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크라프테 전쟁 - 선택 (2)
“우리가 믿어온 그대가…… 정녕 프랑지아의 편이 맞는가?”
니콜라 브리소의 물음에 눈을 감은 순간 떠오른 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라파엘 발리앙의 목소리였다.
-저들은 후작님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들만의 이상론에 잠식되어 현실을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바치기에, 후작님의 충성과 헌신은 지나치게 값집니다.
그의 말을 부정했었다.
-당신의 헌신에 기대어 기생하는 곰팡이들을 위해, 후작님 자신과 추종자들이 치른 희생에 어떤 보상이 있습니까?
그의 말을 애써 부정하며 합리화한 뒤, 돌아온 뤼미에르에서 본 것은 피로 물든 크리스틴이었다.
-후작님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혁명의 의의 자체를 뒤흔드는 존재입니다. 당장 전쟁이 다가오는 순간에야 어떤지 몰라도, 후작님의 효용가치가 다하면 저들은 반드시 후작님을 제거하려 들 겁니다.
혁명의 혼란을 보았다.
그 속에서 야망을 좇던 자를 보았다.
혁명을 위해 목숨마저 바치며 스러진 자 또한 보았다.
그의 유지를 이어 혁명을 지키려 들던 자들도.
그렇기에, 나는 발리앙이 최후에 한 말을 부정하고 여기까지 왔다.
혁명이 더 나은 길이 될 거라 믿고, 에리스를 옹립하고 저들을 지켜내며 여기까지 왔다.
내심 많은 것이 변했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돌고 돌아서, 결국은 다시 원점인가.
혁명은 저들의 혁명일 뿐이고, 나는 결국 저들 사이에 낀 불순물일 뿐인가.
아직도 눈을 감으면 악마의 총탄에 맞고 피로 물든 크리스틴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그 악마들과 손을 잡았다는 혐의라.
나는 천천히 눈을 떠, 니콜라 브리소가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보았다.
나와 크리스틴이 산업혁명 직전에 매입한 대량의 원자재를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판매한 내역의 장부.
……아마도 사본.
회귀한 뒤 크리스틴을 구하고, 다가올 혁명과 파멸을 피하기 위한 시작으로 한 일.
저게 아니었다면 크리스틴이 지금처럼 엄청난 금권을 휘두를 수도 없었고, 나도 내전에서 활약하는 건 어려웠을 터다.
그러나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엔 내전으로 왕국이 불타는 가운데 악마들과 손잡고 매점매석으로 재미 봤다고 생각하기 딱 좋겠지.
“……내전 중에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원자재 거래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어차피 내전 중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거래한 귀족들은 한둘이 아니다. 수상할 정도로 규모가 큰 거래와 차익이 문제.
그러나.
나는 들끓는 속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니콜라 브리소를 가늠하듯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브리소 총재. 왜 찾아오신 겁니까?”
저 서류만으로 유죄를 입증할 수는 없지만, 혁명군 총사령관과 제독에게 악마들과의 협조 협의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일단 끌어내려 조사는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단 의혹을 품고 재판대에 세우기만 한다면, 악마라면 치를 떠는 프랑지아에서 그러지 않아도 나나 크리스틴을 깎아내리고 싶은 자들은 얼마든지 선동할 수 있다.
꼭 명백한 죄가 있어야 처벌받는 것이 아니라는 건 혁명 과정 중에 무고하게 죽은 이들과... 회귀 전의 에리스가 증명하니까.
그러니, 니콜라 브리소는 저런 걸 손에 넣은 시점에 그저 국민의회에서 나를 규탄하기만 해도 되었다.
그에게는 충분히 그만한 상징성과 영향력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의원들이 들불처럼 일어나서 나와 크리스틴을 물어뜯었겠지.
혁명당이나 자유당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중앙당에도 나와 크리스틴에게 과하게 주목이 쏠리는데도 우리가 어느 정도 독자노선을 걷는데 불만을 품은 의원들은 차고 넘치니까.
굳이 전장까지 와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와 독대하며 추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제가 뤼미에르에서 벌인 일을 모르시는 것도 아닐 텐데요.”
“알지, 잘 안다오. 격분한 그대가 뤼미에르 한복판에서 의원들을 참살한 걸 잊은 자는 국민의회에 아무도 없을 거요.”
나는 저들의 혁명을 지키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안에서 살아갈 내 사람들을 위해.
