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90화 (190/258)

190화. 그림자 평화 - 성녀왕

나는 천천히 왕의 알현실로 발을 들였다.

붉은색과 금빛으로 장식된 거대한 방.

모든 기사들의 지배자로서 프랑지아의 국왕이 대대로 군림해온, 왕의 권위 그 자체를 집대성한 장소.

지금은 창이란 창에는 전부 커텐이 쳐져 있어 마력등의 조명만으로 비추어지지만, 원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루어진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왕의 옥좌를 은은하게 비추는 모습이었다고 들었다.

나야 그 광경을 보진 못했지만, 나름 유명한 이야기지.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방의 정중앙에 위치한 옥좌 위에서 휘몰아치는 빛의 폭풍으로 다가갔다.

마치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빗줄기 한가운데에, 에리스가 눈을 감고 두 손을 펼친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내가 발걸음을 멈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휘몰아치던 빛이 천천히 갈무리되기 시작하고, 에리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마력등의 은은한 빛 따위 압도해버리는 신성력의 폭풍 속에서 본연의 색이 없어 금빛으로 물든 채 휘날리다가 가라앉는 백색의 머리칼.

천천히 드러나는 보랏빛의 신비한 눈동자까지.

이제는 더 이상 내 후원을 받는 성녀가 아니게 된, 프랑지아의 여왕.

이 알현실조차 초라해지는 여왕의 앞에서, 나는 그녀만큼 이 방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이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여왕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세요, 후작.”

나는 몸을 일으키며 가볍게 말했다.

“귀국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게르마니아 제국으로의 여정은 평안하셨는지요?”

에리스는 쿡쿡 웃으며 답했다.

“오가는 길이 조금 심심했다는 것만 빼면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게르마니아 제국의 카이제린 체칠리아는 에리스에게 카이저, 아니 이제는 전대 카이저인 오토 2세의 장례식에 참석해달라고 청했다.

에리스의 왕위를 빼앗겠다고 전쟁을 터트린 이복 자매가 남편의 장례식에 초청한다니, 일반적으로는 영 이해하기 어렵다만…….

당연히 국민의회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위험합니다! 국내도 아닌데 만에 하나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다면…….

그러나 에리스는 간단하게 일축했다.

-제국도 피폐해요. 여기서 우리에게 다시 전쟁 명분을 줄 짓을 하고 싶진 않을 테니 제 안전에는 최선을 다하겠죠. 물론 저도 호위 정돈 데려갈 거고요.

-불과 얼마 전에 전쟁을 치른 상대가 아닙니까? 뻔뻔함에도 정도가 있지!

-그러니 더더욱, 저는 가고 싶어요. 이걸로 묵은 적개심이 조금이나마 풀릴지 누가 알겠어요? 어차피 통치는 국민의회가 하는걸요. 할 일도 없는 제가 조금 귀찮아서 프랑지아의 외교에 도움이 된다면 남는 거 아닐까요?

여왕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의원들도 더는 반대하기도 뭣해서, 결국 통과되었다.

체칠리아가 그녀의 남편을 애도하기 위해서 에리스에게 참석을 청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겠지.

그녀가 보여준 수완이나 정치적 역량을 생각하면 아직 미성년인 아들을 위해 정통성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도 있을 거다. 에리스도 그걸 모르진 않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해준 거지.

그리고 듣자 하니 에리스는 제국 황궁을 다 뒤덮을만한 빛을 일으키며 축복을 내려주었고, 제국의 귀족과 백성들은 그 기적과 같은 광경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선황과 제국을 축복해 준 성녀왕의 자비와 은총을 칭송하는 이들이 넘쳐난다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찍혀 나올 정도니, 제국으로 향하며 본인이 한 말을 아주 제대로 지켜준 셈이다.

“그런데, 제국에서도 힘을 많이 쓰신 것 아닙니까?”

그래놓고는 오자마자 저러고 있어도 몸에 무리가 안 가나?

내 말을 들은 에리스는 어딘가 장난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많이 쓸수록 느는 것 아닌가 싶어서, 실험하는 의도도 있어요.”

“……허허.”

‘성녀’잖아. 나름 신이 내려주신 힘으로 저런 거 실험하고 다녀도 되는 거야?

