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크라프테 전쟁 - 포화의 도시 (4)
해가 떨어지며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교전은 아침이 되기가 무섭게 다시 시작되었다.
포성, 포성, 그리고 포성.
곡사포의 포탄이 날아가고, 날아들며 내는 공기를 찢는 듯한 굉음이 무수히 반복되자 적이 쏜 것과 아군이 쏜 것이 분간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길, 불붙었어! 어서 꺼!”
“물! 여기 물 가져와!”
나는 막사에 불이 붙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군사들을 흘긋 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려 지도를 바라보았다.
내가 쓰던 사령부 건물도 포격을 맞고 불이 난 통에, 나도 야전 지휘막사에서 지휘 중이다.
“전 방면 모두 2차 방어선에서 철수했고, 3차 방어선에서 교전 중입니다!”
“남부군의 사상자 수가 심각합니다! 여왕 폐하의 지원이 절실합니다!”
“북부군도 만만치 않습니다! 전방위 동시 공격에 사상자 수가-”
사방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오는 혼란한 상황.
주공 따위는 없었다.
저들은 처음부터 저들의 주력인 상비군을 모조리 밀어 넣으며 전방위에서의 맹공을 퍼부었다.
한 방면으로 공세를 집중하면 에리스를 투입해서 집중방어를 할 수 있지만, 다방면에 동시에 공세를 가하면 그럴 수 없다.
적들은 에리스의 몸이 하나밖에 없다는 걸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초장부터 치열한 전투가 이어진 끝에 손실은 상당히 쌓였고, 에리스는 사제들과 함께 정신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병사들의 보호와 치료를 하느라 숨 돌릴 새도 없을 지경이다.
“……적들의 손실도 무시할 수 없을 텐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1방어선을 버리고 물러나며 가한 산탄 포격은 적 주력군에 꽤 심각한 피해를 입혔을 겁니다.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동방 제국군의 포격도 엄청난 손실을 주고 있는데…….”
알렉상드르 베르테르는 나와 마주 보고 있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미친놈들인지, 그런데도 계속 공세를 가하고 있군요.”
“아무리 크라프테군이라도 계속 저럴 수는 없어. 공세 역량의 한계가 올 거다.”
산탄포격, 지뢰, 동방 제국의 곡사포, 도시를 가득 메울 기세로 늘어놓은 장애물과 끝도 없이 이어진 방어선까지.
우리가 펼치는 방어전의 핵심은 대량 살상과 지연전으로 저들의 사기를 뒤흔들어놓는 것이다.
제아무리 대단한 정예군이라고 해도,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인 이상 동료들이 계속 죽어나가고 지치다 보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상대가 대왕이라고 해도 전방위에 제파 공세를 가해 주공이고 뭐고 없이 우리를 동시에 밀어붙여, 에리스를 통한 집중 방어를 피하는 것까지가 한계.
결국 여기까지 끌어들인 난전 상황에서는 사기와 기합으로 밀어붙이는 것 외에는 별 수가 없다.
“지금은 치열하게 버티는 수밖에 없어. 저들도 인간의 군대다. 버티다 보면 결국 저들이 붕괴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어쩌면 그럴 거라고 나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했다. 경험도 치열했던 지난 전투에서 더는 없을 만큼 쌓았고, 가장 유리한 입지에서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싸우고 있다.
“남은 건 혁명군을 믿는 수밖에 없어.”
어쨌거나 야전과 달리 지연전을 목표로 한 방어선을 펼쳐둔 덕분에 전투가 하루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크라프테군의 기세가 완전히 꺾이기 위해선 하루 이틀로는 무리일 거다.
“이제부터는 체력 싸움이 될 테지. 각 부대 사령관들에게 부대들 교대 돌려가며 잠깐씩이라도 쉬게 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하지만, 벌써 탄약 보유량의 1/4을 소모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일제사격을 주고받는 야전과 달리 엄폐물을 끼고 산발적인 사격을 계속 가하는 시가전 특성상 탄약 소비도 심하고, 도시 전체가 포위 공격받고 있으니 보급도 안 된다.
걱정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지만…….
“그건 문제없어. 어차피, 보급은 저쪽도 부족할 테니.”
같은 조건이라면, 작정하고 장기전을 의도하고 탄약을 비축해둔 우리보다 저쪽이 더 괴로울걸.
게다가…….
“원래부터 탄약을 넉넉히 준비하지 않는 크라프테군이 이런 장기간 시가전에 충분한 탄약을 준비했을 가능성도 낮고, 설사 그랬다고 해도 모렐이 있다.”
시가전에서 쓸모가 없는 기병대는 애초부터 외곽에 빼둔 채로 적의 보급로를 계속 괴롭혀주고 있을 거다.
이미 그쪽에는 도가 튼 모렐이니 어련히 잘 하고 있겠지.