가장 우선되는 건 내 사람들, 무엇보다도 크리스틴이다. 두 번 다시 그들을 희생시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국민의회의 재판대에 저런 혐의를 뒤집어쓰고 크리스틴이 서야 한다면.
그녀가 악마와 공조한 마녀로 몰려 회귀 전의 에리스처럼 처형당할 위험이 있다면.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차악을.
나는 필요하다면 국민의회를 몰살시켜서라도 그걸 막을 거다.
에리스는 슬퍼하겠지.
그러나 동시에, 그 에리스라면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까지 이해하고 가슴 아파할망정 전력으로 나를 막지는 못할 거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
“제가 정말로 악마들과 손을 잡았다고 의심한다면, 총재는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터뜨리려면 제가 모르는 사이, 뤼미에르에서 제 뒤통수를 쳐야 했죠. 이걸 미리 알아버린 제가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이곳에 오셨습니까?”
니콜라 브리소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저 내 눈으로 보고 싶었소.”
“보고 싶었다?”
무엇을?
내 의문에 답하는 대신, 브리소는 다른 말을 했다.
“이걸 받고, 꽤 긴 시간 생각을 했소.”
나는 이 전쟁을 위해 출진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게 넋이 나가 있던 브리소를 상기했다.
하. 크라프테 전쟁 직전에 건넨 건가.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나일까. ……이걸 보낸 것은 누구인가. 많은 고민을 해보았지.”
브리소는 반쯤 식어버린 커피를 들어 홀짝이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왜 하필 나인지는 명백하더군. 국민의회의 일개 의원이라면 그대의 세력을 두려워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거나 총재에게 건넸을 거요. 중앙당의 앙쥬 백작은 불만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등에 칼을 꽂는 걸 주도하기엔 그대들에게 받아먹은 것과 잃을 것이 많지.”
존재감이 약하다고는 해도 긴 세월 총재로 지낸 남자는 제법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혁명당의 탈레랑은 글쎄. 이미 국민의회에서 충분한 세력을 가졌는데, 생쥐스트의 최후를 가장 잘 알고 있을 이들이 굳이 전쟁 중에 모험을 하려 들 것 같진 않구려. 이걸 이용해 그대에게 뭔가를 더 받아먹으면 모를까.”
그의 일인데도,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도 모르는데도 목소리는 담담하다.
“혁명당과 중앙당의 사이에 끼어 그 색체가 미약해 불만이 많고, 애초부터 가진 것이 적으니 잃을 것도 적어 이 사태로 가장 확실한 이득을 취할 수 있을 집단. ……그게 자유당이더군.”
그렇게 말하는 브리소의 입가에는 자조가 가득했다.
“왜 지금인지도 명확하지. 만약 그대가 크라프테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악마와의 유착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 정도로 감히 끌어내리기엔 너무도 완벽한 영웅일 터이니. 그리되면 이깟 서류 쪼가리가 무에 의미가 있겠소?”
니콜라 브리소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나에게 물었다.
“후작, 이 서류를 크라프테가 구할 수 있었겠소?”
“……장담은 못하겠으나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체가 크라프테인지 아닌지까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크리스틴조차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자유당은 지금까지 어중간한 입장에서 무난한 행보를 보인 이들인데, 그들이 승산이 있다고 느끼고 단번에 적으로 돌아설법한 단서를 잡을 거라는 걸 예상하고 미리 감시하는 건 무리지.
아니, 애초에 크라프테와의 첩보전을 상정하면서 혁명 이전의 행적이 약점으로 잡힐 거라는 건 예상 가능한 영역조차 아니다.
그럼에도 이게 크라프테의 소행이라고 한다면, 애초에 그들이 이 정보를 입수한 것 자체가 악마들의 암약일 가능성이 높겠지.
니콜라 브리소는 나를 빤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후작, 노인네의 넋두리 하나 들어보시겠소?”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브리소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혁명에 희생당하는 이의 눈을 감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소.”
“…….”
“혼란 속에서 우리가 피워낸 불씨가 거대한 불길로 변해 미쳐 날뛰며,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그 광기가 두려워 떨고만 있었지.”
브리소는 낮게 웃었다.
“그래서 이 땅을 피로 물들이지 않고도 자진해서 공화국과 함께하겠다는 귀족들이 나왔을 때, 나는 무척 안도했다오.”
