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84화 (184/258)

184화. 크라프테 전쟁 - 승자와 패자 (2)

“승전을 축하해요.”

체칠리아는 샴페인을 잔에 따라 건네며 말했다.

“이번에는 권한 내가 민망하지 않게 해주어도 상관없겠죠?”

드워프들의 알프스 왕국에서 권한 차를 매몰차게 거절한 것을 아직까지 기억하는 것이 새삼스럽다 싶어서, 에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잔을 받았다.

“축하주가 아니라 애도주라고 생각할게요.”

체칠리아는 잠시 침묵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생각한다면야.”

체칠리아가 잔을 내밀며 말했다.

“……양국의 평화를 위해.”

에리스가 건배를 받으며 답했다.

“……쓰러진 이들이 신의 품에서 편히 쉬길 기원하며.”

두 이복 자매는 거의 입만 축이고 잔을 내려놓았다.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체칠리아였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프랑지아의 여왕이 되었군요. 기쁘겠어요.”

“……그다지요.”

에리스의 답은 정말로 심드렁하기 그지없어서, 체칠리아는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모두가 탐내는 강대국의 옥좌가 아닙니까.”

“그 강대국을 지배하는 건 국민의회에요. 저는 지배하지 않는 여왕이고요.”

“하.”

체칠리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여기까지 와서 꼭두각시를 자처하면서까지 성녀 행세를 할 생각입니까? 그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신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에리스가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체칠리아는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전쟁에서 그대가 펼친 기적은 말해봐야 입이 아프겠고, 패전한 군대가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최전선에 섰죠. 프랑지아의 백성들이 그대를 두고는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가능한 행동 아닌가요?”

에리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국의 카이제린인 이 나에게도 그만한 영향력은 없을 것을, 그게 실권이 없는 여왕이라. 하물며 이번 전쟁으로 그대를 옹립한 라파예트 후작은 거의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국민의회 따위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도 능히 가능할 터.”

체칠리아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와서도 성녀 놀음이나 하며, 권력에는 아무 흥미도 없다고?”

에리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게 프랑지아 왕위는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고, 짜증 나는 혼담이나 물고 오는 귀찮은 자리에 불과한데요.”

체칠리아는 에리스를 꿰뚫어 보듯이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내가 제국을 위태롭게 만들어가면서까지 탐낸 자리의 무게가, 그대에게는 고작 그 정도뿐이었군요.”

“유감스럽지만 그래요, 언니.”

체칠리아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체칠리아가 말이 없는 사이, 에리스는 샴페인을 홀짝이며 꽤 긴 시간을 보냈다.

줄지 않을 것만 같던 샴페인 잔을 거의 다 비웠을 때쯤, 체칠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원망한다고 했죠.”

-저는 전하를 원망해요. 아마, 제국민들도 그렇겠죠.

에리스는 자신이 한 말을 떠올리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욕심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애도한다고도 했고.”

“그래요.”

체칠리아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전쟁을 끝냈죠?”

“더 많은 피를 흘려봐야 의미가 없으니까요?”

에리스의 즉답에, 체칠리아는 고개를 더 기울였다.

“프랑지아가 크라프테군을 격파하고 제국으로는 들어오지 않은 채 전쟁을 끝내준 덕분에, 나는 이 전쟁으로 잃어야만 했던 것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에리스는 답하지 않았다.

“제국 내에서 툭하면 반기를 들던 제후들을 무력으로 굴복시켜냈고, 크라프테의 참전을 위해 저들에게 약속했던 제위 지지를 도리어 우리가 나서서 평화 협상을 진행하겠다는 조건으로 돌려받았죠.”

체칠리아는 빤히 에리스를 보더니 말했다.

“이 평화 협상으로 가장 많은 걸 얻어낸 건 우습게도, 제국이에요.”

“우리 모두를 위해서 이겨달라고 하신 건 언니예요.”

담담하게 답하는 에리스의 모습에, 체칠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프랑지아인을 위해, 그들 중 하나로서 싸우겠다고 답한 건 너고.”

“뭐가 문제죠? 우리는 전비를 배상금으로 받기로 했어요. 프랑지아의 왕위를 영구적으로 포기하셨고요. 저는 그거면 충분해요.”

“……네 승전을 위한 연회에서도 죽어간 사람들을 애도한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체칠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짝- 짝- 소리내며 손뼉을 쳤다.

