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88화 (188/258)

188화. 그림자 평화 - 아키텐의 겨울 (1)

“성년이 된 걸 축하해, 루이스.”

크리스틴이 미소 지으며 잔을 내밀었고, 루이스도 미소로 화답하며 자신의 잔을 내밀어 건배했다.

루이스는 잔에 든 와인을 맛보고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전장에서 귀족가 샌님처럼 보이지 않겠답시고 군인들과 가끔 마셨던 술은 쓰기만 했는데.

“맛있네요? 달짝지근하니…….”

크리스틴은 슬며시 웃으며 답했다.

“네 취향에 맞을만한 걸 골라봤는데, 잘 고른 모양이네.”

루이스는 어째 자신이 여전히 어린애처럼 느껴져서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맛은 있다.

지젤 다비가 타주던 코코아와는 또 다른 고급스러운…….

……그래도 그 코코아도 맛있었는데.

“무슨 생각을 그리해?”

핫, 누님 앞에서 무슨.

루이스는 헛기침을 하고 답했다.

“아, 아니에요. 그저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그래? 그런 것치곤 표정이 부드러워지던데.”

루이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아니,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크리스틴은 굳이 더 캐물어서 루이스의 당혹을 더하는 대신 가볍게 미소 지은 채 와인을 음미하며 기다려 주었다.

루이스는 그에 안도하면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누이가 딱히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의 감정을 다 들켜버린 것 같아서 얼굴에 오른 열기가 가라앉질 않는다.

그래봐야 그의 일방적인 감정일 뿐이다.

지젤 다비가 보는 루이스 다키텐은 잘 쳐줘도 부하 내지 보살펴줄 동생의 입장에 불과했을 텐데.

심지어, 따지자면 루이스 다키텐은 그녀의 언니가 죽은 일에 연루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젤은 수도의 해산식에서 헤어지는 순간까지 그를 변함없이 대해주었다.

……배려해 줄 부하이자, 보살펴 줄 동생으로.

친동생도 무엇도 아니며 오히려 은원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의를 베풀어준 존재.

루이스는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달달하고 부드러워서 군인들이 먹던 술에 비하면 아주 약하지만, 그래도 술이라고 취기는 확실히 오른다.

그런 존재라면 눈앞에도 있다.

배다른 누이.

친누나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은 아들에게 백작위와 상단을 넘겨주기 위해 누이를 죽이려고 한 어머니의, 원수의 아들이다.

자신을 미워하면 미워했지, 보살펴 줄 이유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존재.

아키텐의 가신들 중 루이스에게 호의적이었던 이들은 거의 대부분 어머니의 반역에 연루되어 즉결 처형되었다.

살아남은 이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언제 어머니의 비위를 맞추고 루이스를 예뻐했냐는 듯 그를 멀리했다.

어머니가 죽은 이후, 아키텐에서 루이스는 얼룩이었다.

마땅히 지워내야 함에도 주인의 이해할 수 없는 자비에 구해진 존재.

아키텐의 가신들이 루이스를 제거해야 한다고 누이에게 진언하던 것도 알고 있다.

애초에, 그들은 루이스에게 들으란 듯이 그런 소리를 흘리기도 했으니 모를 수도 없다.

머리로는 이해했다.

애초에 그런 일을 벌인 어머니의 자식이다.

한때의 호의가 외면으로 돌아선 것도, 주군에게 위협이 될 존재에 대한 적의도 지극히 당연한 인과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괴롭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힘드니, 누이가 원하는 아키텐 상단의 일 같은 것에는 관심을 두고 싶지도 않았다.

마법에 관심이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실 마도 왕국으로 유학 가고 싶다는 것은 아키텐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것에 더 가까웠다.

누이도 모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루이스를 마탑으로 보내주었다.

그걸 위해 그녀는 결코 적지 않은 돈을 써야 했고, 가신들의 숱한 반발을 무릅썼겠지.

루이스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과 향 속에 숨겨진, 술 특유의 씁쓸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진작에 했어야만 했다.

어쩌면, 살아남은 그날 바로 말해야 했다.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루이스는 여전히 미소를 건 채 자신을 바라보는 크리스틴에게 고개를 숙이며, 그래도 해야만 하는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누님.”

“응?”

“……제가 성년이 될 때까지 보호해 주신 것. 그리고 아키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제 어리광을 들어주신 것. ……그 외에도 전부 다요.”

루이스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있다가, 누이가 아무 말이 없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작 크리스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 있었다.

언제나의 자연스러운 미소도 잃은 채, 말 그대로 굳어있는 누이를 보곤 루이스가 오히려 당황했다.

……누이가 이 정도로 놀라는 걸 볼 일이 있던가?

라파예트 후작이 죽을 뻔했을 때나 볼 수 있는 표정인 것 같은데.

그게 벌써 여러 번이라 바로 연상되는 것에 어이가 없어져서, 루이스는 픽 웃었다.

“이제는, 저도 은혜 정도는 갚아야겠죠? 그러니까…….”

