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크라프테 전쟁 - 쇼미더머니
“배포가 굉장하시군요, 대왕 폐하.”
우리가 그에게 승리한다면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맞선 도움을 주겠다.
얼핏 들으면 배포가 크게 들리지만, 역으로 말하면 대왕은 우리에게 진다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거나…….
혹은 지더라도 크라프테가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가정 자체를 하지 않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저런 약조를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거지.
“왜, 마음에 들지 않는가?”
대왕은 뻔뻔하게 물어봤고, 나는 입을 다문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카를 2세.
게르마니아 제국의 일개 북부 선제후국에 불과했던 나라를 단숨에 제국 북부의 패자이자 중앙대륙 최강의 군사국가로 올려놓은 장본인.
모두가 크라프테의 패배를 예상했을 때 압도적인 능력으로 제국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그의 치세에 크라프테는 공식적인 왕국이 되며 영토도 2배나 넓혔다.
국민들이 대왕이라는 칭호를 헌사한, 이 시대에 가장 유명한 영웅.
그러나 그렇기에 깨닫지 못하는 거다.
결국 그가 이뤄낸 모든 것도 그의 선대가 일궈낸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라는걸.
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크라프테의 백성들 또한 위대한 대왕의 업적이 있기에, 그가 결코 패배할 리 없다고 믿기에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아니요, 모처럼 크라프테의 대왕 폐하께서 값진 전리품을 제시하셨는데, 기꺼이 응해야지요. 다만.”
나는 재미있다는 얼굴의 대왕을 보며 말했다.
“대왕 폐하께서 후회하시거나 철회하실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하하…….”
대왕은 서기관에게 손을 뻗어, 그가 내민 종이에 서명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면, 이만하면 이야기는 다 된 것 같고.”
픽 웃은 대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로 힘차게 땅을 찍더니 그것을 두 손으로 짚으며 물었다.
“시간이 더 필요한가, 그대들?”
하.
나는 척 봐도 오기와 부아가 치민 에리스의 얼굴을 슥 보고 답했다.
“대왕 폐하의 자비가 필요한 건 우리가 아니라 크라프테의 국민들입니다.”
“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린 대왕이 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나흘 뒤, 총공세를 하도록 하지. 기대하겠네.”
* * *
대왕과의 티타임을 끝마치고 돌아온 주둔지.
“저는 도저히 그 대왕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에리스는 돌아오기가 무섭게 분통을 터트렸다.
“국가와 국민들을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해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저런 자가, 어떻게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거죠?”
“국민들에게 위대한 영광을, 자부심을 안겨주었으니까요. 대왕 치세에 크라프테 왕국이 강대국이 된 것은 사실이고.”
“겨우 그것만으로 기꺼이 대왕을 위해 목숨을 내버린다는 건가요?”
최소한 대왕은 그렇게 믿겠지.
-결과적으로 저들이 짐을 계몽전제군주이자 대왕으로 부를 만큼, 짐은 국가에 충분히 헌신했노라. 그렇다면, 짐 또한 백성들에게 짐을 위해 헌신하라 명할 자격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자신 있게 그렇게 말했을 테고.
“그럴 리야 없습니다. 정확히는, 대왕의 영광을 위해 희생이야 있겠지만 그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기꺼이 대왕을 위해 열광하는 거겠죠.”
“대왕도, 저 나라도 통째로 미쳐 있는 게 틀림없어요.”
“재미있군요. 상성이 극악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여왕 폐하께서 어느 누군가를 이 정도로 혐오하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에리스는 내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얼마나 분노에 차 있었는지 자각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국민으로부터 비롯된 고귀함을 누렸기에 여왕으로서 마땅히 국민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믿으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국민을 돕고 구하려고 힘쓰는 에리스.
자신이 국민들에게 위대함을 보여주었기에 국민들에게 헌신을 명할 자격이 있다고 믿으며, 영광과 자부심을 위한 국민의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는 대왕.
그야말로 정반대의 입장에 선,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존재.
