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그림자 평화 - 혁신
프랑지아의 수도, 뤼미에르.
혁명군 총사령부.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를 굉장히 한심하다는 눈으로 위아래로 훑어본 후, 그를 불렀다.
“미르보 사령관.”
“예, 옛! 라파예트 후작 각하!”
데미앙은 바짝 굳어서 딱딱하게 답했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하……. 내 앞에서만 군기가 바짝 들지?”
“소, 송구합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보고서는 날짜 닥치면 그때서야 부랴부랴 작성하느라 주먹구구식으로 작성하질 않나, 근무시간에 자리를 비우고 놀러 다니질 않나…….”
데미앙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별다른 변명은 하지 못했다.
“전시에 그대를 조금쯤은 존경하던 부하들의 시선이 어느새 차갑게 변해가고 있는 걸 그대만 모르는 것 같은데.”
나는 데미앙을 흘겨보며 과장되게 양팔을 벌려 보이면서 말했다.
“위대한 딜루스의 구원자, 방어의 명장 데미앙 드 미르보는 어디 가고 왠 한량이 남부군 사령관 자리에 앉아 있는 거지?”
아, 뭐 사실 나도 안다.
데미앙 드 미르보는 원래부터 이런 놈이었다는 걸. 위기가 좀 닥쳐줘야만 일을 제대로 하는데, 평화의 시기에 위기가 어딨어.
전시에 비해 군대 규모도 축소되고 업무도 확 줄었겠다, 솔직히 긴장감 가지려고 해도 가지기 힘든 것 안다. 잘 알지.
하지만…….
“평화 시기에 군 기강이 흐트러지는 걸 앞장서서 관리하고 막아야할 사령관이 아주 솔선수범해서 군기를 흩트리고 있으니, 내가 그대를 어떻게 해야 하겠나?”
“소, 송구합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나는 쩔쩔매는 데미앙을 보며 손을 목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했다.
“어떻게 해야겠냐니까. 모가지를 날려주면 되나?”
“아, 아, 아닙니다! 즉시 시정하겠습니다! 평시에도 전시와 같이! 빠릿빠릿하게 애들 굴리고 크라프테군 부럽지 않은 강철같은 규율을 유지하겠습니다!”
아니 누굴 잡으려고. 이래서 장군들이 병사들에게 욕먹는 거야.
“그건 너무 갔고. 그냥 업무시간에 주어진 업무는 하면서 보낼 수 있도록 스케줄 관리하고 최소한 우리가 놀고 있다는 티는 내지마. 아랫놈들이 사령관도 노는데 우리가 일해야 하냐 생각하게 하지 말고. 알겠나?”
“예, 옛!”
“좋아, 데미앙 드 미르보 사령관.”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손가락으로 내 눈을 가리켰다가 그에게 향해 보였다.
“잊지 마라, 내가 지켜본다. 내 약혼녀가 뭐 하는 사람인지 그새 잊지는 않았으리라 기대하겠어.”
데미앙은 거의 히이익- 하며 경기하더니 다급하게 경례하며 소리쳤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좋아, 이만 해산.”
“예, 옛!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나는 헐레벌떡 도망가는 데미앙 드 미르보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저놈이 절대 무능한 놈은 아닌데 매번 이렇게 혼나면서도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걸 보면 주체할 수 없는 게으름의 본능이 혈관을 타고 흐르기라도 하는 건가...
“뭐, 아무래도 평시니까요. 솔직히, 너무 오랫동안 전쟁만 치르고 살았더니 저도 적응이 잘 안 됩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집무실 한편의 의자에 앉아서 느긋하게 커피를 음미하고 있던 루이 드제를 보며 픽 웃으며 답했다.
북부 사령관 루이 드제와 남부 사령관 데미앙 드 미르보.
둘 다 내 직속 부하이자 일군을 통솔하는 사령관이니 동격이고, 직접적인 경쟁자라고 할 수 있겠지.
원래라면 동급 직위인 둘을 불러놓고 한 명만 작살내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지만…….
데미앙 놈을 좀 자극해볼 겸 일부러 불러놓고 깬 건데, 정작 데미앙은 드제가 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것 같았다.
그냥 당장 나한테 깨지고 있는 현장에서 탈출하고 싶어 할 뿐.
나는 슬며시 턱을 매만지며 답했다.
“저놈은 자존심도 없나.”
루이 드제도 구 왕실의 근위대 출신이니만큼 나름 귀족이긴 하지만, 영지 귀족 출신 백작인 데미앙에 비할 바는 아니다.
