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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87화 (187/258)

187화. 그림자 평화 - 프라이드

나는 간단한 해산식을 진행하고, 전쟁통에 만나지 못했던 이들과 잠시 대화를 나눈 뒤 오랫동안 비워둔 수도의 저택에 돌아왔다.

그리고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남자와 마주했다.

“오랜만입니다, 후작님!”

“오- 오랜만입니다, 듀몬트 남작.”

로베르 드 듀몬트.

툴루즈 백작가에 이어 라파예트 후작가를 오랫동안 섬겨온, 배 나온 아저씨가 내 저택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아니, 이젠 백발이 성성하니 할아버지라고 해줘야 하나?

듀몬트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하하, 전 남작입니다. 이젠 아들놈이 듀몬트 남작이죠.”

“오, 작위를 일찍 물려주신 겁니까?”

“허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딸린 거라고 해봐야 저택뿐인 작위긴 합니다만…….”

듀몬트가 멋쩍게 웃어서, 나도 그에게 쓴웃음을 지어주었다.

……뒤에 있는 시종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내 허락 없이 손님으로 맞아놔서 저러나.

내 시선을 따라간 듀몬트는 헛기침을 하며 항변했다.

“크흠, 크흠. 이것 보게! 내가 뭐라고 했나! 이 듀몬트는 라파예트 후작님과 막역한 사이라고 했잖나!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죄, 죄송합니다. 후작님의 손님이신 줄은…….”

반쯤 방치해두는 저택인데도 혁명군 총사령관인 나에게 줄을 대겠다는 인간이 워낙 많아서, 손님이라고 하면 일단 의심부터 했겠지.

보아하니 남쪽에서 와서 그런 사정을 잘 모르는 듀몬트는 막무가내로 손님이라고 주장하며 머무른 모양이네.

“아, 괜찮아. 내가 응대하지.”

내가 시종에게 괜찮으니 물러가라고 손짓을 하자, 시종은 나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물러났다.

내가 수도에 올라온 뒤로도 저택에서 지낸 날보다 전장에서 보낸 날이 훨씬 많으니 시종만 하나 둔 건데…….

이런 상황에선 문제가 되는군.

어째 시종이 표정이 영 좋지 않은 것이, 내가 없는 사이 고생 깨나 한 모양이야...

“이거, 미안합니다. 듀몬트 경. 좀처럼 수도에 머물 일이 없다 보니 손님 접대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군요.”

듀몬트는 시종에게 언제그랬냐는 듯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아니, 아닙니다, 후작님. 후작님께서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전장을 전전해오신 것을 모르면 프랑지아인이 아니지요! 후작령에서도 후작님의 활약에 대해 자랑스러워 합니다!”

이젠 후작령이 아니겠지만.

“하하, 그럼 이쪽으로…….”

나는 굳이 그의 인식을 정정해주는 대신,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이제 당분간 수도에 머물게 될 테니, 아무래도 손님 접대도 준비를 해야겠군요.”

참 오래도 싸웠지만, 이제는 평화의 시대에 적응해야 할 테니.

그 긴 전쟁 동안 수차례 개입한 악마들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별다른 행동을 못할 거라고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시다면 우선 저택부터 하나 매입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명색이 혁명군 총사령관이신 후작님의 저택이 이래서야 위신이…….”

듀몬트는 영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내 저택을 살펴보았다. 그래도 귀족의 저택이니 2층이긴 하다만, 그리 크지는 않다.

어지간한 의원도 나보다 좋은 집을 쓰긴 하지.

뭐, 확실히 어차피 길게 머무르지도 않을 것 좋은 집 사서 뭐 하냐는 생각이긴 했지만...

나는 듀몬트에게 그가 즐기는 홍차를 내주고, 내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

“당장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군요. 손님 접대를 위해 집사 정도는 한 명 고용해야 할 것 같긴 합니다.”

“그러면 저를 고용하시지요, 후작님!”

듀몬트가 대뜸 소리쳐서, 나는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커흡, 무, 뭐라고요?”

“제가 후작님의 집사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남작위는 내려놓고 왔다곤 해도 댁이 왜 내 집사를 해.

“툴루즈 총독직은 어쩌시고요?”

“내려놨습니다!”

“뭐라고요?!”

“말도 마십시오! 제 머리가 다 하얗게 새어버린 것 안 보이십니까? 라파예트 후작령, 크흠. 아니 툴루즈 지방은 후작님 덕분에 그래도 좀 체계가 남았지만, 혁명으로 관리들이 싹 날아가버린 중앙정부는 아주 개판이었습니다! 그치들하고 협력해서 체계 다 다지고 나니까 힘들어서 더는 못 하겠더군요!”

“허허…….”

하긴, 나야 전장을 전전하느라 잘 몰랐지만 혁명 이후의 중앙 정부는 관료들을 한번에 싹 날려버린 탓에 좀 많이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갔지.

