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75화 (175/258)

175화. 크라프테 전쟁 - 포화의 도시 (6)

질 드 리오넬은 어두운 밤, 인적 없는 바후아 시가지의 지붕 위를 뛰어다녔다.

평야의 야지에 꾸려진 군영이었다면 모를까, 이곳은 모든 인구를 통째로 소개시킨 대도시다.

주력군도 대부분 전선에 배치된 상황에 어둠을 틈타 도망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아니,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도 이건 데미앙 드 미르보의 독단일 터다.

공이라도 세우고 싶었나 보지. 라파예트 후작이었다면 보다 더 치밀한 포위망을 펼쳤을 텐데.

그게 아니어도 상대가 라파예트 후작……. 기사로 이름 높던 그의 아버지를 쓰러트린 자였다면 그리 쉽게 벗어날 수는 없었을 터다.

한참을 빠르게 질주하던 그는 흘긋 시선을 돌려, 지휘부가 위치한 중앙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조금 시끄러워지던 시가지는 이내 다시 조용해진 뒤다.

질은 고요해진 여름밤의 미지근한 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력으로 강화된 그의 눈은 작은 횃불을 든 채 경계를 서는 소수의 병력을 어렵지 않게 관측할 수 있다.

아무리 봐도 시가지 색출보다는 있을지 모를 야습에 대한 경계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크라프테군은 저녁 즈음부터 공세를 멈췄으니, 지금까지 조용한 걸 보면 다음날 총공세를 준비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

아무래도 그에 대한 보고를 받은 라파예트 후작은 첩자 한 명을 잡아들이기 위해 군사들이 잠을 설치는 것보다는 다음날의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질 드 리오넬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아마도 자신은 딱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별로 대단하지 않은, 무시해도 좋을 법한 변수.

이미 오래전에 패망해버린 가문의, 잊혀버린 후예. 이제 와서는 피에르 드 라파예트의 인생에 별로 큰 비중조차 없을 만한 존재.

남서부의 반란을 부추기는 아버지의 행동에, 반대했었다.

차라리 저들에게 복속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었다.

-아들아. 그 긴 내전 동안 리오넬의 문장 아래에서 충성스러운 이들을 너무 많이 잃었다. 그들이 무엇을 지키기 위해 스러졌더냐?

아버지는 그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의 충정을, 그들의 명예를, 선조에게 물려받은 영지를 저버리고 목숨만 건진 들, 그 삶에 무엇이 남느냐.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럼에도, 그에게 리오넬과 함께 스러지라고 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죽음으로써 리오넬의 명예를 지킬 자는 한 사람이면 족하다. ……그리고 리오넬의 이름을 남길 자도 한 사람이면 족하다. 가거라, 가서 살아남아 가문의 대를 이어라.

그렇게 가문을 떠났으나, 세상살이는 녹록지 않았다. 풍족한 귀족가문의 후계자로서 자라온 그에게 방랑생활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고난이었다.

굶어죽기 직전까지 내몰리자, 명예로운 기사가 할 짓이 아니라고 부정했던 용병 일은 이내 그의 업이 되었다.

명예로운 가문의 이름을 잇는다는 생각 따위, 먹고살기도 힘든 거친 삶 속에 금세 희미해져버렸다.

목적지도 없이 방랑하며 칼밥을 먹다가, 아버지가 라파예트 후작과의 결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버지가 죽고도 이미 1년이 지난 뒤였다.

분노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그래도 옛정이 있는 라파예트 후작이 직접 토벌할 거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기에.

그러나 남은 것은 공허함뿐이었다. 명예로운 무가의 자존심도 내려놓고 용병업으로 먹고살며 도피생활을 하는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무시하려고 했다.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그 안경 쓴 악마 같은 자가 나타나서 꺼져가던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힘이 없으니 감정을 삼킨 채 냉소와 관조를 겉으로 두른 사람에게, 그 정당한 결의를 위한 힘을 쥐여주면 그것을 어떤 식으로 휘두르게 될지. 유치하고 교훈적이기만 한, 재미없는 이야기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흥미진진하거든요.

크라프테의 재상 유스틴 폰 비텐펠트.

그에게 레옹 듀랑으로서의 신분과 피에르 드 라파예트, 그리고 크리스틴 다키텐을 뒤흔들 수 있는 정보를 넘긴 자.

그러나 질은 프랑지아에 성공적으로 잠입한 후에는 그의 지시를 듣지 않았다.

반은 타의였다.

