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77화 (177/258)

177화. 크라프테 전쟁 - 포화의 도시 (8)

“돌격하라!”

“크라프테에 영광을!”

거대한 바후아 시가지는 비명과 고함을 내지르며 백병전을 치르는 전열보병들에 의해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대왕 폐하를 위해!”

“으, 으아, 막아!”

긴 시가전으로 지칠 대로 지친 혁명군은 평소부터 강도 높은 훈련으로 단련된 크라프테군과의 백병전을 이겨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중심부로 밀려나고 있었다.

4차 방어선이 거의 붕괴되어 가던 시점.

쾅!

엄청난 소음과 함께 시가지의 길목을 가로막아둔 장애물 더미가 무너져 내렸다.

“뭐, 뭐야?”

난데없는 소음에 크라프테군이 당황하는 순간. 먼지 더미를 해치고 거대한 녹색 피부의 오크들이 쏟아져 나왔다.

“오, 오크?! 어, 어디서 나온 거야!”

“당황하지 마라! 후열 부대, 대형을 갖춰! 적들이 파고들지 못하게-”

크라프테군의 우수한 장교들은 그래도 빠르게 대응을 명령했지만, 한창 백병전을 벌이며 난잡하게 흐트러진 군대가 대형을 갖추는 것보다 쿵쿵 소리를 내며 지면을 질주해온 오크들이 그들에게 난입하는 것이 더 빨랐다.

“으, 으아아악!”

인간을 살상하기 위한 총검을 내지르던 크라프테군은 질주해온 기세를 그대로 실은 오크의 몽둥이에 맞고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날았다.

“죽어, 죽…… 엉?”

그렇게 허우적거리며 허공을 날아간 크라프테군이 전방에서 혁명군과 드잡이질을 하던 크라프테군의 옆에 떨어진 순간, 그때까지 밀어붙이던 기세가 단번에 반전되었다.

“우오오오오-!”

“헉, 오, 오크들이 왜 여기에!”

“죽여!”

“측면이 공격받고 있다! 측면을 방어해!”

“누, 누가 방어하란 말이야!”

“지금 측면 맡고 있는 부대가 어디야!”

“제길, 당황하지 마라! 당황하면 대열만 더-”

비좁은 시가지에서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외침은 군사들의 혼란만을 가중시켰고-

“Al-ardho-”

“Akbar!”

애꾸눈의 거대한 오크 카로크가 내지른 전투 함성에 오크들이 일제히 화답하며 시가지 전역을 울리자, 그 대단한 크라프테군조차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인간 기준에서 최강의 군대라는 크라프테군의 백병전 능력도 강대한 근육으로 총검이 잘 먹히지도 않고, 체격과 근력에서 비교가 안 되는 오크들 앞에서는 지극히 열세다.

“아아악-!”

오크들의 몽둥이와 도끼가 휘둘러질 때마다 크라프테군 병사들이 마치 나무토막처럼 허공을 날아다녔다.

“으, 으아아- 막아!”

“네, 네가 막아보던가!”

“물러서지 마라! 개개인으로는 상대할 수 없어도 밀집대형을 갖추면 능히 상대할 수 있다!”

크라프테의 장교단은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부대를 수습해서 버텨보려고 노력했으나-

“반격의 기회다! 혁명군, 돌격하라!”

“혁명 만세!”

“동맹을 도와라!”

위기를 벗어나자마자 빠르게 병력을 수습한 니콜라 네와 루이 드제의 명령에 혁명군이 역습을 벌이기 시작하자 그것마저 한계에 달했다.

“시, 시가전에서 역 포위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

혁명군과 오크들에게 앞뒤에서 포위당한 채 공격받는 상황이 되자 제아무리 대단한 크라프테군도, 유능한 장교단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남은 것은 악과 깡으로 싸우다가 결국 무너져 내리는 것뿐.

* * *

그 비보는 크라프테군 지휘부의 대왕과 장성들에게도 빠르게 전해졌다.

“우회 공격이라고? 어떻게?”

대왕, 카를2세조차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소, 송구하나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확인하지 못한 비밀통로가 있었거나...”

“시가지 한복판에서 우리군 모르게 수천의 오크들을 우회시킬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있는데, 그걸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다?”

대왕은 헛웃음을 흘렸으나,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었다.

“서문과 북문으로 공격해 들어간 군대가 오크들에게 측면을 기습당해 허리가 잘렸습니다. 시가전에서 저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으로 보면 서문과 북문 사이에 저들이 숨겨둔 진군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게르하르트 장군이 암울하게 말했다.

