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89화 (189/258)

189화. 그림자 평화 - 아키텐의 겨울 (2)

“배, 백작 각하, 제가-”

“아니, 내가 할게. ……그래도 힘드니까, 조금 거들어주기만 하겠어?”

“그, 그러면.”

크리스틴은 집사의 도움을 받고도 꽤나 고생을 하고서야, 루이스를 방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루이스가 언제나 돌아오나, 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시종들은 아주 기겁을 했다.

“허어억, 백작 각하!”

“죄, 죄송합니다!”

당황하는 그들과 우아함이고 뭐고 없이 땀을 잔뜩 흘려 머리칼이 이마에 달라붙은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우스워서, 크리스틴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집사가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눕힌 루이스를 내려다보았다.

10년 전, 그 일이 있기 전 제법 살갑게 굴 때만 해도 완전히 어린아이였다.

자신이 아주 업고 다닌 적도 있었는데, 어느새 그녀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커져선.

언제 그렇게 그녀에게 멍청하다는 소리를 했냐는 듯 술에 취해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루이스를 방에 데려간다는 것이, 혼자서는 옛날처럼 업어주기는커녕 질질 끄는 것도 힘들었다.

크리스틴은 세상 모르고 잠이 든 루이스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등을 돌렸다.

“모시겠습니다.”

“아니, 어차피 집 안인데. 벌써 밤이 깊었으니, 집사도 가서 쉬어.”

“크흠, 그러면 편히 쉬십시오, 백작 각하.”

늙언 집사는 제법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물러갔고, 크리스틴은 그의 뒷통수에 슬쩍 눈을 흘겼다.

그녀가 바빠서 식사를 좀 거른다 싶으면 냉큼 피에르에게 고해바치는, 누구를 섬기는지 모를 자 사람인데 어느새 서로 익숙해져선.

방으로 돌아가는 길.

심야의 어두워진 복도에, 그녀의 구두가 내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녀가 걷는 복도는 저 남부에 있는 아키텐 저택의 그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쩐지, 야심한 시각에 조명을 다 꺼둔 저택의 복도를 걷고 있자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어두운 공간을 채운 것은 그녀의 그나마 행복했던 유년기를 피로 씻어 내리고 남은 적막함과 불온함이 아니다.

크리스틴은 천천히 복도를 걸어가,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짧지 않은 시간, 기다려 왔다.

그녀가 지은 죄를 다 씻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무고한 아이에게 원래 가졌어야 할 권리를 돌려주겠다는 생각만으로.

그러나 아이는 자신을 무고하다고 여기지도 않았고, 그것을 자신의 권리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제는 더 이상 그녀가 보살펴 주어야 할 아이조차 아니다.

-그러면, 이제 뭘 할 건데?

-글쎄요. 저도 누님이 제게 원하는 걸 하려고 했을 뿐인데요.

-아키텐을 물려받고 싶지 않다면, 내가 네게 원하는 건 없어. 넌 자유야, 루이스.

루이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 우선 마탑에 가서 공부를 조금 더 해볼까요?

-응? 졸업한 것 아니었어?

-음, 이 정도면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거든요. 탑주님도 아직 부족하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더라고요.

루이스는 얼근하게 취한 얼굴로도, 제법 남자 같은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제가…… 잘 보이고 싶고, 대등하게 서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좀 많이 유능해서, 저도 그만큼은 대단해져야겠다 싶어서요.

-……여자?

-그, 그, 그런데요. 뭐 문제 있어요? 누님도 라파예트 후작님한텐 뭐든 다 내줄 것처럼 굴면서!

크리스틴은 웃음을 터뜨렸었다.

그러나, 방에서 그녀의 옷장으로 다가가는 크리스틴은 웃지 못했다.

크리스틴은 그녀의 옷장을 열어보았다.

상복의 의미로 입고 다닌, 별다른 장식도 없는 거의 비슷한 수수한 검은 드레스만 여러 벌.

