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크라프테 전쟁 - 노던 연합 왕국 (2)
“구스타프 12세는 확실히 야심 넘치는 자군요. 불만도 많고.”
탈레랑은 느긋하게 커피를 한 모금 머금어, 음미하듯 천천히 넘긴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아키텐 백작이 저들을 회유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하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크리스틴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가볍게 답했다.
“역시나 저를 전적으로 믿고 따라오신 건 아니군요.”
“하하, 말씀드렸다시피 아키텐 백작은 신용은 해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탈레랑은 씩 웃곤 윙크해 보였다.
“외교에서 100%라는 건 없으니까요. 기본적으로 잘 모르는 나라와 진행하는 일이니, 어디서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죠.”
“그렇군요. 저는 상인의 눈으로 관찰했을 뿐이니. 그래서, 총재의 눈으로 본 구스타프 12세와 노던 연합 왕국은 어떻죠?”
탈레랑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머금더니 싱긋 웃으며 답했다.
“욕심 있고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국왕과 그에 받쳐주지 못하는 국력의 괴리가 심하죠. 역시나 100%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 나라는 앞으로도 전성기를 맞이할 일은 없지 않을까요?”
크리스틴도 어둡게 미소 지었다.
구스타프 12세는 짐짓 분노하는 척하며 국익을 위해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려는 것처럼 굴었지만, 결국 몸이 달아 있었다.
크라프테의 대왕이나 프랑지아의 젊은 거물들의 명성은 젊은 국왕으로 하여금 자신도 그런 활약을 하고 싶다고 여기게 자극했으니까.
겉으로는 마치 프랑지아의 제안이 불쾌하다는 듯이 굴었지만, 구스타프 12세는 해상 봉쇄로 수출길이 막힌 광물로 그대로 무기와 대포를 만들며 명백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크리스틴이 그런 기밀 사안까지 다 알고 있다는 건 저들이 모르겠지만.
“저들의 영토 탈환을 보장해 주지 않은 것은 잘하신 거죠. 탈레랑 총재의 말솜씨는 저도 감탄할 정도입니다.”
크리스틴의 말에, 탈레랑은 히죽 웃으며 답했다.
“저들의 군대가 크라프테군을 당해낼 거라는 보장이 전혀 없는데, 전력 분산시키자고 끌어들인 동맹에게 영토를 먹여주겠다고 프랑지아가 피를 흘릴 수는 없죠. 물론, 이것도 아키텐 백작의 지원이 있어서 가능한 일입니다만.”
“노던 연합 왕국의 기득권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해상 봉쇄를 풀고 저들의 광물을 파는 것이니까요. 국왕과 지지자들의 이해가 따로 노니 이용하기 편하죠. 저들에게 부족한 건 결국 식량이고, 그건 우리가 어떻게든 해결해 줄 수 있으니까요.”
탈레랑은 손으로 턱을 매만지더니 물었다.
“저들에게 호응해 줄 크라프테 내부에서의 반란이라는 건 어느 정도 규모입니까?”
“글쎄요…….”
크리스틴은 조금 말을 끌더니 답했다.
“반란이라는 특성상 저도 정확한 짐작은 어렵지만, 다 합치면 수만은 될 겁니다.”
“워우. 급부상한 제국 북부의 패자가 고생깨나 하겠군요?”
“급부상한 패자니까 가능한 일이죠. 지금 크라프테 왕국 영토의 절반가량은 대왕의 치세에 차지한 타국의 영토입니다. 그동안은 크라프테가 잘나가고 저들의 군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봐야 결말이 뻔하니 움츠리고 있었을 뿐이죠.”
탈레랑은 픽 웃었다.
“거기에 우리가 크라프테군을 격파하고 노던 연합 왕국을 끌어들인 데다, 백작이 자금 지원까지 해줬다. 꺼져가던 불씨에 기름을 부어준 셈이군요.”
“그런 거죠.”