에리스가 의아한 눈으로 보는 가운데, 방 안으로 들어선 시녀가 체칠리아의 드레스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지,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에리스는 화들짝 놀라다가, 체칠리아가 벗겨진 드레스 안에 입고 있던 칠흑의 옷을 보고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상복을 입은 제국의 황후가,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사랑한, 못난 남편이 얼마 전에 죽었단다. 동생아.”

“유감이에요…….”

에리스가 반쯤 무의식중에 뱉은 말에, 체칠리아는 웃었다.

“끝까지 성녀처럼 구는구나. 하지만 전쟁을 이어갔다면 황제가 죽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길 수 없었을 테지. 내가 기껏 복속시킨 선제후들의 지지도 전쟁 도중에 황제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 전부 흐지부지되었을 테고.”

웃음을 지은 체칠리아는, 완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에리스를 보며 물었다.

“나는 진정으로 묻고 싶다. 제국을 모래성처럼 무너트리고 이 전쟁에서 쓰러진 이들을 위한 완벽한 승리를 거둘 기회가 있었으나, 네 스스로 그것을 포기하여 ‘나의’ 제국을 지켜준 너는. ……정녕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느냐?”

* * *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선 카를 2세는 여전히 당당했으나, 몸과 얼굴에는 완연하게 지친 기색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만족하십니까?”

그토록 원하던 전쟁을 벌여, 무수한 피를 흩뿌린 끝에 패배로 끝낸 것에 그는 만족하나?

“음, 비교적 만족스러운 전쟁이었노라.”

“그 결과로 대왕 폐하께서 쌓은 명성과 명예는 모조리 실추되었습니다만. 대왕 폐하께서는 명백히 폐하의 왕국을 잘못된 길로 이끄셨습니다.”

“그렇군.”

아니, 이걸 긍정해?

내가 조금 어이가 없어서 입을 헤 벌리자, 대왕이 나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감사를 표하지, 라파예트 후작.”

“……대체 이 대화 어디에 감사할 일이 있었는지요, 폐하?”

“그대는 짐을 꺾었다. 완전한 패배를 안겨주었지. 그리함으로써 짐이 잘못되었음을 명백히 증명해 주었다.”

그게 어디가 감사하다는 거야.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이 인간.

“군대가 국가를 소유했다는 크라프테 왕국의 평을 짐은 퍽 자랑스러워했으나, 하인리히는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제 짐의 조카를 왕으로서 섬길 자들은 짐의 정책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하인리히를 트집 잡을 일이 없겠지.”

“……그것은 폐하의 평생이 부정당한 것과 같을 텐데요.”

“짐 또한 짐의 국가가 정상을 벗어났음을 알고 있었노라. 그런 짐이 실패했다면, 부정당해야겠지. 만약 짐이 그대와 같은 적을 만나지 못하여, 혹은 운이 좋아 성공했다면.”

대왕은 진하게 미소 지었다.

“짐의 방식만이 옳다고 믿는 이들이, 짐의 가르침에 따라 왕국을 계속 이끌어나갔을 것이 아닌가? 짐조차 이렇게 실패했을 진데, 짐의 후대가 짐과 같은 방식으로 나라를 이끌어 나갔다면 결국 언젠가는 파멸이 도래했을 터.”

이 인간은,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네.

감탄을 금하지 못하는 나에게, 대왕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그러니 짐은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네. 짐의 인생에 후회는 없으나, 최소한 짐의 과오는 짐이 끌어안고 가게 해주었으니.”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알겠고, 후대가 그를 따르지 않게 될 것임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는 없다.

카를 2세, 대왕은 결국 이런 인간이다. 아마도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겠지.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라파예트 후작. 짐이 답해주었으니, 그대도 승자로서 아량을 베풀어 짐의 궁금증을 풀어주겠는가?”

“말씀해 보시지요, 폐하.”

카를 2세는 씩 웃더니 입을 열었다.

“짐이었다면 이렇게 무르게 끝내지는 않았을 터다.”

나는 픽 웃으며 답했다.

“악마들에 대항한 전쟁에 참전하라고 왕세자에게 명하신, 크라프테의 대왕이라 불리는 분이 하시기엔 미묘한 말씀이시군요.”

“하하하!”

카를 2세는 웃음을 터트리더니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옳다! 짐의 행동은 그대가 짐과 왕국을 파멸의 위기로 몰아넣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카를 2세는 형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승자에게는 승자의 권리가 있다. 그대가 짐과 크라프테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면, 그대에겐 마땅히 승자로서 패자에게서 취할 것을 취할 권리가 있는 법! 하물며 인류의 최강 자리를 걸고 오직 짐의 야욕을 위해 벌인 전쟁에서 관대한 처사를 베풂은 짐에 대한 모욕이기까지 하다.”

