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크라프테 전쟁 - 전투 이후
내가 깨어난 건 하루가 지난 뒤였다.
중독의 후유증인지, 무리한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에리스의 치료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몸 상태는 그리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몸은 움직이고 책무는 다해야겠다 싶어서 일어나려고 했다가, 기겁한 의무병의 신고로 찾아온 에리스에게 엄청나게 혼났다.
……시가전에서 발생한 사상자들이 많으니 나 하나 완치하겠다고 힘을 쓰는 것도 곤란해서가 반, 내가 좀 괴로워하며 후회하라는 의도 반으로 적당히 치료해 줬는데 그걸 또 움직이려고 든다고.
한참 나를 혼낸 에리스는 여왕으로서 나에게 얌전히 요양할 것을 명하고 나가버렸다. 여왕 폐하께서 그러시라는데 어쩌겠어.
덕분에 나는 얌전히 요양용 막사의 침대에 앉아서, 한가롭게 수북하게 쌓인 과일이나 까먹는 중이었다.
밖에서는 아직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피해가 심각했던 건 분명하지만, 어떻게든 승리했다.
어쨌든 주둔지가 시가지여서 비를 피하며 머물 곳이야 얼마든지 있는 우리와 달리, 크라프테군은 패주하면서 고생 꽤나 하고 있겠지.
일은 못하더라도 다음 계획을 세우려면 최소한 피해 현황 정도는 알아두고 싶은데, 여왕 폐하의 명이랍시고 심지어 부하들도 방문을 안 한다.
그나마 나 때문에 휘말린 샨드라는 멀쩡히 요양하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긴 한데, 혼자 과일이나 먹고 있자니 좀이 쑤시는군.
물론 총사령관 대리인 루이 드제도, 참모장 알렉상드르 베르테르도 유능하다.
그 둘이라면 솔직히 나 없이도 어련히 알아서들 잘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다.
망할 놈들. 군부 수장이 나야, 에리스야.
아무래도 요양이 끝나면 군의 기강을 제대로 잡을 필요성이 있겠어.
아무리 여왕 폐하라지만 전투가 끝났는데 전황 보고도 못 받는 총사령관이라니, 군 꼴이 말이 아니-내 생각은 이쪽으로 오는 발소리에 끊겼다.
물방울을 밟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꽤 빠른 걸음걸이와 그 사람을 따르는 누군가.
대충 듣기에도 에리스 특유의 활기찬 걸음도, 군인 특유의 그것도 아니다.
……누가 이렇게 걷지?
이런 식으로 걷는 사람이 내가 아는 한은-
설마 했는데, 입구 막을 확 걷고 들어선 사람을 본 나는 놀라서 굳어버렸다.
들어선 사람은 말없이 빗물로 흠뻑 젖은 로브를 벗어 수하에게 건네주었고, 수하는 그대로 막사 밖으로 나가버렸다.
“크리스틴?”
지금 전투 끝나고 하루 지났는데 어떻게 여기에?
“……생각보단, 멀쩡해 보이시네요.”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약간 낮게 깔려있어서,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째 기시감이 있는데.
“예전에도 이런 말을 들은 것 같은데요.”
내 말을 들은 크리스틴이 미소 지었다.
미소 짓는데 왜 살벌하게 보이냐…….
“그보다, 어떻게 벌써 여기에 오신 겁니까?”
비도 오고 있어서, 뤼미에르에서도 승전보를 듣기는 했을까 싶은 시점인데.
크리스틴은 나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며 대답했다.
“베르됭 요새에 머무르고 있었어요.”
“뭐라고요?”
베르됭은 바후아의 바로 위다.
바후아가 무너지면 바로 공격받거나 고립될 곳인데, 그런 곳에 있었다고?
“바후아가 포위되면서 연락이 끊길 즈음, 그곳으로 이동해서 머물렀죠. 정보조직을 이용한 지원을 하기에도 그 편이 더 용이하니까요. 제롬 모렐 장군의 보급 파괴전도 보조했었는데, 아직 모르셨군요.”
“그러다가 만에 하나 우리가 무너지기라도 했다면 당신이 위험했습니다. 왜 그렇게 위험한 전선지역까지-”
“크라프테군은 바후아 시가지에 공격을 집중하고 있는데 베르됭이 위험하면 얼마나 위험했겠나요. 실제로 전혀 공격받지 않았어요.”
“그건 결과론일 뿐입니다, 크리스틴, 만약 당신이 위험에 처했으면-”
“당신이 무사한 것도 결과론이죠, 피에르.”
내가 입을 다물자, 내가 앉아있는 침대 바로 앞까지 온 크리스틴은 조용히 무릎 꿇고 나와 눈높이를 맞추더니 입을 열었다.
“적이 빤히 참수작전을 벌이는데, 총사령관이 직접 뛰어나가서 아군이 퇴각할 시간을 벌어주셨다고요.”
“…….”
