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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83화 (183/258)

183화. 크라프테 전쟁 - 승자와 패자 (1)

이미 결판이 난 전쟁이다.

제국은 어떻게든 제후들의 반발과 혼란을 수습해 내긴 했으나 내실은 엉망일 테니 내부를 제대로 안정시킬 시간이 필요하다.

크라프테도 핵심 전력인 상비군을 대부분 잃은 시점에 작센-바르샤바 공작의 반란과 노던 연합 왕국의 공세를 감당하며 프랑지아를 상대할 여력 따위는 없다.

우리의 예상대로, 며칠 지나지 않아 제국에서 평화 협상을 열자는 제안이 도착했다.

정작 평화협상 제안을 받은 국민의회에서는 이번 기회에 제국과 크라프테를 제대로 한번 손봐주자는 의견이 꽤 나왔다.

특히나 구시대의 명예 감성이 살아있는 앙쥬 백작과 귀족들이 많은 중앙당에서.

전쟁을 계속해서 저들은 손 봐줘야 한다는 의견을 내는 자들은 대개 혁명을 위협한 국가들이 제대로 된 대가를 치러 본보기가 되어야 하며, 죽어나간 군사들의 목숨 값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탈레랑의 혁명당에서 나온 당론은 반반 정도였는데, 니콜라 브리소 총재의 자유당은 완전히 하나로 일치단결해서 전쟁을 끝내자는 의견을 냈다.

의견은 분분했지만, 에리스가 공식적으로 평화 협상을 지지해 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나와 크리스틴이 평화 협상을 지지하자 중앙당 일부가 입장을 바꾸었다.

그때까지 판단을 유보하던 탈레랑이 못 이기는 척 평화 협상 지지를 선언하자, 국민의회에서도 결국 평화 협상안이 통과되었다.

프랑지아 내부의견 정리가 끝나자마자 평화 협상 일자는 빠르게 잡혔다.

* * *

알자스에서 열린 평화 협상의 결론은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났다.

애초에 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제국과 크라프테고, 괜히 자잘한 조건으로 드잡이질 하다가 결렬이라도 나버리면 피 본다는 걸 잘 아는 저들도 굳이 평화 협상을 길게 끌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좀 의외였던 건, 정작 대왕은 평화 협상에서 거의 나서지 않았다는 것.

평화 협상은 사실상 카이제린 체칠리아가 주도했고, 대왕은 거의 지켜보며 동의를 표하는 정도만 했다.

당연하게도, 게르마니아 제국의 황제도 없다. 명목상은 황제의 건강이 좋지 않아 불참했다는 거긴 한데…….

황제 없는 제국의 평화 협상이라니 이게 뭔가 싶지만, 거기에 누구 하나 의문을 표하지도 항의하지도 않는 걸 보니 참 기묘하다.

아무튼.

에리스,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는 정식으로 프랑지아의 여왕으로 즉위하며, 카이제린 체칠리아와 그 후손은 영구적으로 프랑지아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다.

동시에 게르마니아 제국과 크라프테 왕국은 혁명 프랑지아를 구 프랑지아 왕국을 계승한 정식 국가로서 승인한다.

여기에, 우리는 제국과 크라프테로부터 20년에 걸쳐 프랑지아가 지출한 전비에 해당하는 배상금을 받기로 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별 불만 없이 조건에 동의했다.

정확히는, 불만을 표한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했지만.

“이것이 전부인가? 짐의 국가가 참전한 대가는 정녕 없단 말이더냐.”

노던 연합 왕국의 구스타프 12세가 노성을 냈지만,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반응은 차가웠다.

“외람되나, 국왕 폐하. 프랑지아는 노던 연합 왕국과의 거래 조건을 지켜 해상 봉쇄 해제는 물론이고 막대한 양의 광물 매입까지 그대로 진행했습니다. 허나 폐하의 군대가 전장에서 보여준 활약은 유감스럽게도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크리스틴이 저들을 구워삶는데 들인 돈을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패배했다.

그 덕분에 하인리히 왕세자와 상비군 2만이 빠져서 우리가 시가전에서 대승을 거뒀다는 걸 생각하면 그녀의 돈이 낭비된 건 아니지만, 이 자리에서 이권을 주장하기엔 좀 지나치게 뻔뻔하지 않나?

오히려 우리가 여기 초대해서 함께 평화 협상에 서명하게 해주지 않았다면, 프랑지아와의 전쟁을 끝낸 크라프테에게 그대로 밟힐 상황인데.

“송구하나 점령하지도 못한 영토를 노던 연합 왕국에게 넘겨주기 위해 전쟁을 속행하기엔 이미 많은 전비를 지출하고 피를 흘렸습니다. 폐하께서도 프랑지아의 상황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구스타프 12세의 얼굴은 분노로 들끓었지만, 자신의 야망으로 낸 전쟁에서 능력이 부족했던 것을 왜 우리에게 탓하나?

