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크라프테 전쟁 - 바후아 전투 (6)
한낮의 강렬한 태양이 조금씩 기울며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석양이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한 시간.
“조준-”
머스켓이 들어 올려지고-
“발사!”
크라프테군의 전열이 일제히 불을 뿜는다.
총을 격발한 군사들은 찰나의 지연조차 없이 자연스럽게 다시 화약을 쏟고 총탄을 밀어 넣는다.
마치 한 덩이의 기계처럼 거의 오차가 없는, 반복적인 동작.
그 압도적인 포화의 폭력 속에, 혁명군은 막대한 희생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저놈들, 대체 언제까지 버티는 거지?”
전쟁기계처럼 보이던 크라프테군의 지휘관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일제사격으로 처음 입혔던 피해는 성녀왕 때문에 상당히 줄었다고는 해도, 그 이후로는 완전한 전면전이다.
쓰러진 혁명군은 벌써 수만에 달했다.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조금만 더 버텨! 저놈들 지쳤어! 명중률도, 장전하는 속도도 떨어지고 있다고!”
사령관인 데미앙 드 미르보가 검을 뽑아든 채 마력 방벽을 두르고, 직접 총탄을 막아내며 최전선에 나와서 독려하고 있다.
“189중대는 123중대를 지원해! 저쪽이 흔들리고 있다!”
“아, 알겠습니다, 소령님!”
미르보 대신 후방에 남은 지젤 다비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쥐어짜 낸 병력을 무너지려는 곳마다 투입해가며 버티고 있다.
“하아앗-!”
루이스 다키텐이 불러내는 번개는 제아무리 정예병인 크라프테군이라도 한 번에 수십 명씩 숯덩이로 구워버린다.
“어이쿠, 위험.”
마력이 고갈되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루이스의 앞을 가로막은 레옹 듀랑은 그를 노린 슛첸의 사격을 튕겨내 버렸다.
“헉, 허억, 고, 고맙습니다.”
“돈값 하는 거니까 고마워하실 것까지야.”
레옹 듀랑은 싱긋 웃으며 답한 뒤, 눈을 가늘게 뜬 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끈질기게 버티는 혁명군 선봉대를 바라보았다.
그나마 크라프테군이 압도 중인 곳이 선봉대였다.
“피해가 너무 심각한 부대는 교대하고 일시적으로 빼서 재편한 다음 재투입해! 우리 병력이 훨씬 많다! 적들이 지칠 때까지 밀어붙여!”
“알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본대를 지휘하는 루이 드제는 침착하고 노련하게 부대를 다루며 쉴 새 없이 몰아치고 있다.
크라프테군이 제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병력의 열세로 유연한 부대 운영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인 이상,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공격에는 지쳐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던 전선에, 전황을 뒤바꿀 부대가 도착했다.
“미르보 사령관 각하!”
“뭐야?”
지젤 다비의 부름에 슬쩍 고개만 돌린 데미앙은 뒤에 도착한 부대를 보고는 눈물이 핑 돌뻔했다.
“네 장군의 증원이 도착했습니다!”
“오, 오오오, 드디어……!”
“고생하셨습니다, 사령관 각하! 이제부터는 우리가 역습을 주도합니다!”
한나절을 싸우며 지치고 소진된 크라프테군의 앞에, 혁명 수호대를 비롯해 쌩쌩하게 체력을 비축해둔 정예병이 나타나 공격을 시작했다.
* * *
“대왕 폐하, 탄약이 거의 다 소진되었습니다!”
“대왕 폐하, 적들의 포병대가 근위병대에게 집중포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손실이 심각합니다!”
대왕은 지팡이를 두 손으로 꾹 짓누르며 보고를 듣고 있었다.
수만의 희생을 쌓아올리고도 오히려 반격을 해오는 군대라니.
크라프테군조차 이런 적들을 상대로 싸워본 적은 없었다.
대왕의 눈에는 전장의 움직임이 명백하게 보인다.
그들이 절대적인 우위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보병전이 백중지세에 접어들고 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분명, 초전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크라프테군의 엄청난 역량은 적들을 압도하며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었지만, 적들은 성녀왕의 활약으로 그 최초의 충격에서 벗어나버렸다.
그런 뒤에 적들은 크라프테군의 강력함에 맞추어 기민하게 대응했고, 그렇게 누적된 손실과 긴 시간의 전투는 크라프테의 정예군에게도 무시할 수 없는 피로를 안기고 있다.
성녀왕의 보호에 기댄 채 작정하고 포병부터 저격해댄 라파예트 후작의 판단은 전투가 장기전이 된 지금에 와서는 크라프테군의 재앙이 되었다.
크라프테의 포병대는 이미 반쯤 무력화되었고, 포병대를 충분히 무력화시켰다고 판단해서인지 라파예트 후작은 포병대의 화력을 보병대에 퍼붓고 있다.