“결국은 혼자서 비텔스바흐 백작과 제국의 기사들을 상대하다가, 악마의 독에 중독되어서 죽기 직전에 발견되었고.”
……크리스틴의 일이니까.
내 사령부에 심어둔 그녀의 눈이 누군지 일부러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뒤늦게 후회되네.
나는 할 말이 없어져서, 얌전히 그녀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크리스틴은 말없이 몸을 기울여,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왔다.
비를 맞고 와서인가, 그녀의 몸이 차갑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요. 불이라도 피워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가슴팍이 축축하게 젖어왔다.
빗물? 아, 아니.
“크, 크리스틴. 울고 있습니까?”
“매번, 매번 죽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구시네요.”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방법이 없으니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서 그렇게라도 해야 했을 뿐입니다.”
“……그래요, 그랬겠죠. 당신이니까, 그랬을 거예요.”
크리스틴은 목이 멘 목소리로 그렇게 작게 말하더니, 잠시 뒤 내게서 떨어져 나와서 붉어진 눈으로 웃었다.
어째 미소가 섬뜩한데…….
“아랫사람들이 당신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해서 당신이 매번 이렇게 죽을 위기에 처하니, 아랫사람들이 문제인 거겠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크리스틴의 다음 말을 듣고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아니, 사고가 왜 그쪽으로…….
“아무래도 자리에 필요한 능력이 부족한 이들뿐인 것 같으니, 전부 숙청하고 물갈이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노, 농담이죠?”
크리스틴은 나를 빤히 보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답했다.
“당신이 또 이렇게 무모하게 굴다가 정말로 죽어버리면, 농담이 아니게 될 거예요.”
아이고, 머리야.
아키텐의 검은 마녀.
진짜로 별명 값을 해주시겠다는 약혼녀 앞에서 나는 완전히 백기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런 짓은 하지 않도록 하죠. ……애꿎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크리스틴은 그제야 두 팔을 벌려 나를 끌어안더니, 목이 멘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부탁드려요. 정말로, 매번 제가 어떤 심정인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매번 최선을 선택한다고 하는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정말로 죽을 뻔했다.
그레모리에게 한번, 질 드 리오넬에게 한번. 적의 변덕으로 인해 간신히 살았지.
매번 나에게는 최선이지만, 크리스틴은 그럴 때마다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겠지.
나도 어쩔 도리 없이 그녀를 마주 안으며 답했다.
“미안합니다. 이젠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한참 동안 그녀를 어르고 달랜 끝에, 간신히 조금 진정한 크리스틴과 마주하며 농담처럼 덧붙였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아무 죄 없이 열심히 싸운 부하들을 숙청하겠다는 건 좀…….”
정작 크리스틴은 발개진 눈으로 나를 보더니, 굉장히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그러면 당신이 죽으면 저도 따라 죽겠다고 협박해야 했을까요? 그것도 최대한 참아준 거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결국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아, 알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전부 다.”
크리스틴은 그제야 어딘가 섬뜩한 미소 대신, 여유를 찾은 미소를 흘리더니 내 등을 토닥여주며 속삭였다.
“고생 많았어요, 피에르.”
“……고맙습니다, 크리스틴.”
그제야 나도 웃을 수 있었다.
……그건 그거고.
제롬 모렐을 도왔다는 그 며칠 새에 대체 밥은 먹고 다닌 건지, 아니면 비를 맞아서 더 그래 보이는 건지 가녀리게만 느껴지는 그녀가 영 못마땅하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사과 접시에서 사과를 찍어서 그녀에게 건넸다.
“이것도 묘하게 기시감인데, 저보다 당신이 더 환자 같아 보입니다. 이거라도 드시죠.”
크리스틴은 굉장히 미묘한 얼굴로 내가 내민 사과를 보더니, 얌전하게 입으로 받아먹었다.
오, 어쩐 일로 얌전하게-
같은 생각도 잠시.
아삭-
아삭-
일부러 소리를 내기라도 하는 양, 크리스틴이 일부러 천천히 코앞에서 사과를 우물거리며 미소 지었다.
사과를 씹는데 쓸데없이 색기가 넘쳐 보이는 건, 이거 다분히 의도적인 거지?
내가 입을 헤 벌리며 그 광경을 보고 있자, 이내 크리스틴이 두 팔을 둘러 내 목을 끌어당겼다.
입에서 입으로, 혀에서 혀로, 달콤한 과즙과 잘게 부서진 과육이 넘어온다.
저도 모르게 꿀꺽 삼켜버리고 크리스틴의 허리를 끌어안자, 그녀가 찰싹 소리 나게 내 팔을 때렸다.
“어, 어?”
깜짝 놀라서 두 팔을 떼자, 크리스틴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죄를 지으셨으니, 제게 손을 대시는 건 허락하지 않을게요.”
……저러면서 손도 대지 말라니, 벌이 너무 무시무시한데?
“어, 언제까지요?”
저도 모르게 묻자, 크리스틴은 테이블에 놓인 과일들을 가리키면서 진하게 웃었다.
