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크라프테 전쟁 - 방어계획
프랑지아 동부, 바후아.
나는 밤늦게 급하게 방문한 손님이 들고 온 소식에 나도 모르게 반문해야 했다.
“뭐…… 라고요?”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크라프테군이 본국으로 군대를 돌릴 기미가 전혀 없어요.”
“미친 것이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본국이 쑥대밭이 될 판인데 군대를 안 돌려? 그게 말이 되나?
이번 전쟁에 저들이 동원한 병력만 20만이다.
크라프테의 인구를 생각하면 사실상 기초훈련이라도 받아본 병력은 거의 다 끌고 나온 걸 테고, 제아무리 크라프테라고 해도 본국에서 다급하게 긁어모은 징집병만으로 5만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살다 살다 크리스틴의 말을 의심하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해봤는데, 크리스틴도 나를 이해한다는 얼굴로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알자스로의 크라프테군 물자 반입에 대한 보고서에요. 정확한 품목까지는 모르겠지만, 물자 반입 횟수와 수량은 오히려 훨씬 늘었어요.”
나는 말없이 크리스틴이 건네준 보고서를 살폈다.
확실히, 바후아 전투 이후에 오히려 물자 반입이 늘었다.
이것까진 고갈된 탄약을 재보급 받는 건가 싶은데, 특히나 노던 연합 왕국과 본국의 반란 이후에 더 늘었다.
군대를 일부라도 본국으로 돌릴 거라면 줄어야 정상이다. 지난 전투의 손실로 병력도 줄었고, 본국에서도 보급 물자를 써야 할 테니까.
아니, 그걸 제외하더라도 저들은 비정상적으로 많은 물자를 조달하고 있다.
군대의 보급에 차질이 없게 하는 건 상식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많은 물자도 독이 된다. 자칫하면 물자를 지키기 위해 유연한 전술을 사용하기가 어려워지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지?
아니, 그보다.
“이런 건 또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크라프테군으로의 침투 공작은 거의 다 실패하셨다고 들었는데요.”
크리스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아요. ‘군’으로의 침투 공작은 그랬죠. 하지만 국경지대의 주민들 사이에 정보원을 미리 심어두는 건 저들이 차단할 수 없죠. 주민들과 구분할 방법도 없고.”
“하하하……. 알자스가 점령도 당하기 전부터?”
내가 실소를 흘리며 묻자, 크리스틴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네. 크라프테가 전쟁을 예고한 시점부터 작업했어요. 알자스와, 로렌, 그리고 이곳 바후아까지. 마침 제국과의 전쟁 때부터 일한 이들도 좀 있으니까 연계는 어렵지 않았죠.”
“…….”
본국이 공격받고 있다.
지난 전투의 손실로 병력도 줄었다.
거기서 반입 물자를 오히려 늘리고, 본국으로 부대를 파견하는 움직임조차 없다?
상식상으로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인데, 상대가 그 대왕이라서 발상을 알 것 같다.
……기습적인 총공세로 혁명군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나면, 본국에 피해 좀 입어도 나머지쯤은 순식간에 진압할 수 있다.
그 대왕이라면,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더 심각하게 나가자면, 본국이 쑥대밭이 되든 말든 그의 마지막 전쟁에 전력을 담고 싶은 거일 수도.
그렇다면 저 물자 반입량이 말이 된다. 본국이 초토화당해 물자 공급이 어려워지기 전에 미리 비축해두는 거겠지.
내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어서인지, 크리스틴이 슬며시 내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역시, 화나셨나요? 유사시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깔아둔 포석이지만, 역시 이건 군을 통솔하는 당신을-”
크리스틴의 말은 내가 그녀를 확 끌어안는 통에 끊겨버렸다.
“아니요. 당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크리스틴. 고마워요.”
아무것도 모른 채 크라프테군이 본국으로 군대를 빼면 칠 계획만 세우고 있었다면, 정말로 의표를 찔린 우리가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었다.
아니, 애초에 이 전쟁 자체가 크리스틴이 없었다면 제대로 된 전쟁으로서 성립하기도 힘들었겠지.
대왕은 그 정도로 강적이다.
크리스틴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그런 크리스틴이 조금 재밌어서, 내가 농담조로 물었다.
“자국 내에 첩보망을 펼쳐두는 걸 군이나 국민의회에 숨기시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제가 그런 걸로 화낼 거라고 걱정하셨던 겁니까?”
애초에 군 내부, 심지어 내 사령부에도 눈을 깔아둔 사람이 이제 와서 뭘 새삼?
“으음, 그러게요. 피에르, 당신인데도. 어쩐지…….”