탈레랑은 여상하게 답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말로는 쉽지만 크라프테도 저들도 바보는 아니다.
프랑지아가 군사 공작에 집중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 정도의 첩보작전을 펼치면서, 동시에 노던 연합 왕국의 귀족들을 매수하고 크라프테 내부의 제후들을 부추겼다.
크라프테가 허용한 2년간의 정전 동안 그녀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며 얼마나 많은 돈을 썼을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국민의회를 기겁하게 만든 신성력 증폭 수정 건도 그렇고, 아키텐 상단이 내전과 혁명 동안 떼돈을 벌었다지만 이번 전쟁을 위해 거의 모든 걸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그런데도 저렇게 태연하게 있다니.
기실 국민의회에서 소위 혁명 수호를 외치던 자들이라도 혁명의 승리를 위해 전 재산을 헌납하라고 하면 망설이는 자들이 적지 않을 텐데.
애석하게도, 가진 것이 많은 자일수록 더더욱 그렇지.
“아키텐 백작은 굉장하군요. 굳이 상인이 아니라도 그 정도 판돈을 걸었으면 심장이 떨릴 것 같습니다만.”
“저, 떨고 있는데요.”
말과 달리 심드렁한 크리스틴의 표정을 보고 탈레랑이 실소를 흘릴 때쯤 시종이 왔다.
“탈레랑 총재님, 아키텐 백작님.”
“오- 기다리던 소식이 온 모양이군요?”
탈레랑은 시종이 건넨 서신을 받아 뜯어보고는 싱긋 미소 지었다.
“아, 결국 구스타프 12세가 용단을 내려준 모양입니다. 정식 협정 체결 전에 조금 더 조율이 있긴 하겠습니다만.”
크리스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답했다.
“그건 총재께 맡기도록 하죠.”
“음? 먼저 귀국하시려는 겁니까?”
“제가 맡고 있는 일이 좀 많아서요. 가급적 결과를 보고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사이에 다른 일에 대응하지 못하면 곤란하죠. 외교는 총재가 저보다 능숙하시니, 믿고 맡기겠습니다.”
탈레랑은 영 떨떠름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하하, 이것 참. 굉장히 애매한 거 아십니까?”
“뭐가요?”
“대개 정치인이라면 이런 큰 건수에는 어떻게든 한 숟가락이라도 더 올리려고 안달입니다. 그런데 기껏 요리 다 만들어놓고 손님에게 내기만 하면 되는데 접시째로 넘겨줘버리고 가신다니, 내심 경쟁자로 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묘하단 말이죠.”
크리스틴은 탈레랑을 빤히 보더니, 이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제가 조약 체결 하나에 연연해야 할 만큼 영향력이 부족했던가요?”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발언에 탈레랑은 표정을 구겼다.
“아, 예. 뭐, 알겠습니다. 하여간 라파예트 후작이나 당신이나 조국을 위해 헌신할 건 다 해주면서도 밥맛 없는 건 똑같군요. 여긴 제가 알아서 잘~ 할 테니 먼저 가셔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국민의회나 안심시켜주시죠.”
여기선 크리스틴이 잠깐 멈칫했다.
탈레랑이 왜 저래? 하고 고개를 갸웃할 때쯤 크리스틴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본국이 아니라 마도 왕국으로 갈 거라서요.”
“마도 왕국? 거긴 왜요?”
“거래 건이 있어서……?”
드물게 의문형인 크리스틴의 말에, 탈레랑이 미간을 좁혔다.
“신성력 증폭 수정 건도 다 끝났는데 거래요? 무슨 거래?”
“……아키텐 상단 지부는 없는 곳을 찾는 쪽이 더 빨라요.”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탈레랑이 말했다.
“거참, 그렇게까지 해도 고작해야 며칠 차이겠구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네요.”