결심은 꽤 오래전에 해두었다.

이 말을 하는 날을 꽤나 기다려왔는데, 정작 누이가 이런 표정을 하고 있을 때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루이스는 그 상황이 어색해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음……. 누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일이 있다면 뭐든 말씀해 주세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최선을 다해드릴 테니까요.”

크리스틴은 여전히 굳어있는 채로 말이 없었다.

루이스가 슬슬 자신감을 잃고 그가 뭔가 잘못한 건가 고민하고 있을 때쯤에야 크리스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은혜?”

“네?”

거기부터가 문제야?

루이스가 당혹스러워하고 있자, 크리스틴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더 충격적인 소리를 내뱉었다.

“나를 원망하지 않아?”

누이의 어처구니없는 물음에 루이스는 입을 헤 벌렸다.

이 누이는 정말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지만, 그래서인지 가끔 이상한 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원망, 원망…….”

원망.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설사 제아무리 그럴만한 짓을 했다고 해도, 눈앞에서 어머니가 살해당한 8살 소년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원망하기엔 입은 은혜가 너무 크지 않나?

루이스는 퍽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누이가 본 저는 그렇게 이기적이고 배은망덕한 동생이었나 보네요.”

“나는, 네 어머니를…….”

“알아요. 그래놓고는 죽지 못해서 사는 것처럼 굴면서도 저는 끝까지 싸고 도셨잖아요.”

어째 누이가 답답하게 굴어서, 저도 모르게 쏘아붙이듯이 말한 루이스는 헛- 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게 이런 분위기를 만드려고 한 것이 아닌데.

하지만 정작 크리스틴은 그런 루이스의 반응에 화가 났다기보다는,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네가 성년이 되면…….”

“성년이 되면요?”

“……아키텐을 돌려주려고 했어.”

“뭐라고요!?”

루이스는 이번에야말로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수상할 정도로 아키텐의 일을 고스란히 그에게 보여주고 은근슬쩍 일을 가르칠 때, 그는 크리스틴이 장차 그가 장성하면 상단의 일을 돕게 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뭘 돌려줘?

루이스는 잔에 남아있던 와인을 단숨에 전부 들이켰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고급 와인이고 뭐고 간에, 한번에 식도를 뜨겁게 달구며 넘어가는 액체는 병사들이 마시는 싸구려 독주와 별다를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루이스에게 열기와 용기, 아니 만용을 불어넣어 주었다.

“누님, 미치셨어요?”

“미치지, 않았어.”

“근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요?”

크리스틴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네게 물려주려고 했으니까.”

루이스는 기가 막혔다.

“그 아버지가 골방에 처박혀 있을 때 상단을 살려낸 것이 누님인데요? 지금 프랑지아 경제를 쥐고 흔들 정도로 키워낸 것도 누님인데요? 아니, 그 이전에 마탑에서 굴러먹다 온 제가 갑자기 가문과 상단을 맡는다고 하면 가신들이 그걸 예, 그러시지요! 하겠어요?”

“……내가 도와주려고 했어. 정 어렵다면 상단의 관리자로 나를 고용해도 좋아.”

안 되겠다, 이 누님의 머릿속을 이해할 수가 없다.

루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안 해요. 해서도 안 돼요. 애초에 전 죄인의 아들이고, 누님은 피해자에 불과해요. 이건, 이건 누가 봐도 이상해요.”

한참의 긴 침묵이 흐른 뒤.

크리스틴이 살짝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네 어머니가 아버지를 독살할 것을 알고 있었어.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라파예트로 떠났어. 네 어머니가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거래한 장부도 그래서 미리 확보할 수 있었고, 돌아온 나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한 함정을 역으로 돌려주려고 한 거야.”

크리스틴의 말은 평소의 우아하고 나긋나긋한 말투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니까, 루이스. 처음부터 나는 무고한 피해자 따위가 아니었어. 네 어머니가 나를 노렸고, 아버지가 나를 버렸다는 걸 알고, 친족 살해자의 오명을 피하면서 가신들의 지지를 받아 가문을 장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황을 유도한 거야.”

고해를 토해내듯 갈급한 어조로, 누이가 고했다.

“나도, 죄인이야. 가족에게 배신당해 죽고 싶지 않아서, 내가 오명을 쓰고 싶지 않아서 아버지의 죽음마저 방조, 아니 묵인한 공범자. ……네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원수. 그러니까, 나에겐 자격이 없어.”

말을 마친 크리스틴은 루이스에게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루이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제야, 그동안 누이가 해온 생각이 무엇인지 윤곽이 잡혔다.

크리스틴 다키텐은 단순히 온전한 호의로 그를 지켜준 것이 아니다.

누이에게 있어 그는 일종의, 지켜야만 하는 양심의 최소 선이었던 모양이다.

누이는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하니까, 어머니와 그녀 사이에서 피를 봤을 뿐인 무고한 어린 동생만은 살려서 원래 가졌어야 할 권리를 되찾아주겠다는 발상을 한 거다.

