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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63화 (163/258)

163화. 크라프테 전쟁 - 노던 연합 왕국 (1)

에리스는 전투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고서야 깨어났다.

“깨어나셨다고 들었습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여왕 폐하.”

부하의 보고를 받고 달려가자, 다소 파리한 안색으로나마 일어나 앉아있던 에리스가 바로 물었다.

“라파예트 후작님, 전투는요?”

“우리가 이겼습니다. 여왕 폐하의 힘이 컸습니다.”

에리스는 환하게 웃었다가, 이내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죠?”

“전투가 끝나고 이제 사흘째입니다.”

“그럼, 부상자들은…….”

사흘 만에 깨어나서 궁금해하는 것이 그쪽인가.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요한 대주교와 프랑지아 교구의 사제들이 도와주었고, 의무병들도 있습니다. 폐하께서 없다고 해서 부상자들이 다 죽어 나가는 건 아닙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나는 굳이 사상자의 수를 에리스에게 알려주지는 않았다.

대신, 에리스의 보랏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에리스.”

“네?”

“너, 지금 눈 안 보이지.”

“아.”

에리스는 손으로 눈가를 쓸어내리더니 물었다.

“……시종은 눈치 못 채던데, 티 났나요?”

“……전장에서 구르다 보니 눈을 다친 사람을 몇 번 봐서. 무엇보다, 네가 당장 부상자들을 살피러 가겠다고 나서지 않는 것이 이상했어.”

에리스는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

“그건 어떻게 아는 거지? 신성력 사용자라?”

“……네. 기운으로, 어렴풋이 알아요. 당장은 안 보여도, 기운만으로도 이 방에 후작님 혼자만 들어왔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에리스는 내 쪽을 빤히 보았다.

눈이 안 보여서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대충 내가 있는 방향을 보는 시선으로.

“그러니까 후작님이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아.”

에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말씀드렸잖아요. 기운이 느껴진다고.”

수정의 힘을 빌렸다고는 해도, 기절했다가 이제 간신히 깨어난 에리스에게 2,5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축복해달라고 청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고작해야 수십 명 치료하는 것만으로도 허덕이던 성녀에게.

매번 무리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게 에리스에게 명백히 해가 된다는 걸 이제야 확실하게 체감했다.

하지만 에리스는 가슴께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저 하나가 일반병보다 훨씬 귀중하다고 하셨죠.”

“……그래, 내가 그렇게 말했지.”

“으음, 분하지만 지금은 후작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에리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렇게 말하더니,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러면 저 하나가 잠깐 아프거나 눈이 안 보이는 걸로 수십만이 이기고, 수만이 살아남았으면 그건 가치 있는 희생이죠, 후작님?”

“하.”

에리스는 눈도 안 보이는 주제에, 허리에 손을 얹으며 짐짓 엄한 얼굴로 말했다.

“왜 그러세요, 후작님? 설마하니 저한테 훈계하시던 후작님이 입장이 바뀌니까 생각도 바뀌시는 건가요?”

내 앞에 있는 건 이미 어린 성녀가 아니지.

새삼스럽게 그걸 자각해서,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아닙니다. 여왕 폐하.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보통 그런 건 명령을 내리는 자가 판단한다. 그자의 가치를 재단할 수 있는 제3자가 결정해서 희생을 명한다.

“명령을 받아서도 아니고 자진해서 기꺼이 희생을 감당하려고 나서는 자는 보통 없습니다. 하다못해 무리겠다 싶으면 사양하는 법이라도 좀 배워주셨으면 합니다.”

“후작님도 열세에서 목숨 걸고 적진에 뛰어드시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내가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드는 순간에도,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혹시나 잘못될 경우보다 무사히 살아서 승리로 이끌 확률이 높다고 판단해서 행한다.

“최소한 저 스스로가 잘못될 거라는 확신이 선 순간에도 여왕 폐하처럼 나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크리스틴 때문에라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지만 에리스에겐 그런 것이 없다.

상냥하고 활기찬 모습에 감춰져 있지만, 어느 의미로 가장 달관하고 언제라도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에리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렇게 열심히 하면 저나 어머니의 죄를 신께서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 해서.

예전에 그녀에게 들었던 말이 뇌리를 스친다.

내가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있자 에리스는 찌뿌둥한지 몸을 펴 기지개를 켜더니,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모두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잖아요. 그러면 저도 기뻐요.”

-저는,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타인을 위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기에 오히려 자신은 아무래도 좋아져 버린 성녀라…….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말했다.

“이거 하나는 분명하게 해두죠, 여왕 폐하.”

“네?”

“그러다가 당신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당신을 사랑하는 국민들 모두가 불행해할 겁니다.”

