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78화 (178/258)

178화. 크라프테 전쟁 - 포화의 도시 (9)

“전부 동원해!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전부 총 들려!”

지휘부는 아주 난리가 났다.

“자넨 보직이 뭔가?”

“보급병입니다, 각하!”

“아주 좋아. 지금부터 보병일세. 총 들고 따라와.”

우리는 지휘부에 남아있던 모든 병력을 싹싹 긁어내 머스켓을 들려주었다.

뒤도 없으니, 비전투병과는 물론이고 몸에 붕대를 두른 부상병들도 사지 멀쩡한 자는 죄다 동원하는 수밖에.

갑자기 난장판이 된 지휘부에서 샨드라가 벙 찐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는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와, 이게 다 무슨…….”

“샨드라! 그대의 도움이 필요해! 죽을지도 모르는데, 도와주겠나?”

“오, 그러지 않아도 연락장교로 통역이나 하려니 좀이 쑤시던 참입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샨드라는 오히려 반색하며 나를 따라나섰다.

하여간 전사란 좋구만.

나는 여기저기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군사들 사이에서 참모장 알렉상드르 베르테르를 찾아냈고, 바로 그를 붙잡으며 물었다.

“참모장! 동원은 대충 다 끝나가는 것 같은데, 그래서 다 합치면 병력이 얼마지?”

“동부 방어선의 패잔병들을 합쳐서 총원 3,726명입니다, 후작 각하!”

“보고 드립니다! 172보병연대가 본부에 복귀했습니다! 연대장은 전사! 총 인원 324명입니다!”

다급하게 뛰어온 전령의 보고를 들은 베르테르가 멋쩍게 웃더니 정정했다.

“……이제 4,050명이군요.”

……연대 정원이 천명인데 나머지가 어디 갔을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 없겠지.

나는 간단하게 답했다.

“근사하네.”

“근사하죠.”

나와 베르테르는 서로 마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좋게 생각하자고, 패잔병은 계속 합류하겠지. 그래서 지금 동쪽에서 공격해오고 있는 크라프테군 병력이 어느 정도지?”

“보고가 워낙 중구난방이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만, 추정으로 3만은 넘을 거라고 판단합니다.”

“제국 기사들은?”

“비텔스바흐 백작을 포함해, 대략 100여명 정도인 것 같습니다. 전부 기사일 리는 없고, 정예 흉갑기병이 포함된 숫자겠지요. 어차피 일반병들이 보기엔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요.”

하긴, 그들 눈엔 똑같이 괴물 같으니 기사로만 보이겠지.

“샨드라. 지난 전투에서 저들과 붙어봤을 텐데, 저 정도면 저들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겠지?”

우리가 크라프테군과 결전을 벌일 때 샨드라와 이베리카 형제들은 제국의 증원군과 맞붙었다.

저들의 대략적인 규모 정도는 그때 파악했겠지.

솔직히 여기서 대왕이 또 히든카드를 꺼내면 힘들어지니, 그러면 좋겠는데.

샨드라는 조금 생각하는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마 맞을걸요?”

“…….”

아마 맞을걸요, 라니.

순간 표정 굳을 뻔했지만 샨드라의 자유분방함을 생각하면 뭐, 맞다는 소리겠지.

“뒤는 없다. 각 방면에 증원을 요청했으니 어떻게든 버티면 돼. 지휘는 베르테르, 그대에게 맡기지.”

“적은 빤히 참수 작전인데 총사령관이 전선에 서시려고요?”

다소 어이없다는 베르테르의 물음에, 나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뭐 전투병도 아닌 군사들과 패잔병들에게 총 들려주고, 내가 안전한 뒤에서 막으라고 하면 막아질까?”

“하하, 안 막아지겠죠…….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죠.”

“……자신 없긴 한데.”

포위당하면서 소식이 끊겨 걱정하고 있을 크리스틴을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살아남아야지.

“노력은 해보지. 가자, 샨드라. 그나마 그대가 여기 남은 인원 중 전투에선 가장 믿을 만하군.”

샨드라는 슬며시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거 기쁘네요. 가스통 경이라도 남겨두셨으면 더 의욕적이었을 텐데…….”

“그러게.”

내가 왜 가스통을 보내서 이 고생이람.

남부가 주공이라고 확신하고 남부로 뛰어가버린 미르보도 그렇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야. 우리가 버티면 이기고, 우리가 당하면 진다! 가자!”

* * *

“포가 이동, 서둘러!”

“산탄 포격 준비!”

우리는 헐레벌떡 카로크와 이베리카 형제국이 진격할 통로를 뚫는 데 썼던 대포들을 옮겨왔고, 그것들은 그대로 산탄을 장전한 채 곧 크라프테군이 도착할 동쪽 도로를 겨누었다.