적 흉갑기병대의 돌파를 막아낸 왕실 근위대는 보병전에 제대로 합류하기도 전에 엄청난 집중포화를 맞고 끔찍한 손실을 입었다.
이런 상황에 탄약마저 전부 소진하게 되면 남는 것은 백병전뿐이다.
크라프테의 강군은 백병전에도 능하지만, 한나절을 이어온 사격전으로 지친 군사들이 수적으로 우세인 혁명군을 꺾을 수 있나?
저 혁명군의 집념과 끈기는 대왕조차도 감히 가늠할 수 없다.
대체 얼마나 더 죽여야 패주할지 예상이 되지 않는 상황에, 백병전에 돌입해야 하나?
아니라면.
‘후퇴해야 하나?’
“허.”
자신이 고려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선택. 그것이 떠오른 순간 대왕은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하니 정말로,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이야.
“대왕 폐하, 전령입니다!”
대왕이 쓴웃음을 짓고 있는 순간, 전황을 뒤바꿀 소식이 전해졌다.
“하인리히 전하께서 흉갑기병대를 재수습하여 전장으로 오고 계십니다! 1시간 이내에 도착하실 것입니다!”
* * *
크라프테군의 기세가 꺾였다.
그런 확신을 가진 순간, 샤쇠르가 가지고 온 비보는 수뇌부를 혼란에 빠뜨렸다.
“흉갑기병대라고?”
“예, 라파예트 후작 각하. 숫자는 5,000에 달하는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모렐과 가스통에게 격파당한 지 겨우 반나절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걸 그새 다시 수습했다고?
크라프테군의 규율이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이건 예상 이상이다.
하인리히 왕자에게 군재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매복이 역으로 당해서 엉망으로 패퇴했는데 그 와중에 저런 수습 능력을 발휘할 줄이야.
“숫자를 보면 전 부대가 수습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연락이 닿고 집결한 패잔병 중 싸울 수 있을 숫자만 다급하게 뽑아서 보낸 거겠죠.”
“하지만 저것만으로도 재앙이야.”
그렇게 버티고, 지연전을 벌이고, 몰아친 끝에.
크라프테의 포병대를 거의 다 무력화시키고 우리가 일방적으로 포격을 퍼부으면서, 니콜라 네와 루이 드제의 마지막 남은 예비대까지 전부 투입하고서도 백중지세가 고작이다.
흉갑기병대의 돌격이 실패하면서 꾸준히 버티다가 크라프테군의 탄약이 먼저 떨어지는 것에 걸고 있었는데…….
여기서 5,000이나 되는 흉갑기병대에게 무방비하게 측면을 찔리면 이 전투는 그대로 끝장이다.
나는 미처 씻지도 못하고, 피범벅인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가스통을 보며 물었다.
“……가스통 장군, 우리 기병대는 얼마나 투입 가능하지?”
“최대한 추슬러 보겠으나 당장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500조차 되지 않을 것으로…….”
“제길.”
가스통은 다행히 무사 귀환했지만 대부분의 흉갑기병대는 그렇지 못했다.
적진에 뛰어들어 근위대와 정면으로 맞붙은 흉갑기병대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그나마 생환자도 대부분이 부상자다.
심지어 장군인 제롬 모렐까지도 총상을 입은 채 간신히 귀환했을 정도로 치열한 접전이었다.
그보다 한참 전에 패주하여 수습해서 돌아온 크라프테 흉갑기병대보다 훨씬 안 좋은 상황이다.
저 괴물 같은 크라프테군과 백중지세를 이루기 위해 전 부대가 전선에 투입된 상황에 예비대 같은 건 없다.
남은 건 정찰과 적 패잔병 추격을 위해 남겨둔 샤쇠르 2,000 정도에 500도 안 되는 흉갑기병대.
이걸로 5,000의 흉갑기병대를 저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 저 크라프테군이라면 우리 기병대를 상대할 부대를 쪼개고도 능히 아군의 측면을 유린할 수 있을 거다.
“후, 후작 각하. 송구하나 여기서 기병대에게 측면을 유린당하면 아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을 겁니다…….”
알렉상드르 베르테르는 창백한 얼굴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크라프테군을 상대로 이 정도로 맞서 싸운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입니다. 여기선 일단 물러나서 다음을 도모해 보심이…….”
“다음?”
다음이 있을까?
에리스가 이번 전투에서 쓴 수정은 프랑지아의 재정을 거덜 내도 다시 쓸 수 없는 물건들이다.
단 한 번의 승리, 하다못해 무승부만 거두어도 성과를 볼 수 있을 크리스틴의 공작마저 수포로 돌아가면.
저 전쟁기계들을 상대로 밀리고 밀리다, 결국 수도까지 함락당하는 결말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런데 여기서 물러나라고? 고작 한 발, 단 한 발이 부족해서.
지금 저 평야에 쌓인 수만의 시체를 버리고 물러나라고?
