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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62화 (162/258)

162화. 크라프테 전쟁 - 다음 차례

일단 대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크라프테군의 후퇴는 신속했다.

바로 방금까지 교전을 벌이던 크라프테군이 빠르게 물러나고, 후퇴하는 순간까지도 군기를 유지하며 서로를 엄호하는 광경.

최후의 최후까지 기진맥진하게 버텨온 혁명군은 감히 추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으나, 모두가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호하기 시작했다.

“크, 크라프테군이 물러갑니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초전에서 보여준 위용과 압도적인 공포를 에리스의 축복과 외침으로 다잡아가며 버텨낸 끝에 맞이한 승리.

“이젠 살았어!”

“혁명 프랑지아 만세! 우리는 승리했다!”

군사들은 지친 와중에도 환호하며 승리를 기뻐했다.

“이겼어……. 듀랑 씨, 우리가 이겼어요!”

완전히 탈진해서 바닥에 주저앉아 헉헉대고 있던 루이스 다키텐이 신이 나서 하는 말에, 레옹 듀랑도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예, 이겼군요. 솔직히,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듀랑은 어딘가 모호한 표정을 지은 채, 환호하고 있는 혁명군을 바라보았다.

이기긴 했으나, 그 과정은 엉망진창이었다.

성녀왕의 존재감은 확실히 엄청났지만, 이 전투를 본 누가 판단해도 크라프테 쪽이 더 강했고 그들에게 승기가 있었다고 했을 거다.

압도적인 강함을 넘어선 그 무언가로 결국에 맞이한 승리.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여, 결국 승리로 이끈 자가 기병대를 이끌고 본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서 피칠갑을 한 채, 혁명군의 환호를 한 몸에 받는 남자.

“……피에르 드 라파예트.”

레옹 듀랑은 그 이름을 작게 입에 담은 뒤, 가슴속에 응어리진 무언가를 애써 씹어 삼켰다.

* * *

“기병대 해산! 중상자를 우선해서 옮기고, 부상자들도 의료 막사로 가서 각자 치료를 받아라! 그대들의 분투에 감사한다!”

“알겠습니다!”

“함께 싸워서 영광이었습니다, 후작 각하!”

본대와 합류해서 기병대를 해산시키고 있자, 데미앙 드 미르보가 다가왔다.

“어서 오십, 헥, 시오. 라파예트 후작님. 실로 위대한…… 헥, 승전, 축하드립니다.”

데미앙 드 미르보는 한눈에 봐도 혈색이 좋지 않은 것이, 척 봐도 완전히 탈진 직전이다.

누가 보면 이자가 나 대신 적진에 뛰어들어서 싸우다 온 줄 알겠네.

그런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이번만큼은 저절로 자연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고생했네, 미르보 백작. 그대의 헌신과 용기는 내가 제대로 기억하지.”

“가, 감사합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데미앙은 조금 얼떨떨해하면서도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평소 같으면 온갖 아부를 퍼부었을 텐데, 진짜 힘들긴 한 모양이군.

그러고 있는데, 지젤 다비가 다가와서 작게 말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우선 부상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쪽-”

역시 지젤 다비. 피칠갑을 하고 있어서 모를 줄 알았는데, 눈썰미 좋네.

쓸데없이 호들갑 떨지 않는 것도 현명-

“헉, 후작 각하께서 부상당하셨어?!”

……지젤 다비의 조심스러운 배려는 데미앙 때문에 쓸모가 없어졌다.

“총사령관 각하께서 부상?”

“라, 라파예트 후작 각하께서 부상당하셨다!”

순식간에 술렁거림이 번진다.

아, 골치야.

난전 중에 뺨과 팔에 자상을 좀 입긴 했는데, 상처가 쓰린 것보다 머리가 더 아프다.

저 멀리서 부상자들을 나르던 의무병들이 내려놓고 나한테 뛰어와야 하나 주춤하는 꼴이 보여서,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호들갑 떨지 마라!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니 나중에 치료하면 돼! 중상자들부터 신경 써!”

“아, 알겠습니다!”

명령을 내린 나는 데미앙을 흘겨보며 말했다.

“하여간, 그대는 평가 좀 좋아지려고 하면 멍청한 짓을 하는군.”

“소, 송구합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쯧, 한심하긴.

그래도 나는 찌그러지는 데미앙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덧붙였다.

“뭐, 이번엔 사소한 실수 정돈 봐주지. ‘방어의 명장’. 멋진 전투였다.”

이상한 데서 허당이긴 하지만, 뭐 어때.

