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76화 (176/258)

176화. 크라프테 전쟁 - 포화의 도시 (7)

크라프테군은 아침이 되기가 무섭게 총공격을 시작했다.

“시간이군.”

“옛! 전 포병대, 포격 개시!”

대왕의 명령에 따라, 연달아 터지는 포성이 금관악기의 웅장한 울림처럼 전장을 뒤덮는다.

“선봉 전 연대에 전진 명령 하달하라!”

“전 부대 진격 개시!”

장애물과 온갖 잔해로 가득한 도시에서 며칠에 걸쳐 벌인 기나긴 시가전으로 전열보병들의 화려한 군복은 헤지고 더러워졌다.

크라프테군 특유의 검은색은 대왕으로 하여금 그들이 연주자의 손에 충분히 사용되어 앤티크한 맛이 깃든 현악기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인들의 발소리가 내는 육중한 울림은 콘트라베이스의 선율과 같다.

일제히 쏘아지는 머스켓의 포화는 첼로의 연주.

적이 사격하기 전에 먼저 장전을 마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총대를 쑤시는 군사들의 발버둥은 신중히 귀를 기울여야만 음미할 수 있는 비올라의 그것과 같다.

그리고-

전장을 가득 매운 군인들의 소리.

“크라프테를 위해!”

“대왕 폐하 만세!”

조국에 대한 충성과 영광을 찾는 용기.

“크하악!”

“아르민! 빌어먹을 놈들!”

“쏴버려! 전부 죽여 버리라고!”

증오와 복수심으로 불타는 들끓는 적의.

그 숱한 훈련과 규율에도 불구하고 결국 드러나고 마는.

“컥, 다리가 아파, 내 다리가…… 주, 죽고 싶지 않아.”

공포와 나약함까지.

그 모든 것이 관현악단의 주역,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협주만큼이나 아름답고 섬세하며 다채롭다.

그 어디에서 이토록 조화로운 선율을 들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디에서 이런 불협화음을 자아낼 수 있단 말인가.

전장.

이곳이 천상이다.

이곳이 지옥이다.

이곳이야말로, 인간의 정수를 담아낸 파멸의 현장.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것이다.

대왕은 그가 일으킨 환란을 감상하다가, 등을 돌려 그를 바라보고 있는 장군들을 마주 보았다.

적은 혁명군, 적수로 부족함이 없다.

아니. 이건 이미 진 전장이고, 진 전투다.

남은 패는 한정적이며, 누가 보더라도 크라프테군이 불리하다.

그럼에도 대왕은 흔들림 없이 그의 지휘봉,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럼, 시작하지.”

공연의 내용이 그들이 기대한 것과는 다를지라도.

이토록 아름답고 지고한 무대에 올랐는데, 그냥 등을 돌려서야 관객에 대한 예의가 아닌 법.

“짐 또한 전력을 내겠다. 그러니 그대들이 낼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쥐어짜내도록.”

그리하면, 이 전장에서 연주될 선율이 이 세상에 다시없을 아름다움과 추악함으로 영원토록 기억될 지니.

“대왕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 * *

“커헉!”

“마르탱!”

“으아, 으아아악-!”

벌써 며칠을 싸웠다.

중간중간 로테이션을 돌려가며 휴식을 취하게 했지만, 적에게 고립된 채 시가지에서 쉴 새 없이 교전을 이어간 군사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다.

북부군 사령관인 루이 드제조차 직접 검을 빼들고 서부의 최전선에 나와, 직접 눈으로 전황을 보며 지휘 중이었다.

“사령관 각하! 니콜라 네 장군의 보고입니다! 북부 방어선이 밀리고 있습니다!”

“이놈들은 대체 지치지도 않나?”

루이 드제는 헛웃음을 흘렸다.

전투가 끝나질 않으니 아직은 집계조차 하지 못했지만, 혁명군만 해도 벌써 사상자 수가 5자리를 넘은지 오래다.

극도로 요새화된 대규모 시가전이니 제아무리 날고기는 크라프테군이라해도 비슷한 손실을 냈을 텐데.

그럼에도 밀리고 밀려서 이미 4차 방어선이다.

라파예트 후작의 지휘부와 최후의 예비대, 그리고 치료소가 있는 시가지 중심부가 5차, 최종방어선이니 이제는 더 물러설 곳도 없다.

니콜라 네는 너무 용맹해서 문제지, 상황을 부풀려서 보고할 자가 아닌데.

“후, 더는 남은 예비대도 없다. 니콜라 네 장군에게 방어선을 최대한 유지하라고 해. 라파예트 후작 각하께-”

드제의 말은 무언가 날아드는 굉음에 끊겼다.

“조심하십시오, 사령관 각하!”

루이 드제는 잽싸게 몸을 날리며 엎드렸고, 이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폭음이 터지며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콜록, 콜록, 후. 멀쩡한 거 보니 오늘도 운이 좋구만.”

루이 드제는 몸을 일으켜 옷에 묻은 흙먼지를 대충 털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전령, 라파예트 후작 각하께 원군을 받아서-”

그리고 방금까지 그와 대화하고 있던 전령이 몸에 파편이 한가득 박힌 채 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멈췄다.