“이 과일들 전부 먹을 때까지요.”
* * *
크라프테의 수도, 미텔마르크.
하인리히 왕세자가 작센-바르샤바 공국의 반란군을 격퇴하고 연이어 노던 연합 왕국군과의 연전을 벌이는 사이.
위치상 작센과 바르샤바, 노던 연합왕국에게 삼면으로 포위당한 형상에 거리도 가까운 미텔마르크는 직접적인 위협이 노출되어 있었다.
덕분에 정부 요인들은 임시수도로 이전을 결정하고, 준비에 한창이었다.
재상 유스틴 폰 비텐펠트가 관리하는 정보조직 또한 그러했다.
고문 도구와 온갖 기밀문서들로 가득한 지하실.
그곳에서 폐기할 건 폐기하고 수정할 건 수정하느라 요원들이 정신이 없는 가운데, 재상 유스틴 폰 비텐펠트가 느긋한 발걸음으로 지하실에 들어왔다.
“이전 준비는 다 되어가나?”
“옛, 재상 각하! 폐기할 서류는 거의 대부분 폐기 완료되었고, 꼭 필요한 서류들은 저쪽에서 이전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래, 그렇군. 수고했네.”
유스틴 폰 비텐펠트는 그를 오랫동안 모셔온 보좌관의 답에 안경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이전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해둔 기밀서류에 불이 붙었다.
“헉?”
“무, 무슨! 어떻게 불이 붙은 거야?”
보좌관과 요원들이 당황하는 사이.
유스틴 폰 비텐펠트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서,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와 동시에 철창이 내려오며 지하실과 계단이 격리되었다.
“재, 재상 각하! 대체 무슨 일을 하신 겁니까?”
거의 십 년 가까이 그를 모셔온 보좌관이 경악하는 가운데, 비텐펠트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는 탐욕을 뭐라고 생각하나?”
“무, 무슨.”
“제물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탐욕? 그것들은 누구나가 탐하지. 누구나가 탐하는 흔한 건 제대로 된 탐욕이라고 할 수 없어.”
비텐펠트가 아리송한 말을 늘어놓는 동안에도, 요원들은 어떻게든 서류에 붙은 불을 끄려고 애썼지만 지하실에서 당장 진화작업에 도움이 되는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다 못한 직원이 외투를 벗어 불을 덮어버렸지만, 불길은 순식간에 그의 외투까지 먹어치웠다.
“펴, 평범한 불이 아니야!”
“콜록, 콜록…….”
그 광경을 보던 보좌관은 떨리는 눈으로 비텐펠트를 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재상 각하! 문을 열어주십시오! 이대로 가다간 전부 다 죽습니다!”
“진정한 탐욕이란, 일찍이 보지 못한 것, 존재하지 않던 것을 보고자 하는 지식욕이라네. 이를테면, 긴 세월 절대적으로 신뢰하던 대상에게 배신당한 자가 보이는 경악과 배신감 같은 것 말이야.”
떨리는 보좌관의 앞에서, 비텐펠트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소개하지, 나의 충실한 보좌관. 이번 ‘유희’의 이름은 유스틴 폰 비텐펠트. 진정한 이름은 바싸고라네. 어비스 코퍼레이션, ‘그리드’사의 대표이사기도 하지.”
비텐펠트, 아니, 바싸고는 보조관의 얼굴이 충격과 배신감, 경악과 공포로 물들어가는 과정을 섬세한 예술작품을 보듯 감상했다.
“마, 말도 안 돼, 노, 농담이시죠. 재상 각하. 갑자기 왜 이런, 무, 문을, 열어주십시오.”
“아, 나쁘지 않군. 솔직히, 우리 경애하는 대왕 폐하께서 어떤 반응을 보여 주실 지가 무척 기대되지만, 본사의 지침 상 그걸 보지 못하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야.”
“거, 거짓말이야, 거짓말. 우, 우리가 악마의…… 말도 안 돼……!”
그 자리에 주저앉은 보좌관이 머리를 쥐어뜯는 것을 보며 킬킬거리고 웃던 바싸고의 옆에서,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가 울렸다.
“여전히 악취미인 것입니다, 바싸고.”
“아, 마중 나와 준 수고에 감사를 표하지, 그레모리.”
“서, 서큐버스! 정말로, 악마……!”
그레모리는 배신감에 휩싸인 보좌관을 흘긋 보고는 바싸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후후후, 그럼, 그동안 수고했네. 너무 새삼스럽게 여기지 말도록. 쓸모를 다한 자는 ‘처분’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악마, 악마-!”
보좌관이 철창을 붙잡고 흔드는 것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은 바싸고가 손가락을 튕기자, 지하실을 뒤덮은 불길이 더욱 거대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때 그를 섬겼던 부하들이 타죽으며 처절하게 내지르는 비명을 음미하며-
“그럼, 오랜만에 꿈의 세계를 거닐어 볼까.”
바싸고는 그레모리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