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95화 (195/258)

195화. 그림자 평화 - 폭풍전야 (1)

프랑지아의 수도, 뤼미에르.

국민의회.

혁명 이후 실시된 그랑제콜 계획은 군제 개혁에서 상당한 성과를 냈고, 실제로도 대륙 최강이라 불리던 크라프테 왕국에 맞선 전쟁에서 프랑지아가 승리함으로써 그 가치를 입증해 보였다.

하지만 그랑제콜 계획은 단순히 군제 개혁을 위한 것뿐 아니라 국민에 대한 교육 전반을 위한 정책이었고, 특히나 국민의 정부를 자처하는 국민의회 입장에서는 군제 개혁만큼이나 민간 교육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 현실은 언제나 다르기 마련.

외세의 침공이라는 절박한 위기 상황 속에서 급물살을 타고 진행된 군제 개혁과 달리, 정작 민간 교육은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었다.

“농촌에선 여전히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지 않으려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쯧쯧, 기껏 나라에서 가르쳐준다고 해도 배우려고 들질 않으니.”

“하하, 아무래도 농촌에서는 아이들도 중요한 일손 중의 하나니까 말입니다. 배우는 것보다 당장 농사일에 동원하는 걸 선호하는 부모들이 아직 많은 거지요.”

혁명당과 자유당의 의원들이 씁쓸한 대화를 나누고 있자, 중앙당 총재 앙쥬 백작이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흥, 지식의 중요성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아무리 좋은 제도를 베풀어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저런 무지렁이들에게도 동등한 표를 주자는 혁명당의 급진적인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이제는 슬슬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소?”

“백작은 아직도 국민들을 깔보는군! 국민들을 내려다보는 귀족의 고압적인 자세는 대체 언제쯤 버리실 수 있겠소? 무덤까지 가져가실 생각이시오?”

“뭣이 어쩌고 저째? 옛날 같으면 눈도 못 마주칠-”

“아이고, 진정하시지요, 백작님.”

“아니 근데, 백작께서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시는 것 아닙니까. 솔직히 저들 좋으라고 하는 정책인데도 그냥 살던 대로 살고 싶다고 일단 거부하고 보는 걸 보자면 결국 그 자리가 저들의 천성에 맞는 자리가 아닌가 싶은데…….”

“왜, 아주 국민의회 폐쇄하고 다시 귀족정으로 돌아가자고 하시지?”

“말 다 했소? 그냥 답답한 걸 답답하다고 한 것뿐인데!”

“쯧쯧, 누가 보면 시장 바닥인 줄 알겠어.”

“거 고상한 척하면서 뒤에서는 협잡질하는 거 누가 모를 줄 아시오?”

“아니, 지금 싸우자는 거야?”

나는 순식간에 고성이 오가는 의원들을 보며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다.

음…….

언제나처럼 개판이야.

평범한 국민의회로군.

명령하면 따라야 하는 군대식 사고에 익숙한 나로선 어떻게 봐도 개판이지만, 이 개판으로도 느릿느릿하게나마 무언가는 착실하게 진행되긴 하는 것이 신기하기는 하다.

결국 싸우고 싸우고 싸우면서 뭔가 달라지긴 달라지더란 말이지.

아무튼 한껏 싸우고 싸운 끝에, 다음 사안이 나왔다.

“여학교 설립 계획도 진행 중입니다. 일단 계획은 내년 초부터 시범적으로 설립해서 운영하는 거긴 합니다만…….”

의원들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이걸 열심히 밀어붙인 크리스틴의 의석으로 향했다가, 그대로 다시 흩어졌다.

크리스틴은 자리에 없으니까.

“거 농촌에선 아들들도 학교에 안 보내려고 드는데, 딸애들은 잘도 보내주겠소?”

“교사진 확보도 문제요. 여자들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자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당장 농촌에 교육 보급하는 것부터 갈 길이 먼데 굳이 이런 행정력 낭비를 해야 할지…….”

저대로 내버려두면 아주 자연스럽게 취소까지 흘러가겠구만.

결국 내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시범적으로 시행이고, 대도시부터 우선적으로 하게 되겠죠. 대도시에서는 학교에서 뭐라도 배우는 것이 나중을 위해 낫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으니, 일단 해볼 가치는 있을 겁니다. 일단 시행을 해봐야 문제점이나 현실성을 파악할 수 있겠죠.”

“크흠, 뭐, 일리가 있긴 하지만 국민의회의 예산이 그렇지 않아도 부족하니까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정책은 조금 뒤로 미루는 것도 방법이라는 거지요.”

나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아, 예산! 아키텐 백작도 국민의회 예산에 관심이 많죠.”

크리스틴이 사준 전시 채권 다 지급하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을 텐데, 사람이 잠깐 자리 비웠다고 이거 재미없게 왜 이러시나.

