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92화 (192/258)

192화. 그림자 평화 - 결혼식

결혼식을 준비하는 두 달간,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야 했다.

전시라는 특수성에 힘입어 비대하게 확대된 군 조직을 대대적으로 정리 및 개편하는 작업이 필요했고, 평시에도 군대가 기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관리체계를 만드는데 또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당장은 전쟁에서 이겨야 하니 상황에 기대서 급조된 조직을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던 혁명군의 체계를 아예 새로 정립하는 일이니 쉬울 리가 없었다.

최후의 봉건국가였던 프랑지아 왕국에서 국가군 규모의 군대가 제대로 운영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모든 걸 만들어내야 했던 거다.

사실 있었더라도 혁명으로 쓸려나가며 없던 것이 되었겠지만.

망할 미르보 놈을 비롯해서 전쟁 다 끝나자마자 왜 이렇게까지 빡세게 조직을 재편해야 하냐고 생각하는 자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럼 언제 할까.

또 전쟁 터지면 전쟁 중에 할까?

게다가 총사령관이자 의원인 나로서는 국민의회에게 군이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보여줄 필요성이 있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의 혁명군은 정치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에 지나친 관심을 보여도 문제지만 아무튼 예산은 타내야지.

제국, 크라프테와의 연전을 치를 때처럼 국민의회의 예산 대부분이 전비로 나가는 미친 상황을 계속 이어가는 건 문제지만, 전쟁이 끝났다고 너무 줄여버려도 문제다.

정리할 건 정리하더라도 긴 전쟁으로 거르고 걸러진 우수한 인선과 정예군은 남겨놔야지. 처음 혁명군이 보여주던 꼬락서니를 생각하면 전쟁 때마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사태는 사절이다.

재미있게도, 육군에서 대폭 줄어든 예산은 국가 운영과 개혁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금액이 해군으로 넘어갔다.

동방 제국, 그리고 이베리카 형제국과 교역 중인 유일한 국가라는 이점을 살리기 위해서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당장 대륙에서의 적국이 명확해지지 않은 지금 국민의회의 눈은 자연히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악마들에게로 향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혁명부터가 루이 왕이 프랑지아의 국민들을 악마들에게 팔아치우다가 터진 것이니, 프랑지아 국민들의 악마들에 대한 반감은 상당하다.

오죽하면 내가 대낮에 의원들을 참살하고 다녔는데도 그들이 악마들의 도구를 이용해서 시가지에서 테러를 했다는 이유로 오히려 나를 좋게 보는 시민들도 적지 않을 지경이었을까.

그런 이유로, 타국의 해상 봉쇄에 대응하기 위해 시작한 프랑지아 해군은 이제는 확실하게 국민의회의 지지를 받으며 상당한 기대와 투자를 받는 중이었다.

그 해군의 책임자가 다름 아닌 크리스틴이니만큼 예산 운용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없을 테지만, 잠정적 상대가 다름 아닌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해군이니만큼 그녀도 갈 길이 멀다.

문제라면,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수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건데…….

이건 뭐 저놈들의 안개로 뒤덮인 섬에 들어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겠지.

* * *

나는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통 결혼식은 교회에서 하지만 규모가 있다 보니 야외에서 진행하기로 했는데, 운 좋게 날씨가 좋군.

“크흡, 드디어……! 이제는 유리아 아가씨를 뵈어도 부끄럽지가 않겠습니다.”

“아직은 살 날이 많이 남으셨을 텐데 벌써부터 그런 말씀을.”

나는 눈물을 짜는 듀몬트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나 크리스틴이나 워낙 바빠서 정작 결혼식 준비는 듀몬트를 비롯해 다른 이들에게 맡기다시피 해야 했지만, 그래도 시간은 잘만 흐르고 결국은 이날이 왔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덕분에 차질 없이 진행되었군요.”

그의 역할이 커서 감사를 표하자, 듀몬트는 수도에 올라와서 본 뒤로 좀 들어간 배를 출렁이며 가슴을 두들기고 답했다.

“제 기쁨이지요, 후작님!”

……들어갈 줄 모르던 그 뱃살이 줄다니, 두 달간 대체 얼마나 고생한 거야.

나와 잠시 담소를 나눈 듀몬트가 들어가자마자, 등 뒤에서 혀에 기름칠한 것 같은 인사가 날아들었다.

“날씨가 아주 화창한 것이 신께서도 두 분의 결혼을 축하하는 것 같군요! 축하합니다, 라파예트 후작!”

누군지는 얼굴 안 봐도 알겠구만.

“탈레랑 총재님, 의원님들.”

“축하합니다, 라파예트 후작.”

“신수가 훤하시구려, 허허.”