거기다 솔직히 유명세로는 혁명군의 2인자니 방어의 명장이니 한다지만 정작 내가 신뢰하고 실질적 2인자로 쓰는 건 드제다.
그걸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혁명군 내에서도 대부분 그걸 알고 있다. 데미앙 입장이면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할 텐데.
“그대 앞에서 이렇게 깨지는데, 그대 쪽은 신경도 안 쓰더군?”
“하하하, 그러게요.”
루이 드제는 머쓱해하며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적였다.
“솔직히 내심 경쟁자로 생각하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미르보 장군님의 명성이 좀 부럽긴 합니다만.”
나는 코웃음을 치곤 드제의 맞은 편에 앉으며 말했다.
“운 좋은 놈이야. 명성을 즐기거나 과시할 줄도 알고. 그대도 그런 점은 배워야 해. 묵묵히 업무를 충실히 하고 신뢰할 수 있지만, 조용해서 별 티가 안 나잖아.”
드제는 커피를 마시며 답했다.
“뭐, 후작 각하께서는 알아주시니까요. 굳이 남부군과 신경전을 벌이고 싶지도 않고요.”
나는 픽 웃었다.
그래, 이래서 내가 데미앙 드 미르보가 아니라 루이 드제를 2인자로 쓰는 거긴 하지.
데미앙 드 미르보는 할 때는 해줘서 임팩트가 있고 유명세도 높지만, 끊임없이 관리해주지 않으면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질 않는다.
반면 드제는 알아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아서 해주고 언제나 평균 이상을 해주니 신뢰성이 높거든.
나는 조금 식어버린 내 몫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사실 그대도 지적사항이 없지는 않아. 남부군만큼 크진 않지만 나중에 정리해서 보내주지.”
“어이쿠. 아무래도 다비 중령의 예리한 눈초리를 완전히 피하는 건 무리였나 보군요.”
드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전쟁 시기 동안 데미앙 드 미르보의 참모장을 하고 있던 지젤 다비는 내가 빼 와서 총사령부 직속 감찰부를 맡겼다.
그러지 않아도 전쟁 끝났다고 밑도 끝도 없이 게을러진 미르보 밑에서 고통받고 있던 지젤 다비는 신이 나서 좀 과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저 근본적으로 성실하고 군기가 바짝 든 인사에게 아주 적절한 역할이기도 하고.
“뭐 나도 완벽하게 충족할 걸 기대하는 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평시에도 일정 수준의 규율은 유지해주는 걸 원하는 거지.”
모르긴 몰라도, 지젤 다비는 평시에 내가 일하는 태도에서도 빨간줄 그을 항목을 찾아낼 것 같거든.
“아무래도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불안해.”
내전으로부터 시작된 프랑지아의 혼란에는 언제나 알게 모르게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개입이 있었다.
굳이 프랑지아 아니라도, 지금은 크록스에게 통일된 이베리카 반도 또한 그러했고 심지어 저 동방 제국마저 악마들에게 시달리고 있었지.
그들이 모든 전쟁을 끝마치고 안정과 평화를 되찾은 중앙 대륙의 정세를 마음에 들어 할까?
최소한 나는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혹시 모를 악마들의 위협에 대비하는 것도 당연히 해야할 일이겠지.
“……뭐, 단순히 평화 시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군인의 기우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내게도 전쟁은 너무 길었는지 모르겠어.”
“하하, 길었죠. 지금 혁명군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반평생 전쟁을 보고 자란 이들이니까요.”
나는 드제에게 피식 웃었다.
반평생.
내게는 그 이상이지. 회귀 전에는 혁명군과의 내전에서 패배해서 처형당한 것이 대충 이때쯤이었으니까.
혁명으로 인한 내전이 그때까지 이어졌으나, 프랑지아에게는 그 이후에도 제국과의 전쟁, 어쩌면 크라프테와의 전쟁까지 예비되어 있었다.
내가 죽은 이후의 프랑지아는 과연 그 위협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이겨냈다고 쳐도, 그동안 얼마나 큰 혼란과 희생이 있었고…….
악마들은 그 사이에 얼마나 큰 이득을 챙겼을까.
나는 머리를 흔들어 비우고 답했다.
“그러게. 솔직히, 전장이 아닌 곳에서의 내 삶을 나도 잘 상상하기 어려워. 그래도, 뭐…….”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지금 내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다. 그럼에도 수도 없이 검을 잡고 휘두르느라 검 손잡이 모양으로 패인 손은 있지도 않은 검의 감각을 기억한다.
나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들려올 것만 같은 포성과 아비규환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10년이 넘은 전쟁. 내게는 20년도 더 넘은 전쟁.
