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크라프테 전쟁 - 바후아 전투 (4)
기병전이 한창인 시점, 혁명군 선봉대.
“적이 대열을 바꿨습니다!”
“이번엔 또 뭐야!”
망원경으로 적진의 들여다보던 지젤 다비의 보고에, 데미앙 드 미르보는 신경질을 내며 그녀의 손에서 망원경을 채가 그것으로 적진을 들여다보았다.
“뭐야, 저건 또. 언제 바꿨어.”
매끄럽게 후퇴하며 순차사격을 하기 위해 다소 듬성듬성한 3열로 구성되어 있던 크라프테군 전열 보병의 대열이, 어느새 2열의 밀집대열로 바뀌어 있다.
“바로 방금…….”
“이런, 염병할! 재편하는 시간도 없이 전투하면서 대열을 마음대로 바꾼다고? 그게 말이 돼?!”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백작 각하! 조금이라도 진정해 주십시오!”
“X발, 저놈들은 사기야. 사기라고…….”
차라리 이베리카에서 상대했던 드론이 나았다.
공포도 피로도 모르는 적이라는 건 끔찍하긴 했지만, 저쪽도 철저한 규율로 공포를 모르는 것처럼 보이긴 매한가지다.
오히려 지휘관의 압도적인 전술 역량을 그대로 구현해 내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지성을 갖춘 적이란 점에서 이쪽이 드론들보다도 훨씬 더 괴물 같다!
“저런 대열이라면 후퇴사격은 어렵겠지?”
“그래 보입니다, 각하. 저건 어떻게 봐도 기존의 전열보병들처럼 전면 사격전을 위한 대열입니다.”
에리스가 걸어준 보호의 축복은 이미 깨져나갔다.
결국 경보병들이 탄약과 인원 부족으로 물러나고 전열보병 간 교전이 재개될 참이니, 크라프테군은 더는 후퇴사격으로 지연전을 벌일 필요조차 없다.
데미앙 드 미르보는 심호흡을 하곤 흘긋 뒤쪽을 바라보았다.
전투 초반에만 해도 지젤 다비와 살갑게 대화를 나눌 정도로 여유 있어 보이던 에리스는 답답한지 후드도 젖힌 채 비 오듯 땀을 쏟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오의 강렬한 태양빛은 그녀에게 결코 좋지 못할 텐데도 그래야 할 정도로 힘겨워하고 있고, 이쪽의 대화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어 보인다.
“후, 본대는?”
“전진 중입니다, 각하.”
루이 드제와 라파예트 후작의 군대도 전진을 시작했다.
크라프테군과 이쪽 모두, 이제는 전면전뿐이라는 판단이 선 거다.
“좋아, 전방에 하달. 1차 방어선에서 적들에 맞선다. 우리도 순차사격으로 응전해!”
“옛! 전방에 하달, 1차 방어선에서 적 저지! 순차사격으로 응전!”
* * *
정오의 가장 강력한 태양이 기승을 부리는 시점.
눈앞에 사신과도 같은 검은 군복의 물결이 접근해오는 가운데, 혁명군은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1열, 사격 준비!”
“1열, 조준!”
혁명군 장교의 외침에 하사관이 복창하고, 1열의 혁명군이 일제히 머스켓을 들어 올렸다.
장교는 마른침을 삼켰다.
거리는 대략 90m. 최대 효율의 명중을 기대할 80m까지는 아직 조금 남았다.
적들은 어디까지 전진해오지? 먼저 쏠까? 그랬다가 더 가까이 다가와서 쏘면 낭패인데, 2열의 사격이 더 빠를까?
고민 하는 사이 적들은 80m까지 조금 남은 위치까지 전진했고, 적진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정지!”
이제 쏴야겠-
“사격 준비!”
거의 1초도 되지 않는 간격 사이에 터져 나온 외침에 크라프테군의 1열이 무릎 꿇고 앉으며 총을 겨누고, 2열도 동시에 총을 겨누었다.