“크흠, 크흠,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아니나 다를까 의원들도 헛기침을 하며 발뺌을 했다.

“허허, 우리 중에 아키텐 백작이 국민의회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모르는 자는 없을 거요. 뭐, 일단 시행해 보고 정 아니다 싶으면 그때 가서 다시 논의해도 늦지 않겠지.”

“총재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급기야 니콜라 브리소 총재가 나서서 수습했다.

이제 나와 결혼한 크리스틴은 라파예트 후작 부인인 셈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아키텐 백작이고 나도 대외적으로 후작 부인보다는 아키텐 백작이라고 부르니 여전히 저렇게 불리고 있다.

국민의회 의원들 중에서는 크리스틴이 나와 결혼하면 자연스럽게 정치활동이 줄어들거나 후작부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겠느냐고 기대하며 설레발치던 인간들도 있던 모양인데…….

저들에겐 유감스럽게도, 크리스틴은 그럴 생각이 없고 그녀가 원하는 게 곧 내가 원하는 것이니까 그럴 일은 없지.

“다음 안건인데,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 뭔가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자세한 사안은 알 수 없지만, 유사시에 대비할 필요성이 있겠군요.”

다음 안건을 꺼내든 건 모리스 탈레랑 총재였다.

“크흠, 섬의 악마 놈들…….”

“너무 두루뭉술한데, 좀 자세한 정보는 없습니까?”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대한 금수조치 중이고, 이건 중앙 대륙의 대부분 국가들도 그렇습니다. 저 해가 뜨지 않는 섬에 직접 발을 들일 것이 아니라면 단시간 내에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면 변화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겁니까?”

탈레랑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내게 시선을 돌렸다.

“아키텐 백작이 확인한 정보입니다. 출처는 아직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거래를 이어나가고 있는 마도 왕국 홀란트와 노던 연합 왕국. 최근 2년간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거래가 일시적으로 중단되더니 담당자가 바뀐다든지 하는 사태가 빈번한 모양입니다. 저들의 내부에서 무언가…….”

-정확한 사태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개편이 심해요. 아니, 개편이라기엔 이 정도 규모의 개편을 진행하면서 조직이 정상적으로 유지될 리가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대적이에요.

나는 크리스틴이 한 말을 상기하며 단어를 조금 고른 끝에 말했다.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 진행 중인 것 같습니다.”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라. 저 악마 놈들이 무언가 방침을 바꾸려는 것은 아닌가 우려되는구려.”

니콜라 브리소 총재가 탄식하듯 말했다.

솔직히, 나도 좀 우려되긴 한다.

크리스틴의 표현은 조직 개편 같은 온건한 단어가 아니었으니까.

-이건 개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대숙청이라고 부르는 쪽이 맞을 것 같네요.

어비스 코퍼레이션 내부의 대숙청이라.

크라프테와의 전쟁이 끝난 후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수상할 정도로 조용해서 크리스틴도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저들의 동태를 살피려고 애썼는데, 그 긴 침묵 끝에 간신히 파악한 정보가 그거라니.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건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 나와 가장 밀접하게 접촉했던 두 악마였다.

‘태만’ 슬로스 사의 대표이사, 파이몬.

‘색욕’ 러스트 사의 대표이사, 그레모리.

피처럼 붉은 머리칼과 금색으로 빛나는 머리칼의 대조만큼이나 완전히 달랐던 두 악마.

어비스 코퍼레이션 내부에서 제대로 환란이 일어나고 있나 본데, 그 둘은 어쩌고 있을지 모르겠군.

기대 같아서는 저주받을 파이몬 놈은 숙청당했기를 바라고, 그레모리는 가급적 무사하면 좋겠는데.

나는 그레모리와 첫 대면에서 ‘저거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지.’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과 이베리카의 드론들과 싸울 때 만났던 그레모리와의 괴리감을 실감하며 피식 웃었다.

살다 살다 내가 악마가 무사하기를 바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그레모리 정도면 악마답게 미쳐있긴 해도 대화가 가능은 하니까 좀 낫지.

그레모리와 접촉할 방법이 있다면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아니, 지나치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베리카 반도에서 그레모리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었고, 명백히 나를 처치할 기회를 그냥 놔주면서 신의를 지킨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쨌든 어비스 코퍼레이션 소속의 악마다. 내 신뢰를 사기 위한 수작이었을 가능성도 만에 하나를 위해 아주 배제해서는 안 되겠지.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 그 사이 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별 영양가 없는 답변을 해주던 탈레랑 총재가 나에게 말했다.

“아무튼,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동태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조사를 부탁합니다. 어쨌거나, 국민의회 입장에서도 국가 정보국 수장이기도 한 아키텐 백작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으니까요.”

“물론 아키텐 백작과 국가 정보국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전해주도록 하죠.”

“하하, 그럼 후작님만 믿지요. 아,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나는 탈레랑의 축하에 픽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총재.”