어차피 듣고 싶어도, 크리스틴 다키텐이 그를 의심하여 붙여둔 감시의 눈길은 떨어질 줄을 몰랐으니까.

심지어 그가 수차례 루이스 다키텐의 목숨을 구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반은.

-이제 와서?

-이제 와서가 아닙니다, 질 드 리오넬.

비텐펠트가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악마 같은 미소와 함께 속삭인 목소리는 아직까지 귀에 울린다.

-‘드디어’겠지요.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혁명 프랑지아의 고위층이 된 피에르 드 라파예트에게 손을 댈 방법도 없다며 자포자기하고 있던 그가 실제로는 복수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라프테의 힘을 빌려 막상 프랑지아에까지 잠입하고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무시했다.

저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일회용 패로서 사용되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루이스 다키텐은 기대대로 그를 고용해 주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혁명군에 숨어들 수 있었다.

얼마간은 자연스럽게 혁명군의 일원으로서 행동했고, 루이스 다키텐을 지켰다.

그러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루이스 다키텐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순진하고 선량한 소년이었다.

애초부터 가장 필요할 때 뒤통수를 칠 작정으로 접근한 소년이었는데도, 이런 지저분한 마음으로 직접 해치기엔 꺼려질 만큼.

그는 대신, 같은 전장에서 피에르 드 라파예트를 지켜보았다.

차라리, 그가 그저 살아남기 위해 혁명에 편승한 변절자이기를 바랐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옛 동맹을 버리고, 혁명의 기득권이 되어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을 뿐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피에르 드 라파예트의 싸움은 그런 식으로 폄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체제의 귀족 중 그 어느 누가 일개 병사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선봉에 서서 함께 피 흘리며 싸웠던가.

누가 군사들의 피를 아끼기 위해 대도시를 통째로 시가전을 위한 요새로 바꾸는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지?

저런 걸 눈으로 보고도 라파예트 후작을 위선자로 폄하하고, 암살하는 걸로 끝나는 결말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행운을 빕니다, 후작님.

-리오넬이 주었던 도움에는 감사드립니다. ……혹시나 상황이 변하여 생각이 바뀐다면 도울 의향도 있으니, 언제라도 말씀해 주시길.

-고마운 말씀, 기억해두겠습니다.

그렇게 작별할 때, 이해의 차이로 갈라설망정 존중할 만한 자라고 인정했던 것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것을 인정해버리면. 죽어버린 그의 아버지는? 멸망한 그의 가문은?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그가 옳다면 자신이 틀린 자가 되니까.

피에르 드 라파예트는 단순한 암살 따위로 쓰러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쓰러진다면 크라프테의 비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쌓아올린 죄업에 의해.

그가 지켜온 이에 의해 부정당해야만, 그가 잘못된 것이라고 증명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그토록 지켜온 혁명 그 자체에 의해 부정당했을 때, 그의 죄악이 대가를 치를 거라고 생각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크리스틴 다키텐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다는 건 이제 와서는 모르는 자가 없으니, 소중히 여기던 동생을 배신의 형태로 잃은 크리스틴의 절망이야말로 최고의 복수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둘 모두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행동했다.

니콜라 브리소는 입을 다물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를 직접 찾아온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라파예트 후작을 신임하는 길을 택했다.

지젤 다비는…….

-바보 같아도, 이해할 수 없어도 언니의 선택이야. 그 덕분에 배곯지 않고 자란 내가, 언니를 고용한 귀족의 변덕 덕분에 장교가 되어 꿈을 이룬 내가. 그 모든 걸 내 손으로 망쳐버리고 언니의 희생을 바보짓으로 만들라고? 언니가 그런 걸 바라고 목숨을 버렸을 것 같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의 의도를 자기 편할 대로 해석해서 이용하려고 들지 마세요.

이해해버리게 된다면.

그래 버리면, 그는 무엇을 위해.

“하…….”

질 드 리오넬은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눈이 뜨겁고 따갑게 느껴지는 건, 분명 긴 시간 가면을 쓰고 다닌 행동의 부작용에 불과할 테지.

저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일회용 패로서 사용되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것이.

결국은 타인을 꼭두각시로 휘둘러, 그들이 라파예트 후작,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부정해 주기를 바란 것이었다.

-복수를 원하며 죽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 외치는 복수는, 누굴 위한 복수죠? 그건 그저 오갈 곳 없는 자신의 분노를, 그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비열한 짓에 불과해요. 심지어 그걸 부정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사람에게!