“서문과 북문 방면이 그나마 공세가 가장 효과적으로 진행되던 곳이었습니다. 남문과 동문 방면은 그 데미앙 드 미르보가 지휘하고 있고, 지난 전투에서 확인된 마법사가 밀집된 부대에 마법으로 타격을 주는 등 공세가 지지부진했던 걸 감안하면 저곳마저 무너져버리면 곤란합니다.”

그래도 대왕이 지도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레베레히트 장군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오크들에게 측면을 타격당해 고립된 병력들은 혁명군의 호응까지 생각하면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을 겁니다, 대왕 폐하. 여기서는 추가 증원을 파격하여 오크들을 격퇴하고 아군을 구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한참 동안 지도를 노려보고 있던 대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구원은 불가하다.”

“하, 하오나, 대왕 폐하! 저리 되면 북문과 서문에서 고립된 병력은 전멸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성들의 반발에도, 대왕은 손으로 지도를 짚었다.

“적들이 펼친 서문과 북문의 방어선을 보라. 시가지 안쪽으로 들어서며 둘 사이의 간격이 계속 좁혀지는 형태다.”

처음 진입할 때만 해도 당연히 두 문에 펼쳐진 방어선의 거리는 멀었다.

그게 점점 안으로 들어가며 교묘하게 겹쳐지게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었지만, 도시의 거리라는 것이 꼭 균일하게 정리된 건 아닐 수도 있어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했다.

그러나 남문과 동문의 방어선이 여전히 완전히 이격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면 명백히 수상해 보인다.

애초부터 시가전에서 그런 걸 뚫고 나와 측면을 타격한다는 발상 자체를 할 수 없었으니 문제지.

“서문과 북문의 방어선이 비교적 쉽게 뚫린 것도 의도된 바겠지. 아군을 끌어들여서 저들의 비밀 우회로로 타격하기 위함이었을 것이야.”

“대왕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오나, 그렇다면 더더욱 적의 함정에 빠진 아군을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들을 구한다고 해서 전투를 승리할 수는 없다. 오크들의 우회가 가능했다는 건, 같은 길로 다른 부대가 투입될 수도 있음이야.”

대왕은 지도를 빤히 노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방어선의 구조로 볼 때, 오크들을 공격하는 아군 부대의 측면을 또 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아니, 라파예트 후작이라면 우리의 최후 예비대를 끌어내어 섬멸할 계획까지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결국 크라프테군의 장성들도 더는 이견을 표하지 못했다.

침묵이 흐른 끝에, 게르하르트 장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오나 대왕 폐하, 이리되면 사실상 북문과 서문의 공격부대는 막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고, 공세 실패는 불가피합니다. 하오시면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대왕은 천천히 지도상의 깃발에 손을 뻗으며 답했다.

“함정에 빠졌다고 해서 그걸 만회하는데 급급해지면 결국, 적의 의도대로 끌려갈 뿐이지.”

* * *

바후아 중심지, 혁명군 최종 방어선 사령부.

“니콜라 네 장군과 루이 드제 사령관의 부대가 이베리카군과 함께 적들을 섬멸하고 있습니다!”

“오오오……!”

백병전으로 들어서며 엄청난 사상자 보고에 얼굴이 흙빛이던 참모들이 탄성을 지르는 가운데, 나는 지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행히 이건 제대로 먹혔군요, 후작 각하. 하지만, 역시나 카로크의 오크들을 지원해 줄 예비대는 미리 파견해야 했던 것 아닌지.”

나는 참모장 알렉상드르 베르테르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게 확인된 이후 파견해도 늦지 않는다. 대왕은 그런 식으로 나오지 않을 위험이 커.”

그뿐 아니라 대다수의 참모들이 카로크의 오크들에게 측면이 노출되더라도 크라프테군은 바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므로, 적이 그들을 구원하려 들 것에 대비해 오크들을 도울 예비대를 미리 파견하자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나는 참모들의 모든 건의를 무시해가며 최후 중앙 사령부에 배치해두었다.

“대왕은 전장의 주도자다. 내 전술에 걸려들었다고 해서 그것에 대응한다는 선택지는 고르지 않아.”

“그…… 으음. 그렇습니까.”

알렉상드르 베르테르도 반신반의하는 얼굴이고, 실제로 군사학적으로 보면 여기선 어렵게 잡아낸 적의 허점을 최대한 찔러 서문과 북문의 적군을 전멸시키는 것이 효과적인 전과 확대를 꾀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대왕이고, 의표를 찌르는 전술을 즐겨 쓴다.

심지어 지금까지 대왕이 보여준 모습으로 볼 때, 그는 병력 손실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단 말이지.

“그러니 잠시만 참아주게. 이젠 우리도 예비대 여력 같은 건 없어.”

이제 내 손에 남은 건 기껏해야 혁명 수호대와 그들을 엄호하기 위해 준비한 가스통과 흉갑 기병대의 정예병 정도다.

