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크라프테 전쟁 - 포화의 도시 (5)
“아, 그…….”
루이스 다키텐은 뒤늦게 입을 열긴 했지만 변변한 말 한마디 쥐어짜내지 못하고 아무 의미 없이 입만 움찔거리다 다시 닫았다.
뭐라고 해야 하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지?
그곳엔 그와 누님, 그리고 라파예트 후작만이 있었다.
대체 어떻게?
누님이 알려준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모른 척한 채 태연하게 지젤에게 배려 받고 의지하던 자신은.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보였을까.
루이스가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고 있자, 그를 바라보던 지젤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그때 중위가 몇 살이었는지 알고 있어요. 추궁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순수하게 물어보는 거예요.”
지젤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물었다.
“쟝 말로를 독살하고 투신자살한 암살자가, 엘렌 다비였나요?”
루이스는 차마 답하지 못하고,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의뢰한 건, 아키텐 백작님이셨고요?”
이번에는 루이스도 섣불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러나 뻣뻣하게 굳어버린 루이스의 모습이 지젤에게는 오히려 더 확실한 답이 되었다.
“……그래요, 그랬군요.”
반쯤은 자조 섞인 씁쓸한 미소에 루이스의 가슴이 얼어붙는 듯했다.
“소령님의 언니도 동의-”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내뱉다가,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엘렌 다비도 동의했다고? 동의할 수밖에 없었겠지.
동의하지 않았다면 지젤을 포함해서 가족 전원 굶어 죽을 처지였으니까.
누이를 변호하고 싶다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 너무 쓰레기처럼 느껴져서, 루이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젤의 목소리는 한참 뒤에 들려왔다.
“……언니를 직접 만났어요?”
루이스는 반쯤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난 왜 이렇게 멍청할까.
누이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발목만 잡고 있다니.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지젤이 물었다.
“언니는, 어땠나요? ……두려워했나요?”
여기까지 와서 침묵한들 뭐가 달라질까.
루이스는 천천히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아니요.”
자신의 의지를 과대평가한다는 누이의 말을 들었을 때 엘렌 다비가 지었던, 오기에 찬 표정과 고집스러우리만치 의지가 강한 얼굴을 꼭 빼닮은 여성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누님에게 묻더라고요. 자신이 가족들을 위한 돈만 챙겨서 달아나면 어쩌실 거냐고.”
지젤은 픽 웃으며 답했다.
“언니답네.”
그 웃음은 이내 씁쓸함으로 뒤덮였다.
“결국, 우리 때문에 한 거네요.”
“……죄송해요.”
“뭐가요?”
지젤의 물음에, 루이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답했다.
“……알고도, 모른 척 숨기고 있던 거요.”
지젤은 빤히 루이스를 보더니 천천히 루이스에게 다가왔다.
루이스가 조금 움찔하는 사이, 지젤은 그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어-”
루이스는 당황해서 버둥거릴 뻔했지만, 지젤은 이내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이성으로서의 포옹보다는 마치 어린 동생을 보살피는듯한 동작에 루이스가 조금 진정하자, 지젤이 입을 열었다.
“잘 나가는 귀족가 도련님 주제에 쓸데없이 착해빠져선, 그동안 무슨 가슴앓이 했을지 얼굴만 봐도 다 알겠네. 그게 왜 중위 잘못이겠어.”
“어, 그……. 저는, 알고도 숨긴 채…….”
“날 기망하려는 의도로 숨긴 건 아니잖아. 내가 지켜본 루이스 다키텐은 요령 없고, 어리숙하고, 쓸데없이 의욕만 넘쳐서 그 정도로 음험한 사람은 못 되는데, 내가 잘못 봤을까?”
루이스는 미처 답하지 못한 채 터지려는 눈물을 참았다.
지젤도 굳이 루이스의 답을 기다리는 대신,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언니가 선택한 거야. 바보같이, 아무도 부모님의 복수 같은 거 원하지 않았는데, 우릴 위해서.”