내게 있어 니콜라 브리소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대가 정치적 부담까지 져가면서까지 서부에서 행해질 뻔한 박해를 멈춰주었을 때는 기뻐했고.”
혁명정부와의 연줄이자, 혁명 당시 과반수를 차지하던 급진파를 견제하기 위해 협조했고…….
“……아키텐 백작을 잃을 뻔하고 격분한 그대가 저 급진파와 다를 바 없는 일을 벌였을 때는 절망했지.”
그나마도 중앙당이 자리를 잡고 발리앙마저 꺾은 이후에는 그럴 가치조차 사라져 버린, 어중간한 관계의 사람.
“그러나 그대는 결국 공화국의 손을 들어주었소. 저 라파엘 발리앙에 맞서 혁명을 지키고, 마음만 먹었다면 국민의회를 엎어버릴 수 있는데도 지금까지 프랑지아를 수호하며 전장을 전전해왔지.”
그 니콜라 브리소가 나를 보는 시선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어느 순간 깨달았소. 후작이 국민의회와 때로는 힘을 합치고 때로는 견제하며 만들어온 프랑지아가, 우리가 그 광기와 혼란 속에 꿈꿔온 것과 꽤 닮아져 있다는 걸 말이오.”
니콜라 브리소는 잠시 침묵하며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헌데, 왜일까. 분명히 그 혼란이 잠식되고 광기가 멈추는 것을 간절히 바라왔을 진데. 프랑지아가 하나로 단결하여 위기에 맞서는 것만을 기대해 왔을 터인데. 나도, 자유당의 의원들도 기뻐할 수가 없더군.”
이제 브리소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뤼미에르 방향으로 향했다.
“분명히 우리가 목표로 하던 모습에 가까워졌으나, 그게 우리가 이룩한 업적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구체제를 혐오해서 우리가 일으킨 혁명에서, 우리가 꿈꾸던 것을 굴러 들어온 귀족이 이루도록 내주어서.”
이것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하는 말인가.
“……그래서 그토록 시샘이 났던 모양이야. 권력이 무섭다, 무섭다 하더니 정말로 그렇더구려. 없을 때는 그저 세상이 더 나아지면 좋다고 기대했을 터인데, 막상 권력을 잡으니 부족함만 느껴지는 것이. 마셔도, 마셔도 갈증만이 나는 소금물과 같아…….”
아니면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인가.
혁명 이전에는 존경받는 변호사였던 남자가, 완연한 노인의 한탄을 흘리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전쟁은 잘 모른다오. 누군가는 후작이 있어서 우리가 이길 수 있었다고 하고, 누군가는 여왕 폐하와 부하들의 공일뿐 후작의 역할은 별것 아니라고도 하지.”
브리소는 서류를 든 채 걸음을 옮기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여, 처음으로. 우리가 벌일 일로 희생될지도 모를 자의 눈을 들여다보러 왔소.”
“……그래서 답을 얻으셨습니까?”
니콜라 브리소는 내 물음에 답하는 대신, 약간 흔들리는 표정으로 답했다.
“모르겠소. 확신은 없구려. 지금이 아니면 후작을 몰아낼 기회는 영영 없을 거요. 어쩌면 자유당이 권력을 잡을 기회도 이게 마지막일 지도 모르오. ……나는 어리석은 지도자일 수도 있고, 무책임한 지도자일 수도 있겠소.”
말을 마친 브리소는 손에 쥔 서류를 빤히 들여다보더니 불타는 장작이 놓인 벽난로에 들이밀었다.
“……하나 우리가 꿈꾸던 광기와 혼란이 멈춘 조국을 눈앞에 두고도 탐욕과 불만이 가득한 우리가 그대를 몰아낸 뒤, 그대보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더군.”
찰나의 망설임일까, 조금 손을 떨던 브리소는 그대로 서류를 불길 속에 밀어 넣어버렸다.
불길이 종이를 집어삼키는 모습을 망연하게 들여다보던 노인이 천천히 내게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하여, 이게 내 선택이요, 후작. 그대에게 의심과 경계만 품던 국민의회를, 혁명을 지금까지 수호해온 그대가 앞으로도 그래 줄 것이라 믿고 벌인.”
브리소는 확신도 없고 불안에 가득한 얼굴로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이 어리석은 노인의 독단을.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주시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