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그림자 평화 - 목표
귓가에 은은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
그리고 소금기를 살짝 머금은 따뜻한 바람이 뺨을 간질인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뜨면 눈앞에 흐드러지게 펼쳐져 있는 검은 머리칼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 무척이나 기꺼워서,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나는 맨 어깨를 드러낸 채 자고 있는 크리스틴이 혹시라도 감기에 걸릴까 봐 이불로 덮어준 후, 먼저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면 드넓게 펼쳐진 수평선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은 프랑지아 남서부, 아키텐 지방에 마련해둔 별장이다.
우리가 여행지로 고른 곳인데, 이 해안가 풍경만큼은 매일 아침마다 봤는데도 질리지 않는다.
봄이 거의 끝나 여름이 눈앞까지 다가왔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덥다기보다 따뜻하다는 느낌의 날씨도 무척 마음에 들고.
자고 일어나서 찌뿌둥한 몸을 적당히 풀어주고 다시 들어가 간단하게 아침을 준비하고 있자, 다 끝나갈 때쯤 타박타박하고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크리스틴이 멍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초점이 약간 맞지 않던 검은 눈동자에 천천히 생기가 돌아오고, 그녀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자리하는 짧은 시간.
그 짧으면서도 느릿한 시간이 벅차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감을 느끼고 있자, 크리스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피에르.”
“좋은 아침입니다, 크리스틴.”
그제야 비로소 평소의 페이스로 돌아온 크리스틴은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와 식탁에 앉았다.
……드레스차림이 아니라 맨발에 슬리퍼만 신은 슈미즈 차림으로도 저러는 건 저것대로 묘하지만, 아무래도 그녀에겐 그냥 무의식중에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인 것 같다.
내가 빵을 잘라내고 씻어낸 채소를 안에 채워 넣은 뒤 소스를 바르고 있자, 잠자코 보고 있던 크리스틴이 조금 민망해하며 말했다.
“결국 저보다 당신이 더 많이 준비하네요.”
나는 다 만든 요리를 그녀의 앞에 가져다주며 답했다.
“하하, 습관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나야 전장에서 구르면서 직접 식사를 준비해야만 할 일도 많았고, 마찬가지 이유로 일찍 일어나는 일이 많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내 실력은 흔한 야전 취사병 수준에 지나지 않고 회귀 후에는 그 정도로 궁한 상황에 몰릴 일이 자주 있진 않았지만, 어쨌든 식사 거르는 걸 습관적으로 해온 크리스틴에 비할 바는 아니다.
“게다가 저는 당신이 그런 노력을 기울이며 저를 위해 준비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요.”
크리스틴은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별말 없이 빵을 베어 물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또 귀여워서 빤히 보고 있자 그녀가 얼굴을 슬며시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너무 빤히 보지 말아요, 피에르.”
“하하하…….”
여행하는 동안에는 단둘이만 시간을 보낼 생각으로 사용인 없이 별장에 머무르기로 했는데, 충격적이게도 크리스틴이 나를 위해 식사를 준비해 주겠다는 소리를 했었다.
먹는 분야에 있어서의 크리스틴은 사용인이 챙겨주는 식사도 귀찮아서 거를 정도로 게으를 텐데.
오죽하면 집사가 나에게 하소연할 정도였으니, 그걸 잘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녀가 정찬을 준비해 주는 걸 보고 거의 충격과 공포를 느꼈는데…….
더 놀라운 건 크리스틴이 준비해 준 식사가 제법 그럴듯했다는 거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가 한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녀에게 보낸 의심의 눈초리가 부끄러울 만큼.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했더니, 결혼식을 준비하는 기간에 틈틈이 사용인들에게 배우셨단다.
아무리 내가 전문적으로 요리를 배운 건 아니라지만, 장장 20년을 전장에서 구르면서 익힌 것보다 그녀가 자투리 시간 쪼개서 두 달쯤 배운 요리가 더 맛있다니.
불합리한 천재의 재능이라는 것이 요리에까지 통용될 줄은.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식사 챙겨 먹는 것도 귀찮아하던 크리스틴이 오직 나에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요리를 배웠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어서, 첫 이틀간은 그녀가 해주는 식사만 먹었다.
문제는 사랑하는 아내가 이상한 쪽에서 허술하다는 걸 간과했다는 거였다.