“하지만, 결국은…….”
지젤은 슥- 루이스에게서 떨어져 나오더니 씁쓸한 얼굴로 물었다.
“중위도, 결국 우리 언니가 선택권이 없던 희생양에 불과했다고 생각해?”
“그, 그런 말이 아니라-”
“아니면 아키텐 백작님에게 언니는 이용당하고 버린 패에 불과했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아키텐의 검은 마녀는 그런 사람이야?”
“아, 아니에요!”
루이스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이미 죽은 여자의 가족에게 돈을 줄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네 수하들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자신이 받은 명령을 행하기 전에 네 처사를 떠올리겠지. 그리고 저 여자는 많은 패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끼리 면식이 없을 거라는 보장은 있니? 푼돈이 아까워서 목숨을 담보로 한 거래를 지키지 않으면, 자신의 패를 줄이는 격이야.
누이는 루이스를 가르치듯,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나 말은 저렇게 해도, 루이스는 누이가 단순히 그런 이해득실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이해하고 있다.
크리스틴 다키텐은 그녀의 행동에 그럴듯하고 합리적인 명분을 가져다 붙이면서까지 이성을 가장할 뿐, 세간의 평대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루이스를 살려서 키운 것도, 진실을 알면 원한을 품을 수도 있는 지젤 다비에게 굳이 군대로의 길을 열어준 것도 이해득실로 따지면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래, 나는 그거면 돼.”
지젤은 산뜻한 얼굴로 그렇게 답하더니, 이내 루이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마워, 중위. 숨기고 이리저리 돌리며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진실을 알려줘서. ……최소한, 나는 언니가 우릴 위해서 뭘 해줬는지,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알고 추모해 줄 수 있게 되었어.”
루이스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그에게 살짝 웃어주고 고개를 든 지젤이 날카로운 눈으로 변했다.
그것이 전장에서 내내 보여주던 참모장교 ‘다비 소령’의 눈빛이어서, 루이스까지 반사적으로 전장의 감각을 되찾았다.
“그렇게 되었어요, 듀랑 중사. 당신에겐 꽤 유감이겠군요.”
깜짝 놀란 루이스가 시선을 돌리자, 레옹 듀랑이 당연하다는 듯이 막사 입구를 걷어 젖히더니 삐딱하게 섰다.
“이건 참 의외군요. 왜입니까? 크리스틴 다키텐은 당신의 가족을 이용하고 죽인 원수, 루이스 다키텐은 그녀가 애지중지하며 끼고도는 동생인데.”
“듀, 듀랑 중사?”
루이스가 경악하는 가운데, 지젤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당신이라면, 어차피 전부 다 엿들었을 텐데요.”
“엿듣다니요. 다키텐 중위의 호위로서 직분을 다 했을 뿐입니다.”
지젤은 피식 웃었다.
“그 호위 대상을 해치도록 저를 부추기신 분이 퍽이나.”
“뭐…… 라고요?”
루이스가 완전히 얼어붙어 있자, 지젤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키텐 중위, 저자는 위험합니다. 제게 언니의 죽음에 대해 알려준 자가 저자니까요.”
루이스는 더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때 현장에 있던 건 그와 누이, 그리고 라파예트 후작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자가 대체 무슨 수로 그걸 알 수 있지?
레옹 듀랑. 프랑지아 귀족 가문 출신의 용병.
수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실제로 누이도 그걸 우려했다.
루이스도 가능성 정도는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를 지켜주었다.
배신할 만한 기회도, 간자 짓을 할 기회도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지금까지 잠자코 있다가 여기서? 그것도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사실을 어떻게 알고?
“흠, 이것 참. 상처받은 도련님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껄끄럽군요. ……그래도 의아하단 말이죠. 절호의 기회를 그냥 차버린 자유당의 총재도, 원수에게 복수할 기회를 그냥 차버린 당신도. 대체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습니까?”