살아남아 가문을 이으라며 그를 살려 보내고, 가문의 명예를 끌어안은 채 죽은 아버지가 복수를 원했던가?

그는 왜 이곳에 있지?

그를 믿고 의지하던 선량한 소년을 배신하고, 그의 원수를 부정해 주리라 기대했던 이들에게 오히려 부정당한 채 어둠 속에 홀로 도사리고 앉아서.

길을 잃은 그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만 하는가.

질은 주민이 퇴거되고 요새화 과정에서 담장이 뜯겨 나가, 을씨년스러운 몰골이 된 저택에 들어가 벽에 등을 기댔다.

엉망이 된 실내가 마치 그의 심상을 그대로 그려낸 풍경 같아서, 질 드 리오넬은 핏발이 선 눈으로 칠흑 같은 밤하늘만을 노려보았다.

저 어둠 속에서도, 결국 동은 터올 거다.

원수의 삶이 틀렸다고 증명하지도 못한 그는, 왜 여기에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그는.

여명과 함께 다가올 공세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 * *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일찍 깨어버린 나는 어둑어둑한 성당 안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포격에 의해 산산조각 나버린 천장을 통해 어슴푸레한 새벽의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잠겨있던 신상이 내리쬐는 빛에 의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은 어쩐지 현실감이 없다.

에리스는 나와 함께 있을 때 신성력을 쓰면 쓸수록 느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신성력을 받을수록 강해진다.

내가 신성력과 관계가 있다.

아마도, 내 회귀가.

이쯤 되면, 내 회귀가 신의 의도와 관련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맞는 걸까?

신을 부정하던 성녀, 에리스는 신에게 감사 정도는 드려야 할 것 같다고 말했지.

그럼에도 나는, 신의 앞에서 에리스처럼 기도를 드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신성 교국의 부패와 타락을 보았다.

누구보다 신의 축복을 받아 신도들을 품고, 성녀를 지켜야 할 그들이 에리스를 마녀로 몰아 처형했음을 기억한다.

그것을 바로잡으라는 것이 신의 뜻인가?

그러나 그렇다면, 왜 하필 에리스도 아니고 나지?

신의 의도라는 건 대체 뭘까.

악마인 서큐버스가 성녀만큼이나 강력한 신성력을 사용하는데.

신성력에 의해 회귀했다는 나도 결국 손을 피로 물들이며 여기까지 와서, 사랑하는 사람을 도리어 위험에 빠트리고 또 수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또, 과거에 저지른 행동의 대가를 마주하고 있는데.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후작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푹 쉬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여왕 폐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 것뿐인데요. 보세요, 동이 터오고 있잖아요.”

“……그렇네.”

나는 어느새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들어오고 있는 밝은 빛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심란하세요?”

“……조금?”

레옹 듀랑에 대해서는 크리스틴에게 전달받아 알고 있었다. 크리스틴이 감시도 충분히 붙였다.

벌써 몇 달째 크라프테와의 전쟁에서도 수차례 루이스를 지켜주고, 활약도 그럭저럭해서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는데.

크리스틴의 연락이 닿을 수 없는 시가지 포위전에서 본색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것이 질 드 리오넬이라.

“역시 무리해서라도 잡아들이는 게 좋았을까요?”

“아니, 그 정도로 어설픈 친구는 아닐 겁니다.”

레오 드 리오넬, 선대 리오넬 백작과의 결투는 나도 간신히 이겼다.

그가 인정한 후계자였는 데다 내전에서도 나름대로 이름 높았던 걸 감안하면, 쓸데없이 군사들을 고생시킨다고 잡는다는 보장은 없지.

크라프테의 총공세가 임박한 것이 명백한 상황에, 그것보단 군사들을 조금이라도 더 편히 쉬게 해주는 것이 중요했다.

-리오넬의 땅과 명예는 나와 함께 하니, 리오넬의 씨앗은 그 아이에게....

아니, 어쩌면.

-그 아이만큼은, 모른 척 해주겠소?

그가 이대로 전쟁의 혼란을 틈타 조용히 빠져나가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지.

“……사실 꽤 놀랐어요. 음, 그땐 제가 그저 후원받는 입장이었으니 말해주지 않으신 것도 할 말은 없지만.”

에리스의 목소리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송구합니다, 여왕 폐하.”

“……아니요, 장본인이 괜찮다는데 제가 무어라고 할 자격은 없네요.”

장본인.

