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크라프테 전쟁 - 포화의 도시 (1)
바후아, 혁명군 총사령부.
니콜라 브리소 총재가 떠난 다음 날.
나는 거의 아슬아슬한 시간에 맞춰 도착한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프랑지아 혁명군을 대표하여 그대들을 환영합니다. 혁명군 총사령관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입니다.”
“반갑습니다. 동방 제국의 대신이자 사절단으로 온 세르게이 콘스탄티노프라고 합니다. 이번 파견군의 통역사를 맡고 있습니다.”
세르게이 콘스탄티노프.
동방 제국 파견군의 통역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이내 지극히 정중한 손짓으로 그의 옆에 멋들어진 녹색 군복을 입고 서 있는 엘프를 소개했다.
“파견군 사령관, 엘시온 대공이십니다.”
성도 없이 이름만.
탈레랑에게 듣기로는 가문 같은 걸 따지기엔 애초에 인구도 적고 수명은 기니, 엘프들은 성 없이 고유한 이름만으로 자신의 고귀함을 표현한다고.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엘시온 대공님. 혁명군 총사령관 피에르 드 라파예트라고 합니다.”
나는 나름 웃으며 악수를 청해보았지만, 엘시온 대공은 팔짱을 낀 채 매우 오만한 얼굴로 내가 내민 손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만 까닥해 보였다.
“크흠, 크흠. 동방 제국의 고위귀족께선 다른 종족과의 신체 접촉을 꺼리십니다. 다른 의도는 없으시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음. 뭐, 문화적인 차이로군요. 미리 숙지하지 못해서 결례를 범한 듯합니다.”
머쓱하네…….
그러고 보니, 동방 제국의 고위귀족인 엘프들은 아예 인간의 언어를 배우려는 행동 자체를 안 한다고 했지?
그래서 그들의 통치를 받는 인간들이 대신 중앙 대륙어를 배워서 통역하는 거고…….
참 대단하신 제국이다 싶긴 하지만, 아쉬운 건 우리 쪽이니 별 수 없지.
그래도 이건 탈레랑의 업적이다.
-저들의 화포 기술이 그렇게 좋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총재.
그때 탈레랑이 지었던 어처구니없다는 얼굴과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난단 말이지.
-대놓고 입조하라고 해대는 오만한 차르의 비위를 맞춰서, 저들의 군사기술을 받아오라고요?
그렇게 말해놓고, 잘도 실제로 해내주었다.
나는 저 오만한 엘프, 엘시온 대공의 뒤로 도열해 있는 인간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지휘관은 엘프고 군대는 전부 인간. 동방 제국의 군제를 대충 알 만하구만.
병력 자체는 고작해야 1,000명 정도다. 하지만 핵심은 저들이 가져온 물건.
나는 그들이 가져온 독특한 화포들을 바라보았다.
저게 그토록 명성이 자자한 동방 제국의 화포인가.
대포에 쓸데없이 용을 조각해놔서, 용이 포탄을 뿜어내는 것 같은 괴상한 디자인이긴 한데…….
“어쨌거나 어려운 부탁인데 동방 제국의 관대하신 차르께서 선진적인 화포 기술을 전수해 주겠다고 하시니 실로 영광입니다.”
“하하, 탈레랑 총재가 진상한 귀한 마카롱 덕분이지요. 차르께서는 본국에서 매일같이 마카롱을 찾고 계십니다.”
“하하하…….”
탈레랑의 말에 따르자면 프랑지아 왕국이 입조할 수는 없으니 프랑지아 여왕의 신하인 탈레랑이 개인적으로 ‘조공’하는 형태로 이것저것 바치다 보니 차르가 마카롱에 꽂혔다던데…….
뭐, 과정이야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지.
“한데, 파견군까지 보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동방 제국과 차르께서 보여주신 호의가 앞으로도 이어져나갈 양국의 우호관계에 깊은 상징이 되겠군요. 먼 길을 와주신 엘시온 대공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콘스탄티노프가 내 말을 통역으로 전달하자, 엘시온 대공이 지극히 오만하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뭐라고 답했다.
콘스탄티노프의 입매가 살짝 굳었는데, 뭐라고 한 거야 대체.