“원수, 복수라.”
지젤은 입안에서 그 단어를 되뇌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아키텐 백작을 직접 만나봤거든요.”
“오, 그랬습니까? 그건 의외네요. 아키텐 백작의 추천을 받은 인사라는 소문이 그냥 빈말이 아니었다니.”
“의외죠. 애초에 암살자로 쓰고 버린 평민 여자의 가족을 약속대로 보살펴주기만 해도 놀랄 일인데, 아예 장교가 될 수 있도록 뒤를 봐주고 굳이 만나주는 사람 같은 건 보통 없으니까.”
크리스틴 다키텐은 지젤이 장교가 될 수 있도록 의회에서 직접 법안을 통과시켜주기까지 했다.
지젤은 그녀와 단 한번 만났을 때, 그녀가 해준 말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다비 가를 보살펴 주신 분이 백작 각하십니까?
-글쎄요.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합당한 대가를 받고 보살펴 주는 것이겠죠. 그러니 부채의식 같은 건 가질 필요 없어요. ……행운을 빌어요. 지젤 다비.
그 이후에는 어떠한 연락조차 한 적 없지.
정말로 사람을 그저 패로서 쓰고 버리는 여자였다면, 그녀의 부채의식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수족처럼 이용할 수 있었을 텐데.
듀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겨우 그뿐입니까? 한낱 귀족의 변덕스러운 감수성이, 위선이 당신이 복수를 포기하게 만든 이유입니까? 당신과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손을 피로 더럽히고 죽어버린 엘렌 다비는-”
“그 입으로 언니의 이름을 더럽히지 마.”
레옹 듀랑이 조금 놀라는 사이, 지젤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내뱉었다.
“바보 같아도, 이해할 수 없어도 언니의 선택이야. 그 덕분에 배곯지 않고 자란 내가, 언니를 고용한 귀족의 변덕 덕분에 장교가 되어 꿈을 이룬 내가. 그 모든 걸 내 손으로 망쳐버리고 언니의 희생을 바보짓으로 만들라고? 언니가 그런 걸 바라고 목숨을 버렸을 것 같아?”
천천히 웃음기가 지워지는 레옹 듀랑에게,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른 지젤이 천천히 내뱉었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의 의도를 자기 편할 대로 해석해서 이용하려고 들지 마세요.”
레옹 듀랑은 완전히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이 되었다.
“……. 하하, 하하하……. 이미 죽어버린 사람의 의도라…….”
“복수를 원하며 죽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 외치는 복수는, 누굴 위한 복수죠? 그건 그저 오갈 곳 없는 자신의 분노를, 그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비열한 짓에 불과해요. 심지어 그걸 부정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사람에게!”
레옹 듀랑은 한참 동안 멍하니 지젤을 보더니, 천천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사죄드리지요, 지젤 다비 소령. 멋대로 당신에게 제 입장을 투영해 보았습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저들에게 이용당하는 입장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이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시길.”
지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는 용서하죠, 레옹 듀랑. 덕분에 저도 언니의 운명을 알았으니. 하지만-”
지젤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레옹 듀랑에게 겨누었다.
“언니가 용서할 것 같진 않네요. 당신에게 속은 루이스 다키텐 중위도. 어느 쪽이든,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당신 같은 불온분자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얌전히 구속당하는 것을 권장하죠, 레옹 듀랑.”
레옹 듀랑은 별 긴장감 없이 지젤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미안해서라도 얌전히 구속당해드리고 싶지만, 저는 아직 당신처럼 후련하게 납득할 수 없는 것 같군요.”
루이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레옹 듀랑은 강력한 기사다. 지젤은 사관학교 출신 장교니 검과 총 모두 좀 쓰겠지만 그래봐야 그뿐.
그녀와 루이스, 둘만으로 저자를 저지할 수 있을까?