“……아플 새도 없이 갔네.”

루이 드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다급하게 달려와 그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주고 있는 장교에게 말했다.

“네 장군에게 전령 보내. 라파예트 후작에게 원군 받아서 보내줄 테니 좀 더 버티라고. 라파예트 후작은…… 내가 직접 써주지.”

“알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버티면 어떻게든 돼, 버티면.”

라파예트 후작은 그렇게 말했다.

루이 드제도 그렇게 생각한다.

저들의 탄약 수량은 분명 그들보다 한정되어 있다.

장애물을 넘으며 공세를 펴는 입장이니, 저들이 훨씬 빨리 지치는 것도 정상이다.

그러니 버티기만 하면 어떻게든 이길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산발적으로 계속 터져 나오던 총성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어? 뭐야?”

“사령관 각하, 저들이 공세를 멈췄습니다! 휴식하려는 걸까요?”

아니, 그럴 리가. 저들은 벌써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이 정도 찌르다가 물러날 것 같으면 애초에 진작에 후퇴했어야지.

탄약이 부족해지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것도 말이 안 된다. 탄약이 부족했다면 밤사이에 그걸 눈치챘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애초부터 오늘 공세를 하질 말았어야-

그 순간.

“크라프테를 위해!”

“대왕 폐하께 영광을!”

엄폐물에 숨었던 크라프테군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튀어나왔다.

그들 모두의 총 끝에서 번뜩이는 총검이 섬뜩한 빛을 흩뿌리는 모습에 루이 드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허, 헉!”

“미친놈들!”

탄약이 다 떨어졌다고 시가전에서 백병전을 걸어?

다 같이 죽자는 건가!

“저, 전원! 백병전에 대비하라!”

비명 같은 외침을 시작으로, 비명과 고함이 전장을 뒤덮었다.

* * *

“이야아아-!”

“크억, 꺽…….”

달려드는 적을 발길질로 넘어트리고, 그대로 총검을 박아 넣는다.

“으, 으아아-!”

옆에서 갑작스레 터져 나온 고함에 다급하게 총검을 뽑으려다가, 너무 강하게 찔러 넣은 탓에 빠지지 않은 병사는 그대로 총검에 찔려 쓰러졌다.

“아아악!”

“죽어, 개자식아! 죽어!”

가벼운 방아쇠를 당기는 것으로 적에게 죽음을 내리며 살육에 대한 감각을 조금 덜어준, 소위 신사적인 전장은 백병전의 돌입과 동시에 여전히 그곳이 내포한 폭력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아, 안 돼, 안 돼! 살려줘! 살려ㅈ…… 끅, 끄르으윽……!”

“죽어, 죽어, 죽어, 죽으라고-!”

안간힘을 쓰며 총검을 막으려고 애쓰는 병사와 그런 그를 찍어 눌러 결국 죽여버리는 병사.

아이러니하게도 완전무결해 보이던 규율의 크라프테군은 백병전에 돌입해 서로에게 적의와 증오를 쏟아내기 시작하고서야 인간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더 공포스럽다.

“헉, 허억…….”

루이스 다키텐은 그 혼란과 아비규환의 한복판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크라프테를 위해!”

“으앗-!”

루이스는 그에게 총검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크라프테군의 핏발 선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마력을 쏟아부었다.

이내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그에게 달려들던 병사는 움찔거리며 경련하다 그대로 쓰러졌다.

고기타는 듯한 냄새를 남기고.

“윽…….”

루이스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를 지켜줄 레옹 듀랑은 없다.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이 혼란을 틈타 도망쳤나?

“죽어!”

“엇-”

탕!

루이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순간, 총성이 터지고 그에게 달려들던 크라프테군은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마법사가 여기서 뭐하나, 아키텐 중위!”

“다, 다비 소령님.”

“따라와! 백병전에서 마법사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어!”

“이야아- 컥!”

지젤 다비는 권총을 재장전하며 소리치다가, 다른 크라프테군이 달려들자 권총을 그대로 그의 면상에 집어던져버리고 검을 뽑아들었다.

“아, 알겠습니다!”

루이스는 지젤 다비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오고, 분명히 혁명군이 더 많았을 텐데도 크라프테군의 병력이 더 많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미, 밀리고 있습니다, 다비 소령님!”

“나도 보면 알아!”

혁명군의 사기가 높은 편이긴 하지만, 규율과 훈련도에서는 크라프테군을 따라갈 수 없다.

장애물을 낀 사격전이면 몰라도 아예 지근거리에서의 백병전이라면 혁명군의 일반 병사들로는 저들을 당해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대로 우리만 전선에서 후퇴해도 됩니까? 대응책은요?”

“그건-”

지젤은 답하려다 그대로 옆에서 튀어나온 크라프테군이 내지르던 총검을 검으로 쳐내고, 발로 그를 걷어차 넘어트렸다.

지젤은 멈칫하고 있던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뭘 멍하니 있어, 달려!”