탈레랑이 ‘아, 이 귀여운 아가씨를 어쩌나’하는 시선을 보내서, 크리스틴은 헛기침을 하며 등을 돌렸다.
“예, 뭐, 그럼 가서 라파예트 후작과 여왕 폐하께 안부나 전해주시죠. 여긴 제가 아주 깔끔하게 처리해드리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청춘이네, 청춘이야~ 부럽다!”
크리스틴은 못 들은 척하고 방을 나섰다.
* * *
바후아 전투가 끝난 뒤 일주일이 흘렀다.
다행히 그사이 에리스의 시력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우리의 여왕 폐하께선 언제 그랬냐는 듯 발랄한 모습으로 부상자들의 치료를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반가운 얼굴을 맞이하고 있었다.
“왕의 형제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카로크, 그리고 샨드라. 여기까지 와주고, 또 게르마니아 제국의 침공을 대신 방어해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들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지.”
이베리카 형제국의 증원군을 이끌고 온 카로크와 샨드라는 내 요청을 받고 그대로 북상해, 크라프테에 붙은 제국군을 격파하여 로렌을 지켜냈다.
생긴 것만 봐선 나 정돈 씹어 먹게 생긴 애꾸눈의 험상궂은 오크가 부드럽게 미소 짓고, 샨드라는 언제나처럼 쾌활한 얼굴로 너스레를 떨었다.
“어우, 죽을 뻔했죠. 제국군은 오합지졸이었는데, 비텔스바흐 백작인가? 그 치는 굉장하던데요.”
“아, 비텔스바흐 백작.”
제국 최강의 기사.
재능은 과연 제국 최강이라 불릴만해 보였지만, 경험의 격차가 한계였지.
나에게 패배한 이후로 절치부심해서 수련을 하기라도 한 걸까? 샨드라도 만만한 실력은 아닌데 그런 샨드라가 죽을 뻔했다라...
내가 괜한 자극을 줘서 벽을 넘기라도 한 거라면 피곤해지겠는걸. 역시 그때 죽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어쨌거나, 다시 한번 고맙네.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프랑지아 국경지대의 핵심 방어선인 로렌을 허무하게 잃었을 거야.”
“형제국이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어 기쁩니다. 지금부터는 우리도 합류하겠습니다.”
“아아, 부탁하지. 그대들의 왕은 잘 지내고 있는가?”
“하핫, 차라리 전쟁 치를 때가 더 편했다면서 불평불만이 가득하십니다. 도망쳤다가 오빠한테 잡혀 오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나는 그 집채만 한 덩치의 근육질 오크가 서류더미 사이에서 끙끙대다가 도망쳐선, 비쩍 마른 핫산에게 질질 끌려 다시 집무실로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하고 웃어버렸다.
“하하, 원래 정복하는 것보다 다스리는 것이 어려운 법이지.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그대들의 왕이다. 잘 해내리라 믿고 있네.”
“왕께서도 형제의 신뢰에 기뻐하실 겁니다.”
카로크와 내가 훈훈하게 미소를 주고받고 있자, 샨드라가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국군은 왜 로렌으로 왔답니까? 이미 교두보도 있고 교전 중인 알자스로 합류하는 것이 보통 아닙니까?”
“하하…….”
전술적으로는 그렇지.
물론 저들 딴에는 우리가 크라프테군과 교전하는 사이 허를 찌른다고 찌른 거겠지만, 로렌은 우리가 크라프테군에 대비해 구축해둔 방어선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제국군이 오합지졸이었다고는 해도, 형제국의 군대가 가볍게 이길 수 있던 이유도 분명 그게 클 테니까.
“형제국은 몰라도 중앙 대륙의 인간 국가들은 다분히 정치적이네. 저들은 뒤늦게 전쟁에 합류했으니, 어차피 이길 크라프테의 전투에 들러리로 끼기보단 뭐라도 저들이 내세울 공적을 세우려고 한 거겠지.”
