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94화 (194/258)

194화. 그림자 평화 - 반혁명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크리스틴과의 여행도 결국은 끝이 났고, 우리는 뤼미에르에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크리스틴이 저택에서 여독을 푸는 사이 혁명군 사령부로 향했다.

아무래도 일주일 넘게 자리를 비운 참이니, 혹시나 급한 사안이 있는지 확인은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런데 내가 집무실에 거의 들어서자마자 방문한 자가 있었다.

“복귀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각 잡힌 군복과 또렷한 음성, 단정하게 빗어 내린 갈색의 단발머리.

나는 나에게 경례하는 부하의 모습을 보며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지젤 다비 중령?”

“옛, 라파예트 후작 각하! 지젤 다비입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뤼미에르 시가지를 뒤덮은 석양이 한창 기세를 부리고 있는 모습을 어떻게 봐도, 근무 시간은 끝난 것 같은데.

나는 다시 시선을 돌린 뒤,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물었다.

“중령, 오늘 당직인가?”

지젤 다비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후작 각하. 단지…….”

“단지?”

당직도 아닌 장교가 굳이 휴가 간 총사령관의 집무실에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등장한 이유가 뭐야? 당장 나는 공식적으로 오늘까지는 휴가인데.

그러나 지젤 다비의 입에서 흘러나온 답은 상상을 초월했다.

“오늘 여행에서 돌아오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께서는 보통 장기간 근무지를 비우셨을 경우 복귀하시면 집무실에 들러 긴급하게 파악해야 할 사안이 있는지 확인하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시리라 생각하고 미리 자료를 정리해둔 채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

그러니까, 내 행동 패턴을 분석해서 예측한 끝에 내가 집무실에 들를 거라고 예상해서 미리 준비를 갖춰두었다고.

누가 그럴 거라고도, 그러라고도 안 했는데 알아서.

이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조금 소름 돋는다고 해야 할지.

내 반응을 살피던 지젤 다비는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방해가 되었다면, 물러갈까요?”

사람의 행적을 토대로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괜찮은 재능이다. 그게 군사행동이 아닌 개인의 평소 습관을 토대로도 뽑혀져 나올 정도면 대단한 거지.

이런 것이 가능한 것 자체가 지젤 다비의 유능함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지만, 그걸 넘어선 집착에 가까운 근면함이 더 무섭다.

어째 데미앙 드 미르보가 지젤 다비에게 꽤 기대면서도 학을 떼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은데.

“……아니, 아니야. 도움이 되었네. 귀관은 정말 열성적이군. 하지만 다음부터는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내가 그녀에게 감찰부 일을 맡기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것까지 기대하진 않았어...

지젤 다비는 군말 없이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시정하겠습니다.”

“그래. 감찰부의 보고서는…….”

나는 내 책상에 놓인 보고서들을 슥 둘러본 후 쓴웃음을 지었다.

“미리 정리해두었군?”

“옛, 라파예트 후작 각하. 각 부서의 보고서를 부서 및 중요도 순으로 재정리해두었습니다. 제가 열람할 권한이 없는 보고서는 봉인된 채로 따로 빼두었으니 심려치 마시길.”

“하하…….”

확실히 이래두면 나야 굉장히 편해지지.

휴가 기간 중에 온 거라 당연히 내가 정리해서 파악해야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기대도 안 한 조력이라니.

나는 먼저 지젤 다비가 올렸을 감찰부의 보고서들을 살폈다.

역시나 미흡한 부분에 대해 철저히 파악하고, 그걸 어떻게 개선할지에 대한 제안사항까지 꼼꼼…….

아니, 꼼꼼을 넘어선 철두철미함으로 정리되어 있다.

다른 부서에서 올라온 서류들도 말한 대로 중요도에 따라 아주 잘 분리되어 있고.

나는 슬며시 웃었다.

“훌륭하군, 중령. 덕분에 내가 일할 시간이 반은 줄겠어.”

“감사합니다.”

지젤 다비는 답하면서도 약간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하여간, 재미있단 말이지.

확실히 큰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상관에게 아부하기 위한 행동이라기엔 살짝 너무 나갔다.

나름 긴장하고 있는 걸 보면 자기도 그런 줄 알고도 저러는 건데, 여러모로 특이한 타입이야.

“고맙네. 감찰부의 보고서는 내가 검토해서 조치하도록 하지. 아, 혹시 필요한 사안 있나? 업무 외적이어도 상관없어.”

기왕 이렇게까지 해주었으니 뭐 필요한 거라도 있는지 물어본 질문에, 지젤 다비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는 산뜻한 얼굴로 답했다.

