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크라프테 전쟁 - 승부수
프랑지아 동부 바후아, 혁명군 사령부.
“어서 오십시오, 라파예트 후작 각하!”
“아, 다들 앉지.”
자연스럽게 답했는데, 어째 장군들 모두 표정들이…….
뭐, 그런 표정 지으면 어쩔 건데.
그렇지 않아도 아침에 휴가 내버리고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은 충동을 이기느라 고생했는데 이 인간들이…….
“좋은 시간 보내셨나요, 후작님?”
아.
내가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에리스가 아주 대놓고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제기랄, 계급으로 찍어 누르지 못하는 상대가 있었군.
절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억누른 나는 에리스의 장난기 가득한 시선을 애써 피하며 답했다.
“여왕 폐하, 외람되나 군사회의에서 사담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하, 네! 군사회의에서 사담은 곤란하죠! 하긴, 라파예트 후작님이 진중에서 사랑을 과시하신 것도 아니시고, 전시에 군 숙소에서 그런 일을 하신 것도 아니-”
“여, 여왕 폐하!”
젠장, 여기엔 카로크와 샨드라도 있단 말이다!
어째 인자한 얼굴로 보고 있는 외눈의 오크와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샨드라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다.
다른 장군들은 그래도 웃음을 참으려고 온갖 웃기는 표정들을 짓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큭, 푸흡…….”
미르보, 너 이 새끼. 기억해뒀다.
데미앙도 내 눈빛을 알아본 건지, 웃던 얼굴이 바로 창백해졌다.
그래도 덕분에 민망함은 좀 줄어서, 나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시작하지. 노던 연합 왕국과 작센 공국, 바르샤바 공국이 크라프테에 반기를 들었다. 합치면 5만에 달하는 병력이니, 크라프테 본국을 휩쓸기에 충분하겠지.”
“오오, 빠르군요. 과연 아키텐 백작님.”
루이 드제는 제법 놀라워했다.
그래, 크리스틴이 대단하긴 하지. 조금 더 칭송해도 좋다.
내가 저 크라프테를 상대로 한 번이라도 승리를 따내줄 것이라 믿고, 그녀가 사전에 비싼 돈을 들여가며 준비 작업을 해두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시기적절한 호응이 나오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러지 않았더라면, 저들을 설득하고 매수하는 사이 우리가 크라프테와의 2차전에서 패배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작 각하. 지난 전투의 피해가 전부 수복된 것은 아닙니다. 더 시간이 필요한 부상병도 있고, 무엇보다 가장 치명타를 입은 흉갑기병대의 전력은 여전히 온전하지 못합니다.”
참모장 알렉상드르 베르테르의 지적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대의 말이 맞아. 확실히 우리 군이 지난 전투의 피해에서 수습되지는 못했지. 그건 크라프테 쪽이 오히려 더하면 더 하지, 덜 하지는 않을 거다.”
저들과 달리 우리에겐 신성력의 지원이 확실하고, 그만큼 부상자들의 회복과 복귀도 빠르다.
“크흠, 크흠. 잘못하면 본국이 쑥대밭이 될 거니 적들도 부대를 나눌 수밖에 없겠군요. 절호의 기회입니다. 역시 라파예트 후작 각하, 그리고 아키텐 백작 각하!”
데미앙 드 미르보가 뒤늦게 열심히 아부하지만, 그래봐야 아까 대놓고 웃은 건 기억한다.
뭐, 그건 그거고.
“그래, 어렵게 이끌어낸 기회다. 우리가 자칫 늦게 대응해서 노던 연합 왕국이나 크라프테 내의 공국들이 먼저 쓸려버리면 그대로 날아갈 기회니, 우리군도 저들에게 호응하여 반격을 준비한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대가는 가볍지 않았다.
크리스틴이 순전히 나 하나만 믿고 아키텐 상단이 그동안 모아온 돈을 거의 다 소진해 주었는데,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해서야 그녀에게 면목이 없어진다.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그러면 크라프테가 군대를 나누어 본국으로 보내자마자 공격을 개시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도록.”
“옛!”
이 전쟁에 대비해 크리스틴이 준비해 준 패도 이제 다 썼다. 전략적 우위는 충분히 점했으니, 이제 남은 건 군대의 승리뿐이지.
나는 작전 지도상의 알자스, 크라프테군의 거점을 노려보았다.
저들의 재상도 결코 무능하지 않다. 저들이 예기치 못한 사태를 보고 대응책을 꺼내기 전에 결정적인 승기를 잡아내야 한다.