나는 모리스 탈레랑 총재, 그리고 혁명당의 의원 몇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흠…….

급진파의 의원들을 뤼미에르 시가지 한복판에서 참살한 것이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그게 벌써 수년 전이다.

이들에게 내 결혼을 축하받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지.

혁명당의 의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머쓱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후작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하하, 저도 몰랐습니다.”

나와 크리스틴이 국민의회와 처음 손을 잡을 때만 해도, 우리 관계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보긴 어려웠으니까.

오히려 빌미만 있으면 숙청하고 싶어 하는 적대관계였지. 그에 비하면 지금은 그래도 가끔은 협력도 하는 관계가 되었으니, 실로 많은 것이 변했다.

“시대는 언제나 물처럼 흐르지요. 시대가 변하면 사람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면 관계도 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과거를 고집하지 않고 제때 변했기에 평화의 시대에 서로 축하를 주고받을 수 있는 거겠지요!”

탈레랑이 언제나처럼 능란하게 떠들어서, 나는 픽 웃으며 그에게 답해주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크리스틴이 말하길, 탈레랑이 자기 입으로 우리를 적대하지 않은 것이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했다지?

탈레랑이 자신이 한 그 말을 상기한 건지 어땠는지야 모르겠지만, 그는 히죽 웃으며 의원들과 함께 다시 한번 나에게 축하해 주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축하하오, 라파예트 후작.”

탈레랑과는 대조적으로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

“브리소 총재님,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탈레랑이 혁명당의 의원들을 몰고 다니던 것과 달리, 혼자 조용히 온 중앙당 총재 니콜라 브리소는 싱긋 웃었다.

“옷 잘 어울리는구려.”

“하하, 감사합니다.”

니콜라 브리소는 나와 악수한 후, 가만히 나를 보더니 슬며시 웃었다.

“고맙소.”

“예?”

결혼식에 와줘서 내가 고마워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브리소는 가만히 나를 보더니 웃었다.

“우리는 참 먼 길을 왔고, 다사다난했지. 그래도 지금 이 자리에서 제2신분, 제3신분 할 것 없이 함께 웃고 떠들며 축하하는 광경을 보여주어서, 이 노인네가 편안한 마음으로 축하할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소.”

나도 그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총재님. 국민의회와 우리의 시작은 총재님께서 만들어주셨으니까요.”

비록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를 달고 오는 사태를 만들었고, 그의 말대로 여기까지 오는 길이야 정말 다사다난했지만...

그는 결정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만한 자료를 얻고도 나를 신임해주었고, 그 결과 우리는 여기까지 함께 올 수 있었다.

“이런 자리를 보여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니콜라 브리소는 싱긋 웃더니 축하한다며 내 어깨를 툭툭 쳐주곤 그대로 들어갔다.

자, 그럼 대충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은데.

마지막 귀빈도 대충 맞춰서 오겠군.

그러기가 무섭게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고, 대놓고 기다리느라 지루했다는 얼굴로 들어오는 사람을 본 나는 슬며시 웃으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여왕 폐하.”

“정말,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길고도 길었다고요. 왜 여왕은 먼저 입장하면 안 된다는 거람.”

에리스가 칭얼대듯이 말해서, 나도 슬며시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요, 폐하. 정말 길고도 길었습니다.”

* * *

식이 시작되고.

나는 나에게로 다가오는 크리스틴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늘 장식이 없는, 상복과도 같은 검은색 일색의 드레스만을 입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화려하게 수놓아진 문양과 장식의 드레스가 자칫하면 미모를 잡아먹을 법도 한데, 크리스틴의 새하얀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의 강렬한 대조는 드레스에게 잡아먹히긴커녕 오히려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래서 끝까지 안 보여준 건가.

“……노, 놀랐군요.”

크리스틴이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올 줄은 몰랐기에 얼떨떨하게 말하자, 정작 크리스틴도 고운 아미를 슬며시 찌푸리더니 작게 답했다.

“제 취향은 아니에요.”

“그, 그래요?”

“여왕 폐하께서 골라주신 옷이에요.”

“엥?”

그 에리스가?

옷이 조금만 불편하면 질색하는 그 에리스가?

이렇게 화려하고 척 보기에도 혼자서는 움직이기도 힘들 것 같은 웨딩드레스를 골라줬다고?

그러자 크리스틴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답했다.

“직접 입긴 싫지만 입은 모습은 보고 싶다던데.”

하, 그것참 그 장난꾸러기 여왕 폐하다운 폭거네.

“그래도, 아름답습니다. ……정말로.”

순수하게 진심을 담아서 말하자, 크리스틴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피에르, 당신도-”

“커흠, 커흠.”