가장 입기 편한 자리에 둔 그 옷들에서 천천히 시선을 돌린 크리스틴은 다른 레이디들이 입고 다닐법한 제법 그럴싸한 드레스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런 드레스를 입은 자신을 상상해보려다가, 잘 되지 않아 이내 포기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10년.

그녀가 살아온 인생의 1/3이 넘는 시간을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것이 동생 본인에게 부정당하고 나서 드는 기분은 해방감만큼이나 큰 막막함이다.

크리스틴은 천천히 발코니로 나갔다.

밤바람이 그녀를 시원하게 해주어서, 크리스틴은 눈을 감은 채 잠시 동안 바람을 맞고 있었다.

겨울은 가고 봄이 와서 그럭저럭 따뜻한 바람임에도 시원함은 잠시고, 루이스를 옮긴다고 애쓰느라 땀을 흘린 몸은 이내 으슬으슬해지기 시작했다.

크리스틴은 문득, 피에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눈을 떴다가, 저택의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쳐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2층에 있는 그녀의 방을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

크리스틴은 눈을 가늘게 떴다.

“피에르?”

루이스를 상대해준다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헛것이 다 보이고.

“크리스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데 그 헛것에서 답이 들려와서, 크리스틴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 정말로 피에르?”

그러자 피에르도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미심쩍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로 크리스틴입니까? 뭔가 평소답지 않은데.”

“자, 잠시만 기다려요.”

크리스틴은 헐레벌떡 방으로 들어가 위에 걸칠 법한 옷을 찾다가, 뒤돌아선 깜짝 놀랐다.

“앗!”

어느새 2층으로 도약해서 발코니에 선 피에르가 노크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으니까.

“야심한 밤에 실례지만, 들어가도 될까요?”

크리스틴은 자신이 이렇게 당황한 적이 있나 싶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건 분명히 술기운 탓이겠지.

그러니까 이건 루이스가 잘못한 거다.

그 아이가 너무 시원하게 마셔대니, 그녀도 저도 모르게 따라가다가 평소라면 마시지 않을 만큼 많이 마셔 버려서.

그래서 그 앞에서 이렇게나 흐트러지는 거다.

피에르가 가만히 서서 가볍게 미소지은 채, 여전히 노크하는 시늉을 하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어서 크리스틴은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드, 들어오세요.”

“그러면 감사히.”

크리스틴은 피에르를 방으로 들이고서야, 뒤늦게 물었다.

“어쩐 일이세요?”

어쩐지 엉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에르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웃음을 참는듯한 얼굴이 되었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답했다.

“그냥 보고 싶어서요. 그걸로는 안 됩니까?”

그냥 보고 싶어서 야심한 밤에 약혼녀의 저택 앞에 서서 하염없이 방만 보고 있었다고?

완전히 엉망진창이다.

완전히 엉망진창인데도, 크리스틴은 어쩐지 눈치를 살피는 피에르의 얼굴이 귀엽게만 느껴져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녀가 멍하니 그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발코니를 내다 본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겠지.

“……음, 좀. 엉망진창이죠? 예, 비웃어도 좋습니다. 듀몬트에게 하도 들볶이다 보니 저도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입니다.”

듀몬트.

듀몬트 남작. 툴루즈의 충신이자 피에르가 약혼만 맺어놓고 결혼을 안 해서 불만인 사람이라는 정보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아서, 크리스틴은 더 웃음을 터트렸다.

기실 피에르가 들볶이게 된 것은 순전히 자신의 탓일 텐데도,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서 웃음이 그치지 않는 건 분명히 술기운 탓이겠지.

이제 슬슬 피에르의 표정이 미묘해져서, 크리스틴은 웃으면서 사과했다.

“미안해요, 피에르.”