“음~ 멍청하네요. 결국 쫓겨나서 크라프테와 같이 싸워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덕분에 우린 살았지.”
이베리카 형제국의 군대는 아무래도 백병전을 중시하니, 교리가 프랑지아군과는 많이 다른 편이다.
사전에 저들을 배려한 작전을 짜지 않으면 병력에 비해 즉시 전력이 되긴 어려웠을 테고, 솔직히 말해서 크라프테군의 미친 화력 앞에 붙기도 전에 저들이 녹아버릴 것이 심히 우려된다.
그런 상황에 오합지졸이라곤 해도 교리상 바로 크라프테군과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제국군이 함께 왔으면, 아마 우린 더 고생했겠지.
나는 흘긋, 뒤쪽을 보곤 웃으며 말했다.
“자, 그대들을 안내해 줄 자가 도착했으니 이만 가서 쉬도록 하게. 다음 전투까진 여유가 조금 있을 거니까.”
“알겠습니다.”
“넵~ 아.”
샨드라는 카로크와 함께 내게 답하고 등을 돌렸다가, 내가 안내역으로 부른 가스통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갔다.
보아하니 이젠 가스통도 꽤 반가워하는 눈치라서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나는 고참병들이 형제국의 인간과 오크, 고블린의 혼성군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는가 하면, 신병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선 오크를 보는 모습을 살폈다.
이 정도면 그래도 편견은 많이 사라진 거지.
처음에 크록스와 만날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만하면 공조가 어렵지는 않을 거다.
지난 전투에서 혁명군의 사상자가 6만가량, 크라프테군의 사상자가 4만가량.
엄청난 돈지랄의 수정을 동원하고 에리스를 한계까지 몰아붙이고도 저런 교전비라는 건 꽤 암담하지만, 이쪽엔 에리스가 있고 신성 교국의 방침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협조해 주는 요한 대주교도 있다.
덕분에 사상자 중 이미 치료를 마치고 전선에 복귀 가능한 인원이 1만 가량.
카로크와 샨드라가 데려온 병력이 5만에 준하니 우리 병력은 사실상 차이가 없다.
프랑지아군 전력의 핵심인 흉갑기병대가 지난 전투에서 극심한 타격을 입은 것은 뼈아프지만, 사상자가 전부 전력손실로 이어지고 포병을 상당히 잃은 크라프테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
여기서 그렇지 않아도 병력상 열세인 크라프테군이 분산되기까지 한다면, 승산은 충분히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던 연합 왕국이 크라프테 왕국에 선전포고했어요. 이에 호응해, 작센 공작과 바르샤바 공작을 중심으로 크라프테에게 복속했던 제후들이 독립전쟁을 선포했고.”
나는 몸을 돌리며 답했다.
“기다려 마지않던 소식이군요.”
크리스틴이 슬며시 웃으며 답했다.
“아마 크라프테의 대왕보다도 먼저 받은 소식이실 거고요.”
나는 그대로 다가가서 크리스틴을 끌어안았다.
크리스틴은 잠깐 멈칫했다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은, 전투가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당신을 보러 오고 싶었는데.”
“이렇게라도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아, 여기 진중이지.
뒤늦게 깨달은 내가 머쓱하게 그녀를 놔주자, 주변의 시선이.
아…….
“미, 미안합니다. 너무 반가워서.”
크리스틴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당신을 위해 눈 돌아가도록 바쁘게 일하면서 돈도 엄청나게 쓰고, 긴 여행길로 고생하고, 오자마자 부끄러운 일을 당했네요.”
“그, 그게…….”
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크리스틴은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리더니 내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그러니, 합당한 보상을 요구할게요. 피에르.”
“…….”
나는 바로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숙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뭘 봐, 이것들아.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총사령관 각하!”
“바, 바닥을 쓸자. 바닥을…….”
나를 따르는 크리스틴이 쿡쿡 웃는 소리가 마음을 간지럽히는 감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