나는 그제야 앙쥬 백작의 존재를 눈치챘다.

아, 맞아.

가족이라곤 루이스 밖에 안 남은 크리스틴을 위해 앙쥬 백작이 대신 아버지 역할을 해주러 나왔지.

크리스틴이 너무 강렬해서 옆에 있는 줄도 몰랐네.

“아, 죄송합니다, 백작님.”

“그것참…… 뭐, 젊음이 좋긴 좋구려. 이 노인네도 참 눈치도 없었지. 이렇게 티가 나는데 두 분의 면전에서 아키텐 백작이 탐이 난다는 소릴 했으니.”

내전 중 국민의회와 손을 잡겠다는 이야기를 처음 꺼냈던 때의 이야기를 말하는 건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그게 벌써 오래전이어서, 나는 픽 웃으며 답했다.

“그것도 다 추억이군요.”

에리스를 미리 확보해두려고 역병이 돌 때 남부로 내려갔다가 얽힌 인연으로 여기까지 같이 왔으니.

앙쥬 백작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이내 헛웃음을 흘리곤 그가 잡고 있던 크리스틴의 손을 건네주었다.

“뭐, 축하드리오. 그리고 거 중앙당도 좀 챙겨주시오. 누가 보면 두 분이 다른 당인 줄 알겠어!”

“하하, 가급적 선처하도록 하죠.”

보장은 못 해드리고, 가급적.

나는 크리스틴을 이끌고, 주례를 봐주기로 한 요한 대주교의 앞에 섰다.

한때는 국민의회의 혁명 정부와 격돌 직전까지 갔던 남서부에서 사람들을 보살피던 대주교가 온화한 얼굴로 축사를 읊어 주는 동안.

나와 크리스틴은 손을 꼭 마주 잡은 채, 서로를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었다.

크리스틴의 눈동자는 조금 흔들리고 있다.

-사실, 지금도 생각하고는 해요. 저 같은 여자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고.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함께 밤을 보내고 나서 속삭이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나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내 손에 묻은 피가 결코 적지 않다.

회귀 전의 10년, 회귀 후의 10년.

장장 20년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전장만을 거쳐 와, 오히려 평화가 어색하다.

당장에라도 비명과 총성이 귓가에 들려올 것 같아서, 문득 눈을 뜨고 나면 이 행복이 모두 거짓인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곤 한다.

그래도.

나는 크리스틴과 맞잡은 손을 다시 힘주어 잡았다.

이렇게 함께 손을 마주 잡고 있으면 그런 불안감도 희미해진다.

진상조차 모른 채 가족에게 배신당한 채 죽어버린 약혼녀가 아니라, 나와 함께 사지를 넘나들며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준 크리스틴이 여기에 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모든 것을 부정당하며 죽은 구체제의 귀족 대신, 그녀와 함께 사지를 해쳐 나온 끝에 여기까지 도달한 내가 있다.

그러니까, 괜찮다.

요한의 축사가 끝나고, 함께 마주 본 순간.

그녀의 눈에 더 이상의 흔들림 대신 기쁨만이 자리한 것은 분명, 그녀도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겠지.

나는 더없는 기쁨 속에 그녀의 뺨을 감싸며 입술을 포갰고-그 순간 식장 전체를 뒤흔드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정적, 그리고 침묵.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뻣뻣하게 굳어 있던 데미앙 드 미르보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죄, 죄송, 죄송합니다. 초, 총사령관 각하를 축하드리는 의미로 예포를 준비한 건데, 너무 과해서…….”

소리에 자기도 놀랐는지 쩔쩔매고 있는데...

어떤 미친놈이 예포로 대포 12문을 동시 발포하냐.

어이가 없어서 노려보자, 데미앙은 거의 경기하며 나에게 연신 허리를 숙여 보였다.

저거 겉으로는 저러면서 나한테 불만 많다고 일부러 시위한 거 아니야?

……나중에 두고 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내 목에 부드러운 팔이 감겨왔다.

“신부를 눈앞에 두고 한눈을 파시다니.”

“앗, 미안합니다, 크리스틴.”

잽싸게 시선을 돌리기가 무섭게, 그녀의 입술이 다가왔다.

황홀한 감각에 빠져 그녀를 끌어안은 채 정신없이 받아들이다가-부러움과 질투, 놀림이 뒤섞인 사람들의 환호성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좀 진한 것 아닌가?

같은 생각이 들 때쯤 크리스틴이 입을 떼더니, 살짝 눈물 젖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간절하게 속삭여 왔다.

“그냥, 제 곁에만 있어줘요. 전 그거면 되니까.”

……머릿속에 있던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려서, 나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답했다.

“언제까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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