“뭐……?”
그 놀랍도록 신속하고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처음 보는 대열에 장교가 멈칫하는 순간-
“발사!”
크라프테군의 1열과 2열이 동시에 발포했다.
“컥!”
“아악!”
총탄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피가 튀었다.
지시를 내리려고 하다가 멈칫했던 장교도 눈에 피가 튀어, 정신없이 눈을 비비고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내린 순간, 1열의 군사들이 사라져 있었다.
“뭣, 다, 어디.”
보호막을 미리 깨기 위해 거리를 벌려 후퇴하며 3개열이 순차적으로 발포하던 순간과는 그 화력이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제대로 유효한 사거리에서 뼈를 깎는 훈련으로 놀라운 명중률을 보유한 전열보병의, 2열로 이루어진 전원의 발포.
그것만으로도 최전선에서 사격을 준비하던 군사들 대부분이 당했다.
전열보병의 1열에 세우는 병사들은 대부분 훈련도나 사기가 제일 양호한 이들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격을 주고받는 상황을 맨정신으로 버틸 수 없으니까.
그런 자들이 한순간에 뭉텅이로 쓰러져 버리고, 맨 앞에 드러난 2열의 군사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히, 히이익!”
“무,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로스, 일어나! 로스!”
“우, 우린 다 죽을 거야!”
군사들이 패닉에 빠진 광경에 얼어붙어 있던 소위는 하사관의 다급한 외침에야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소, 소위님!”
“어, 어어, 2, 2열 사격 준비!”
“2열 사격 준비!”
명령이 떨어졌지만, 우왕좌왕하는 군사들의 동요는 가라앉지 않는다.
몇은 총을 들고, 몇은 비명 지르고, 몇은 당황하는 사이에도 크라프테군은 기계적으로 다시 화약을 쏟아넣고, 총탄을 머스켓에 밀어 넣고 있었다.
“쏴, 쏴!”
다급하게 떨어진 명령에 혼란에 빠진 2열의 반절도 되지 않는 자들이 쏜 총탄 중 반은 하늘로 날아가거나, 땅으로 나갔다.
크라프테군의 소수만이 쓰러지는 사이, 나머지는 불과 15초 남짓한 시간 만에 기계 같은 동작으로 장전을 마쳤다.
“조준-”
크라프테군의 전 병력이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총을 겨누었다.
이건 졌다.
소위가 직감한 순간.
“발사-!”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총탄이 그의 의식을 날려버렸다.
* * *
얇고 넓게 2열로 편 크라프테군의 일제사격에, 혁명군의 2열마저 무너져 내린다.
“선봉대는 끝났군.”
망원경으로 그 광경을 들여다보던 대왕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나름대로 괜찮게 훈련받았다는 전열보병들이 3열을 구성해서 순차적으로 사격하는 것이 한계다.
그러나 크라프테군은 그 한계는 진작에 뛰어넘었으니, 느릿느릿하게 순서대로 사격할 시간에 일제 포화를 쏟아붓고 훨씬 빠르게 재장전하여 다시 일제포화를 쏟아부을 수 있다.
단순 이론상으로도 1.5배의 화력을 투사할 수 있고, 그 화력을 한 번에 투사 당한 적이 손실로 잃는 화력과 사기의 동요까지 생각하면 그 격차는 압도적으로 벌어진다.
“이렇게 될 거라고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대왕 폐하.”
“흠, 그렇기야 하다만…….”
애초부터 이러기 위해 극한까지 단련한 군사들이며, 그렇게 단련된 군사들로 펼친 전술이 초래할 파괴가 어떤 형태로 구현될지까지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대왕은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덧붙였다.
“그래도, 조금쯤은 예상외라는 것이 있었으면 했다네.”
그렇게 대앙의 예상대로, 순식간에 초토화된 혁명군의 전열에서 살아남은 군사들이 도망치려는 순간.