그렇다고는 해도 국민의회와 나름 협상해서 앉혀드린 자린데…….

기분은 미묘하지만, 본인이 싫다는데 어쩌겠냐 싶다.

“아니, 근데 이제 좀 편히 쉬려고 내려놓으신 것 아닙니까? 할 일이 없어도 그렇지 왜 내 집사를…….”

그러자 듀몬트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더니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눈으로 소리쳤다.

“후작님, 결혼은 대체 언제 하십니까!”

“예?”

“이러다간 이 늙은이가 유리아 아가씨 뵙기 죄송스러워서 죽지도 못하겠습니다! 빨리 후작님에게 참한 아가씨를 붙여드리고 후작가의 대를 잇는 모습을 봐야지요!”

어지간한 기사도 못 따라갈 배 나온 할아버지의 기세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키텐 백작과 약혼은 했습니다만…….”

“그래서 언제 결혼하시는데요? 아무리 전시라지만, 두 분 나이가 20대가 끝나가는 데도 도통 소식이 없으니 제가 직접 거드려고 여기까지 온 것 아닙니까! 파혼까지 해놓고 혼기가 다 끝나갈 때까지 결혼을 보류해 두다니, 고얀-!”

아니, 그러지 않아도 전쟁도 끝났고 루이스도 성년을 맞이했다.

크리스틴과 루이스가 결정할 일만 남았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조만간-”

“조만간 언제입니까! 라파예트 저택에 남은 이들이 죄다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이대로는 아니 되겠습니다. 이 듀몬트, 후작님께서 후사를 보시는 날까지 곁에 찰싹 달라붙어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는 뱃살을 출렁거리며 열성적으로 떠드는 듀몬트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머리야.

……에리스가 중앙당 의원들 보는 심정이 대충 이런 건가.

이런 식으로 에리스와 공감대가 생길 줄은 몰랐는데.

* * *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수도 판데모니움.

자욱하고 탁한 보랏빛 안개로 뒤덮여, 영원히 해가 뜨지 않는 도시에는 대낮처럼 밝은 조명이 밝혀져 있고 인간의 형상을 한 드론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프라이드’사의 대표이사 바알은 언제나처럼 쪼개진 마왕의 관으로 어깨를 장식한 갑옷을 입은 채, 팔짱을 끼고 판데모니움의 풍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뒤에 있던 순간 이동 마법진이 빛을 발하고-안경 쓴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와, 수녀복을 입은 서큐버스가 나타났다.

“복귀를 환영하지, 바싸고. 당분간은 ‘그리드’사의 대표이사를 정례회의에서 볼 수 있겠군.”

유스틴 폰 비텐펠트로서 수십 년을 보내고 복귀한 바싸고는 안경을 추워 올리며 답했다.

“수십 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만이로군, 바알. 나는 제법 임무를 잘 수행했다고 생각하는데…….”

바싸고는 제국의 일개 변경령에 불과했던 크라프테 왕국을 제국의 혼란을 가속시킬 조커로 키워냈다.

크라프테 왕국이 제국에 거둔 승리는 다른 제후들도 자극했고, 그러지 않아도 느슨하던 제국의 중앙집권이 더욱 약해지자 제후들은 너나 할거 없이 군대를 양성하며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큰손이 되어주었다.

꿈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그레모리야 별개로 치더라도 대표이사씩이나 되는 그가 굳이 잠입 요원으로 활동하는 건 다분히 그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취향이지만, 그만한 능력과 성과를 선보인 그가 어비스 코퍼레이션 본국을 길게 비우고도 그리드 사의 대표이사로 남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바싸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아무래도 본사는 딱히 그러지 못했던 모양이야.”

바알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였지만, 살짝 표정을 굳혔다.

“불확정변수 때문이겠지. 라파예트 후작, 직접 만나도 봤지만, 장군치고 특이하긴 하더군. 하지만 그저 그뿐이었을 텐데, 처리되어야 정상일 준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살아있단 말이야.”

바싸고는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라파예트 후작을 무너트림으로써 가장 이득을 볼 수 있거나, 그에게 복수해야하는 자들의 정보를 넘겼다.

그것도 모자라 인간 따위 우습게 죽일 수 있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극독까지 준비했다.

그럼에도 그걸 다 수습해냈다는 건 인망 이상의 운이 있고, 또 하필이면 극독을 해결해 줄 수 있을 성녀 왕까지 나섰다는 이야기겠지.

“피곤하군, 나는 할 수 있는 걸 다 했는데도 본사에서 실패해 버려서 일을 그르치다니.”

바알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아키텐 백작에게 휘둘린 처지에 할 말은 아닐 터인데, 바싸고.”

“오, 그건 유스틴 폰 비텐펠트로서 상대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바알.”