“아니요, 별도로는 없습니다, 후작 각하. 아, 여행은 즐거우셨는지요?”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지냈지.”

그러고 보니, 지젤 다비는…….

나는 지젤 다비의 표정을 살폈지만, 순수하게 상관에 대한 경의만이 보이는 얼굴에 별다른 의도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나도 업무 외적인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 중령?”

“물론입니다, 후작 각하! 어떤 질문이시리라도 가능한 상세하게 답하겠습니다!”

나는 지젤 다비의 과잉 충성에 픽 웃으며 물었다.

“결혼식 날, 크리스틴과 만났지?”

“아, 옛.”

지젤 다비도 당연히 내 결혼식이 참석했다.

다른 부하들과 함께 참석해서 나하고는 거의 말 몇 마디 나누고 들어갔지만, 확실하게 크리스틴과도 만났던 것으로 알고 있다.

크리스틴과 지젤 다비의 관계를 알고, 또 지젤 다비가 엘렌 다비에 대해 알게 된 시점에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무척 궁금했는데...

정작 크리스틴은 지젤 다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안 했다.

크리스틴에게도 굳이 묻지 않았는데, 지젤 다비에게 캐묻는 건 더 이상하지.

그래서 나는 다르게 물었다.

“……귀관은 그걸로 충분한가?”

지젤 다비는 잠시 침묵했지만, 이내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후작 각하. 저는 이걸로 충분합니다.”

나도 마주 웃었다.

“그래, 고맙네. 이만 물러가도 좋아. 내 지원이 필요한 사안이 있다면 언제라도 말하도록.”

“감사합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그러면,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지젤 다비는 나에게 경례를 한 후 그대로 등을 돌려 집무실을 나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란 가스통, 루이 드제, 알렉상드르 베르테르, 제롬 모렐, 니콜라 네, 그 외에도 많은 혁명군의 부하들.

……예포 사태로 감봉 처먹은 데미앙 드 미르보까지.

모두가 처음부터 내 부하들은 아니었다. 일부는 적이기도 했고, 지젤처럼 원한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여기까지 나를 도와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주었고, 결혼식에도 참석해서 말뿐이 아니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지.

나는 픽 웃으며, 내 책상 위에 쌓여있는 서류더미로 시선을 내렸다.

자, 그럼 충분히 놀았으니 일해야지.

나를 지금까지 도와준,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위해.

* * *

겨울의 추위 속에서 만물의 생명이 새로 피어나는 봄이 지나가고, 생명이 무르익는 여름이 도래했다.

그럼에도, 계절 따위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거의 비슷한 날씨를 유지하는 곳도 있다.

언제나처럼 자욱하고 탁한 안개로 뒤덮여, 햇빛 한 줄기조차 들어오지 못하는 불온한 하늘 아래 위치한 대지.

영원히 해가 뜨지 않는 섬, 어비스 코퍼레이션.

한때는 마왕의 통치 아래 전 대륙을 공포로 물들이던 국가 판데모니움을 계승한 국가지만, 7개의 기업이 통치하는 땅에 전신이 된 국가의 흔적은 거의 남지 않았다.

유이하게 남은 옛 국가의 잔재 중 하나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그대로 계승한 수도의 이름, 판데모니움.

그리고 다른 하나는 판데모니움의 멸망 후 지난 사백 년간 바엘의 갑주를 장식하고 있던, 반으로 쪼개져버린 마왕의 관이었다.

그렇기에 사백 년 동안 존재했고, 다시 사백 년을 이어갈 것 같던 그것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을 때 모든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대표 이사들은 자연스럽게 그 변화를 알아챘다.

그럼에도 다들 곁눈질로 허전해진 바엘의 어깨를 바라볼 뿐, 그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군. 그러면, 어비스 코퍼레이션 정례 회의를 시작한다. 각 사 대표이사들은 정례 보고를 하도록.”

심지어 그 변화를 일으킨 바엘, 본인조차도.

자연스럽게 언제나와 같은 정례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라스 사는 특별히 문제없음! 전쟁 허가는 언제임? 동방 제국이든, 어디든 라스 사의 직원들은 전쟁을 갈망함!”

그러나 언제나처럼 7개사 대표들의 결정에 의해 전쟁을 기각한다는 선언은 나오지 않았다.

바엘은 침묵했고, 바르바토스의 의아한 시선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여전히 병나발을 불던 폭식, 글러트니 사의 살레오스가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킬킬, 사백 년 이어진 전쟁 타령이 슬슬 지겨우신가 보지.”