크리스틴이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피해서, 나는 그녀의 뺨을 살짝 잡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크리스틴, 저는 당신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
크리스틴이 탄식하듯 숨을 내뱉었다.
이건 아마 그녀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트라우마일 터다.
나와 에리스가 서로를 남녀관계로 본다고는 여기지 않으면서도 기묘하리만치 에리스를 경계하는 태도.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필요한 모든 곳에 포석을 깔아두는 습관을 가졌으면서도, 정작 그게 꺼림칙하게 여기진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모순적인 모습까지.
“저는 당신이 제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다고 해서 당신을 경계하지도, 당신의 재능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아주 어린 소녀 시절에 어머니를 잃고 실의에 빠진 아버지를 돕겠다고 나선 그녀가 오히려 그 때문에 아버지에게 꺼려져, 끝내 살해 기도조차 묵인된 기억은 지금까지도 그녀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을 거다.
그래서 혹시나 같은 일을 나와 반복하게 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순수한 선의로 가득 찬 에리스와 그녀 자신을 비교하며 경계해왔겠지.
이제 겨우 한 발 남았는데.
마치 매달리듯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서슴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혹시나 내가 그런 그녀를 꺼려 하지 않을까 걱정한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일까.
“말했지 않습니까. 저는 이미 당신의 것이라고.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어떤 모습을 보이든, 저는 언제나 당신의 편입니다.”
평소의 표정관리도 잊고, 멍하니 나를 보던 크리스틴이 속삭이듯 물었다.
“제가 아무리 잔인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어도요?”
“저는 영원한 당신의 것이니까요. ……당신도 제 것이 되어주겠다고 하셨으니,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 한들 놓아줄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크리스틴은 고개를 푹 숙였다가, 이내 내 목에 팔을 감으며 안겨왔다.
깊은 밤의 입맞춤은 눈물의 맛이 났다.
* * *
다음 날, 사령부.
“예? 방어전이라굽쇼?”
데미앙 드 미르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어 와서,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지금까지도 크라프테 본국으로의 방어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다. 정보에 따르면 오히려 공세 준비를 위한 물자를 반입하고 있지. 그러니, 저들이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 그게…… 정말입니까? 샤쇠르들의 보고에도 그런 건 없었는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공세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태세 전환을 해서 방어 준비를 하라고 하시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좀…….”
루이 드제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해서, 내가 답했다.
“정보 출처는 아키텐 백작이다.”
“아.”
“오.”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다.
그런 정보를 어떻게 구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없이,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간 크리스틴이 보여준 존재감 덕분이든, 그녀가 가져온 정보를 의심하는 것을 내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든.
어느 쪽이든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혼란을 잠재우고 정리하기에 지극히 효과적이지.
“그런 관계로, 우리는 기존의 공격 계획을 폐기하고 방어 계획을 입안한다.”
“휘유~ 정말입니까……. 본국이 쑥대밭이 될 상황인데 여기서 총공세를 준비 중이라고요. 저 크라프테와의 전쟁은 정말 기존의 모든 상식을 갈아엎어버리는구만요.”
“국왕으로서의 판단으로는 미친 것 아닌가 싶지만, 장군으로서는 탁월하지. 우리가 이걸 모른 채 한가하게 공격 준비만 하고 있었다가 저들의 총공세를 맞이했다면 어떤 끔찍한 결과가 나왔을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 알 텐데?”
경박하게 말하던 제롬 모렐도 내 말을 듣고는 표정을 굳혔다.
에리스는 프랑지아의 예산을 다 털어도 부족할 수정을 물처럼 쓰고도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을 정도로 혹사당했고, 우리도 모든 걸 다 내던져가며 싸우고서야 간신히 대등한 전투가 가능했다.
제대로 대비도 못한 채 그런 자들과 다시 부딪혔다면 패배는 불 보듯 뻔하다.
“그런데,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솔직히 말해서, 야전을 다시 치른다고 해서 지난 전투와 크게 다른 양상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크라프테군 특유의 전술을 처음 봤을 때에 비해 충격이 줄긴 하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저들은 그 자체로 괴물처럼 강하니까요.”
“타당한 지적이다, 베르테르. 그래서 우리는 야전을 포기한다.”
“예? 그러면…….”
알렉상드르 베르테르가 조금 당황하는 가운데, 내가 덧붙였다.
“우리는 이곳, 바후아에서 적을 맞이한다. 주민들을 전부 소개하고, 시가전으로 적을 끌어들여 싸우겠다.”