유스틴 폰 비텐펠트로서의 수족들. 즉 크라프테의 요원들만 움직여야 했기에, 그에게 제약은 상당히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 공작에 한해서는 크리스틴 다키텐을 압도할 수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

결국 아무 기반도 없는 외교전 분야에서 패배한 것은 필연이다.

애초부터 ‘그리드’사의 대표이사로서의 자산을 전부 쓸 수 있었다면 글쎄.

바싸고는 그랬다면 재미있는 대결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픽 웃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튼 큰일이군, 큰일이야. 이 바싸고가 제국의 분열을 일으키고 크라프테를 움직여 프랑지아와의 전쟁을 내는 것까지 무리 없이 해냈는데, 정작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머리’를 담당하는 ‘프라이드’사가 대전략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니 말이야.”

“‘그리드’사가 ‘프라이드’사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건가?”

바알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하자, 그때까지 잠자코 허공을 유영 중이던 그레모리가 잽싸게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진정하는 것입니다~ Love&Peace!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 사내 갈등은 금지! 금지인 것입니다앗! 모두 웃으면서 즐겁게 즐겁게~”

가운데에서 반쯤 의도적으로 허우적거리며 윙크하고 눈웃음을 날리며 애쓰는 서큐버스 덕분에, 둘 모두 기세를 접었다.

“하하하, 그러면 오랜만에 ‘그리드’사를 점검해 봐야겠군. 그러면 꿈속 세계의 산책 즐거웠네, 그레모리.”

“또 이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악취미의 탐욕 씨.”

바싸고는 코웃음을 치고 등을 돌렸다.

그레모리는 그러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허공에서 빙글 몸을 돌려 두 손으로 다리를 잡아당겨 몸을 웅크린 채 바알을 바라보았다.

“바알, 요새 너무 까칠한 것입니다아-”

바알은 그레모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레모리, 네가 본 라파예트 후작은 어땠지.”

“넹?”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설립으로부터 400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프라이드’ 사의 전력 평가와 예측이 이토록 번번이 빗나간 적은 지금껏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라파예트 후작은 분명히 내전 초기에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혜성처럼 나타나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준비한 내전의 시나리오를 틀어버렸고, 그로 인해 혁명을 이용해 중앙 대륙에서 이익을 취하려던 그들의 계획은 송두리째 박살나 버렸다.

결국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혁명으로 얻을 이득을 포기하더라도 제국이 이기는 것으로 라파예트 후작을 제거하고 프랑지아를 꺾으려고 했다.

적어도 그들이 판단하기에, 제국에 제공한 무기는 충분히 그걸 가능하게 할 수준이었다. 암살자들의 극독도 있었고.

그럼에도 라파예트 후작은 이겨냈고, 심지어 그들의 주요 재료 수급원인 이베리카 반도에까지 개입해서 파이몬을 패퇴시켜버렸다.

그 결과 라파예트 후작은 더 이상 단순한 변수 따위를 넘어선 존재가 되었다.

그로 인해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긴 시간 대륙에 심어둔 많은 커넥션이 날아가 버렸고, 제국의 황후가 그들과의 거래를 끊어버리며 수입과 수출도 반토막이 났다.

결국 그들은 가진 최강의 패를 동원했다.

그러나 제국의 분열과 환란을 위해 키워온 패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잡아내려고 했던 시도마저, 결국 실패해버렸다.

“실패할 리가 없는 준비를 했음에도, 매번 실패한다. 이해할 수가 없어.”

그들은 분명히 프랑지아의 전력을 제대로 평가했다. 그러나 저들은 매번의 싸움마다 이전에 보여준 전력을 한참 넘어서는 위력을 보였다.

성녀왕 에실리스테, 아키텐 백작, 미르보 백작, 그 외에도 프랑지아에 위협적인 요소야 많다지만, 결국 그들의 구심점이자 초기부터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계획을 망쳐놓듯이 움직이는 자는 하나.

“피에르 드 라파예트는 대체 어떻게 매번 당사의 예상을 깨고 계획을 파탄 내는 거지?”

그레모리는 미묘한 미소를 흘리더니 답했다.

“글쎄요오- 신에게 사랑이라도 받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아-”

바알은 코웃음을 쳤으나, 그레모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바알, 이제라도 방침을 좀 바꿔보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아-? 슬슬 위험수위인 것입니다아. 저들을 상대로 우위를 점해서 이득 보는 것이 더 이상 어렵다면, 슬슬 적절히 협력으로오-”

“네가 인간들의 성녀였던 건 벌써 수백 년 전의 일일 터인데, 그레모리. 아직도 저들에게 감정이입이라도 하는 건가?”

그레모리는 입을 다물었다.

악마들의 ‘교만’, 또는 ‘긍지’.

‘프라이드’사의 대표이사 바알은 간단하게 단언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아직도 저 열등한 대륙의 종족들에게 확고한 기술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저들은 언제나 우리의 꼭두각시였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패권에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배제해야 하는 법.

바알은 그대로 그레모리에게서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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