그 사이에도 동부 방어선의 패잔병들이 계속 합류하여 우리 병력도 1만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그래봐야 급조된 방어부대와 패잔병들이 뒤섞인 병력이다.

저들이 크라프테의 강군을 상대로 오래 버텨줄 거라는 기대를 할 순 없으니, 교전이 벌어지기 전에 산탄 포격으로 적을 최대한 줄이려는 것이 내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막상 도로 저편에서 크라프테군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 나는 바로 욕설을 내뱉었다.

“아, 이런 시발.”

달려드는 크라프테군의 앞에, 그들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 혁명군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설마 의도인가?

아군까지 산탄 포격으로 쓸어버릴 수는 없을 테니 일부러 적당히 앞서서 도망치게 내버려 둔 건가?

아니, 그건 지나치다.

제아무리 크라프테군이라도 그런 걸 의도적으로 하기는 어려울 테고, 그냥 그만큼 금박한 전황에 크라프테군의 전진이 빨라서 일어난 일이겠지.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후작 각하?”

“……제길.”

정예도를 차치하더라도 병력 차가 압도적이다. 여기서 산탄 포격이라도 먹이지 않으면 그대로 끝장인데.

그렇다고 도망쳐오는 혁명군까지 싸잡아서 쓸어버리면, 가뜩이나 패잔병과 비전투병들로 가득한 우리 군사들의 사기는?

고민은 짧았다.

“믿는다, 베르테르.”

“예?”

“아군이 다 도망칠 때까지 막고 있을 테니, 신호하면 쏴버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작 각하! 무모-”

“샨드라!”

“네?”

“따라와!”

“어, 엉?”

영문도 모르는 얼굴로도 일단 따라나서는 샨드라를 데리고, 나는 그대로 적진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가전이다. 나름 중앙 시가지 도로라고 해도 공간이 그렇게까지 넓은 게 아니다.

“허, 헉, 후작 각하!”

“멈추지 말고 달려! 방어선에 합류해!”

“아, 알겠습니다!”

나를 보고 기겁하며 도망치다 말고 멈춰 서려는 혁명군을 그대로 떠밀어 보내버리고, 검을 뽑아 들고 달렸다.

“라, 라파예트 후작?!”

뭐야, 왜 크라프테군이 당황해.

당황하며 총검을 들 생각도 못 하는 병사의 몸을 바로 검으로 그어버리자 피가 튀고-흘긋 곁눈질을 하자 샨드라도 그새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춤추듯 날뛰며 크라프테군을 썰어버리고 있다.

“라파예트 후작이다!”

“죽- 크악?”

인간의 팔을 끊어내는 감각도 마치 별것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나는 그 와중에도 빠르게 적들을 살폈다.

기사들, 비텔스바흐 백작은?

“이야- 아악!”

크라프테군이 강군이라고 해봐야 그건 일반 병사들 기준이고, 기사도 아닌 잡병들이 나를 잡을 순 없다.

찌르는 총검을 총 채로 갈라버리고, 팔을 절단하고, 목을 베고, 몸을 가르고, 동료가 도륙 당하는 꼴을 보고 멈칫한 자에겐 단도를 날려 미간에 박아버린다.

나에게 달려들던 크라프테군 십수 명이 순식간에 쓸려버리자, 그 크라프테군도 찰나나마 주춤거리는 것이 보인다.

흘긋 뒤를 돌아보자, 혁명군의 패잔병들은 아직도 대포가 있는 곳까지 달리고 있다.

“느려 터졌네, 진짜!”

나와 샨드라가 정신없이 날뛰며 크라프테군을 도륙 내는 시간이 조금 더 이어지고서야, 나는 뒤늦게 비텔스바흐 백작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참 뒤편에서 검을 든 채, 내가 하는 모양새를 빤히 보고 있는 모습을.

“하.”

기사도 산탄 무서운 줄은 안다 이거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달려드는 크라프테군을 정신없이 베어내느라 호흡이 약간 거칠어졌을 때 즈음 베르테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충분합니다, 후작 각하!”

“엎드려, 샨드라!”

“와, 너무 부려 먹으시네!”

나와 샨드라가 가장 가까운 적병을 걷어차서 날려버리고, 거리를 벌려 바닥에 엎드리기가 무섭게 지축을 뒤흔드는 포성이 터졌다.

나와 샨드라가 눈앞에서 휘젓고 다니는 광경에 정신이 팔려있던 크라프테군은 그대로 산탄의 포화를 얻어맞았다.

정예병이고 뭐고 없이,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모두가 공평하게 피를 흩뿌리며 벌집 신세가 될 뿐.

“하, 잘못하면 나까지 죽을 뻔했네.”

나는 분명히 엎드려서 자세를 최대한 낮췄는데, 바닥을 긁고 지나가는 몇 개의 파편들만으로도 마력 방벽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이 여실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느긋하게 안도하고 있을 시간도 없어서, 나는 산탄 포격이 지나가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났다.

