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크라프테 전쟁 - 선택 (1)
바후아 시가지.
이미 주민의 소개가 끝나고 혁명군이 시가지 요새화에 한참인 시점이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주민들은 있었다.
“아이고, 이놈들아! 어떻게 산 집인데!”
“어, 어어, 아주머니, 작전 중에 방해하시면 안 됩니다!”
“너는 어머니 없어? 너희 어머니 집 담장 부수고 있어도 그렇게 말할 거냐고!”
“아, 아니, 그게…….”
“나쁜 놈들아! 너희들 먹이고 입히라고 낸 세금 아니야! 근데 왜 우리 집은 안 지켜줘!”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 사병과 그를 붙잡고 늘어지는 여성을 바라보던 지젤 다비는 한숨을 내쉬고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병사?”
“소, 소령님!”
병사가 답하는 것보다, 성큼성큼 다가온 여성이 지젤의 소맷자락을 잡는 것이 빨랐다.
“누구 허락받고 우리 집 담장을 다 허물고 있는 거야!”
“혁명군 총사령관 라파예트 후작 각하의 명이십니다. 시가전이 벌어지면 쉽게 허물어지고 병력 배치만 어려워질 담장을 철거하고 보다 보강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서요.”
“우, 우리도 국민인데 집을 지켜줘야지! 피 흘려서라도 이 나라 지키라고 있는 것이 혁명군 아니야?”
지젤 다비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명령했다.
“도시 밖으로 모셔드려. ……되도록 정중히.”
“예, 옛!”
“이리 오십시오, 아주머니. 다른 도시로 가는 마차 편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모셔드리겠습니다.”
“이런 나쁜 놈들! 놔, 놔! 내 남편도 혁명군으로 싸우다 죽었는데 집에서까지 쫓아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필요한 일이고 전술적으로 탁월한 판단이라고 생각하지만, 민간인들이 그런 걸 알아줄 리가 없다.
그저 자신들이 쫓겨나고 고향은 전장이 되어 황폐화될 거라는 것이 억울하고 화가 날 뿐이지.
지젤은 악을 써대며 부하들에게 끌려가는 여인을 보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하십니다, 소령님?”
그러고는 들려온 목소리에 슬며시 눈썹을 틀어 올리며 시선을 돌렸다.
“듀랑 중사.”
레옹 듀랑.
일개 중사가 참 편하게도 소령에게 말을 건다 싶긴 하지만, 사실상 군 계급은 명목상일 뿐 루이스 다키텐 중위의 개인 호위로 고용된 남자라서 군내에서도 반쯤은 용병 취급이다.
루이스를 신경 써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와도 면식이 생긴 지젤은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죠. 원망을 듣는 입장이라는 건. 언제 저들의 공세가 시작되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아직도 저런 사람들이 남아있으니.”
“하하, 높으신 분 덕분에 고생하시는군요.”
“……그 높으신 분이야말로 온갖 원성을 혼자 다 책임지고 계신걸요. 제가 우는소리 할 처지는 아니죠.”
“흠, 그럴까요?”
듀랑의 의문조에, 지젤은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
“대개 높으신 분들이야 아랫사람들의 고충 같은 건 진지하게 신경 쓰지 않으시는 법이니까요.”
“듀랑 중사, 군내에서 그대를 예외적으로 취급하고 있다고는 해도 계급상 부적절한 언행이군요.”
“어이쿠, 실례. 송구합니다, 소령님. 하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만한 대도시에 단호하게 퇴거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이라면 전투의 공적 같은 거에나-”
듀랑의 말은 낮게 깔린 지젤의 목소리에 끊겼다.
“목숨을 걸고 일선에서 군사들과 함께 싸우는 분이시기도 하죠. 이미 더 올라갈 곳도 없는 분인데 정치적으로 부담될 시가전을 결정하기도 하셨고. 본인의 출세나 정치에 신경 쓸 사람이라면 오히려 주민들의 원성을 들어가며 시가전을 벌일 게 아니라...”
지젤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차갑게 식은 어조로 내뱉었다.
“이 도시를 지키겠다고 야전에서 병사들을 전부 갈아버리는 편이 싸게 먹힐 테죠.”
“워우. 생각 외로 꽤 냉철하십니다, 소령님?”
“어떻게든 승리만 거둘 수 있다면, 정치적으로 병사 개개인의 생명은 저평가 받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을 뿐이에요. 하지만 후작 각하께선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셨고, 그래서 제가 그분을 존경하는 거죠.”
레옹 듀랑은 피식 웃었다.
“뭐, 확실히 흔한 장군들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것보다 아키텐 백작 각하의 약혼자여서는 아니고요?”
이번엔 지젤 다비가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이 되었다.
“그, 화, 확실히. 그것 때문에 만나 뵙기 전부터 좋게 생각하긴 했지만, 그걸 떠나서 직접 지켜본 바 후작님 개인으로도 충분히- 아니, 잠깐. 그걸 중사가 어떻게 알죠?”