저들의 예봉은 이미 꺾었으니 저곳에서만 승리하면 크라프테군을 프랑지아에서 완벽하게 몰아낼 수 있다.
하지만 상대는 그 대왕이다.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볍게 압도 할 수 있을까?
혹시나 또 내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발상으로 역습을 펼치는 건 아닌가?
카를 2세, 그 전쟁광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 * *
프랑지아 동부 알자스, 크라프테군 점령지.
다음 전투를 위해 진행 중이던 대왕의 작전회의는 본국에서 다급하게 달려온 전령 때문에 난장판이 되었다.
“대, 대왕 폐하, 큰일입니다! 노던 연합 왕국이 선전포고하고 동원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국내에서는 작센 공작과 바르샤바 공작이 저 침략자들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뭐라고? 노던 연합 왕국은 제국의 편이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된 건가?”
“작센과 바르샤바 공작? 복속하고 쥐 죽은 듯이 지내던 자들이 갑자기 왜! 아니, 그보다 저들과 노던 연합 왕국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고?”
“적들의 규모는?”
“노던 연합 왕국이 3만, 작센과 바르샤바 공작과 이에 결탁한 반란군이 2만 정도로 추정됩니다!”
“맙소사!”
회의장은 아주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이건 준비 없이 나올 수 있는 병력 규모가 아닙니다!”
“저 비열한 반역자들이 적들과 내통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혼란이 깊어만 가고 있자, 대왕의 일갈이 터졌다.
“그만!”
회의장이 대번에 고요해졌다.
천천히 장군들을 둘러본 대왕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당황하지 마라. 이건 프랑지아의 함정이다.”
그러나 대왕의 침착한 음성에도 크라프테의 장군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프, 프랑지아의 함정…….”
“하오나 대왕 폐하, 저들과 노던, 우리 국내의 반역자들이 대체 어떤 연고가 있어서 이렇게 되었는지…….”
대왕은 끌끌거리며 혀를 찼다.
그래. 아무 연고도 없다. 그래서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노던 연합 왕국은 제국의 편에 붙어 프랑지아의 성녀왕을 부정하며 침략했던 국가고,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프랑지아의 해군에게 시달리던 저들의 적국이었다.
작센과 바르샤바 공작? 크라프테와 제국의 전쟁에서 저들 편에 붙었다가 그에게 대패하고 복속한 하찮은 자들일 뿐이다.
그런데 서로 연고도 없었을 그들이 정확히 프랑지아의 승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잡고, 크라프테에 반기를 들었다.
프랑지아의 입김이 닿지 않고서는 저럴 수가 없다는 사실이 명확한데, 어떻게 저런 작업을 했는지는 대왕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가기는 한다.
노던 연합 왕국은 프랑지아의 통상파괴 작전에 가장 큰 피해를 받고 있는 국가고, 제국이 약속한 참전 대가를 전혀 받지 못해 울상이었으니 구워삶으려면 구워삶는 것도 가능은 했을 터다.
작센과 바르샤바의 공작들도 힘이 없어서 얌전히 복속되어 있었을 뿐, 크라프테에게 불만이 없을 리 없다.
무적처럼만 보이던 크라프테가 패배한 시점에, 저들은 충분한 사탕발림만 있다면 제국에게 붙었을 때처럼 적에게 붙어도 이상하지 않다.
크라프테도 그를 모르지는 않았으나, 문제는 그게 바로 이 순간에 일어났다는 것.
크라프테가 프랑지아에게 최초로 패배하고 2차전으로 반격을 모색하는 순간에, 마치 크라프테가 프랑지아에 전력을 집중시키는 것을 방해하겠다는 듯이 정확한 타이밍에 터졌다.
이게 가능하려면,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프랑지아의 승리에 맞춰서 저들을 끌어들일 수 있도록, 사전에 충분한 공을 들여 밑 작업을 해둔 거다.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적절한 순간에 저만한 규모의 호응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하하, 하하하……. 이 크라프테에게, 짐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미리부터 준비해두었다?”
지금쯤 그의 재상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 하며, 대왕은 유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유스틴 폰 비텐펠트는 아키텐 백작이 크라프테군에 군사 공작을 집중하고 있다고 보고했고, 그를 성공적으로 저지해냈다.
그러면서 프랑지아군에는 제대로 공작을 성공해서, 그동안엔 대왕조차 정보전에서 크라프테가 우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성공한 것은 수도 무기고의 파괴공작, 최초 기마전에서의 매복 성공까지.
정작 바후아 전투에서는 저들이 첩자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굴며 역이용해 매복군이 격파당했고, 이제는 그동안 아키텐 백작이 펼친 군사 방해 공작 시도가 그저 미끼에 불과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훌륭하군, 훌륭해…….”