결과적으로 죽은 자를 애도해 주는 행동이자 평화를 위한 거니, 의도가 나쁘냐면 그건 아니긴 한데…….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수십 명 치료하고 허덕이던 어린 성녀가 어느덧 그때의 나보다 나이 먹고 저러고 있는 걸 보자니 참 기분 묘하다.

에리스는 나를 보곤 눈을 휘며 웃으며 말했다.

“그냥 많이 쓴다고 느는 건 아니더라고요.”

실망스러워야 할 것 같은 결과인데, 왜 묘하게 웃지?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자, 에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국하는 길에 구호활동이라도 좀 하고 오려고 했는데, 결제 받아야 할 것이 있다며 냉큼 돌아오라고 불러놓고는 막상 사인 좀 해주니 끝나서 지루하기도 했고요. 이럴 거면 내보내주기라도 하지.”

그렇게 말한 에리스는 어딘가 불온한 미소를 지은 채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얘가 이런 표정을 지으면 보통 뭔가 좋지 않은 생각을 떠올린 건데...

에리스는 내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흐어어어엉-!”

내 뇌가 행동을 정지했다.

뭐야, 뭔데.

밑도 끝도 없이 왜 이러는데.

“배신자!”

에리스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에 정신이 얼얼하다.

“여, 여왕 폐하.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결혼하라고 달달 볶는 거 저보다 나이 많은 후작도 아직 안 했다고 핑계 대고 있었는데 제국 다녀오는 그새를 못 참고!”

“아.”

나는 절로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크리스틴에게 청혼 받고 신이 나서 듀몬트에게 이제 좀 그만 귀찮게 굴라는 의미로 알려줬더니, 바로 다음 날 신문에 우리의 결혼 소식이 떴다.

심지어 수도에 도착한지 하루도 안 지난 여왕까지 알고 있다니.

듀몬트, 이 망할 배불뚝이 할아버지가…….

에리스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손을 내리더니 방긋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결혼하시게 된 건 축하드려요! 하지만 배신자는 미워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여왕 폐하. 하지만 배신자라니, 대체 왜 배신자…….”

어이가 없네.

에리스는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대신, 나한테 슬쩍 혀를 내밀어 보이기만 했다.

……이렇게까지 옥좌에 안 어울리는 여왕이라니.

세상에 맙소사.

한숨만 푹푹 나온다.

그래, 말 나온 김에 물어나 볼까.

“그러면, 여왕 폐하.”

“네?”

“혼인은 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네.”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선선히 나온 답에 나도 피식 웃었다.

앙쥬 백작이 들었으면 뒷목 잡고 넘어갔겠는걸.

“그러시다면 혹시 사유 정도는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사유가 타당하시면 저도 신하로서 한 손 거들어 드리도록 하지요.”

에리스는 반색하더니, 성녀답지도 않고 여왕답지도 않으며, 성녀왕에겐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 언사를 내뱉었다.

“와, 정말요? 앙쥬 백작을 후작에게 떠넘겨도 되는 거예요?”

“……사유가 타당하면요.”

에리스가 여전히 방긋방긋 웃고 있어서,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역시 정략혼 같은 건 거부감이 있으신 겁니까?”

“그렇네요, 아무래도 얼굴도 모르고 성격도 모르는 사람은 좀…….”

에리스는 그러면서 어색하게 웃더니, 나에게 슬쩍 눈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후작님 정도면 모를까.”

“……화냅니다, 장난꾸러기 여왕 폐하.”

에리스는 소녀 같은 얼굴로 까르르 웃으며 몸을 빙글 돌려 나에게서 한걸음 물러나더니, 그제야 조금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전쟁을 막기 위해 선출된 여왕이잖아요. 그렇게 선출되었을 뿐인 여왕이 대를 잇고, 그 자식이 다시 선출되어서까지 프랑지아 왕족의 혈통을 이어야만 하나요?”

“글쎄요. 폐하의 입장 자체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보니.”

“그렇죠? 그냥 다른 나라 왕족들은 다 그렇게 하니까 우리도 그러자는 건데, 저는 그게 별로 마음에 안 들거든요. 우리는 구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체제를 만든 건데 굳이 원래 그랬다며 따라가야 하나요? 게다가…….”