“샨드라, 살아 있나?”

“살아는, 있는데요…….”

뭐?

기겁하며 돌아보자, 샨드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어깨와 등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머리를 보호한 건지 팔에는 파편이 박혀있어서, 가슴이 철렁했다.

“후작님, 인간 맞습니까? 저걸 어떻게 마력 방벽으로 버텨요.”

“……제길, 사과는 나중에 하지!”

내가 샨드라의 역량을 지나치게 고평가한 건가? 아니면 힘이 강해지다 보니 감각을 잃은 건가.

어느 쪽이든 명백한 내 오판에 머리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당황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후작 각하, 적들이 다시 몰려옵니다!”

베르테르의 다급한 외침에, 나도 바로 소리쳤다.

“나도 눈 달려서 알아!”

빤히 앞서 달려가던 동료들이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몰골로 변해버렸는데도 불구하고, 크라프테군은 거의 지연 없이 바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저대로면 포병대의 재장전보다 저들의 도달이 빠르다!

“실례하지.”

나는 바로 샨드라를 안아 들고 방어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와, 편하다. 헤헤, 이렇게 안기는 건 가스통 경에게 받고 싶었는데.”

“……농담이 나오는 걸 보니 다행히 살 만한가 보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혁명군을 살리기 위한 내 무모한 짓에 어울려주다가 다친 샨드라에게 뭐라고 할 낯이 없다.

……이렇게 된 그녀를 보고 놀랄 가스통에게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후작님. 제가 아직 수행이 부족했나 보죠. 왕께선 형제인 후작님을 전력으로 도우라 명하셨으니, 이건 자랑스러운 상처입니다.”

“……그 헌신 꼭 보답해주지. 베르테르! 몇 명 차출해서 샨드라를 남부로 호송해 줘! 여왕 폐하께 치료받아야 해!”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지휘권은 바로 이양합니다!”

나는 샨드라를 베르테르에게 넘겨주고 바로 고개를 돌려 방어선을 살폈다.

산탄 포격에 휩쓸리는 위험을 무릅써가며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다급하게 도망쳐온 군사들은 베르테르의 지휘 아래 잠시 숨을 고르고 대열에 합류했다.

적어도 당장 이들의 눈에는 크라프테군에 대한 두려움보다, 자신들을 구해주기 위해 적진에 뛰어들어 시간을 벌어준 총사령관에 대한 경의가 더 짙어 보인다.

이만하면 할 만하지.

나는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전 부대, 사격 준비!”

“사격 준비-!”

“1열 조준!”

일제히 총을 들어 올리는 혁명군의 기세만큼은 이들이 패잔병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제법 일사불란하다.

산탄 포격에 당한 동료들의 육편과 피가 가득한 도로를 따라 달려드는 크라프테군의 기세는 굉장하지만, 그래봐야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에 불과할 뿐.

“대기해, 대기!”

적들에게 탄약이 없다는 걸 빤히 아는 이상, 최대거리에서 쏠 필요는 없다.

“조금 더!”

“와아아아-!”

“크라프테에 영광을!”

이제는 적들이 외치는 전투 함성도 여과 없이 들려오는 거리가 되고서야, 내가 검을 내리그으며 소리쳤다.

“1열, 발사!”

거리는 고작해야 50m 여기선 제대로만 겨눠도 빗맞히기가 더 힘들다.

머스켓이 일제히 불을 뿜고, 앞장서 달려들던 크라프테군이 맥없이 픽픽 고꾸라진다.

“멈추지 마! 돌격하라!”

“대왕 폐하를 위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세가 꺾이지 않은 채 돌진하려는 크라프테군의 앞에서, 빠르게 지시 내린다.

“1열 앉아, 2열 조준!”

철컥 소리와 함께 총이 겨누어지고-

이제 거리는 겨우 30m가량.

“발사!”

다시금 머스켓들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눈앞까지 다가온 크라프테군을 꿰뚫었다.

지근거리에서 발포된 총탄은 아예 병사를 관통하고 그 뒤에 있는 이들까지 꿰뚫을 정도의 피해를 입혔고, 적들의 대열은 순식간에 구멍투성이로 변했다.

여기선 어차피 기세 싸움이다!

“돌격하라!”

나는 주저 없이 앞장서서 뛰어들었고, 등 뒤에서 거의 지체 없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후작 각하를 따르라!”

“혁명 만세-!”

* * *

동쪽 방어선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의 지붕 위.

라파예트 후작을 선두로, 수적으로 압도적인 크라프테군을 도리어 파고드는 혁명군의 모양새를 내려다보던 질 드 리오넬은 손에 든 단도를 만지작거리다가, 허리춤에 다시 찔러 넣었다.

“……드디어, 인가.”

작게 읊조린 질 드 리오넬은 이내 지붕에서 뛰어내려, 번들거리는 적의와 환란으로 가득한 전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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