다시금 빛이 터져 나와 전장을 뒤덮었다.
눈이 멀어버릴 것같이 강렬한 빛임에도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대열은 희열을 느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허어…….”
“맙소사.”
“저, 저게 대체.”
대왕은 물론이고 크라프테군의 참모들마저 감탄만을 흘리는 순간, 크라프테군의 일제사격에 당해 쓰러졌던 혁명군이 느릿하게 다시 일어섰다.
이 먼 거리에서도, 모두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진다.
전쟁 기계의 부품처럼 움직이던 크라프테군의 군사들조차 놀라서 손이 멈춘 순간, 전장에 날카롭고 절박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싸우세요!”
신성력으로 증폭된 여왕의 목소리가 전장 전역을 울린다.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가 일어나 어안이 벙벙하던 혁명군이 여왕의 외침을 듣고, 다급하게 떨어트렸던 머스켓을 주워들고 격발할 때까지 그 크라프테군조차 대응하지 못했다.
아예 치명상을 입고 즉사해버린 군사들은 에리스의 권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닥에 누워 있다.
고통 속에 신음하다가 새 살이 돋아나고 총알이 밀려나며 자리에서 일어선 이들의 사격은 일제사격과는 거리가 먼 중구난방이고, 효과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런 사격에도 맞기만 하면 사람은 쓰러진다.
혁명군의 눈에 인간이 아닌 미지의 공포처럼만 보이던 크라프테군도 총에 맞고 쓰러졌다.
대왕의 눈에, 처음으로 그의 군대가 당황하는 것이 들어왔다.
극한까지 단련시켜 인간성을 거세시키다시피 한 전쟁기계들마저, 신의 권능이 일으킨 기적 그 자체 앞에서 경외와 당혹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단번에 무너질 것 같던 혁명군이 정신 차리고 반격을 개시했다.
대왕은 망원경을 들어, 저 멀리 선봉에서 적들의 여왕이 천천히 쓰러지고 놀란 측근들이 달려드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하, 하하하. 굉장하군, 실로 굉장하도다.”
진정으로 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사랑받고 찬미 받아 마땅한 성녀가 아닌가.
“폐, 폐하. 군사들의 손실이 적지 않습니다.”
우려 섞인 참모의 말도 대왕의 유쾌한 기분을 날려버리지는 못했다.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저들의 여왕은 쓰러졌다. 제아무리 성녀왕이라도 무리한 힘을 쓴 게지. 다소 손실은 있지만 결국 교전이 이어지면 우리의 승리-”
“저, 전령! 대왕 폐하! 급보입니다!”
그러나 대왕이 여유롭게 웃으며 하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하인리히 전하께서 패하셨습니다! 매복군은 전멸, 흉갑기병대도 심각한 피해를 입고 패퇴했습니다!”
전투 개시 후 처음으로, 대왕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 * *
적들의 일제사격 앞에서 1열이 무너졌을 때, 데미앙 드 미르보의 머리에 든 생각은 믿을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현실을 부정하는 사이, 똑같은 사격에 2열마저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든 생각은 공포뿐이었다.
저것은 인간이되 인간의 군대가 아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쟁만을 위해 벼려낸 무기 그 자체.
저런 것을 상대로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간신히 살아남은 3열의 군사들이 동요하며 패주하려는 순간 떠오른 생각은, 누구도 이것이 그의 능력 부족이라며 비난할 수 없을 거라는 자기합리화였다.
그러나 전장 전역을 뒤덮은 빛이 터져 나왔을 때, 데미앙의 머릿속에 있던 모든 생각이 한 번에 날아가 버렸다.
“싸우세요!”
저 가녀린 몸 어디에 그런 박력이 있는지 놀랄 만큼, 강하게 터져 나온 외침이 그의 영혼까지 흔드는 것 같았다.
“미, 미르보 백작님.”
