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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85화 (185/258)

185화. 크라프테 전쟁 - 승자와 패자 (3)

카이제린 체칠리아는 에리스의 답을 듣고는 천천히 눈을 내리 감았다.

“그래, 그렇구나.”

그러고는 천천히 눈을 떠-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지치고 처연한 얼굴로 말했다.

“……프랑지아의, 여왕 폐하.”

“말씀하세요, 카이제린 체칠리아.”

에리스의 답에, 체칠리아는 느릿하게 물었다.

“이웃나라의 여왕이자 성녀로서, 제 남편의 장례식에 참석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국민에 의해 추대된 여왕이라서 바로 긍정해 드릴 수 없어요. 그래도, 허락만 받는다면 기꺼이 참석할게요.”

에리스의 답을 들은 체칠리아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잔혹합니다.”

“네?”

에리스가 눈을 깜빡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해서, 체칠리아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대는 끝내 이겨냈습니다. 그것을 솔직하게 축하해 줄 수 없는 내가 처량하고, 그런 나에게 분노조차 해주지 않는 그대가…….”

체칠리아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멈추고, 그대로 에리스에게 손을 뻗었다.

“아.”

에리스는 움찔했지만, 체칠리아는 그런 그녀를 가볍게 포옹할 뿐이었다.

“기다리마, 동생아.”

차라리 마음껏 질투하고 미워해도 될 존재였더라면.

그랬더라면, 체칠리아는 증오심을 품은 채 복수를 맹세하며 원동력을 얻었을 텐데.

차라리 저 고향에서 버려질 때 심장마저 버려두고 왔더라면.

그랬더라면, 그저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사랑을 속삭였을 뿐인 남편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지도 못했을 것을.

여기까지 와서, 그 숱한 피를 흩뿌려놓고.

어떤 가증스러운 정이 남아 이 무구한 성녀를 염려하면서도, 진작에 죽어 썩지도 못하고 있을 남편을 위해 와주기를 바라나.

프랑지아 출신 황후라며 그녀를 멸시하던 자들이 처음으로 그녀를 칭송하던 순간의 쾌감과 만족감이, 누구보다도 위대한 황후가 되겠다고 다짐하던 젊은 시절의 결심만이 아득하게 느껴져서.

무어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른 채 당혹스러워하는 에리스에게, 그녀의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의 이복자매가 기원하듯 속삭였다.

“부디, 너는 변하지 말거라.”

* * *

크라프테 왕국의 수도, 미텔마르크.

평화 협상이 체결되고, 살아남은 크라프테의 군인들은 귀국했다.

엄정한 규율과 위풍당당하던 기세 따위는 없다.

인간성을 깎아가면서까지 최강의 군대로 길러진 대신 주어진 자부심과 명예를 잃은 그들은 평범한 패잔병에 불과했다.

다치고 상처 입은, 지친 군인들이 힘없이 도시로 돌아왔다.

돌아온 이들만큼이나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많아, 도시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개중에 미텔마르크를 구원하고 노던 연합 왕국과 반란군을 밀어낸 하인리히 왕세자를 칭송하는 자들은 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대왕을 칭송하고, 최강의 크라프테군을 자부심에 찬 눈으로 보는 자들은 더는 없다.

전사 통보를 받고도 제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어, 굳이 귀환 행렬을 맞이하러 나와 눈물을 흘리며 있을 리 없는 아들을 찾는 가족들만이 있다.

카를 2세는 그런 시가지의 풍경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모르지는 않았다.

그의 행동은 그저 폭군의 것.

크라프테의 국왕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에 남을 위대한 명장으로 남기 위해 벌인 행동.

그마저도 결국 패배했다면, 당연히 비난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고 있다고 해도.

그를 칭송하고 그에게 환호하던 자들이 돌변하여 싸늘한 원망과 불신 어린 시선을 보내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은.

“덧없구나.”

카를 2세는 그저 허허로이 웃었다.

* * *

군대를 해산시킨 카를 2세는 그의 별궁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그가 시간을 보내던 2층에 도착한 카를 2세는 천천히 그가 항상 밖을 내다보던 발코니로 나섰다.

언제나 그가 시간을 보내던 자리에서, 언제나와 같이 그의 지휘봉을 두 손으로 짚고 섰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고, 연병장과 병영만이 있는 별궁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언제나, 이곳에서 전쟁을 준비했다.

언제나, 이곳에서 도전을 준비했다.

제국을 꺾었을 때도 불완전한 승리라 여겼기에.

더 크고 위대한 승리를 꿈꾸며, 그의 일생일대의 도전을 기다려 왔다.