“아, 알겠습니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새 백병전의 소음은 멀어져 가고, 이내 지휘부에 도착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지젤과 루이스를 맞이해준 건 데미앙 드 미르보의 노성이었다.

“늦어, 다비!”

“헉, 허억, 송구합니다, 백작 각하. 허억, 각하께서 와주셨으면 더 빨랐을, 허억, 텐데요!”

“크흠, 내가 자리 비우면 누가 지휘해! 아, 이게 아니라. 이봐, 다키텐 중위!”

“예, 옛!”

“네 차례다. 작전 개시 전에 들은 거, 기억하고 있겠지?”

“예? 아, 예!”

루이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레옹 듀랑의 건 때문에 심란해서 깜빡 잊을 뻔했는데, 확실하게 그의 역할이 있었다.

“흠, 이 도련님이 우리 길잡이인가? 영 못 미더워 보이는데.”

루이스는 갑작스럽게 그의 옆에 다가온, 거대한 덩치에 애꾸눈의 오크를 보고는 기겁하며 당황했다.

“어, 어어…….”

다행히 그런 루이스를 당황해서 구해주는 사람이 나왔다.

“아키텐 가문의 도련님이에요, 카로크.”

싱긋 웃으며 끼어든 샨드라의 말에, 카로크는 새삼스럽다는 얼굴이 되더니 이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왕의 형제의 정인. 실례했소. 카로크라고 하오.”

의외로 정중한 오크의 말에 루이스가 조금 안도하고 있자, 카로크가 하나뿐인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준비에 시간이 필요하오, 마법사?”

루이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그만이 할 수 있다고 요청받은 임무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그만이 할 수 있는 일.

그는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레옹 듀랑, 질 드 리오넬을 지워버리고 단호하게 답했다.

“지금 바로 가시죠.”

카로크가 씩 웃으며 답했다.

“흠, 제법 전사의 눈이로군. 그대를 믿을 테니, 우리 형제들을 이끌어 주시오.”

* * *

시가전.

그 특성상 건물과 장애물로 인해 진격로는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 앞뒤로 힘겨루기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는 머스켓의 특성상 적이 작정하고 돌격해온다면 백병전을 피하기란 어려우며, 이런 환경에서 백병전에 진입한다면 승패는 순수한 강함과 정예도에 의해서 결정된다.

측면타격 같은 변수를 동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그러나 저 대왕을 상대한다면, 일반적인 상식을 깨야만 승리할 수 있다.

“왔군.”

나는 카로크와 샨드라가 이끄는 이베리카 형제국의 군대, 그리고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준비는 되었나, 아키텐 중위?”

“네, 후작님.”

“좋아, 시작하지.”

루이스는 심호흡을 하고, 지면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사이 루이스가 마법진을 다 완성시키고 마력을 주입하자 푸른색으로 빛난다.

이걸 보고 있자니,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가며 대마법을 시전하던 폭풍의 마녀가 떠오르는데…….

당연히 루이스는 그런 천재지변 따위를 일으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마법사라서 가능한 기적도 있지.

“좋아, 전 포병대, 발사 준비.”

“옛, 전 포병대, 발사 준비!”

우리는 초전에 산탄포로 쏘고 버린 일부를 제외하고, 교전을 계속하는 시가전에서 쓸 수가 없던 직사포를 한 대 모아두었다.

그들이 일제히 장전하고-

원래라면 길이 아닌, 저택과 잔해로 들어찬 공간을 겨냥한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집들이지만, 저거 사실 이미 반쯤 부숴놓은 것들이거든.

“발사!”

“발사하라!”

지축을 뒤흔드는 포성이 터지고, 허술한 잔해와 반쯤 파괴된 집들이 일제 포격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키텐 중위.”

그리고 그 순간 루이스의 마법진에서부터 비롯된 맹렬한 바람이 휘몰아치자-원래라면 내려앉아 그대로 군대가 지나갈 수 없는 길이 되어야 했을 잔해더미들이 모조리 바람에 휘말려 날아가 버린다.

“……이론상 된다고 듣기는 했는데, 신기하네.”

포격과 맹렬한 강풍 속에, 원래는 없었어야 할 길이 순식간에 생겨났다.

“그럼, 부탁하지.”

내 말을 들은 카로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소리쳤다.

“……왕의 형제들이여!”

아마 밀고 당기던 때 이들을 투입했다면, 백병전 전문인 이들은 크라프테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개죽음당할 뿐이었겠지.

“Al-ardho-”

“Akbar!!”

일제히 외친 오크들이 맹렬하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정예도와 훈련도상, 크라프테군은 백병전에서 혁명군을 압도한다.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들끼리의 이야기고.

기사라면 모를까 개개인의 힘에서 인간이 오크를 당할 수는 없다.

저들은 백병전을 벌여가며 우리를 밀어붙여, 깊이 파고들었다.

여기서 크라프테군은 존재조차 상상할 수 없을 진격로로, 한껏 늘어진 저들의 측면이 전투종족 오크들에게 강타당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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