“하하, 동방 제국의 ‘청룡포’는 강력한 곡사포입니다. 화포의 제조기술도 제조기술이지만, 활용에도 정예화된 숙련병이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혁명군에 기술을 전수해 주기 위해서는 이 화포를 다룰 줄 아는 이들에게 배우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크라프테에 맞선 전쟁 중에 그것을 단기간에 이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지요.”
콘스탄티노프가 말하는 걸 보니 이젠 적당히 익숙해진 외교적 수사로 해석이 될 것 같은데.
저 엘시온 대공이라면 아마도 ‘너희 열등한 인간들이 동방 제국의 위대한 화포를 바로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친히 보여주고 알려주기 위해 위대한 차르의 군대가 왕림해 주었노라.’
……정도로 말한 것 아닐까?
“하하……. 그렇군요. 위대한 차르와 자비로운 엘시온 대공의 호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프랑지아 혁명군의 총사령관께서 이리도 위대한 차르의 높은 뜻을 헤아리며 감사를 표하시니, 저 또한 동방 제국의 대신으로서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라파예트 후작의 말은 필히 차르께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주신다면 무척 영광이겠습니다.”
엘프들이 오만하건 어쩌건, 실제로 도움이 되는데 비위 좀 맞춰주는 것 정도야.
나는 흘긋, 청룡이 물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의 대포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우리가 쓰는 직사포보다도 큰 구경인데, 저런 걸 곡사로 쏜다라...
크라프테군은 아주 화끈한 맛을 보겠는걸?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루이 드제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실례합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크라프테군이 알자스에서 출진했다고 합니다.”
“아, 시기적절하군.”
하루만 늦었어도 동방 제국의 파견군이 전투 도중에 도착할 뻔했네.
근데, 행군하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저들이 바로 전투에 투입될 수 있나?
내 입장에선 당장에라도 투입이 절실한 고급 포병대긴 한데...
아.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곧바로 전투를 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위대한 차르의 군대라고는 하나, 아무래도 여독도 쌓여있으실 테니 이번 전투 동안 엘시온 대공님의 군대는 후방에서 쉬도록 해드려야겠지요?”
콘스탄티노프에게 내 말을 전해 들은 엘시온 대공은 대놓고 미간을 구기더니 무어라 무어라 답했고, 콘스탄티노프가 전해준 그의 답은 지극히 예상범위 내였다.
“차르의 위대한 군대는 불굴의 군대이니, 바로 전투에 합류하겠다고 하십니다.”
나는 되도록 친절하게 웃으며 답했다.
“동방 제국과 차르의 군대가 이토록 강대하니, 혁명군도 보고 배워야 할 것 같군요!”
아, 오만한 엘프 다루기 쉽군!
……어째 탈레랑과 몇 번 붙어 다녀 봤더니 점점 이런 요령만 느는 것 같아서 슬프긴 한데.
* * *
시가전 준비가 거의 막바지에 달하고 있는 바후아 시가지는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혁명군으로 가득했다.
“알자스에서 크라프테군이 출진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마무리 작업 더 서둘러!”
“거기 목책 좀 더 튼튼하게 고정시켜봐!”
“아, 알겠습니다!”
지젤 다비는 멍하니 작업이 한창인 시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비 소령님! A구역 배치 완료되었습니다!”
“아, 그래. 수고했어, 중위.”
“옛, 그럼 물러가보겠습니다!”
“그래.”
지젤이 간단하게 답하며 지도에 체크하자, 조금 머뭇거리던 중위가 물어왔다.
“실례지만, 다비 소령님?”
“응?”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물러가는 중위를 보며 지젤 다비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렇게 티가 나나?
아니, 조금 멍한 정도로 그녀를 신경 써줄 정도면 평소에도 여러 번 마주쳤다는 이야기인데.
정작 지젤은 저 중위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지젤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아마도 혁명군 내에서도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그만큼 그녀는 예외적인 케이스니까, 항상 주목받는 것도 당연하다.
원래라면 사관학교에 들어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교장이 갑자기 그녀를 호출해, 그녀가 이름과 성별을 숨기고 입교한 사실을 추궁했을 때는 그대로 모든 것이 끝장날 줄 알았다.
그런데 아키텐 백작, 크리스틴 다키텐이 그녀를 구제해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조금은 이상한 여자아이 정도로 취급받던 그녀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그걸 믿을 것 같나요?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 한들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제가 어디에 고용된 몸인지 잊으신 겁니까?