에리스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긴 은발을 빙글빙글 꼬며 덧붙였다.

“‘프랑지아의 여왕’과 결혼하겠다고 정략혼을 걸어대는 타국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과연 프랑지아의 국민의회와 나서지 않는 왕실의 존재에 만족할지도 의문이고요.”

“확실히, 저들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일단 노려본다는 느낌이 강하긴 하죠.”

에리스는 그녀의 이야기인데도 픽 웃더니 꽤나 회의적인 얼굴이 되었다.

“프랑지아의 현 왕인 저는 굳이 나서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제게 영향력이 없지는 않아요. 권한도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폐하.”

애초에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선출 왕정이라는 체제 자체가, 제국과의 전쟁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 나온 일종의 타협안이다.

명백하고 중요한 실권은 없지만, 제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에리스에게도 어느 정도의 권한은 부여되었다.

거기에 성녀왕으로서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는 이상, 국민의회도 에리스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실제로 국민의회가 반대하는데도 에리스가 밀어붙여서 강행 처리된 사안은 짧은 제위 기간에도 제법 많다.

지금까지야 전시라는 특이성에 에리스의 의도가 좋고 결과도 좋아서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음, 저. 보기보다 욱하는 성격이라서요.”

“……잘 알고 있습니다, 여왕 폐하.”

내 답을 들은 에리스는 나에게 슬쩍 눈을 흘기더니, 이내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제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성녀왕의 휘광을 뒤집어쓰고 이 나라를 마음대로 다루려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꽤 화날 것 같아요. 얼마나 많은 피로, 얼마나 많은 희생 위에 세워진 나라인데.”

에리스는 내가 보는 가운데 두 팔을 벌리면서 웃었다.

어떻게 보면 성녀답게, 또 어찌 보면…….

“저는 그 꼴 못 보거든요. 그러느니 제 손으로 다 엎어버리고 말지.”

타락한 자들을 징벌하는 천사장이라도 되는 양.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것참.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와 에리스가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볼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구체제의 혈통이자 그가 부정하던 종교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국민의회보다도 더 이 나라를 사랑하는 민중의 지도자라는 것에 탄식했을까?

에리스는 그 존재 자체로 갓 태어나 아직 혼란스러운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여왕이다. 정신적 지주이자 구심점으로서 이보다 더 대단한 사람은 있을 수 없겠지.

그럼에도 동시에, 그렇기에 그녀의 존재 그 자체가 국민의회와 민중의 정부에 최악의 적일 수도 있다는 걸 본인이 자각하고 있다.

나는 에리스에게 되도록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폐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이 일로 더는 귀찮아하실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에리스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후작의 헌신에 감사드려요.”

나는 고개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 성녀왕으로서의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에리스 개인의 행복은?

나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나를 보던 에리스가 미소 짓더니 말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 제 사기꾼 후원자님.”

“하하, 사기 친 적은 없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여왕 폐하.”

에리스는 쿡쿡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사랑을 한다면 후작님과 크리스틴 언니 같은 사랑을 해보고 싶어요.”

내가 뭐라고 해줘야 하나.

언젠가는 그런 사랑을 찾으실 수 있을 거라고 해줘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에리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데, 전 그런 건 할 수 없어요.”

“……어째서?”

에리스는 손을 가슴께에 얹더니, 나긋나긋한 투로 답했다.

“저는 모두를 위하니까요. ……모두를 위해야 하니까요.”

-이렇게 열심히 하면 저나 어머니의 죄를 신께서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 해서.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그 사람에게 모든 걸 내어주거나 할 수 없어요. 분명, 모두를 구하겠다고 나서며 저를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겠죠. 그러니까, 그 대신.”

성녀라고 불리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했던 소녀가.

“저는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를 사랑할 거예요. 제가 열심히 노력해서, 모두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한다면.”

그 어느 누구도 성녀임을 부정할 수 없는 성인으로 자라나.

“그러면 언젠가 먼저 간 분들의 앞에서. ……어머니의 앞에서, 자랑스러워할 수 있겠죠.”

더 없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는 저도 분명, 무척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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