“아니요, 저야말로 미안합니다. 전쟁을 끝내고 수도로 귀환한지 며칠 되지도 않았으니까요. 아아, 오해는 마시죠. 당신도 루이스와의 결론을 내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10년을 기다렸는데, 조금 더 기다린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요.”

크리스틴은 미소지은 채 열심히 해명하는 피에르를 바라보았다.

루이스에게 아키텐을 돌려준다.

그것 하나만을 보고 여기까지 달려온 그녀에게 미래계획 같은 건 전혀 없었으니까.

루이스에게 아키텐을 넘겨주고 나면 그 아이가 적응하고 가신들을 장악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테고, 당연히 그 아이가 아키텐을 장악하는 것을 도와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쓸데없는 배려, 쓸데없는 죄의식이었다고 정면에서 부정당했다.

루이스는 크리스틴이 오랫동안 가져온 마음의 짐을 덜어주기는 했으나, 그 자리에 그만한 막막함과 공허함을 채워주었다.

기실,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틴 다키텐이라는 인간은 의무감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족에게 배신당한 채 죽어버리는 결말은 억울했기에 피했을 뿐, 그 이후에 뭘 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녀를 구하고 도와준 피에르에게 보답해야 한다.

무고한 루이스에게 권리를 돌려주어야 한다.

그 삶의 여정 어디에도, 크리스틴 다키텐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나 꿈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피에르와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런 걱정이나 공허함 같은 건 말끔하게 사라져 버린다.

파혼해버린 가문과의 약혼. 그것도 혼기는 한참 지나버리게 만든, 10년의 약혼.

-라파예트의 위신을 바닥에 처박기라도 하실 생각이신가요? 아니면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어느 쪽이어도, 저는--제게는 라파예트의 위신보다, 아키텐 상단의 영향력보다 당신 한 사람이 더 가치 있습니다.

귀족이면서 혁명에 가담하여 쿠데타를 막아내고 혁명의 수호자로 불리며 혁명군 총사령관이 된 사람.

크라프테의 대왕을 꺾고 청기사마저 넘어선 희대의 영웅으로 칭해지는 남자.

그런 사람이 아키텐의 크리스틴이 아니라, 그녀를 원한다고 해주었다.

지금까지 그녀를 기다려주고도, 앞으로도 기다릴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그와 함께라면.

지금껏 함께 길고 어려운 길을 걸어왔듯이, 앞으로도 방황하는 일 따위는 없겠지.

분명, 그녀도 새로운 삶의 목표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피에르.”

“아, 예. 크리스틴.”

크리스틴은 벅차오르는 기분으로 청했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어요?”

피에르는 입을 헤 벌렸다가, 뭔가 뻐끔거리는 듯이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피에르가 꽤나 낙담한 얼굴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청혼을 받은 남자가 저런 표정은 조금 너무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면서도, 불안감은 조금도 없어서 크리스틴은 그저 쿡쿡 웃었다.

“일생일대의 실수를 했군요. 이걸 갑자기 기습으로 해버리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청혼만큼은 제가 하고 싶었는데…….”

크리스틴은 해사하게 웃었다.

“그러면 저는 프랑지아 최고의 장군에게 승리한 건가요?”

“하하, 하하하…… 그렇…… 군요. 훌륭하십니다, 제독님.”

크리스틴은 떨떠름하게 말하면서도, 눈에는 기쁨이 흘러 넘치는 피에르를 그대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당신은 영원한 나의 것.

“저는 영원한 당신의 것.”

그리고는 피에르가 단 한시도 떼어놓지 않고 가슴에 달고 다니던 흑장미 브로치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저는 이미 당신의 것이니.”

절로 눈물이 흘러넘쳐서, 크리스틴은 피에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을 이었다.

“당신도 제 것이 되어주시겠나요, 기사님?”

피에르가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끌어안아주며 답했다.

“그날부터 이미 그러했듯이, 기꺼이.”

크리스틴은 피에르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눈물 흘리며 웃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길고도 길었던, 아키텐의 겨울에 작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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