이건 또, 정말 미친 듯이 대단하시네.

이긴 자가 무슨 짓을 하든 정의다 이건가?

“적어도 짐이 본 바로, 그대는 청기사를 완전히 넘어서고 싶어 했노라.”

여기선 나도 움찔했다.

“그 기회가 그대의 손안에 들어왔다. 승기는 명백히 그대들에게 있었으며, 대적에 맞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그대가 원하기만 했다면 크라프테 왕국은 그대들의 군홧발 아래 짓밟혔음이야. 어쩌면 이 중앙대륙 전체가 프랑지아의 깃발 아래 놓이는 것도 능히 가능했을지 모르지.”

대왕은 마치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떠들고 있다.

“그랬더라면 그대는 청기사 따위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로서 남았을 터!”

아니, 이 자는 자신의 나라보다도, 최강자가 이룩한 위대한 제국을 더욱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닿지 않을지라도, 정복할 곳이 있기에 도전한다. 하물며 정복할 수 있고 닿는 곳을 눈앞에 두고, 완벽한 승리를 포기한 채 전쟁을 끝낸다라.”

카를 2세는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가? 일평생 안주를 거부하고 도전해온 자로서, 그런 짐을 꺾은 그대가 현실에 안주하는 선택을 했음에 실망을 금할 수가 없노라.”

“그러신 것치곤 평화 협상에서는 거의 개입하지 않고 서명도 잘만 하셨습니다만?”

카를 2세는 당당하게 답했다.

“그것은 크라프테의 국왕으로서 짐의 책무이니라! 크라프테의 군인들이 짐의 도전에 동참해준 이상, 그대들이 평화 협상을 결정한다면 후대를 위해서라도 짐은 이 전쟁을 끝내고 조카에게 왕국을 물려줄 의무가 있었음이야.”

그리곤, 웃으면서 덧붙였다.

“하나, 내심은 그대의 압도적인 공세를 최후까지 막아내다가 전사하는 최후를 더 기대했노라.”

하.

자신이 파멸해도, 자신의 왕국이 파멸할지라도 전장에서 끝까지 싸우다 죽고 싶어 한 늙은 왕이라.

대왕은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말해보라. 가장 완벽한 승리를, 그대가 넘어서고자 한 청기사를 압도할 위업을 눈앞에 두고 어째서 포기하였는가?”

* * *

에리스는 체칠리아를 빤히 바라보다가 답했다.

“후회하지 않아요.”

체칠리아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에리스가 진심인지 가늠해 보려는 듯, 뚫어보는 듯한 눈빛을 보낼 뿐.

“그래요, 전하의 말대로. 배상금을 받는다고 죽은 이들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아요. 그들의 죽음에 안타깝고, 애도해야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니를 원망하며 전쟁을 계속해도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예요.”

에리스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원망과 피 값을 치르게 하기 위한 전쟁은 더한 원망과 더한 피만 돌려받으니까요. 패전한 제국이 평화 협상으로 오히려 구제받았다고요?”

에리스는 매우 담담한 투로 말했다.

“잘 되었네요. 최소한 후회하지만, 반성은 하지 않는다던 언니가, 언니로 인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니까요.”

“……나는, 내 남편의, 내 아이의 제위를 지켰을 따름이야.”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그 제위를 지키기 위해 쓰러져 간 제국민을 위해 책임을 다해주세요.”

체칠리아는 끝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너는 결국, 끝까지 고고하구나. 내가 탐낸 것에는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제국을 원망하면서도 제국에 복수하려고 들지는 않다니. 그토록 고결한 성녀답게 굴고 싶더냐?”

에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는 대왕에게 답했다.

“제가 꿈꾼 승리는 대왕 폐하의 것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바라는 명예는 대왕 폐하께서 노래하는 영광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왕이 말한 승리, 대왕이 노래하는 영광.

그것은 저 라파엘 발리앙이 원했던 것과 같다.

그러나 피에르 드 라파예트는 발리앙이 아니라 다른 이의 손을 잡았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말했다.

“저는 청기사나 폐하처럼 영광을 좇는 자가 아니라, 지키는 자가 되기를 택했습니다.”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가 말했다.

“그만큼 고결한 것도, 아무런 분노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피바다 위에서 제 개인적인 감정을 풀고 느낄 공허함보다, 살아남은 이들이 찾을 행복을 더 바랄 뿐이에요.”

두 사람이 말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전쟁을 끝냈습니다. 그대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는 이미 우리가 바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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