“다비 소령님, 듀랑의 실력은…….”
루이스가 조심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지젤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고 있어요. 우리 둘이선 무리겠죠.”
그러고는 권총을 천장을 향해 들어 올려, 그대로 격발했다.
타앙!
총성이 울려 퍼지고-
“그래서 증원을 준비해두었습니다.”
“쯧.”
레옹 듀랑이 바로 천막에서 몸을 빼고, 루이스와 지젤은 그의 뒤를 따라 달려 나왔다.
밖으로 빠져나오자, 기사와 병사들로 이루어진 병력 수십 명이 레옹 듀랑과 루이스, 그리고 지젤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도한 첩자 놈! ‘딜루스의 수호자’, ‘방어의 명장’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님께서 친히 왕림하였다! 검을 버리고 당장 항복하라!”
“푸흐…….”
레옹 듀랑은 쓴웃음을 흘리더니 지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세상 물정 모르고 휘둘리는 젊은 여자인 줄만 알았는데.”
“그 이전에 혁명군의 참모장교입니다. 빠져나갈 곳은 없으니 항복하세요, 레옹 듀랑.”
“후……. 경의와 사죄를 표하는 의미에서-”
레옹 듀랑은 천천히 목으로 손을 뻗고- 그대로 찌이익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찢어냈다.
인간의 피부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정교한 가면이 바닥에 떨어지고, 데미앙 드 미르보가 기겁하며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어, 어어, 넌-!”
“레이디 다비, 리오넬 백작가의 장남이자 마지막 남은 후예, 질 드 리오넬이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히지 않은 그대에게 경의를. 그리고, 작별입니다.”
“어-”
지젤이 미처 반응도 하기 전에, 질 드 리오넬이 지면을 미끄러지는 듯한 쾌속한 움직임으로 데미앙에게 달려들었다.
놀라서 보병대가 격발한 머스켓 총탄은 그의 마력 방벽에 가볍게 막히고-
“어딜-!”
“하압-!”
기사들이 가로막으려고 들었지만, 그들의 검은 리오넬의 검에 대번에 잘려나가 버렸다.
“우, 우왓?!”
데미앙이 기겁하며 검을 뽑아들고 맞섰지만, 놀라운 힘과 속도로 움직이는 질 드 리오넬의 검격을 막아내기도 버거워 했다.
“엇, 자, 잠깐! 잠깐, 기사가 기, 기습이라니! 비, 비겁하- 으악?”
결국 시작부터 무너진 자세로 힘겹게 버티던 데미앙이 검을 놓치고, 질 드 리오넬의 검격에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데미앙의 눈앞에 강력한 마력 방벽이 펼쳐져 질의 검격을 막아냈다.
질은 픽 웃으며 시선을 뒤로 돌려, 약간 흔들리는 눈빛으로나마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루이스 다키텐을 마주 보았다.
“……제법이군요, 루이스 다키텐. 가여운 도련님, 잠시의 친우.”
“듀랑……!”
질 드 리오넬은 쓴웃음을 짓고, 그대로 신속한 몸놀림으로 데미앙을 지나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헐레벌떡 뛰어온 데미앙이 지젤의 양 어깨를 붙잡고 입에서 침을 튀겼다.
“지, 지, 지젤 다비! 죽을 뻔했잖나! 첩자라며! 왜 명문 무가로 이름 높은 리오넬의 장남이 튀어나와!”
“그, 그러게 그냥 라파예트 후작님께 말씀드리자고 했잖습니까! 백작님으로도 충분하다면서요! 어떻게 그렇게 한심하게 지세요?!”
그야 그냥 혼자 공 세울 생각에 들떠서 그랬지…….
차마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한 데미앙은 질 드 리오넬이 숨어든 어둠을 빤히 보더니, 허탈한 얼굴로 내뱉었다.
“아, 씨……. 망했네…….”
이걸 라파예트 후작에게 뭐라고 보고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