말이 기병대지 이런 시가전에선 사실상 보행 기사나 다를 바 없으니 신중하게 써야만 할 카드지.

그리고 잠시 뒤, 전령이 달려왔다.

“전령!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 각하의 보고입니다! 남문에서 적의 총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공세이며, 크라프테 왕실 근위대의 깃발을 확인했습니다!”

베르테르와 참모들이 경악하는 얼굴로 나를 보는 가운데, 나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과, 과연 라파예트 후작 각하. 굉장하십니다.”

“설마하니 전멸 위기의 아군을 버리고 도리어 지금껏 크게 밀리지 않은 방어선에 공격을 가할 줄이야…….”

“저자는 약점을 읽는데 도가 텄으니까.”

기실 루이 드제의 북문과 남문보다도 데미앙 드 미르보의 남문과 서문 쪽이 더 위태위태하다.

덜 밀려났다는 건 잘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역으로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자리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남부와 동부 방어선의 거리가 먼 저쪽은 구조 상 오크들의 우회 같은 것도 불가능하니까.

덕분에 에리스까지 저쪽에 나가 있고, 뒤에서 쉴 새 없이 부상병을 치료해서 어떻게든 미르보의 군대가 밀리지 않게 해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좋아, 혁명 수호대와 가스통의 부대를 투입한다. 여왕 폐하께 더는 은폐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전열에서 아군을 보호해달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그동안 아끼고 아껴온 크라프테군의 왕실 근위대지만, 포격으로 입었던 손실이 복구되는 건 아닐 터다.

혁명 수호대라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을 테고, 지젤 다비의 보조를 받는 데미앙은 방어전 한정으로는 혁명군에서 가장 우수한 지휘관이다.

가스통이 무력도 담당할 테니, 이건 이길 수 있겠지.

내 명령을 받은 전령과 참모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던 나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내 손에도 예비대가 없다.

전투는 이제 완전히 장군들과 일선 병사들에게 넘어간 셈이다.

잠시 동안 초조하게 기다리던 나는 결국 허리춤의 검을 잡았다.

“베르테르, 지휘부는 맡기지.”

“후, 후작 각하?”

“나도 제법 싸우는 기사다. 이런 총력전에서 전력은 하나라도 허투루 놀릴 수 없지.”

“끄응, 여왕 폐하께서 몸 사리지 않으신다고 하실 처지가 아니십니다.”

“뭐, 그러게.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전투 결과만 기다리는 것도 체질이 아니라-”

그러나 내가 미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헐레벌떡 뛰어온 전령이 고했다.

“저, 전령!”

“음?”

“도, 동문 방어선이 붕괴! 크라프테군이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총 공격은 남문이었다며?

“비텔스바흐 백작과 제국 기사들이 선봉에서 돌파하고 있습니다! 크라프테군의 예비대도 전부 이쪽으로 투입된 것 같습니다!”

이런, 시발.

크라프테 왕실 근위대의 이름값에 낚인 건가?

데미앙 드 미르보, 그 바보가……!

아니, 아니지. 지젤 다비까지 붙어 있는데 낚였다는 건 그럴만한 총공세처럼 보였다는 거다.

최소한 손실을 감수해가며 맹공을 퍼부은 건 사실이겠지.

저 대왕은 병사들의 목숨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우리를 속인 거다.

……그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냈다는 것에 안도한 나머지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내 쪽이 문제인가.

“이대로면 사령부가 공격받습니다!”

“하하, 하…….”

서문과 북문에서 고립된 병력을 버렸다.

남문에 크라프테 왕실 근위대를 배치하고 너덜너덜한 군대로 총공세를 벌여서 주공으로 착각하게 하고, 정작 핵심 돌파는 동문에서 들어왔다.

“참수 작전이라…….”

크라프테군이 얼마나 희생되든 말든, 사령부를 붕괴시키면 어떻게든 이길 수 있다 이거지.

과연 대왕, 마지막까지 그냥 당하지는 않네.

“동문에 주력부대를 다 쏟아 넣었다면 남문의 공세는 결국 패퇴할 수밖에 없어. 가스통과 미르보에게 이 상황을 전달해.”

“알겠습니다!”

“사령부는 모든 방어선으로 통하고 보급품도 관리 중인 핵심 지역입니다. 이곳을 빼앗기면 그대로 전투에서 패배합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후작 각하?”

나는 드물게 창백하게 질린 채 당황하고 있는 알렉상드르 베르테르를 보며 간단하게 대꾸하고-

“어쩌긴 뭘 어째. 남부에서 곧 증원을 보내올 거다.”

검을 뽑아 들었다.

“있는 전력 전부 긁어모아서, 일단 붙어봐야지. 참수작전은 결국 머리를 자를 수 있어야 성립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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