“부- 부- 라스 사는 글러트니 사의 일이나 잘 할 것을 요청함!”

살레오스는 코웃음을 치곤 다시 입을 열었다.

“글러트니 사는 문제가 있소, 바엘. 아편 대금으로 인간을 판매하던 동방 제국 지주들이 대거 처형당했고, 차르의 이름으로 금수조치가 떨어졌거든. 아편 재고가 막대한데, 조치가 필요하다오.”

“흠.”

그럼에도 바엘이 팔짱을 낀 채 별말을 하지 않자, 이번에는 탐욕, 그리드 사의 바싸고가 입을 열었다.

“중앙 대륙도 상황은 마찬가지요. 프랑지아는 말 할 것도 없고, 최대 고객인 게르마니아 제국부터가 금수조치에, 나머지 인간 국가들도 프랑지아가 알프스 왕국과의 중계무역을 진행하면서 무기 수출량은 역대 최저치더군. 아예 상실해버린 이베리카는 뭐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고.”

바싸고는 손으로 안경을 추워 올리더니,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렇게까지 말하게 되어 유감이지만, 그리드 사가 크라프테에서 수십 년에 걸쳐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이득을 창출하는 동안 프라이드 사는 대체 뭘 한 거요? 뭘 했기에 사백 년 이어진 번영이 불과 십여 년 만에 이렇게까지 추락할 수가 있지?”

바엘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대륙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고, 프라이드 사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기존 전략으로는 변화한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전략의 수정을 제안하도록 하지.”

“호오, 무슨 전략이오?”

바엘은 간단하게 답했다.

“전쟁.”

“전쟁? 라스 사는 찬성! 대찬성임!”

바로 반색하는 바르바토스와 달리, 나머지 대다수의 대표이사들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바엘, 친애하는 대악마. 마왕을 처단한 용사여,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오? 그러지 않아도 대륙으로부터 고립된 상황에 전쟁을 벌이겠다니?”

“기존의 전략을 고수했을 때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장기적으로 감당해야 할 손실에 비해, 지금 전쟁을 통해 대륙의 역량을 꺾어두는데 드는 비용이 더 적다고 판단했다.”

“그건 프라이드 사나 라스 사의 입장이겠지. 나머지 회사들은 대륙에 투자한 기반이 아직도 많소. 그걸 전부 손실하면 피해는 천문학적인데, 어비스 코퍼레이션이란 이름으로 나머지 회사들의 손실을 감당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질투, 엔비 사의 대표이사 보티스가 비난조로 떠들고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대표이사들은 반사적으로 바엘의 기색을 살폈지만,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별다른 답이 없었다.

마침내, 바싸고가 입을 열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사백 년간 지켜온 우위를 단숨에 잃어버린 것은 지난 10여 년간 프라이드 사가 추진한 전략이 전면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이오. 이에 따라...”

바싸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마왕을 처치하고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생겨난 이래, 7개 사의 대표이사가 바뀐 적이 없지는 않았다.

악마들은 근본이 경쟁적인 자들이고, 여차하면 상대를 몰아내는 것을 즐겼으니까.

그럼에도 바엘만은 지금껏 단 한 번의 도전도 받지 않았다. 상징으로도, 힘으로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지금이라면.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대전략을 담당해야 하는 프라이드 사가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지금, 그리드 사는 프라이드 사의 대표이사를 교체해야 한다고 건의하는 바요.”

“부- 부- 바르바토스는 전쟁하겠다는 바엘을 지지하는 바임!”

“글러트니 사의 대표이사로서, 살레오스는 찬성을 표하오.”

2표.

바엘의 정책에 반대해온 그레모리는 평소의 깐죽거리던 성격이 무색하게 표정을 굳힌 채 침묵하고 있다.

바싸고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런다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엔비 사의 보티스도 찬성을 표하지!”

3표.

바싸고는 반쯤 희열에 찼다.

말로는 7개 사의 대표이사 회의가 통치한다지만, 바엘은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암묵적인 왕이었다.

그러나 그랬던 자가 왕이 아니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가 크라프테에서 잠입 요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새로운 권력자는 제 발로 자멸했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놓치기엔, 악마들은 사백년 간 군림해온 그에게 충분한 싫증을 내고 있었다.

인간의 땅을 전전하면서까지 새로운 것과 기회를 찾아 헤맨 탐욕,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연이은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실패 속에서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슬로스 사의 프로네우스도 찬성을 표합니다.”