에리스는 눈을 깜빡이더니 슬며시 웃었다.

“어쩌죠? 저, 진짜 나쁜 사람인가 봐요. 그게 걱정되기보다 오히려 기쁘게 들리는데요.”

아, 이걸 진짜.

여왕을 쥐어박을 수도 없고.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정히 그러시다면야, 지휘관으로서 멋대로 명령을 내려서라도 통제해드리는 수밖에. 어차피 모든 걸 다 걸어서라도 이겨야만 하는 위기는 지나갔으니까, 폐하의 의사에 반하더라도 강제로 후방에 배치해드리도록 하죠.”

나는 에리스가 언제나처럼 사기꾼 후원자라면서 샐쭉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보는 앞에서 꽤 기쁘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그래요. 저는 잘 모르겠으니까, 제가 믿는 후작님께 맡길게요. 후작님이라면 분명, 기왕 발휘할 제 이기심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더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게 해주실 테니까.”

터무니없는 말에, 절로 실소가 흘렀다.

“이건 책임감이 넘치는 거야, 무책임한 거야…….”

……그런데도, 어째서인가.

몸에 남은 신성력의 잔향인지, 그게 아니면 더 깊숙한 곳의 무언가인지가 맥동하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 * *

노던 연합 왕국, 수도 노르트리히.

크리스틴의 기함 ‘리브레’와 호위함대가 노던 연합 왕국의 두 반도 사이를 잇는 섬에 위치한 왕국의 수도, 노르트리히에 입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회의에서는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쟁 도중에 동맹을 배신한다니? 어디에도 그런 법은 없소! 연합 왕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겠군!”

“엄밀히 말하면 배신은 아니오. 우리 동맹은 엄연히 게르마니아 제국이지, 크라프테 왕국이 아니잖소? 크라프테 왕국이 제국, 그리고 우리와 전쟁을 치른 적국이었던 건 불과 20년도 안 되었소!”

“흥, 그게 그거지! 이 전쟁은 애초에 게르마니아 제국이 시작한 거고, 우린 동맹으로서 참전한 거요! 여기서 우리가 왕위 계승권을 부정한 프랑지아의 서출 여왕과 손을 잡는다고? 우리 꼴이 어떻게 되겠소?”

“그렇게 따지면 게르마니아 제국이 우리를 끌어들이면서 약속한 것 중 하나라도 제대로 이행한 것이 있소? 이 전쟁에서 크라프테가 이긴다고 한들 이행할 기미는 있겠소? 지금도 제후들에게 시달리느라 정신이 없지 않소! 도리를 먼저 져버린 건 저쪽이오!”

친 제국파 대신들과 반 제국파, 또는 아키텐 상단에 의해 매수된 대신들이 열심히 치고받는 걸 보던 탈레랑은 여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과연, 아키텐 백작. 제대로 해두셨군요.”

제독의 정복 차림인 크리스틴은 언제나처럼 부채로 입가를 가리는 대신, 도도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보이곤 옥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 프랑지아의 2왕녀였던 왕비는 자애로운 성품으로 노던 연합 왕국의 국민들에게 그럭저럭 괜찮은 지지를 받는 존재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심약해서 제대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야심가였다면 저 제국의 황후 체칠리아처럼 프랑지아 왕위에 눈독을 들였거나, 아니어도 이권을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했었을 터이니 무리도 아니다.

그리고 왕비보다 6살이나 적어 비교적 젊은 왕, 구스타프 12세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프랑지아의 사절단 앞에서 서로를 헐뜯고 있는 대신들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왕국의 외교와 미래에 대해 이토록 깊이 심려하는 대신들이 있으니, 짐의 홍복이로구나. 손님들 앞에서 이토록 왕국의 위신을 드높이고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꼬?”

바로 방금까지만 해도 서로를 미친 듯이 헐뜯던 대신들이 단번에 입을 다물었고, 구스타프 12세는 왕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왕비, 그대의 의견은 어떠하오? 아직도 그대의 친정을 위한 복수가 필요하오?”

“폐하, 아무리 그래도 동맹의…….”

왕비는 조금 말하다가, 왕의 눈빛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닙니다, 폐하. 폐하의 뜻대로 하심이 옳습니다.”

왕비의 답을 들은 구스타프 12세가 입을 열었다.

“짐은 사절과 조금 더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하오나 폐하!”

“폐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친왕비파는 반발하려고 했으나, 훨씬 많은 대신들이 허리를 숙이며 하는 말에 표정을 구기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고요해진 대전에서, 구스타프 2세는 탈레랑과 크리스틴을 내려다보며 오만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것이 옳게 된 왕국이다. 짐은 그대들이 세운 불쾌한 정치체제를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인정할 생각도 없노라.”