지젤 다비가 크리스틴 다키텐과 대면한 것은 고작 한번, 그것도 그랑제콜 과정 수료 후 졸업식 날에서 단 한번이었다.
루이스와 첫 대면에서 아키텐 백작에게 신세 졌다는 말 정도야 했지만, 사적으로 그녀에게 감사하고 있다고 떠들고 다닌 것도 아닐 텐데?
외국 출신 일개 용병이 그녀가 크리스틴 다키텐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는 걸 대체 어떻게 알지?
의문투성이지만, 정작 지젤의 질문을 받은 레옹 듀랑은 굉장히 복잡 미묘한 얼굴이 되었다.
쓴웃음을 짓고 있는데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은 아닌 것 같고, 표정에서 측은함이- 측은?
“그 표정은 무슨 의미죠?”
“음, 뭐어……. 진실이라는 것이 꼭 생각과 같지는 않다는 걸 실감하고 있어서요.”
이쯤 되자 지젤의 표정도, 말투도 딱딱해졌다.
“제대로 설명하도록, 중사.”
단순히 루이스를 통해 친분을 얻은 관계가 아니라, 소령과 중사의 관계로 찍어 누르면 말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오히려 그렇게 되기를 유도한 것이던가.
레옹 듀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엘렌 다비,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 * *
혁명군 사령부, 총사령관 지휘소.
갑작스럽게 루이 드제가 가져온 소식에,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니콜라 브리소 총재가 여기까지 왔다고?”
“예,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와 만남을 청하고 계십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후작 각하께서도 모르시는 일이었던 모양이군요. 일단은 손님용 숙소에 모셔드렸습니다만, 어쩌시겠습니까?”
드제도 완전히 의외라는 얼굴로 물어왔다.
“흠…….”
크라프테군의 공세가 임박한 상황인데, 자유당 총재가 이 위험한 최전방까지 오다니.
그것도 사전 연락도 없이?
설마하니 바후아에서 주민들을 소개시킨 건에 대해 항의하러 온 건 아니겠지.
솔직히 그냥 돌려보내도 할 말 없을 상황이긴 한데, 반대로 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만나야 할 정도로 중요한 안건을 들고 왔다는 이야기겠지?
어차피 자유당 총재야 혁명 초기부터 나름대로 협력관계라면 협력관계였고, 적대한 적은 없다.
혁명당의 세가 꺾이고 중앙당이 의회를 장악해버린 데다 크리스틴이 프랑지아 경제를 주무르게 되면서 사이가 좀 불편해진 감이야 있지만, 최소한 여기까지 온 사람을 빈손으로 돌아가게 해서 좋은 소리는 못 듣겠지.
“일단 만나보지.”
“알겠습니다. 모시도록 하죠.”
나는 드제를 따라 밖으로 나서, 주민들이 전부 소개되고 요새화가 한창인 시가지를 눈에 담았다.
프랑지아 중동부의 번영한 도시가 삭막하고 긴장감 넘치는 모습으로 변모해 있다.
“하하, 마치 거대한 요새 같지 않습니까? 뭐, 과정은 좀 많이 시끄럽습니다만.”
“아, 보고는 받았네. 무리도 아니지.”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시가지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반발이 상당하다는 보고는 여러 차례 올라왔지만 어쩔 수 없다.
결전을 앞둔 크라프테군이 뒤늦게 본국으로 병력을 보낸 건 대왕답지 않은 선택이라 의외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뚜렷한 대책 없이 야전에서 저들과 재차 교전하면 피해는 엄청날 거다.
이곳 주민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애초에 전쟁에서 패배해버리면 보상해 줄 주체조차 사라져버린다.
일단 전쟁을 이긴 다음 어떻게든 보상을 마련해 줄 방안을 강구해야 할 일이지.
잠시 드제와 함께 시가지를 걸은 끝에, 니콜라 브리소가 기다리는 손님용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말이 손님용 숙소지, 민가다만.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후작님.”
“아, 안내역 수고했네, 사령관.”
그런 일 할 직책은 아닌데.
루이 드제도 알아들었는지 픽 웃으며 경례했다.
“일선 장교들은 다들 바쁘니까요.”
드제를 떠나보낸 뒤 건물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니콜라 브리소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브리소 총재님. 갑작스러운 일이라, 늦게 온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말에 담긴 뼈 때문인지, 브리소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사전 언질도 없이 찾아온 이 늙은이가 문제겠지. 오랜만이오, 라파예트 후작. 건강해 보이시는 구려.”
50대가 넘어 백발이 성성한, 이미 늙어버린 변호사 출신 정치인이 한 말이라서인가 어째 묘하게 들린다.
“총재께서도 아직은 정정하십니다.”
“허허허, 한창때인 후작에게 듣자니 묘하구려. 나는 이미 저물어가는 세대인 것을...”