결국 그도 그 이상으로는 항의하지 못한 채 조약에 서명했다.

그나마 그는 이 회담장에서 정식으로 평화 협상에 서명할 당사자로서 참석이라도 할 수 있었지, 작센 공작과 바르샤바 공작은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그들은 반란군으로서 크라프테군에게 짓밟힐 예정이고, 크라프테는 아마도 그들을 쥐어짜내어 우리에게 낼 배상금을 마련하겠지.

웃기게도, 제국도 반기를 든 제후들에게 항복을 받아낸 상황이니 똑같이 그들을 쥐어짜내서 우리에게 낼 배상금을 만들 테고.

저들 입장에선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한 셈이다.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도 아무튼 우리가 받을 돈만 받으면 그만이니 저걸 막아줄 의리도 이유도 없다.

“……내전부터 시작된, 그 긴 프랑지아의 전쟁이 드디어 완전히 끝이 났구려.”

이번 안건 통과를 주도한 덕분에 국민의회 대표로서 참석한 니콜라 브리소 총재는 카이제린 체칠리아와 크라프테의 대왕 카를 2세, 그리고 프랑지아의 여왕 에리스가 조약에 서명하는 걸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예. 혁명 프랑지아는 이제 당당한 정식 국가로서 인정받았고, 누구도 이에 감히 의문을 품지 못할 겁니다.”

진정한 의미로 구시대의 끝이자, 새로운 프랑지아가 그를 계승했다는 걸 중앙 대륙에서 인정받은 셈이다.

국민의회는 혁명 이후 전쟁으로 보낸 긴 시간 이후 이제야 프랑지아의 정통정부로서 인정 받았다.

브리소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평화 협상 체결을 지지해 주어 고맙소, 후작. 중앙당도 그랬지만, 군 사령관인 그대는 공과 명예를 위해 전쟁을 지속하고 싶어 할 수도 있다고 여겼는데.”

그래, 그가 옳다. 단순히 내 권력을 강화하고 싶었다면, 솔직히 전쟁을 강행하는 것이 맞다.

인류 최강이라던 크라프테군을 붕괴시키고 미텔마르크와 게르만부르크에 프랑지아의 깃발이라도 꽂으면, 나는 청기사 따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전설적인 장군으로 남았을 테니.

하지만, 알바인가?

그 긴 전쟁 동안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을지 모르고, 무엇보다 크리스틴이 하염없이 기다릴 텐데.

나도 그에게 마주 웃어주며 물었다.

“후회하지 않으셨지요?”

-이 어리석은 노인의 독단을.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주시겠소?

브리소 총재의 부탁을 상기하며 한 물음에, 브리소는 편안한 웃음으로 답해주었다.

* * *

조약 체결이 끝나고, 으레 그렇듯 평화 협상 체결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렸다.

노던 연합 왕국의 구스타프 12세는 참석하지 않고 도망치듯 귀국해 버렸지만.

함께 피 터지게 싸운 나라의 지도층이 모여 언제 그랬냐는 듯 만찬을 즐기며 불상사의 재발을 막기 위한 우애를 다진다.

이런 것도 나름 필요한 일이지.

나는 에리스와 카이제린 체칠리아가 둘이서 손님방으로 향하는 것을 흘긋 보았다.

프랑지아에서 제국으로 팔려갔으나 제국을 휘어잡은 황후와, 서출이나 성녀가 되어 혁명이 터진 나라에서 민중에 의해 추대된 여왕.

비록 만남부터 적이긴 했으나, 두 이복자매에겐 알 수 없는 어떤 관계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지.

기껏 평화 협상도 체결해놓고 여기까지 와서 황후가 미쳐서 에리스에게 해코지할 일도 없고, 에리스 본인이 강력한 성녀인데다 보몽 경도 조금 뒤에서 따르고 있다.

별문제야 없겠지.

그렇게 판단 내린 나는 느긋하게 와인을 음미했다.

그러고 있자, 의외의 인물이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승전을 축하합니다, 라파예트 후작.”

“하인리히 왕세자 전하.”

그와 내가 별 접점은 없었는데, 굳이 인사하러 올 줄이야.

나는 굳이 따지자면 잘 나가던 크라프테의 앞길을 제대로 가로막은 원수에 가까울 텐데.

“감사합니다. 저도 왕세자 전하의 전장에서의 활약은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패주한 기병대를 빠르게 수습해서 제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신 결단과 통솔력은 노던 연합 왕국과 반란군을 상대로도 유효했던 모양입니다.”

솔직히 그땐 왕세자 때문에 진짜 질 뻔해서,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선봉으로 뛰어나가야 했지.