나는 자신이 처벌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데미앙 드 미르보를 적당히 겁주고 보낸 다음, 지젤 다비와 한 독대를 떠올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파예트 후작 각하. 엘렌 다비의 일에 대해서 제가 증언하거나 발설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왜? 그대 정도로 유능한 인사라면 그 정보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텐데. 아키텐 백작을 암살하려던 자들에게 분노해 그들을 참살한 내가, 그보다 앞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걸 알면 신이 날 정적들은 많을 텐데. ……내 위선적인 모습에 실망해도 이해할 수 있다만.

-쟝 말로는 귀족 계층 전체의 말살을 주장하던 급진파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인사였습니다. 그의 제거 없이는 라파예트 후작님과 아키텐 백작님이 공화국과 동맹을 맺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시점부터 공화국의 요인을 배후가 발각되는 일 없이 제거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전술적인 수완에 경탄할 정도입니다만.

-……아니, 잠깐만. 그대 언니의 일인데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되나?

기가 질린 내 말에, 지젤 다비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사적으로 쟝 말로는 부모님의 원수였고, 언니가 선택한 일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키텐 백작님이 언니와의 거래를 충실히 이행해주었음은 명백합니다. ……아니면, 후작 각하께서도 일개 평민에 불과한 언니는 아키텐 백작님과 거래를 한 것이 아니라,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 미안하네.

-저는 라파예트 후작님께서 혁명군을 어떻게 이끄시는지 봤습니다. 그리고 라파예트 후작 각하께서 가지신 문제보다, 혁명군에 대한 후작 각하의 기여가 훨씬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혁명군 참모장교로서 이 건에 대해 함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문제가 있는지요?

나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한 채, 지젤 다비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그녀에게 휴식을 명했었다.

……절로 쓴웃음이 번진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다들 절 과대평가해 주는군요.”

니콜라 브리소도, 지젤 다비도.

나와 그리 많이 대화해 보지도 않은 이들이, 여기까지 오면서 쌓아올린 죄업만큼이나 많은 약점을 덮어주며 내가 혁명군을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눈앞에서, 나를 믿는다는 듯이 보랏빛의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에리스까지도.

기껏해야 최악을 피해서 차악을 밟으면서 여기까지 왔을 뿐인 나를.

에리스가 슬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와서, 갑자기 불안하세요?”

“뭐, 그냥.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동안 저지른 일들의 대가를 마주하고 있자니 약해지는 기분입니다.”

……당장 이 파괴된 시가지에만 해도, 내가 더 완벽한 판단을 내릴 수 없어서 쌓인 시체가 몇이나 있을지 셀 수조차 없을 지경이니까.

“음-”

에리스는 나를 보며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머쓱하게 웃어버렸다.

“곤란하네요. 성녀왕씩이나 되는 이름을 달고서도, 무슨 조언을 해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만큼은, 믿는다는 말도 짐만 될 것 같은데.”

“너무 무리하지 마시죠. 성녀왕이니 뭐니 해봐야 아직 어리십니다.”

“뭐예요, 애 취급은! 저 벌써 24살이라고요!”

어, 그러냐.

미안하지만 이쪽은 전생을 합치면 50이 넘는데도 인생 앞에서 나약한 까막눈에 불과하구나.

내가 쓴웃음을 짓고 있자, 에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 많이 변했어요. 자랑하긴 뭐하지만, 처음 후작님을 뵈었을 때에 비해선 좀 낫지 않을까요?”

“아아, 그래. 지금 당장 부상자 치료소에 뛰어가서 마력을 다 쓰고 있지 않을 정도의 인내심은 생겼지, 우리 성녀님.”

에리스는 픽 웃었다.

“후작님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보기에 후작님도 꽤 나아지셨거든요.”

“……그런가?”

“사실 후작님은 조금이고, 크리스틴 언니 쪽이 정말 몰라보게 좋아졌죠. ……누구 덕분에?”

에리스가 장난스럽게 물어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러면 여기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그러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 포성이 울렸다.

“……시작이군. 가실까요, 여왕 폐하.”

“네, 라파예트 후작님. 언제나처럼 같이 가보죠. ……가다 보면, 지금보다도 더 좋아지겠죠? 그러다 보면 뭐-”

에리스는 흘긋, 포격으로 천장이 날아가 버린 성당에 을씨년스럽게 남아있는 신상을 돌아보더니 웃었다.

“언젠가, 우리 둘이 함께 편한 마음으로 신께 진심으로 감사드릴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요?”

나는 허리춤의 검을 잡으며 답했다.

“……그러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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