나는 내 옆에서 팔짱을 낀 채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외눈의 오크, 카로크를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건, 최후의 카드를 언제 투입하냐인데.
* * *
점령된 바후아 시가지의 외곽은 그대로 크라프테군의 진지이자 막사가 되었다.
“대왕 폐하, 탄약이 벌써 절반 가까이 소진되었습니다.”
“적의 샤쇠르들이 보급부대를 계속해서 습격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병력을 일부 빼서 보급로를 지키는 것이-”
“그렇지 않아도 손실이 막대한데 여기서 뺄 병력이 어디에 있단 말이오?”
지난 전투의 척후전에서 후사르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은 지금, 기병대만으로 프랑지아의 샤쇠르들에게 대응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흉갑기병이 샤쇠르들을 사냥하는데 적합하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후사르들의 지원 속에 몰아넣을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고, 도망 다니며 총질만 해대는 경기병을 중기병만으로 잡기란 요원하니까.
덕분에 크라프테군은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는 내내 보급 파괴전에 도가 튼 제롬 모렐에게 지독하리만치 시달리고 있었다.
지난 전투의 전훈을 빠르게 받아들인 크라프테군은 탄약 소지량을 대폭 늘렸지만, 그것도 이렇게 밤낮없이 치열한 시가전을 이어가는 상황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거의 날밤을 지세우고 눈에 핏대가 선 장군들이 서로 토론하는 광경을 마찬가지로 피로한 얼굴로 바라보던 대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사상자가 많다. 여기서 보급로를 지키겠다고 병력을 빼는 건 불가하지.”
“하오나 대왕 폐하, 이대로면 곧 탄약이 소진될 것입니다.”
대왕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저녁까지만 공세를 계속하고, 밤 동안엔 군사들을 전부 쉬게 한다. 그렇게 하면 소량의 탄약은 남겠지.”
“그렇기는 하겠으나, 그걸로는 다음날 전투를 이어나갈 수준은 되지 못합니다.”
대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난 포격과 지뢰까지 동원한 적의 방어선에 흔들리던 기세는 그가 군사들과 함께 진군하는 모험까지 하면서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초의 타격에서 회복하고도, 적들은 질릴 정도로 엄청나게 요새화된 시가지에서 끊임없이 지연전을 벌이며 시가지 안으로, 더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제아무리 대단한 규율을 자랑하는 크라프테군이라고 해도 이렇게 장애물이 가득하고 혼란한 전장에서까지 대열과 조직력을 유지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난전 상황에서는 결국 크라프테군과 혁명군의 격차도 상당히 좁혀진다.
실로 지독하리만치 그들을 위해 준비해놓은 듯한 전장이 아닌가. 저 라파예트 후작은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그들을 괴롭힐 수 있는지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세를 늦출 수도 없다.
“그러면 공세를 중단하고 보급로를 지키며 기다려야 하는가? 그동안에도 저들의 성녀왕과 사제들은 적의 부상자들을 일으키고 있을 걸세.”
“……소, 송구합니다, 대왕 폐하.”
크라프테군과 프랑지아군의 결정적인 차이는 거기서 기인한다.
저들의 성녀왕은 전장에서 저들을 보호하는 건 물론, 시간만 주어진다면 엄청난 숫자의 부상자들을 치료해낼 수 있다.
그녀만으로도 크라프테에는 없는 절대적인 우위인데, 프랑지아는 심지어 협력적인 대주교 덕분에 적지 않은 수의 사제들까지 전투에 동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최초의 방어선에서 많은 정예상비군을 잃은 크라프테의 입장에서는 저런 식의 재보충을 기대할 수 없다.
“이미 상비군의 손실이 심각하다. 전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전황은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해진다.”
대왕은 지팡이로 지도상의 시가지 중심부를 짚으며 말했다.
“라파예트 후작은 신중하고 부하들의 희생을 신경 쓰는 인사다. 저녁에 공세를 중단하고 우리군을 쉬게 한다고 해도 교대를 돌려가며 경계를 강화하면 했지, 섣불리 유리한 방어 거점을 버리고 역습을 펼치려고 하지는 않을 테지.”
“타당한 판단이십니다, 대왕 폐하.”
“그러니 우리도 최대한 군사들을 쉬게 하고, 다음날 총공세를 편다. 탄약이 소진되면…….”
대왕은 픽 웃었다.
지난 전투에서 물러설 때, 그는 크라프테가 단 한 번의 패배로 여기까지 내몰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물러났다. 그러나, 차라리 그때 승부수를 띄웠다면 어땠을까?
지금에 와서는 의미 없는 가정이다.
대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탄약이 소진되면, 백병전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이런 지저분한 장애물로 가득한 시가지에서 벌이는 산발적인 사격전이라면 그들의 정예도도 많이 퇴색되지만, 백병전에서는 기본적으로 훈련도와 규율이 높은 크라프테군이 유리해진다.