하인리히가 꽤 미묘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어서,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진심입니다. 저는 솔직히 노던 연합 왕국의 침공과 반란으로 크라프테 왕국이 위험에 빠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걸 막아내고 평화 협상에서 불리한 조건을 강요받지 않으신 것은 온전히 전하의 역량이니까요. ...아, 추가로 왕세자로 공인 받으신 건 축하드립니다.”

하인리히는 나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의외로군요.”

“무엇이?”

“대왕 폐하께서 약조하신 조항을 순순히 받아들이신 것 말입니다.”

대왕이 걸었던 다소 무리한 요구…….

프랑지아가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전쟁에 돌입할 시 크라프테가 참전한다는 조항에 대해 하인리히 왕세자는 아무런 반발조차 없이 승인했다.

그때 당시에야 질 것 같지 않았을 테고 대왕의 권위도 절대적이니 노골적으로 반발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도 어이없어한 조건이었고 하인리히 왕세자도 마음에 드는 눈치는 아니었는데.

우리가 비교적 관대하게 전비만 부담시키는 조약을 체결해서 저 정도는 용납하는 건가, 아니면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하인리히의 표정을 보자니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인데.

나는 그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아 보여서 얼른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비텐펠트 재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하네. 그 치라면 반드시 여기 나와서 뻔뻔하게 웃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하인리히의 표정은 더 안 좋아졌다.

엥? 뭔데?

“그는…… 불운한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

당당하게 크리스틴에게 선전포고하고, 군사첩보 한정으로는 크리스틴이 도저히 파고들 틈이 없다고 선언하게 만들 정도의 인간이 그렇게 허무하게?

의외지만, 어쩔 수 없지.

“……유감입니다.”

하인리히 왕세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내 크라프테 왕국은 달라질 겁니다, 후작.”

나는 왕세자를 바라보다가, 조금 뜸을 들인 뒤 답했다.

“긍정적인 방향이기를 바라겠습니다.”

하인리히는 픽 웃으며 나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닥해 보이고, 그대로 물러갔다.

그리고 그가 나가기가 무섭게, 익숙한 소리가 났다.

몇 번 들어본,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하지만 그만한 패기와 힘은 없고, 돌아본 곳엔 몰라보게 늙어 보이는 카를 2세가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크라프테의 미래와 나눈 담소는 즐거웠나?”

“흠, 뭐…….”

나는 잠시 생각해 봤지만, 즐거웠냐기엔 글쎄.

애초에 짧았다만…….

“나쁘지 않았습니다, 대왕 폐하.”

내 말을 들은 카를 2세는 싱긋 웃더니 모자를 벗으며 지팡이에 기댄 채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가장 늙은 인류의 명장이, 인류 최고의 명장에게 경의를 표하네. 그대와 전장에서 자웅을 가릴 수 있어 실로 영광이었다네.”

대왕이라 불리던 일국의 지도자가, 일개 후작이자 장군에게 허리를 숙이며 최대의 경의를 표한다.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답했다.

“감사합니다, 대왕 폐하. 그러나 애석하게도, 저는 대왕 폐하께 경의를 표할 수 없습니다.”

내가 돌려준, 상당한 무례라고 할 수 있는 답에도 카를 2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대가 본 짐이 폭군이기에?”

폭군.

그래.

그 불타오르는 바후아 시가지에서 본 크라프테군의 처절함을 기억한다.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믿고 주저하지 않고 따르는 이들을 패로 소모해가며 영광을 쌓아올리는 인간.

내가 그토록 증오하고 또 경멸했던 청기사와 다를 바 없는 행위.

카를 2세, 크라프테의 대왕이라 칭송받던 저 남자는 놀랄 만큼 청기사와 닮아 있었다.

마치, 청기사의 생전에 따라잡지 못한 나에게 그 대신 예비 되어 있던 적이라도 되는 마냥.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대왕 폐하. 저는 제가 섬기는 여왕 폐하께는 몇 번이고, 더 없는 경의를 표할 수 있으나 폐하께는 그럴 수 없습니다.”

카를 2세는 그래도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뻔뻔하게 물어왔다.

“그렇군. 그러나 경의는 표할 수 없더라도, 패자와의 대화에 응해줄 승자로서의 아량은 베풀 수 있겠지?”

그것참, 여러모로 대단한 양반이란 말이지.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답했다.

“레오폴트 대공에게 굳이 저를 데려가주신 그런 아량 말씀이십니까?”

“하하하하!”

카를 2세는 웃음을 터트렸다.

뭐, 좋아.

에리스도 카이제린을 상대하고 있었지?

이것도 전쟁의 연장선이라고 해야 하나?

대적과의 이야기, 확실하게 마무리 짓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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