“자유당원들은 반기지 않을 말씀이신데요.”
내 말을 들은 브리소는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하게 급진적이고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의 계승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혁명당과 구체제를 버리고 혁명에 합류한 귀족들을 주축으로 보수 세력이 결집한 중앙당.
그에 비해 온건파인 자유당은 혁명의 시작부터 함께했고 지금까지 총재 자리를 지키는 니콜라 브리소를 제외하면 그렇게까지 강렬한 이미지를 가지진 못했으니까.
아마 니콜라 브리소가 은퇴라도 한다고 하면 다들 뜯어말리지 않을까?
“커피는 좋아하십니까?”
“아, 커피 좋지.”
브리소의 답을 들은 나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커피를 내려, 두 사람 몫을 준비하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망할 대왕 앞에서는 커피 필요 없다고 했지만, 사실 대왕의 커피는 제법 맛있었단 말이지.
우리는 느긋하게 커피의 향을 음미하며 서로의 시간을 보냈다.
내가 별말을 하지 않자, 니콜라 브리소가 입을 열었다.
“이번 전투는 이길 수 있으시겠소, 라파예트 후작?”
“글쎄요, 전장에서 승패는 언제라도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가능한 철저히 준비하고, 변수를 줄여서 승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죠. 아시다시피, 저들의 대왕은 지금껏 상대해 본 어떤 자들보다도 굉장한 자라서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그렇군.”
총사령관 입장에서는 으레 하는 정론인데도, 브리소는 마치 내 답을 곱씹기라도 하듯 커피의 향을 음미하며 잠시 말이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릴 하려고 왔길래 이리 뜸을 들이시나, 할 일도 많은데.
의문이 깊어질 때쯤, 니콜라 브리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꽤 오래 알고 지내지 않았소?”
“……예, 그렇지요.”
당시 공화국이었던 혁명 정부와 접촉을 원하던 우리에게 제일 먼저 관심을 표해준 것이 니콜라 브리소다.
그가 먼저 크리스틴에게 연락을 해주어서 우리가 혁명 정부와 협상을 할 수 있었지.
비록 그 협상이 혁명 정부에게 누설되어 막시밀리앙 이지도르가 따라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다 추억이군.
내가 자연스럽게 실소를 흘리고 있자, 브리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아키텐 백작은 혁명 정부에 먼저 접촉해왔지. 정확히는, 아마도 그대의 요청이었을 테고.”
“맞습니다, 브리소 총재님.”
별생각 없이 한 답.
“……우리 혁명 정부가 그대들의 존재조차 알기 전에, 구체제의 귀족이었던 그대들이 우리를 반란군이 아니라 협상 대상으로 인식하고 손을 뻗어주었어.”
하지만 그에 대한 브리소의 말이 이어질 때쯤에는, 나도 이질감을 느꼈다.
“당시에는, 무척 기쁘게 생각했다오. 나는 그 피비린내 나는 혁명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고, 구체제의 귀족 중에서도 타협이 가능한 이가 존재한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었거든.”
니콜라 브리소의 표정은 좋은 추억을 이야기한다기보다…….
명백한 의문과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한데, 이제 와서 의문이 드는구려. 그런 일이 어찌 가능했을까? 라파예트 후작과 아키텐 백작은 어찌 저 구체제의 귀족들과 다르게 남부에서 세력을 규합해두고, 그 처참한 내전 동안 그토록 놀라운 자본과 군사력을 비축해두고 우리에게 손을 뻗을 수 있었을까?”
혁명정부 내에서 음모론이 돌았던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별다른 증거도 없고,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흐지부지 되었다는 것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하필 이 타이밍에?
“그대들은 어떻게 구체제의 귀족이라는 엄청난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혼란과 격동 속에서 혁명정부를 이끄는 자가 될 수 있었을까.”
니콜라 브리소의 말투는 담담하지만, 그의 눈빛은 나를 꿰뚫어 보듯 날카롭다.
“……라파예트 후작. 그대는 내전의 혼란 속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도,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도 알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뭐라고 답할지 말을 고르는 중에, 니콜라 브리소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의문을 품은 이들은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혁명의 발생과 전개를 모종의 세력과 손잡은 후작이 유도했다고 생각하면 말이 되더군.”
니콜라 브리소는 커피잔을 손으로 매만지며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라파예트 후작, 아키텐 백작. 그대들은 어떻게 혁명이 터지기도 전에 악마들과 거래하여 막대한 재산을 손에 넣었소?”
이건.
크라프테의 정보원 수준에서 알아낼 수 있는 일일까?
“묻겠소, 라파예트 후작. 혁명의 수호자인 그대가. 악마들과 외세에 맞서 프랑지아를 지켜왔다고 우리가 믿어온 그대가.”
이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자는 대왕이 아니었다.
파이몬……!
“……정녕 프랑지아의 편이 맞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