꽤나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국왕의 말에도 탈레랑은 자연스럽게 답했다.

“혁명 프랑지아 왕국 또한 다른 국가들에 우리의 체제를 퍼트리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폐하. 어느 나라에나 맞는 옷이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하.”

구스타프 12세는 헛웃음을 흘리곤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짐의 왕국에서 대신들을 멋대로 구워삶은 자들이 말은 잘 하는구나. 아키텐 백작. 그대의 이명과 악명은 짐도 익히 들었노라. 필히 그대의 작품이렸다?”

아키텐의 검은 마녀.

결코 좋게는 들리지 않는 이명을 언급한 왕의 언사에, 크리스틴은 살짝 미소 지으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외람되나 국왕 폐하, 최근 노던 연합 왕국 내부의 여론 변화는 폐하께 부정적이지는 않으셨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구스타프 12세는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는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래. 그것이 외국의 입김에 의한 것이 심히 불쾌하다만, 틀린 말은 아니로구나.”

프랑지아의 1왕녀였던 체칠리아보다 나이가 많아 이미 늙은 오토 2세와 달리, 구스타프 12세는 30대로 제법 젊다.

그러나 그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에, 친제국파가 많은 대신들에게 휘둘리며 제 뜻을 펴지 못해왔다.

“동맹이란 것이 본디 무엇입니까, 국왕 폐하. 동맹은 상호 간의 이득을 전제로 한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이 손해만 본다면 그것은 더 이상 동맹이라고 부를 수 없지요. 그렇다면 국익을 위한 관계 재고 또한 필요한 일입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프랑지아가 드리는 제안은 폐하의 왕권을 더욱 공고히 만들 기회입니다. 대신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저 강대한 크라프테에게서 왕국의 고토를 되찾아오신다면, 폐하께서도 저 ‘대왕’만큼이나 칭송받으시겠지요.”

카를 12세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탈레랑과 크리스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옳게 된 왕국.

그렇게 말하기는 했으나, 카를 12세는 지금 친제국파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그를 지지하는 여론이 어디까지나 이해가 일치하는 동안만 이어질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저들은 대부분 그동안 제국과 교류하며 붙어먹던 기득권과 적대관계이거나, 아니면 프랑지아와의 전쟁 탓에 해로가 봉쇄되어 피해를 보고 있는 자들이니까.

결국, 국왕인 그도 국가가 처한 상황에 구애되지 않고 국가를 멋대로 좌지우지 할 수 없다.

“불쾌하구나, 심히 불쾌해.”

그러나 그의 나이가 아직 겨우 30대다.

크라프테의 대왕이 그의 나이에 제국을 격파하며 일약 중앙 대륙 제일의 명장으로 떠올랐고, 그보다도 더 젊은 라파예트 후작이나 아키텐의 검은 마녀, 성녀왕 에실리스테의 명성은 이미 전 대륙을 진동시키고 있다.

단순한 자존심만으로 이런 기회를 놓치기엔, 그는 젊고 야심 차다.

무엇보다도 마지못해 제국의 들러리로 파병한 소규모 부대가 무참히 패배한 몇 번의 전투. 그 이후로는 프랑지아의 해군에 휘둘리며 통상파괴 작전에 휘둘리며 경제만 계속 악화되어 가고 있다.

역사에 그의 시대가 그저 그런 암흑기로만 남는 것은 결코 참을 수 없다.

“그대들이 노던 연합 왕국을 이용하기 좋은 패로 여길지는 모르겠으나, 짐은 그리 어리석지 않노라.”

카를 12세는 관자놀이에서 손을 떼며 자세를 바로 했다.

“묻겠다. 짐의 군대가 저 크라프테로 진격하면 그대들에게 저들의 강병을 붙잡아둘 여력이 있는가? 그대들의 해군 탓에 막혀, 근근이 이어지던 광물거래조차 크라프테와의 전쟁에 돌입하면 여의치 않아진다. 그대들이 이를 만회하여, 정말로 ‘동맹’다운 이득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가?”

탈레랑은 슬며시 크리스틴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크리스틴은 왕의 앞에서도 오연하게 고개를 세운 채 자신 있게 답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프랑지아는 대규모 전쟁을 치르느라 언제나 풍부한 광물 수요가 있고, 설사 남더라도 아키텐 상단은 귀국의 광물로 중계무역을 진행할 충분한 여력이 있습니다. 또한…….”

크리스틴은 조금 뜸을 들였다가, 슬며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답했다.

“귀국의 군대가 크라프테로 진격할 때, 저들이 맞서 싸워야 할 군대는 왕국군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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