혁명군의 강점인 흉갑기병대는 시가전에서는 그리 도움 되는 존재들이 아니다.
프랑지아 특유의 기사들이란 존재는 신경 쓰이지만, 그렇다고 수가 적은 그들이 수만의 군대가 벌이는 교전에서 결정타를 날릴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그들에게도 나름의 패가 있다.
대왕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알베르트 폰 비텔스바흐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병전 돌입 시에는 제국군도 참여시키겠소. 그대도 저 라파예트 후작에게 볼 일이 있었지?”
“물론입니다, 대왕 폐하. 제국의 기사들이 선봉에 서서 저들을 격멸할 것입니다.”
형형한 눈빛으로 답하는 비텔스바흐 백작에게, 대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군.”
저들이 데려온 제국군이야 이베리카의 야만족들에게도 박살 난 잡병이니 기대할 것이 못 되지만, 비텔스바흐 백작을 비롯한 기사들은 저 프랑지아의 기사들에 맞설 수 있는 재원이니 요긴하다.
대왕은 슬며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분수령이다, 제군. 모든 것을 얻느냐, 아니면 모든 것을 잃느냐. 실로 크라프테다운 전투지. 그렇지 않은가?”
“그러합니다, 대왕 폐하!”
일제히 복창하는 장군들의 앞에서, 대왕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주사위를 던져보지, 제군.”
* * *
쾅- 콰앙-
루이스 다키텐은 거의 노이로제 걸릴 것 같은 폭음에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그러고는 하늘이 이제야 막 어두워진 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피곤한 얼굴로 손을 들어 눈가를 꾹-꾹- 눌렀다.
전선에서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마법을 써대다가, 휴식을 명받았었지.
막연하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누이를 위해 프랑지아를 지키는 영광스러운 싸움에 동참하고 싶었다.
실제로 마주한 전장이란 그가 생각하던 영광스럽고 멋진 장소와는 크게 달랐다.
끔찍하고, 잔혹하고, 피가 말라붙어가는 듯한 공간이었다.
누이야 일편단심이지만, 피에르 드 라파예트의 어딘가 삭막한 눈을 내심 꺼려 했던 루이스는 이제야 왜 그의 눈이 그랬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보다 정확히는, 이 전장에 서 있는 자들 중 상당수가 그런 눈을 하고 있으니까.
……그를 포함해서.
어려서부터 눈앞에서 어머니와 그를 아껴주던 가신들이 죽는 걸 봤다.
그랬기에 그 정도면 험하게 살아왔고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어린애의 착각이었다니.
“하아아…….”
루이스는 마른 세수를 하며 몸을 일으키려다가-
누군가가 그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겁했다.
“헙?!”
“아, 미안해요. 놀라게 했나요?”
그리고 그런 그를 놀라게 한 장본인은 태연한 목소리로 컵을 하나 건네주었다.
“받아요, 좋아하시는 코코아예요.”
“아, 고, 고맙습니다. 다비 소령님.”
루이스는 지젤이 건넨 잔을 받아 바로 입에 머금었다.
금방 타온 건지 따스하고 달달한 맛이 입안에 퍼지는 감각이 놀란 가슴을 빠르게 안정시켜주어서, 루이스는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 감사합니다. 매번 느끼지만, 이건 정말 좋네요.”
“보급으로 나오는 걸 그냥 타준 것뿐인데요, 뭘.”
“그래도 소령님이 타주시면 특히 더 맛있더라고요, 하하…….”
어색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분위기에서 둘 모두 코코아로 몸을 따뜻하게 적신 뒤, 지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침 대기조라서 한번 와본 건데, 쉬고 계셔서 그냥 갈까 했거든요. 그런데 때맞춰서 일어나셨네요.”
“그건 운이 좋네요. 이걸 못 먹었으면 좀 아쉬웠을 텐데.”
지젤은 쿡, 하고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많이 나아지셨네요. 처음에만 해도 완전히 귀족가 도련님이라는 느낌이라-”
“큼, 큼……. 많이 배웠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루이스가 조금 식어 미지근해진 코코아를 마시자, 지젤이 입을 열었다.
“꽤…… 고민을 해봤는데요.”
“예?”
“역시, 결론은 확실히 내려야 할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이지?
루이스가 조금 당황스러워 하고 있자, 지젤이 입을 열었다.
“엘렌 다비라고, 혹시 아세요?”
루이스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힘이 풀린 손에서 컵이 떨어지고-바닥에 떨어진 컵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그의 발을 적셨다.
미지근하고 끈적하여, 핏물 같은 액체의 감각에 루이스는 멍하니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지?
그런 루이스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지젤이 씁쓸한 얼굴로-
“사실이 아니기를 바랬는데.”
웃으며 작게 읊조렸다.
“……아무래도, 정말인가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