라파예트 후작도, 성녀왕도, 아키텐 백작도.
모두가 그의 기대를 한참 넘어서고 있지 않은가.
대왕은 처음으로, 이대로 가다간 전쟁 그 자체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상황마저, 그에게는 기꺼움을 안겨주었다.
일개 제후국으로서 제국에 맞서 전쟁을 치를 때조차 그의 역량이 아니라 크라프테의 국력 부족이 문제였다.
그런데 죽기 전, 그가 맞이한 마지막 전장에서 이런 적수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축복이 아니겠는가?
“대왕 폐하.”
“오, 하인리히. 말해보라.”
와중에 그의 후계자가 나서, 대왕은 기꺼운 마음으로 답했다.
비록 지금까지는 그의 눈에 차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의 후계자가 저 프랑지아의 젊은 영웅들에게 자극받아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 또한 기대해 볼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상비군 중 2만의 군사만 내어주십시오. 신이 저 노던과 국내의 배신자들을 모두 토벌하겠습니다.”
“2만으로 5만을……? 가능하시겠습니까?”
“5만이라고 해봐야 오합지졸들에 불과합니다. 능히 가능합니다.”
“오오, 과연 하인리히 전하!”
단언하는 하인리히와 이에 감탄하는 장군들을 빤히 보던 대왕이 입을 열었다.
“기특하기는 하나, 아직 멀었구나 하인리히.”
“예?”
하인리히가 당황하고, 열심히 왕자에게 찬사를 보내던 장군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지난 전투에서 그러지 않아도 상비군의 손실이 컸다. 거기서 2만을 빼고도 저 프랑지아를 상대로 이길 수 있겠는가?”
혁명군이 사상자를 6만이나 내는 와중에 크라프테군의 손실은 4만이었다. 하지만 그걸 겨우 4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저중 상당수가 적을 분쇄하기 위해 앞장섰던 크라프테의 정예 상비군이고, 저들은 국민을 징집해 채운다고 해서 대체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니까.
“하, 하오나 대왕 폐하. 그렇다고 해서 본국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많이 뺄 수는 없더라도 본국을 방어할 부대는 분명히 필요합니다.”
대왕은 얼굴을 구기더니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짐을 따른 크라프테군의 자랑스러운 장군들의 역량이 겨우 이 정도라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노라.”
“소, 송구합니다.”
난감해하는 장군들과 하인리히 왕자의 앞에서, 대왕이 단언했다.
“애초에 본국을 지키기 위해 병력을 분산시키는 것이야말로 저들이 바라 마지않는 일이다. 이 공작이 바로 그걸 위해 일으킨 것임이 명백한데, 어찌 그것을 모르는가?”
“송구합니다…….”
이제야 좀 조용해진 장군들을 슥 본 대왕은 짐짓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음에도 불만을 미처 다 숨기지 못하는 하인리히 왕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기억하라, 하인리히. 우리가 키워낸 강병은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영토는 일시적으로 빼앗겨도 되찾으면 그만이나, 군대를 잃으면 전쟁은 그대로 패배한다.”
“하오나 대왕 폐하.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군대는 국가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군대를 위해 국가가 황폐화된다면-”
“그게 상식이고, 모두가 그렇게 여기겠지. 하나 그렇게 군대를 분산시켜서 역전의 기회를 잃는 순간, 양면 전선에 지지부진하게 끌려가다 패전하는 결과만이 남는다.”
결국 하인리히도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라파예트 후작과 성녀왕, 그리고 아키텐 백작.
개개인으로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모두 모인 프랑지아는 그와 호각이거나 어쩌면 그 이상이다.
그렇다면 그 또한 모든 것을 걸고 전력으로 맞부딪히는 수밖에.
이것이 무리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크라프테에 남을 후유증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거다.
하인리히 왕자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해가며 모든 것을 걸어야만 승리할 수 있을 만큼 저들이 크라프테를 몰아붙인 거다.
“심지어 이 공작을 벌인 프랑지아 또한 우리가 군대를 분산시킬 것이라 여기겠지. 본국이 쑥대밭이 되고 있는 와중에 전 병력이 총공세를 벌일 거라 예상할 수 있는 인간은 없을 터.”
여기까지 그를 몰아붙인 프랑지아의 젊은 인재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대왕이 선언했다.
“그 허를 찌른다. 혁명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다면, 노던과 반란 분자들의 오합지졸 따위 언제라도 능히 쓸어내릴 수 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