-임시로 고용된 용병일 뿐이죠!
레옹 듀랑은 딱히 그녀를 비웃거나, 불쾌해하지는 않았다.
다만 굉장히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을 뿐이다.
-재미있죠. 누군가에겐 더없이 좋은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악독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다비 소령님, 기묘할 정도로 특별 취급받고 있다는 자각 정도는 하셨을 텐데.
-그건…….
지젤은 반박하지 못했다.
-정 못 믿겠다면…….
레옹 듀랑은 조금 고민하는 기색이다가 말했다.
-아키텐의 도련님에게 직접 물어보시던지요.
-루이스 다키텐 중위? ……그도 알아요? 이걸?
-나중에 내키면 확인해 보시죠.
지젤은 고개를 가로저어 복잡한 생각을 털어 내었다.
“-비”
그녀는 참모 장교고, 어깨에는 막중한 책임이 걸려 있다. 지금은 전투에 집중해야 할 때다.
“이봐, 다비.”
“헛, 예? 아, 아! 미르보 사령관 각하!”
지젤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뻣뻣하게 경례했다.
데미앙 드 미르보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그런 그녀를 뚫어져라 보더니 입을 열었다.
“방어준비는?”
“A,B 구역 요새화 및 포진 완료되었습니다! C구역은 현재 마무리 단계입니다!”
“그래. 뭐, 순조롭네.”
고개를 끄덕인 미르보는 고개를 돌리려는 듯하다가, 다시 그녀를 보며 물어왔다.
“근데, 작전이 눈앞인데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는 거야? 답지 않게.”
“소, 송구합니다.”
“쯧쯧…….”
데미앙 드 미르보는 또 한소리 하려는 듯하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뭐, 아키텐 백작이 추천해 준 자네니까, 실전에선 잘 할 거라고 믿어.”
또, 또 아키텐 백작.
정작 크리스틴 다키텐은 사관학교 졸업식 이후로 그녀와 얼굴을 마주친 적조차 없는데.
그럼에도 군 상부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가 아키텐 백작을 연줄로 둔 인사라는 듯이 취급하고 있다.
지젤 다비는 그녀 자신의 실력과 재능에 자신이 있었다. 최소한, 자격 없이 이 계급과 직책을 거머쥐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아키텐 백작이 아니었다면, 미르보 백작이 지금처럼 그녀를 인정하고 써줬을까?
그 이전에, 장교가 될 수조차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감사한 일이다.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의문 같은 걸 품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수도에서 새 집으로 이사 간 뒤 떠난 언니는 몇 차례 편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주소도 없이, 인편을 직접 보내서 편지를 보내왔고 그조차 이내 끊겼다.
-지젤 누나, 엘렌 누나는 왜 안 와?
-바보, 엘렌 언니는 도망간 거야!
-엘렌 누나는 그런 사람 아니야!
-하지만 안 오잖아…….
당시에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평민이 주소로 우편을 보내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고용해서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주소를 숨기는 것이 보통 일인가?
사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수도에 올라온 지젤이 공부만큼이나 열심히 한 것은 언니의 행방을 찾는 거였다.
하지만 엘렌 다비라는 사람의 흔적은 이상할 정도로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누가 작정하고 지워버리기라도 한 마냥.
-쟝 말로를 독살하고 투신자살한 소녀가 엘렌 다비입니다.
그 기사는 그녀도 봤다.
용의자 소녀의 이름이 뭐였더라. 플레르였나? 아무튼 흔한 이름이었다. 적어도 엘렌 다비는 아니었다.
애초에 사건 당시 딱 한번 신문에 실렸을 뿐이고, 그 이후엔 쟝 말로의 이야기나 전쟁 이야기에 묻혀버렸으니까.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죽고 잊힌 것이 그들의 가족이라면.
……지금껏 그들이 배곯지 않고 따뜻하게 자랄 수 있던 것이, 그들의 누이가 이름마저 버려가며 암살자로 쓰이고 죽은 덕분이라면.
지젤 다비는 천천히 주먹 쥐었다.
최소한, 진실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두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정말로 그게 진실이면?
그러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루이스 다키텐.”
지젤은 그녀의 의문을 풀어줄지도 모를 소년의 이름을 낮게 읊조렸다.
그녀의 음성에 실린 감정이 무엇인지 그녀 자신조차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