루이스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누님, 그렇게는 안 봤는데.”

루이스는 정말 극심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보다 멍청하시네요.”

“……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크리스틴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누이는 나름 마탑에서 재능으로 인정받은 그가 보기에도 규격 외의 괴물 같은 존재다.

살면서 멍청하다는 소리 같은 건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겠지.

그래서 루이스는 더없이 강하게 말했다.

“누님이 이렇게 멍청한 착각을 하면서 보낸 세월이 아까워요.”

루이스는 그의 폭언에 정신을 못 차리는 크리스틴을 보며, 힘주어 물었다.

“제가 완전히 아무것도 몰랐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으세요?”

루이스가 크리스틴의 암살 기도나, 아버지를 독살하고 크리스틴에게 덮어씌우려고 한 어머니의 음모를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본느는 세상 물정 모르고 마냥 누이를 좋아하는 어린아이에게 그런 계획을 누설할 만큼 허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루이스도 최소한 전조는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누이와 잘 지내라고 하고, 루이스를 돌봐주는 크리스틴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는 어머니와.

크리스틴이 돌아가고 난 후 루이스에게 애정을 쏟으면서도 결코 누이를 믿지 말라고 속삭이는 어머니가 공존했으니까.

크리스틴에게 충성하는 가신들과 어머니와 루이스에게 충성하는 가신들 간의 알력 다툼과 마찰은 알고 싶지 않아도 눈에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애초에 아무것도 모른 것이 아니다. 모를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 루이스 다키텐은 어려서부터 충분히 우수했다.

빤히 눈에 보이는데도, 피부로 불온한 공기가 느껴지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누이가 그에게 주는 호의를 받으며, 파멸 직전의 껍데기 뿐인 행복이 계속되기를 바란 어린아이의 이기심으로 전부 무시하고 외면했다.

생각하려고 들지 않았고,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8살의 겨울, 아키텐 저택에서의 비극.

하다못해, 그가 조금만 상황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그는 누이가 죽기를 원하지 않노라고 어머니를 설득해 보기라도 했다면.

그랬다면, 최소한 루이스는 그는 무고하다며 누이 앞에서 떳떳할 수라도 있었겠지.

어쩌면, 누이가 이토록 긴 세월을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루이스 다키텐의 시간은 그날의 겨울에 묶여있다.

눈앞에서 어머니와 그를 아끼던 가신들이 참살 당하던 광경은 평생토록 잊을 래야 잊을 수 없는, 그가 영원히 가져가야 할 짐이다.

하지만 그 겨울의 풍경이 루이스에게 심은 감정은 누이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호의에 취해 그 밑에 빤히 도사리는 불온을 무시한 자기 자신에 대한 짙고도 짙은 후회다.

루이스는 크리스틴의 흔들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괴물 같은 천재, 피도 눈물도 없는 아키텐의 검은 마녀.

세간의 평은 얼마나 지독한가.

그들의 평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에게 호의를 보내주던 누이와 어머니의 겉모습만을 보던 과거의 자신과 지독하리만치 닮아 있다.

누이는 분명히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넘어선 천재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 되지는 못했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적어도 크리스틴 다키텐 개인은 조금은 더 행복했겠지.

누이는 그녀에게 소중한 이에게는 한없이 무르고, 그들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들에게 잔혹해질 수도 있는, 어디에나 있는 평범하고 이기적인 인간에 불과하다.

저토록 평범한 감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괴물과 같은 두뇌로 남들은 떠올릴 수도 없는 발상과 행동을 할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누이의 비극이었을 뿐.

평범한 감성을 가지고, 자신이 명백한 악행을 하고 있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을 악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악이라고 생각하니, 루이스를 무고하다고 여기고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면서 죄책감에 물들어 살아왔다.

라파예트 후작은 누이의 이런 생각을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알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제지하거나 말리지 않은 건 그 또한 그 겨울, 누이의 공범자였기 때문에.

공범자인 그로서는, 누이의 마음에 얹힌 짐을 내려줄 수 없으니까.

“저도 그 비극을 막을 수 있었는데, 알려고도 하지 않고 막지도 않은 죄인이에요. 애초에 그 피로 물든 겨울에 무고한 사람 같은 건 아무도 없었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누이의 마음에 얹힌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지.

루이스는 10년 전 아키텐에서 벌어진 참상을, 그 참혹한 풍경을 상기했다.

피로 물든 드레스를 입은 채 처형을 명하던 누이와, 어머니와 가신들의 피로 물든 눈밭.

그가 그러했듯, 누이의 시간 또한 그때에 사로잡혀 있다.

아직까지도 그 죄책감에 물든 채, 영원한 겨울 속에서 헤매는 누이에게.

“우리 모두가 잘못한 일이에요. 그러니 저는, 누님을 용서할게요.”

부디 아키텐의 끝없는 겨울이 끝나기를 바라며 청했다.

“누님도, 부디 저를, 제 어머니를 용서해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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