쓰러지다가 다급하게 달려든 보몽 경에게 안긴 채, 에리스가 낸 목소리는 거의 꺼질 것 같다.
곧 죽어버릴 사람처럼 창백해진 얼굴의 여왕이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이 놀랄 만큼 차가워 데미앙이 당황하는 순간, 에리스가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며 쥐어 짜내는 듯한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믿어요.”
에리스는 그 말을 끝으로 혼절해버렸다.
-제가 백작님을 믿고 함께 나서도 되겠죠? 백작님께서는 이 나라와 승리를 위해, 기꺼이 저와 함께 선봉에 나서주실 거죠?
여왕이 그렇게 물었었다.
-무, 무, 물론입니다, 여왕 폐하! 이 데미앙 드 미르보, 신명을 다 바쳐 여왕 폐하와 프랑지아를 위해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하겠습니다!
데미앙이 그렇게 답했으나, 진정으로 그러려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답하지 않았다간, 선봉에 서지 않았다간 저 성녀왕이든, 라파예트 후작이든, 아키텐 백작이든 아무튼 자신을 조져놓을 테니까 그렇게 답했다.
데미앙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은 여왕의 손을 풀어냈다.
그러면서 정신도 잃은 사람의, 얇고 가는 손가락에 그렇게 강한 힘이 담겨있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놀랐다.
“……백작 각하.”
지젤 다비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고 느끼며, 데미앙이 지시했다.
“여왕 폐하를 후방으로 모셔.”
그렇게 말하면서도, 데미앙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성녀잖아. 여왕이잖아.
저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이미 고귀하고, 충분히 경애 받을 존재다.
라파예트 후작도 그렇다.
귀족 주제에, 군의 최고사령관인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 자기 자신을 불사를 기세로 뛰어들어 혁명군을 위해 싸우지?
딜루스에서 도망치다 다시 돌아가 부대를 수습했을 때, 그의 머릿속에 든 건 하나뿐이었다.
이대로 도망치면 그의 인생에 남는 것이 없다는 것.
그저 자신의 영광을 위한, 자신의 명예를 위한 선택.
어디까지나 살아남고, 칭송받으면 족한 그로서는 도저히 저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가슴이 들끓는 것 같아서, 데미앙은 이를 악물었다가 소리쳤다.
“전 부대에 하달! 100m 이내에 들어오면 그냥 무조건 쏴버리고 다음 열로 물러나라고 해!”
“하지만, 그렇게 하면 탄약 소모가…….”
“저 전쟁기계 놈들에게 시체로 변하고 나면 탄약이 무슨 소용이야! 탄약 낭비고 뭐고 상관없으니 일단 쏴서 한 놈이라도 죽이고 살아남으라고 해! 우리 역할은 저들의 예봉을 꺾어 본대가 총공세를 벌일 때까지 버티는 것뿐이다!”
“아, 알겠습니다!”
지젤 다비가 다급하게 전령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이, 데미앙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당신을, 믿어요.
“썩을.”
여왕이 정신을 잃기 직전에 한 말이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믿는다는 말, 기대한다는 말.
언제나 무겁게만 들리고, 듣고 싶지도 않았던 말인데.
데미앙은 이베리카에서 선물 받은 그의 검 손잡이에 새겨진 문구를 눈에 담았다.
-딜루스의 수호자에게, 존경을 담아.
남들이 그를 칭송하든 말든 그에겐 용기도 없고 결의도 없다.
하지만 그런 그라도.
“아키텐 소위를 데려와! 나도 선봉대에 합류한다!”
“가, 각하?”
“여왕 폐하께서 쓰러지셨다는 것이 알려지면 기껏 수습한 사기도 다시 꺾여! 어떻게든 버티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그런 결의를, 그런 절박함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쓰레기는 되지 못했다.
그 무모한 라파예트 후작을 항상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신의 입으로 이런 소리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이번 전투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렇게 외치는 순간, 데미앙의 가슴에 언제나 쌓여있던 답답함이 날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