궁지에 몰린 파이몬을 비난하고 사내 불화를 조장하며 엔비 사와 글러트니 사의 지원을 받아 슬로스 사의 대표이사를 꿰찬 악마의 지지까지, 총 7개 사 중 4표.

바싸고는 회심의 미소를 흘리며 지금껏 보지 못한, 다시는 없을 ‘왕’의 몰락을 선언했다.

“그렇게 되었소, 바엘. 유감이지만-”

그러나 그의 선언이 끝나기도 전에, 바엘이 말없이 등에 손을 뻗어 그대로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대표이사들은 그에 반응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 지금껏 숱한 대표이사들의 축출에 표를 던져온 자가 자기 차례가 되니 받아들이지 못하겠나 보지?”

“어비스 코퍼레이션 사칙 제1조 3항! 어비스 코퍼레이션 구성원 간의 모든 수단의 분쟁을 금지한다! 바엘, 그 검을 뽑는 순간 네놈은 반역자다!”

바엘은 픽 웃으며 검을 뽑고 입을 열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사칙 제1조 3항. 그걸 누가 만들었지?”

섬뜩한 검날의 빛에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바엘이 덧붙였다.

“내가 만들었다. 마왕의 시체 위에서, 마왕의 구체제와는 다른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그대들에게 베풀었다. 헌데, 사백 년이 길기는 길군. 버러지들이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게 되다니.”

바엘이 반발할 가능성은 염두에 두었지만, 수적 열세에서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라서 굳어 있는 대표이사들 앞에서.

“어비스 코퍼레이션 사칙 제1조 3항. 어비스 코퍼레이션 구성원 간의 모든 수단의 분쟁을 금지한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직, 간접적인 위협을 가한 경우를 제외하고.”

바엘이 오만하게 선언했다.

“네놈들은 감히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위협하고 있으니, 긍지, ‘프라이드’를 대표하여 그대들에게 베푼 권한을 회수하도록 하지.”

“허, 마왕을 처치한 용사가 타락하는 꼴이 우습군! ‘프라이드’사가 강하다고 한들 단독으로 4개 사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소?”

“단독으로 전쟁?”

바엘은 픽 웃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대표이사 회의실의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무수한 인형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이건, 드론……!”

“뭣? 폐기했던 것이-”

바싸고와 살레오스, 보티스와 프로네우스가 달려드는 드론들을 저지하며 당황하고 있는 사이, 짐짓 쾌활한 목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안녕하신지, 안녕하신지, 정말 완벽하게 완벽한 날입니다. 아주 오랜만에 여러분을 뵙자니 반갑기 그지없군요.”

“파이몬-!”

피처럼 붉은 머리칼의 악마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선언했다.

“그러면 모두, 열등한 인형들의 손에 비참하게 찢겨죽으시길.”

“이익-!”

난장판이 되어버린 회의장에서, 바엘은 바르바토스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지지는 변함없나, 바르바토스.”

바르바토스는 손으로 권총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고쳐 잡더니, 히죽 웃었다.

“바르바토스는 전쟁한다면 좋음. 바엘을 지지하는 바임!”

“그러면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감히 반기를 든 반역자들과의 교전을 허가하지, 바르바토스.”

“하하핫-!”

바르바토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뛰쳐나가, 드론의 파도를 힘겹게 버티고 있던 네 명의 대표이사에게 뛰어들었다.

욕설과 비명이 터져 나오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엘은 지금껏 딱딱한 얼굴로 자신의 자리에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레모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왕의 구체제가 실패했기에, 나는 저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제각각의 얄팍한 이득만을 쫓느라 분열된 집단에 불과했지. 그렇다면 쓸어내리는 수밖에. 그레모리, 네 침투력과 신중함은 높이 평가한다. 선택은?”

그레모리는 드론들에게 찢기고 바르바토스의 총탄 세례에 벌집이 되어 쓰러지는 대표이사들을 바라보더니, 입술을 파르르 떨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항복할게요, 바엘.”

“후…….”

바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망토 속으로 손을 넣어-다시금 온전해진 마왕의 관을 꺼내 들었다.

“내가 과거 그대들을 이끌고 마왕을 처치했듯.”

그러고는 천천히, 그것을 그의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씌웠다.

“이제 내가 다시 그대들을 이끌겠다.”

마왕의 관을 쓴 바엘은 그의 앞에서 예를 갖추는 이들의 앞에서-

“앞으로 불과 수십 년이면 대륙과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기술 격차가 따라잡힐 터다. 따라서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프라이드’ 교만 그 자체로서 선언했다.

“그 전에 대륙의 성장역량을 철저히 파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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