“오, 우리 기병대 손실이 크니까 아예 개싸움으로 가자는 겁니까? 하핫-”
“그래. 그대의 생각 그대로다, 모렐. 저들은 지난 전투에서 포병 전력의 손실이 심한데 반해 기병 전력은 우리보단 온전히 유지했으니까.”
시가전 양상이 되면 제아무리 정예도를 자랑하는 크라프테군이라도 그 역량의 활용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지난 전투에서 포병도 많이 손실된 크라프테군 입장에선 바후아 정도 되는 대도시를 요새화시키면 뚫느라 고생 좀 할 테고.
“확실히 그렇군요! 이번엔 저를 선봉에 세워주십시오!”
니콜라 네는 이번에도 아주 용맹하기 그지없어서,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아. 고려해 보겠네, 네 장군.”
시가전은 그 특성상 전술의 개입이 최소화되는 전장이다. 기세가 최고이니, 그에게 선봉을 맡겨도 괜찮겠지.
“그런데, 후작 각하.”
“뭔가, 드제 사령관?”
“괜찮으시겠습니까? 바후아는 제법 대도시입니다. 이곳 주민들을 전부 소개하는 것도 일이지만, 시가전을 벌이면 도시는 엄청난 피해를 입을 텐데요.”
“맞아. 정치적 부담은 상당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 목이 날아갈 정도냐면 그건 아니야.”
지난 전투를 치를 당시에 내가 그런 제안을 했다면 진지하게 내 목을 걱정해야 했지.
알자스에서, 기병전에서 연이어 패배한 다음 총사령관이란 작자가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그런 제안부터 했다면 당연히 국민의회도 난리가 났을 테니.
“우리는 이미 저 크라프테의 대왕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국민의회에서 반발이야 있겠지만, 내 인기 좀 잃고 저들을 막아낼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거지.”
저 크라프테군과 2차 회전을 치루면 얼마나 심각한 희생을 낼지, 이길 수나 있을지부터 의심되는 판이다.
애초에 저 대왕이 전략적 고려 따윈 완전히 배제하고 전술에 모든 걸 다 거는 데, 이쪽도 뭐라도 희생해야 막을 수 있지.
“으음, 확실히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렇게까지 했는데 저들이 혹시나 공격을 단념하기라도 하면 후작님께서 정적들에게 공격받게 되실까 봐 조금은 우려가 되는군요.”
“그대가 그렇게까지 나를 걱정해 주는 줄은 처음 알았군.”
루이 드제는 꽤 억울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지금까지 함께 산전수전 다 겪어왔는데 너무하십니다. 게다가, 그것 아니라도 라파예트 후작님은 혁명군에 꼭 필요한 분이시니까요.”
오, 루이 드제. 이 친구가 나를 감동시키네.
“그, 그렇습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가 아니시면 누가 저 대왕에게 맞설 수 있겠습니까! 이 데미앙 드 미르보, 후작 각하만이 진정한 혁명군의-”
“알았어, 알았다고.”
저 눈치 없는 놈만 아니었으면 감동이 좀 오래갔을 텐데.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다음, 장군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대왕은 반드시 오니까.”
“예? 간단하게 단언하시는군요.”
“본국이 쑥대밭이 되는데 총공세를 감행하는 건 장군으로서는 허를 찌르는 기책일지 몰라도 국왕으로서는 절대로 할 짓이 아니야. 제아무리 대왕이라 한들 반발이 나오지 않을 수는 없다.”
국가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전쟁을 위해 국가를 버림 패로 쓴다?
군대의 본질을 부정하는 미친 짓거리다. 저게 말 그대로 군대가 소유한 국가지 뭐야.
“만약 우리가 시가전을 준비한다고 해서 공격을 철회하면, 대왕의 선택은 그대로 엄청난 정치적 부담이 되겠지.”
어차피 바후아는 수도 뤼미에르로 가는 길목에 있어, 반드시 뚫어내야만 하는 도시다.
그런데 공략이 어려울 것 같다고 뒤늦게 공격을 취소한 뒤 본국에 원군을 보낸다?
그런다고 이미 대왕의 외면 속에 침공 받고 있는 본국 여론이 좋아질 리가 있는가?
“그걸 만회할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정면으로 돌파해 확실한 승리를 얻어내는 것뿐이다. 그러니 대왕은 반드시 온다. 다들 내 정치적 입지 걱정하지 말고 방어전에 철저히 대비하도록.”
결국 정치적 입지 문제라는 것도 상대가 먼저 무너지면 아무래도 좋은, 누가 더 쫄리냐의 싸움일 뿐이거든.
그리고 내가 아는 그 대왕이라면.
빡세게 요새화된 시가지를 화려하게 뚫어보겠노라고 정면으로 들이박을 인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