쓸만한 부하고, 이번 전투에서만큼은 그는 할 만큼, 아니 그 이상을 해주었다.

상사라면 이런 부하는 칭찬해 줘야지.

“오, 오오, 영광입니다, 후작 각하!”

내가 부담스러워지려는 데미앙의 시선을 은근히 피해 지젤 다비와 눈을 마주치자, 그녀는 나에게 정중히 경례하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지젤 다비라면 직속상관인 데미앙의 앞에서 치하해주면 모양새가 이상하다는 걸 잘 이해할 정도의 눈치는 있는 거지.

“라파예트 후작 각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아, 수고했네, 드제 사령관, 네 장군. 둘 모두 역할을 아주 훌륭히 수행해 주었어.”

마침 북부군 사령관 루이 드제와 충격대를 이끈 니콜라 네가 와서 나는 그들도 치하해 주었다.

“하하,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였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아, 별거 아니야. 명색이 기사인데, 이 정도로 우는 소리는 안 해.”

“라파예트 후작 각하!”

이번엔 본대 제일 후방에 남아있던 참모장 알렉상드르 베르테르.

아주 여기저기서, 정신들이 없구만.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그 처절한 전투 속에도 용케들 전부 무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안도했다.

“베르테르. 여왕 폐하와 모렐은?”

“모렐 장군은 벌써부터 추격하러 나서겠다고 난리인 걸 억지로 침대에 눕혀놨습니다. 여왕 폐하께서는…….”

베르테르는 슬며시 주변을 살피더니,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완전히 탈진하셔서, 쉬게 해드렸습니다.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라고는 하는데, 꽤 쇠약해지셔서 적어도 며칠은 쉬셔야 할 듯합니다.”

“……그래.”

수정의 힘을 빌렸다고는 해도 그만한 기적을 마구 뿌려댔다. 아니, 애초에 수정이 있다고 해도 에리스니까 그만한 권능을 발휘할 수 있었겠지.

에리스가 무리한다는 걸 빤히 알고 있었는데도, 이렇게까지 그녀에게 의지하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승리는 불가능했을 거다.

하지만 이젠 남은 수정도 없으니 에리스에게 이 이상 무리를 시킬 순 없겠지.

“송구하나, 후작 각하. 사상자 집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추정치는 이미 5만에 달합니다.”

베르테르의 보고를 들은 나는 전장의 드넓은 평야로 시선을 돌렸다.

승리에 기뻐하며 환호하고 있는 군사들과, 울면서 시체를 나르는 군사들이 공존하는 전장.

인류 최강의 군대를 상대로 맞서 싸워, 어떻게든 승리를 거두기 위해 치러야 했던 막대한 희생.

“이번 전투는 힘겹게나마 이겼습니다. 하지만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이기는 것이 가능할지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예?”

이런 식의 총력전, 크라프테군의 막강함을 피로 막아내는 짓을 계속할 수는 없다.

그래서야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게 되니까.

“피 흘리는 외교는 우리가 충분히 해주었으니.”

대왕은 이번 전투 못지않게 화려한 다음 무대를 기대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번 전장이 대왕의 최대 무대였다.

“이제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의 차례지.”

크리스틴이 요청한 것은 단 한 번. 무승부여도 좋으니 크라프테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다는 것을 보여 달라는 것.

그 단 한번을 위해 온갖 무리를 해야 했지만, 결국은 충족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상, 내 약혼녀는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니까.

이제부턴 크리스틴의 차례다.

* * *

프랑지아 서부, 군항 브레스트.

드레스가 아닌 해군 제독의 정복을 입은 크리스틴은 뒤헝 선장과 부하들을 이끌고 전열함 ‘리브레’의 앞에서 서서 오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들이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

“아, 마중 나와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꽤 기다렸죠.”

“레이디를 기다리게 하다니, 이건 결례를.”

“지금은 레이디가 아니라 제독입니다, 총재.”

“크흠, 크흠.”

헛기침을 한 혁명당 총재 모리스 탈레랑은 이내 표정을 고치더니 물어왔다.

“밑 작업은 다 되신 겁니까?”

“물론이죠. 저를 못 믿으시나요?”

겉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묻는 크리스틴을 보던 탈레랑은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아하하, 혁명당에서 아키텐의 검은 마ㄴ…… 아차, 실례. 아키텐 백작은 신뢰는 할 수 없으나 신용은 할 수 있는, 아니 해야만 하는 사람으로 통하죠. 물론 아키텐 백작의 수완을 믿고 있으니 제가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친 탈레랑은 이내 싱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로군요. 크라프테의 머리 위, 적성국인 노던 연합 왕국의 포섭이라. 잘도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다?”