정말로 그 수밖에 없나?
“……후작님?”
내가 고민하는 사이,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왕 폐하.”
고개를 돌리자, 창백하기 그지없는 안색의 에리스가 나를 보고 있다.
뒤에 선 보몽 경이 걱정을 숨기지 못하는 걸 보니, 또 뜯어말리는데도 못 참고 나온 모양이군.
……정말이지 못 말리겠어.
“전황은 어떻죠?”
“전황.”
네가 모든 걸 쥐어짜내고 수만의 병력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힘이 부족해서 물러나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 말을 에리스 앞에서-아니.
“……예비대가, 있군.”
여기 있잖아.
어지간한 기병 수십을 가볍게 능가하는 최강의 기병이.
적들이 부대를 나누어서 보병대를 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최고의 미끼도.
“예? 예비대라니요, 각하?”
알렉상드르 베르테르가 당황하는 가운데, 나는 에리스를 보며 물었다.
“폐하. 남은 수정은 있습니까?”
“한 개, 남았어요. 방금 전에 정신을 잃어서…….”
네 몸 상태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물으려다가, 말을 삼키고 다른 말을 했다.
“이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2,500명가량에게 되도록 가장 강력한 가호를 걸어주십시오. 가능하시겠습니까?”
“라파예트 후작 각하, 아무리 여왕 폐하의 가호를 받는다고 해도 경기병대 2,000과 이제 갓 수습한 중기병 500으로 중기병대 5,000을 막는 건 불가능합니다. 적들도 적당히 부대를 나누어서 보병대를 타격할-”
“내 깃발을 걸고 내가 제일 앞에 나선다. 가스통 경, 도와주게. 송구하지만 여왕 폐하, 보몽 경도 빌려 가겠습니다.”
중기병 5,000을 상대하는데 경기병 2,000에 중기병 500이면 잠깐 발목 잡는 수준밖에 안 되겠지.
하지만 에리스가 건 축복을 받고, 혁명군 최강의 기사 세 명이 앞장 서면 어떨까.
“총사령관이 열세의 병력을 이끌고 눈앞에서 뛰어드는데, 잡병 잡겠다고 무시할 기병은 없어.”
“무, 무모합니다!”
알렉상드르 베르테르가 기겁하며 반대하고 가스통도 뭐라고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나는 무시하고 에리스에게 물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여왕 폐하? 이 전장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한, 마지막 방법입니다.”
이제 막 정신 차렸을 뿐인 에리스는 당황하고 있었지만, 대화 내용만으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흔들리던 보라색의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고, 그 자리에 결연함이 깃들었다.
에리스가 입을 열었다.
“언제나 그랬듯, 당신을 믿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할게요.”
내가 답했다.
“여왕 폐하의 믿음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 * *
긴 기병전과 정찰전으로 지친 샤쇠르들과, 적진을 헤집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온 흉갑기병대를 전부 끌어모았다.
그러나 당장 모을 수 있는 기병을 전부 끌어모으고도 그 숫자는 겨우 2,500을 간신히 넘는다.
에리스가 마지막 수정과 힘을 전부 쥐어짜 부여해 준 축복은 피로를 날려주고 몸에 넘치는 힘을 불어넣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게 절대적으로 열세인 싸움이 될 거라는 걸 모르는 자는 없다.
나는 내 옆에 서있는 가스통 경과 눈을 마주쳤다.
그저 이야기 속의 기사를 동경한 용병의 아들이었으나, 누구보다도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기사가 된 남자가 나와 함께한다.
반대편에는 프레드릭 드 보몽 경.
왕국이 무너지기 전부터 근위기사였으며, 여왕이 되기 전부터 에리스를 지켜온 기사가 그녀의 명을 받고 나를 돕기 위해 와 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 멀리에서부터 질주하는 기병대 특유의 흙먼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게 이 전투의 마지막 분수령.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내 옆에 따라붙은 기수가 든 깃발을 보았다.
라파예트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돌고, 돌고, 돌아서.
다시 라파예트의 전장이다.
이윽고, 언덕 너머에서 수천의 크라프테군 흉갑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번에 기병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린다.
이런 전장에서, 이런 상황에서.
절대적인 열세에서, 라파예트의 깃발을 내건 청기사가 앞장서 돌진했다.
그가 지나간 피의 길을 따라간 언덕 위에서, 내가 고했다.
이제는 내가, 라파예트가 그대들을 위해 깃발을 들겠노라고.
내가 검을 뽑아들자, 모든 군사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였다.
청기사, 나의 아버지.
위베르 드 라파예트가 영원히 남을 그의 전설을 위해, 수천의 군세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한 말.
“따르라!”
그러나 지금은.
크리스틴의, 에리스의, 프랑지아의 모든 희생을.
수만의 사람이 잃은 목숨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하면 내가 그대들을 전설로 만들어 주리라!”
나는 말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적진의 정중앙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