과의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든 간에, 저들이 본 것은 이베리카 형제국과 내가 드론을 패퇴시켰다는 결과뿐이니까.
국민의회 의원 상당수는 크리스틴이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드론의 위협을 과장했거나, 지나치게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한 것은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
어차피 나나 크리스틴이나 전쟁이 시작도 되기 전에 국민의회가 전쟁을 준비하며 동원령을 내린다거나 할 걸 기대한 건 아니었으니까 상관은 없다.
중요한 건 그런 가능성을 미리 주지시켜두고, 실제로 사태가 터졌을 때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는 거니까.
정말로 중요한 건 동방 제국이 어떻게 나오냐는 거였는데…….
2주 뒤.
육군 총사령관인 나와 해군 제독인 크리스틴, 그리고 탈레랑, 브리소, 앙쥬 총재는 동방 제국의 사절로 도착한 이들을 맞이했다.
익숙한 얼굴이군.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콘스탄티노프 경.”
“하하,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라파예트 후작님. 엘시온 대공 전하께서도 차르께 총사령관으로서 후작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용맹과 놀라운 전술을 전하시며 흡족해하셨었지요.”
나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팔짱을 낀 채 턱을 쳐들고 있는 엘시온 대공을 흘긋 보았다.
이 엘프가?
설마.
그래도 외교니까.
나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건 우연이군요. 저 또한 여왕 폐하께 엘시온 대공 전하와 동방 제국 포병대의 엄청난 위용을 보고드린 바 있습니다.”
“오호, 그건 또. 하하하! 이게 바로 이심전심이 아니겠습니까!”
콘스탄티노프는 기뻐하며 엘시온에게 저들의 말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난 그래도 거짓말은 안 했다.
-동방 제국의 포가 대단하긴 하더군요. 정작 지휘관은 나잇값 못했지만요.
-그래요? 그 대포, 잘 구슬려서 배우면 우리 군사들에게 도움이 되겠네요.
-그러지 않아도 꼭 확보할 생각입니다, 여왕 폐하.
물론 에리스와 내가 나눈 대화는 저랬지만, 아무튼 위용은 보고한 거 맞잖아.
엘시온은 매우 오만한 얼굴로 콘스탄티노프의 보고를 듣더니, 툭 던지듯이 한마디 했다.
“엘시온 대공께서도 후작님을 높이 평가하시며, 호의에 감사하신답니다!”
콘스탄티노프는 매우 열성적으로 떠든다만…….
……저게 어떻게 봐도 그런 말 한 얼굴이 아닌데?
아무튼 콘스탄티노프의 통역으로 엘시온 대공과 세 명의 총재, 그리고 크리스틴이 가볍게 인사와 안부를 주고받았다.
의외로 엘시온 대공은 젊은 여성인 크리스틴이 해군 제독이자 정보국 수장이라는 소개에는 별로 놀라는 기미가 없었다.
인간의 국가와 외교할 땐 볼 때마다 놀라는데, 엘프들 기준에선 아닌가 보군.
그러고 나서, 본론이 나왔다.
엘시온 대공이 매우 짧게 몇 마디 말하면…….
“오늘 이렇게 프랑지아의 각군 책임자와 국민의회의 세 총재분께서 맞이해주신 것에 대하여. 엘시온 대공 전하께서는 위대하고 고결하시며 유일하신 대륙의 수호자 차르를 대신하여 깊은 만족감을 표하셨습니다. 양국의 우의는 끝없이 흐르는 물줄기처럼 길고 영원할 것이며-”
길고, 길고, 복잡하고, 아무튼 길고 길게 늘인 외교적 수사가 흘러나오고.
……하다못해 엘시온 대공이 표정 관리를 좀 해서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시늉이라도 해주면 저 콘스탄티노프의 눈물겨운 노력이 의미가 있을 텐데.
나는 탈레랑 총재에게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서 진짜론 뭐라고 했습니까?”
탈레랑은 썩은 미소를 흘리며 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럼, 시작하지. 이렇게만 말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탈레랑은 외교관 아니랄까 봐 열성적으로 동방 제국의 고위 귀족 엘프들이 쓰는 언어를 배워서, 이제 발음은 몰라도 어느 정도 알아듣는 경지에는 이르렀거든.
물론 동방 제국이 좀 극단적인 편이지 외교적 관례라는 것이 흔히 그러하므로, 우리는 모른 척하고 콘스탄티노프의 장황하고 무의미한 노력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위대하고 고결하시며 유일하신 대륙의 수호자 차르께서는 비열하고 사악한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위협에 맞서 명예로운 혁명 프랑지아 왕국이 신의를 다하여 줄 것을 기대하고 계시며-”
“이번엔 뭐랍니까?”
“조공국의 의무를 다해서 참전하랍니다.”
……엘시온 대공의 오만한 한 마디를 어떻게든 그럴싸한 외교적 수사로 자아내고 있는 콘스탄티노프에겐 정말로 미안하지만, 나름 차르가 신임해서 보냈을 엘시온 대공이 저러는 꼴을 보니 차르도 별로 제정신일 것 같지는 않다.
아무래도 혁명 프랑지아 왕국이 조공을 바칠 수는 없으니 모리스 탈레랑 개인이 일종의 선물 삼아 조공한다는 외교적 우회도 저들 딴에는 멋대로 왕국의 조공으로 번역된 모양인데.
저런 친구들을 설득해서 원군과 화포 기술을 받아온 탈레랑이 실로 위대해 보이는군.
아무튼 길고, 장황하고,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 의미는 없는 콘스탄티노프의 통역……이라기보다는 창조적 외교적 수사 끝에,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이 나왔다.
“이번엔 뭐랍니까?”
엘시온 대공의 짧고 퉁명스러운 말을 들은 탈레랑이 입을 떡 벌린 채 굳어있어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콘스탄티노프의 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여, 위대하시고 고결하시며 유일하신 대륙의 수호자 차르께서는 혁명 프랑지아 왕국이 제국의 청룡함대에게 기꺼이 정박지를 제공하고, 비열하고 사악한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본토를 공략하는 데 힘을 보태주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계십니다!”
오,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