단 한번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 서지 않고, 이 자리에 꼿꼿이 서서.

그랬기에 준비할 전쟁도, 기다리는 도전도.

그의 꿈을 위해 인간성을 마모시켜가면서까지 스스로를 극한까지 단련하던 군대의 모습조차 없어진 별궁은.

더 이상 그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더 이상 대왕이 아니게 된 카를 2세는 이제는 지휘봉이 아니게 된 그의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천천히 발코니에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조카와 마주했다.

“후회하십니까, 폐하?”

하인리히 왕세자의 물음에, 카를 2세는 찰나의 주저조차 없이 답했다.

“아니, 짐에게 후회는 없노라.”

하인리히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러시다면 답은 얻으셨습니까, 폐하?”

카를 2세는 픽 웃었다.

카이제린 체칠리아가 평화 협상을 주도하기 시작할 때, 그는 실소를 흘렸다.

정치적으로 벌인 전쟁에서 패배하여, 분열 직전까지 간 제국을 간신히 수습해 낸 여자가 다시 또 정치적인 이유로 무리한 일을 벌인다고 여겼다.

그는 저들이 다 이긴 전쟁에서 평화 협상에 응할 리가 없다고 여겼다.

바후아의 불타는 시가지에서 벌어진 강철과 피의 향연을 보았다.

프랑지아가 흘린 피를, 그들의 눈에 가득한 전의를 직접 눈에 새겼다.

끝내 그가 준비한 모든 정병을, 숨겨놓았던 비수마저 정면으로 깨부수고 그에게 패배를 안긴 라파예트 후작을 보았다.

그러나 카를 2세가 인정한 호적수는 그가 제대로 된 적수로조차 여기지 않은 카이제린의 손을 잡아, 결국 평화 협상을 체결했다.

그로 인해 제국은 구원받았다.

크라프테 왕국도 구원받았다.

그에게 책임을 다 한 이들을 위해 그 또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끝없이 승리와 명예를 좇아온 그로서는 그런 결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완벽하고도 총체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는가.

이 카를 2세를, 인류 최강의 장군이 이끄는 최강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도, 어째서 현실에 안주하는가.

그래서 그를 꺾은 자에게 찾아가, 답을 구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와의 대화를 상기한 카를 2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

그는 피에르 드 라파예트를 이해할 수 없다.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가 성군임을 감히 부정할 수도 없으나, 그녀에게 공감할 수도 없다.

저들이 말하는 완벽한 승리라는 것은, 그가 일평생 추구해온 길과는 정반대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저들의 길은 그가 추구할 수도 없고, 추구해서도 안 되는 길이기에.

그럼에도 저들은 승자고, 그는 패자다.

그렇기에.

“짐은 짐의 길을 후회하지 않으나, 저들이 옳다.”

카를 2세는 하인리히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니 이 패배도, 이 실패도 짐의 것이다. 짐은 책무를 다했노라, 하인리히.”

전장에서 죽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않은 채, 평화 협상을 체결하고 주민들의 원망을 한 몸에 받으며 귀국했다.

그리함으로써, 최소한 하인리히의 치세는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

“알고 있습니다, 폐하.”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이번에는 카를 2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비텐펠트는, 편히 갔던가?”

하인리히는 답하지 않았다.

-그대는 크라프테 출신도 아니지 않나.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어째서 이제 막 즉위했을 뿐인 짐을 섬기는가? 기반은 있다고 하나, 이 나라는 아직 제국 북부의 변경령에 불과하거늘.

-무릇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면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자신의 능력을 펼쳐 뭐라도 이뤄내고자 하는 탐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렇지요.

그 탐욕과 야망으로 가득 차 있던 눈빛을, 카를 2세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외람되나, 저는 폐하께서도 그만한 자질과 탐욕을 가지고 계신다고 보았습니다.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가는 것이 아니라 물길을 바꾸는 주역이 되고자 한다면, 당연히 폐하 같은 분을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좋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짐과 함께 역사를 바꾸어 보자!

비텐펠트가 없었더라면 크라프테 왕국이 이토록 빠르게 제국에 비견될 강대국이 되지 못했을 터다.

크라프테군을 최강의 군대로 올려놓은 기술적 혁신 중 일부는 그의 아이디어였다.

그런 그가 침공이 임박한 미텔마르크에서 철수 작업을 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지하실에서 불이 나서 죽었다니.

편히 가진 못했겠지.

카를 2세는 피식 웃었다.

“덧없구나, 덧없어.”

그럼에도 그것이 한 번뿐인 인생인 것을.