* * *

국민의회가 폐회된 후, 나는 말을 몰고 뤼미에르 시가지를 지나 저택으로 향했다.

새로운 저택은 수도 뤼미에르의 중심부가 아니라 조금 떨어진 외곽에 위치해 있다.

청기사가 호화롭고 거대하게 지은 남부의 라파예트 후작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도의 어지간한 저택은 압도하고도 남을 3층 건물은 제법 규모가 있다.

건물 앞에서 내려 시종에게 말을 건네주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배 나온 노인이 나를 반겨준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님!”

“듀몬트.”

로베르 드 듀몬트.

전 듀몬트 남작은 내가 결혼했는데도 여전히 수도에 눌러앉아서 저택의 집사를 자처하고 있다.

솔직히 고마운 사람이긴 하지만 내 입장에선 살짝 부담스러운데, 그래도 본인이 좋아서 한다는데 남부로 가라고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늘도 레온 도련님이 힘차게 걸음마를 하셨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우신지! 후작님을 닮아 아주 강건한 사내로 자라시겠지요!”

“어, 그, 그렇군…….”

솔직히 말하자면 듀몬트는 나보다 더 내 아들을 아끼는 팔불출이다.

누가 보면 듀몬트의 손자인 줄 알겠어…….

사실상 내가 그를 반쯤 아버지 비슷한 걸로 여기긴 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닌가.

“크리스틴은?”

“부인께서도 건강하십니다. 물론 플레르 아가씨도요! 하하!”

“그래, 늘 수고해 주어서 고맙네, 듀몬트.”

“하하, 제 기쁨입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후작님.”

“아아.”

듀몬트는 나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 물러갔다.

허리를 숙일 때마다 튀어나온 배가 출렁거리는 웃기는 할아버지.

내 집사를 하는 이상 내게 존대를 받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옛사람이면서도, 공화국에 가담하겠다던 내 결정을 지지해 준 고마운 사람.

나는 물러가는 듀몬트를 흘긋 본 다음, 방으로 들어섰다.

“크리스틴, 일어나 있습니까?”

“네. 일어나 있어요.”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나를 맞이하는 크리스틴에게 다가가,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오늘 하루 잘 지냈습니까?”

“누워서 쉬고만 있으려니 조금 지루했지만요. 일하고 싶어도 다들 너무 열심히 뜯어말려서.”

크리스틴은 슬며시 웃으며 답했다.

프랑지아 해군 제독이자, 이제는 더 이상 아키텐 상단의 산하 비밀 조직이 아니라 국가에 공인된 정보국의 수장. 동시에 국민의회의 중앙당 의원이면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경제계의 거물.

……그런 거물이 된 크리스틴이 중요한 국민의회 회기에 불참한 건 나 때문이지.

“역시 두 번째는 좀 힘들어요.”

“크흠.”

“이렇게 빠를 줄도 몰랐지만요.”

“미, 미안합니다.”

크리스틴은 짓궂게 웃더니 말했다.

“남편에게 너무 사랑받아도 문제네요.”

입으로는 저렇게 말하면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건 반칙이잖아.

신혼여행에서 얻은 아들인 레온, 그러고 바로 어제 낳은 딸 플레르까지.

어느새 아이를 둘이나 둔 어머니가 된 크리스틴은 꽃처럼 웃으며 말했다.

“어서 와요, 피에르.”

나도 마주 웃어주며 다시 한번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고 답했다.

“다녀왔습니다, 크리스틴.”

크리스틴은 부드럽게 웃었지만, 이내 표정을 고치며 입을 열었다.

“정보가 들어왔어요, 피에르.”

“……다 뜯어말려서 일은 못했다면서요?”

좀 쉬지, 그새 못 참고 또 일을 했어?

절로 불만스러운 시선을 보내자, 크리스틴은 슬며시 시선을 피하더니 답했다.

“보고받는 것 정도는 누워서도 할 수 있으니까요.”

“하아…….”

정보조직 관리자 아니랄까 봐, 눈에 쌍심지를 켜고 감시 중인 듀몬트를 잘도 피한단 말이지.

사실 저택을 굳이 규모가 있게, 수도 외곽에 위치한 것으로 구입한 건 다분히 크리스틴의 의향이 반영된 거였다.

경제와 정치, 군부의 거물인 우리는 손님을 맞이할 때도 좀 그럴듯한 격식을 차려야 하니까.

……이건 대외적인 이유고.

실제로는 저택이 크고 외곽일수록 비밀스럽게 정보조직을 운영하기가 용이해지니까, 라는 지극히 크리스틴다운 이유였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소식인가요?”

크리스틴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폭탄을 던졌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전쟁을 준비하는 것 같아요.”

“……설마, 프랑지아?”

크리스틴은 작게 고개를 내젓더니 답했다.

“아니요, 동방 제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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