그러나 영원한 전쟁은 없고, 그 긴 전쟁이 끝난 지금은 평화의 시대다.
국민의회는 국민의회대로 전쟁하느라 바빠 뒤로 미루어둔 개혁을 처리하느라 바빠졌다.
그동안에야 전비를 대느라 허덕였지만, 배상금도 받고 있고 군비 지출도 확 줄었으니 이제야말로 의욕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거지.
크리스틴과의 결혼도 착실히 준비 중이고…….
나는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피 흘리며 밥 값하는 것보단 적당히 월급도둑질하면서 어색한 평화를 지키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하하하, 동감입니다. 가장 행복한 군대는 눈칫밥 먹는 군대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드제도 웃으면서 답해줘서, 우리 모두 느긋하게 커피를 음미하며 평화를 만끽했다.
그래, 그거면 된 거겠지.
대비는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전장에 사로잡혀 있을 수만은 없는 법.
* * *
어비스 코퍼레이션.
수도 판데모니움.
보랏빛의 자욱한 안개로 뒤덮여 영원히 해가 뜨지 않는 도시.
‘프라이드’ 사의 대표이사 바알은 오직 인위적으로 개발된 마도공학에 의한 불빛만으로 밝혀진 음울한 도시의 정경을 창으로 흘긋 보면서, 복도를 걸었다.
그의 어깨에 걸린 것은 언제나처럼 마왕을 처단할 때 쪼개진 그의 왕관.
그의 등 뒤에 맨 것은 언제나처럼 마왕을 직접 그의 손으로 벤 검.
구시대의 종말이자 새시대의 탄생을 알린 수백년 전의 상징 그 자체가 그다.
그가 악마종의 자긍심이며, 영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연속된 실패를 맞이하고 있다.
대륙을 이간질시켜 혼란을 유발하고, 그 사이에서 이득을 챙기는 방침은 수백 년에 걸쳐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막대한 부와 기술적 독점을 제공했다.
그러나 영원한 진보와 이득은 없고, 결국 대륙의 종족들도 점차 그들을 따라 발전하기 시작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대륙의 격차는 수백년에 걸쳐 조금씩, 그러나 확연히 좁혀져 왔다.
그리고 그 순간 나타난 이레귤러의 존재로,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누리던 전략적 우위가 하나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뒤에 남은 건 공통적으로 악마들을 증오하는 국가들과 그들 사이에서의 위태로운 평화.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더는 이전만큼 독보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이전만큼 대륙을 좌지우지하며 그들의 이윤을 챙길 수 없다.
수백년 간 그들의 번영을 이끌어온 체제는 실패했다. 실패했다면 변화해야만 한다.
그러나 7개의 기업에 의해 분산된 권한과 각 회사들의 이해득실 차이는 그런 혁신을 막고 있다.
빤히 기울어가고 있는데, 자신들의 회사가 손해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현상유지를 고수하려는 머저리들.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7개 회사 간의 모든 분쟁을 원천적으로 금지한다.
마왕에 맞선 내전으로 태어난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새 시대를 연 제1항의 원칙.
마왕을 처단하고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창설한 그 자신조차 저 규정을 따라야만 하고, 따라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저 원칙이 세워진 이유는 긴 세월 속에 망각되었고 분쟁만 아닐 뿐 은근한 견제와 반대는 암묵적으로 계속 되어 왔다.
남은 것은 원칙만 믿고 지금의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만든 그의 긍지에 감히 도전하려는 자들뿐.
나머지 6개 사의 대표이사들은 작금의 실패를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대전략을 짜온 ‘프라이드’사의 책임으로 은연 중에 몰아가고 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저 규정이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혁신을 막고 있다.
그렇다면.
수백 년 전 마왕을 처단할 때 그러했듯, 마족의 긍지.
‘프라이드’인 그가 또다시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할 뿐.
바알은 감옥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비쩍 마르고 초췌해진 채 구속되어 있는 악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파이몬.”
축 늘어져 있던 붉은 머리의 악마가 고개를 들어, 바알을 바라보았다.
이베리카에서의 대실패로 슬로스 사의 대표이사직도 빼앗기고, 책임을 물어 지금껏 수감되어 죗값을 치르고 있던 악마의 눈에 실린 감정은 분노도 좌절도 아니다.
수백 년간 ‘나태’라는 직위에 갇혀있었음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아니 변할 수 없는 광기와 갈망을 품은 악마.
바알은 그 모습에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물었다.
“혁신을 원하나?”
파이몬은 소름 끼치도록 아름답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