“최초 루이 왕과의 내전에서 노던 연합 왕국이 참전한 것은 어디까지나 프랑지아 왕실로서의 혼인 동맹에 대한 의무였어요. 거기서 패전하고도 내키지 않는 전쟁에서 제국을 지원한 건 황후가 제시한 이권 때문일 테지만, 제국이 패전하면서 그것마저 요원해졌죠.”

“확실히, 어비스 코퍼레이션에게 해외 자산을 압류당하고 있는 제국 황실이 노던 연합 왕국에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할 수도 없었을 테니.”

노던 연합 왕국의 입장에선 끼지 않아도 되는 전쟁에 끼어서 손실만 크게 본 참이다.

“그렇다고는 왕비가 제국 황후의 동생인데, 동맹의 역전이라. 그런 수를 노리실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요.”

“반대로 말하면 이번 전쟁에 저들이 끼어들어 저쪽 편을 든 이유는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게다가, 저들은 그 대가로 우리 해군에게 해상봉쇄를 당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죠.”

노던 연합 왕국은 반도들과 섬으로 구성된 국가고, 그중에서도 북부 반도는 광물이 많이 날뿐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이다.

그만큼 해상 운송이 중요한 나라.

크리스틴의 통상 파괴 작전이 입힌 피해는 원래부터 대륙국인 크라프테보다도, 노던 연합 왕국에게 더 치명적이다.

“요컨대, 포함외교죠. 크라프테는 엄밀히 말하면 제국의 적국이기도 하니 심리적 거부감도 덜하겠고.”

“겸사겸사 무적의 크라프테군에게서 되찾아올 엄두도 못 내던 고토를 되찾아올 기회고?”

크라프테 왕국은 대왕의 치세에 영토를 2배가량 넓혔고, 그중에는 한때 노던 연합 왕국이 가지고 있던 땅들도 있다.

당장 크라프테 북부의 항구부터가 노던 연합 왕국의 영토였다.

“바로 그거죠. 실리가 분명하고, 저들의 귀족 상당수는 매수되었어요. 관건은 크라프테군이 무적이 아니라고 증명해 보이는 것. 이건 라파예트 후작님이 이미 해주셨죠.”

“허허, 솔직히 처음에 2번이나 패배할 때만 해도 가능할까 싶었는데, 그걸 진짜로 이길 줄은 몰랐습니다.”

헛웃음을 흘리는 탈레랑을 보던 크리스틴은 진하게 웃으며 물었다.

“모두가 크라프테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결국 우리가 이겼죠. 이제 남은 건 왕의 결단을 끌어내기 위한 설득뿐인데 그 정도는 하실 수 있겠죠? 총재님.”

“하하, 하하하. 요리는 이미 만들어놨고, 포크만 얹으면 되는 일인데 여기서 못 하면 외교관은 때려치워야지요. 그러면 가시지요, 레이디.”

크리스틴은 에스코트를 위해 내밀어진 탈레랑의 손을 보며 픽 웃었다.

“고맙지만 사양하죠. 총재의 손목은 소중하니까요.”

탈레랑은 아리송한 얼굴이 되더니 이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참 살벌하군요. 그러면서 결혼은 대체 왜 아직도 안 하신 겁니까?”

“총재께선 저보다는 부인께 더 관심을 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하하, 유부남이라도 더 젊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눈이 가는 것은 남자의 생리입니다.”

크리스틴이 픽 웃으며 답했다.

“그 말, 라파예트 후작님께 꼭 전해드리죠.”

“……크흠, 그건 좀 참아주십시오. 전 감미로운 음식을 맛보며 오래오래 즐겁게 살고 싶단 말입니다.”

크리스틴은 탈레랑의 농담에 답하는 대신, 손으로 승선대를 가리키며 답했다.

“그러면, 가시죠. 중앙 대륙에서 제일 비싼 돈을 들인, 사치스러운 외교를 하러.”

“오, 그것참. 돈으로 동맹도 뜯어간다니, 크라프테도 전쟁 할 맛 나겠네.”

탈레랑이 답하며 승선대에 오르기 시작하자, 크리스틴이 그의 뒤를 따라 승선대에 오르며 낮게 읊조렸다.

“그거 유감이네요.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한데.”

“오…….”

탈레랑은 낮게 탄식하며 크리스틴을 돌아보더니, 소름끼친다는 듯이 덧붙였다.

“제가 총재로서 제일 잘한 판단이 두 분을 정면으로 적대하지 않기로 한 결정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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