내가 연신 맛있다고 해주자 크리스틴은 무척 기뻐하더니, 아침 식사에도 정찬을 준비해 주겠다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장장 두세 시간을 써서 식사를 준비하려고 들었다.
고맙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아침은 간단한 걸로 먹어도 된다고 했더니, 크리스틴의 답이 걸작이었다.
-……그런 건 아직 못 배워서.
간단한 요리도 모르면서 어려운 요리는 배운 걸 그대로 기억해서 재현할 수 있는 천재의 두뇌에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요리를 감각이 아니라 정보로 처리하는 그녀에게 어이가 없어야 할지.
반쯤 질려서 그러면 아침은 내가 준비해 주겠다고 했더니, 크리스틴은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혹시, 제가 준비한 식사는 맛이 없었나요?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녀가 미안함과 실망감이 완연한 얼굴로 물어왔을 때, 정작 나는 기쁨을 참느라 힘들었다.
크리스틴이 워낙 간단하게 익혔다는 투로 말해서 그냥 천재라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이러는 걸 보니 그녀가 얼마나 고생하며 노력했고 내가 맛있다고 해줬을 때 얼마나 뿌듯해했는지가 너무 잘 보여서.
누가 이 사람을 피도 눈물도 없는 아키텐의 검은 마녀라느니, 그런 식으로 함부로 부르나.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구만.
내가 그때 당황하던 크리스틴의 오해를 풀어주고서야 안도하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피식 웃고 있자, 크리스틴이 슬며시 눈을 흘겼다.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그렇게 웃고만 계세요?”
“당신이 귀엽다는 생각이요, 크리스틴.”
크리스틴은 입을 벌렸다가 닫더니, 무언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이내 포기한 듯 다시 빵을 먹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것대로 귀엽게 느껴져서,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예전에 크리스틴이 내가 당황하는 모습이 퍽 보기 좋다고 했는데, 어째 나도 좀 그런 것 같아서 큰일이야.
식사를 끝마친 후.
마주 앉아 함께 커피를 마시던 크리스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벌써 6일째네요.”
그녀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짙게 묻어 나와서, 나는 슬며시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요. 시간이 너무 빠른데.”
그리곤 크리스틴의 손을 잡아당겨,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못내 아쉬운 감정을 담아 일부러 천천히.
검지, 중지, 약지, 소지까지.
더없이 소중히 시간을 들이며 손가락마다 한 번씩 입을 맞추고 올려다보자, 크리스틴이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그냥 쭉 이러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지도요.”
“하하하.”
확실히 그것도 제법 행복할 것 같지만.
그래도 우리 둘 모두 그러지는 않겠지.
일주일.
짧은 여행 동안 단둘이서 보낸 시간은 꿈같이 행복했지만, 계속 이렇게 시간을 보내기엔 맡은 역할이 좀 커서.
뤼미에르로 돌아가야지.
다른 이들을 포기한 채 우리 둘만이 살아남는 길 대신 함께 가기로 선택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에게로.
나는 잠시 크리스틴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생각은 충분히 해봤어요?”
크리스틴은 슬며시 미소 짓더니, 조금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충분하진 않은 것 같은데요. 누군가가 좀처럼 놔주질 않으셔서.”
“저런, 그건 미안합니다.”
……아니, 근데 생각해 보면 처음에나 힘들어했지 나중엔 그녀도 만만치 않게-내가 엄한 생각을 하고 있자, 크리스틴이 입을 열었다.
“성년이 되기 전에, 루이스에게 물은 적이 있어요.”
“음? 뭘요?”
“만약 아키텐 상단을 운영한다면, 어떤 식으로 하고 싶냐고요.”
“하하, 짓궂으시군요.”
모르긴 몰라도 그 질문을 받은 루이스는 꽤나 고민해야 했을 텐데.
크리스틴은 슬며시 웃더니 답했다.
“기왕 돈 벌어서 쓰는 거, 좀 좋게 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루이스답군요.”
내가 간단하게 답하자, 크리스틴이 슬며시 웃더니 물었다.
“피에르. 처음부터 루이스가 아키텐을 받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죠?”
“확신은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죠. 아, 그래도 아키텐이 없어도 크리스틴 당신이면 충분하다는 건 진심이었습니다. 그건 믿어주세요.”