카를 2세는 천천히 지팡이를 짚으며, 옥좌가 아니라 작전회의를 위해 놓인 긴 테이블로 다가갔다.

닿지 못했다.

그럼에도 도전했다.

승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투쟁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가 바랐던 인생이다.

“……피곤하구나, 하인리히.”

“쉬십시오, 폐하.”

카를 2세는 일평생 그가 벌어진 전쟁과 전투에 대해 토론하며 작전회의를 논하던 자리에 앉았다.

눈을 감자 그의 일평생, 그와 작전회의를 논하고 전장을 거쳐 간 무수한 군인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카를 2세는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군사들에게 말했다.

그러면, 회의를 시작하지.

* * *

하인리히는 천천히 테이블로 다가갔다.

카를 2세는 미소 지은 채, 더는 숨을 쉬지 않는다.

조용히 침묵하던 하인리히는 천천히 모자를 벗어 그의 주군에게 예를 표했다.

한동안 카를 2세를 내려다보던 하인리히는 시종을 부를까 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대왕은 작전 회의 중에 방해받는 것을 원하지 않을 터이니, 잠시간은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인리히는 그대로 대왕을 남겨둔 채, 등을 돌렸다.

일평생 그만을 위한 꿈을 좇다가, 꿈을 끌어안고 익사한 위대한 명장, 이기적인 폭군.

그에게 후회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다.

그에게 배신감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비텐펠트는, 편히 갔던가?

하여, 하인리히는 침묵했다.

하인리히는 그 대신 분노했다.

그가 미텔마르크를 지키기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수도 정부청사의 지하실에서는 화재가 발생했다.

모든 것은 깡그리 타버렸고, 누가 누군지도 알 수 없을 불타버린 사체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운 좋게 탈출한 자들이 비텐펠트와 그의 수하들이 지하실에서 자료를 정리 작업하고 있었다고 증언해 주었기에, 불운한 재상이 함께 타죽었겠거니 여겼을 뿐.

그러나.

뒤늦게 전투에서 이긴 후, 오랫동안 왕가를 섬긴 재상을 애도하고자 제일 먼저 현장에 방문한 하인리히는 보고 말았다.

철창문의 바로 코앞에 엎드린 채 바닥에 못 박힌 듯 단도를 손에 잡은 채 굳어있던 시커먼 숯덩이와.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 바닥을 칼로 긁어내어 새기던 글귀를.

-비텐펠트는 악마였

엉망진창인 글씨였다.

작열통의 어마어마한 고통 속에서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처절하게 새기는 모습이 바로 연상될 만큼.

생각해 보면, 부자연스러운 곳이 많았다.

일국의 재상이면서, 그는 언제나 대왕의 전쟁에 찬성했다. 누구보다 크라프테의 군국화에 찬성했고, 실제로 일부 기여하기도 했다.

대왕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한 이였고 실제로도 유능하여 도움도 되었으나, 정말로 크라프테의 내치를 위하는 자라면 적어도 이번 전쟁에는 반대해야 했다.

그가 찾아낸 모든 포석들, 심지어 적에게 주어진 정보들조차 이걸 대체 어떻게 구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들이 많았다.

그 모든 의혹을 대왕의 즉위 초기부터 그를 보좌해온 크라프테의 영웅적인 재상이라는 신뢰가 덮어버렸을 뿐.

그럼에도, 그가 처음부터 악마였다면.

그렇다면 모든 것이 말이 된다.

비록 쇠퇴해가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은 위태위태한 안정을 유지하던 제국은 크라프테의 부상으로 대혼란에 빠졌다.

크라프테의 군대를 무장시킨 군수품의 대부분은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 구매했다. 제국의 혼란기와 프랑지아의 내전으로 가장 이득을 본 것도 어비스 코퍼레이션이다.

제국에 맞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국력의 한계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대왕은 군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그때도 대왕의 전쟁 목표는 분명히 제국이었다.

제국이 무너졌다고 해서 화살을 프랑지아로 돌리는 것에는 대왕의 희망도 있기는 했으나, 분명히 비텐펠트의 지분이 상당했다.

그의 나라가 애초부터 악마들의 필요에 의해, 악마들의 도움에 의해 끌어올려졌을지도 모른다는 의혹.

있는 것은 심증뿐, 이것은 의혹에 불과하다.

아니, 의혹이어야만 한다.

크라프테의 새로운 왕으로서, 하인리히는 어둡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별궁의 복도를 걸었다.

그럼에도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 악마들이 언젠가 그들의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 그들의 오만과 기만이 창조해낸 군사 국가는 저들에게 총 끝을 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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