크리스틴은 얌전히 내 품에 등을 기대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녀의 체온을 느끼는 사이 기분 좋은 침묵이 흐르고.
“그때는 아이다운 순진한 생각이라고 여겼는데…….”
크리스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것이 목표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악마처럼 벌어서 만든 상단이니, 천사처럼 쓰는 것도.”
“악마처럼 벌어서 천사처럼 쓴다라, 하하. 자선사업이라도 늘려보시려는 겁니까?”
내가 크리스틴을 등 뒤에서 끌어안으며 묻자, 크리스틴은 내 손을 잡아 아까 내가 한 걸 따라하듯 손가락마다 천천히 입을 맞추더니 답했다.
“그것 외에도 이것저것 생각은 있어요. ……지금껏 악명은 충분히 샀으니까요.”
나는 슬며시 웃었다.
아키텐의 검은 마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지만, 동시에 그만한 경외와 공포가 담긴 별명이기도 하다.
반쯤은 크리스틴이 의도적으로 구축한 이미지이기도 하지.
그런 이미지가 배후에서 암약하는 그녀의 활동에 제법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차피 루이스에게 아키텐을 물려줄 거라면, 굳이 번거로운 이미지 관리 따위 하느니 차라리 악명을 이용할 만큼 한 뒤 그녀가 그 악명을 끌어안은 채 물러나 주겠다는 의도였을 테니까.
“재미있네요. 물론 저는 당신을 존중하지만, 그런 심경의 변화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크리스틴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제법 잘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크리스틴은 세간에서 생각하는 만큼 악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필요한 만큼은 충분히 이기적이다.
그런데 그런 크리스틴이 신혼여행 겸, 잃어버린 그녀의 삶의 목표를 고민해 보자고 온 곳에서 에리스나 꿈꿀 법한 목표를 세울 줄은 몰랐다.
크리스틴도 내가 대충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겠다는 듯이 낮게 웃더니, 내 품에 조금 더 파고들곤 고개를 들어 나와 마주 보았다.
잠시 말이 없던 크리스틴이 미소 지으며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젠 혼자가 아니니까요. 존경받는 혁명군의 총사령관님, 제 사랑하는 남편.”
나까지 악명을 뒤집어쓸까 걱정해 준 건가? 고맙기도 하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춘 뒤 답했다.
“마음은 무척 기쁘지만, 당신의 인생 목표는 당신을 위한 것이었으면 더 좋겠는데요, 부인.”
“저를 위한 거기도 해요. 왜냐하면…….”
말하던 크리스틴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응? 크리스틴?”
어째 귀가 발개져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크리스틴이 작게 말했다.
“아이를 가진다면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저를 자랑스러워하며 자랄 수 있게 해주고 싶어서.”
일찍 어머니를 잃고, 사랑받지 못한 채 자란 딸.
대신 가족으로 대해주었지만 아들만을 끔찍이 여겼던 루이스의 어머니에게 배신당해, 적으로 돌려야만 했던 그녀가 한 말이라서.
나는 차마 무어라고 해줄 수 없어서, 그녀를 꼭 안아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크리스틴은 내게 몸을 기대고 있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위로해 주지 않아도 돼요, 피에르. 대신, 사랑해 주세요.”
누구보다 냉철한 척 하지만, 사실은 정에 굶주린 사람의 호소에 답했다.
“……얼마든지요.”
그녀가 부모님에게 받지 못한 몫까지, 내가 기꺼이 다 채워줄 테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크리스틴이 몸을 빙글 돌리더니, 내 목에 팔을 감으며 속삭였다.
“그러면 목표는 세웠으니까, 실행해야겠죠?”
실행해? 뭘?
아.
……아이?
“그건, 모르긴 몰라도 아마-”
벌써 생기지 않았을까?
우리 잠깐 경치 구경하거나 밥 먹는 거 말곤 거의 여행 내내 별장에 틀어박혀서-그러자 크리스틴은 진하게 웃더니 답했다.
“훌륭한 지휘관이라면, 만에 하나의 변수조차 최소화해야죠. 아닌가요, 사령관님?”
그것참…….
“……지당하십니다, 제독님.”
아무래도, 마지막 날까지 어김없이 야간 작전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