한참 침묵하고 있던 에리스가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런 사람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피 흘리게 될 거라는 것이 너무 끔찍해요. ……지금만큼 절실히 힘을 갈구해 본 적이 없어요.”
-후작 각하. 우리는 저 대왕에게 승리할 수 있습니까? 자기만족만을 위해 피바다를 만들려는 저런 작자에게 지고 싶지 않습니다…….
에리스의 음성과, 주둔지에 도착해 복귀하기 전 나에게 애원하듯 물어보던 조제 바셰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답했다.
“그거 다행이군요, 여왕 폐하.”
에리스가 눈을 깜빡이더니 답했다.
“네?”
“……여왕 폐하께 잘못하면 취할 정도의 힘을 드릴 참인데, 여왕 폐하께서도 지금은 마다하실 것 같지가 않아서요.”
“무슨 말씀이시죠?”
의아한 얼굴의 에리스에게, 내가 웃으면서 답했다.
“대왕을 잡으려면 우리도 비밀병기 하나쯤은 있어야겠죠.”
* * *
이틀 뒤.
에리스는 입을 헤 벌린 채, 상자 안에 놓인 10개의 수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요한 주교님. 아니, 이제는 대주교시죠. 축하드립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파예트 후작. 후작의 덕이 크지요, 허허.”
한때 서부 루아르 강 이남 지방에서 종교를 탄압하던 공화국에 맞서 신앙을 지키려던 이들을 이끌던 주교 요한.
그는 수도 뤼미에르에서 명망 높던 리슐리외 주교가 사망한 뒤, 혼란에 빠진 프랑지아의 종교계에서 구심점 역할을 해주었다.
마침 무려 성녀씩이나 되는 에리스가 여왕으로 즉위한 나라에 대주교가 없는 것도 이상하니, 이전 국민의회의 종교탄압에 맞서 신앙을 지켜낸 공과 에리스와의 친분을 모두 가진 요한이 프랑지아 교구를 총괄하는 대주교가 된 거다.
내가 요한 대주교와 인사하고 있는 사이, 에리스의 옆에선 로브를 차려입은 마법사가 설명해 주고 있었다.
“이건 기존에 마탑에서 판매하던 마력 증폭 수정과 달리, 철저하게 신성력 사용자를 위해 제작된 특제품입니다.”
기본적으로 신성력도 기사나 마법사처럼 사용자의 마력을 소모한다.
그래서 에리스가 마력 증폭 수정을 사용해서 일시적으로 신성력을 크게 강화하는 것도 가능했다.
실제로 폭풍의 마녀와 싸울 때는 임시방편으로나마 써서 그런 식으로 활약했고.
하지만 재료로 마력을 사용하기는 해도, 신성력 사용자는 마력과는 크게 다른 형태인 신성력으로 전환하여 사용한다.
그래서 같은 마력 증폭 수정을 사용해서는 아무래도 마법사에 비해서는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수정의 마력을 신성력으로 전환하고서야 제대로 쓸 수 있는데, 그 과정 중 적지 않은 양은 날아가 버리니까.
……확신은 못 하겠지만, 에리스가 당시에 큰 부담을 받은 것에는 갑작스럽게 막대하게 주어진 마력을 신성력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따른 부하도 있을 거라 추정한다.
“기존에는 이런 제품을 만들 이유가 없었습니다. 마탑과 신성 교국이 사이가 그리 좋지도 않을뿐더러, 신성력을 이렇게까지 해가며 사용하려는 분이 없었으니까요.”
신성 교국은 신성력으로 돈벌이에 여념이 없으니까. 누가 이런 돈 낭비까지 해가며 기적을 남발하겠어?
“하지만 모처럼 주문이 들어왔고, 신성력은 비교적 연구가 덜 된 마탑을 위해 요한 대주교께서 협조해 주신 덕분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초기형 제품이지만, 적어도 신성력 사용자에 한해서는 이전의 마력 증폭 수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멍하니 듣고 있던 에리스가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물었다.
“이거…… 엄청나게 비싸지 않나요?”
마법사는 아주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답해주었다.
“대금은 제대로 받았습니다. 물론, 마탑에서도 나름 도움을 받기도 하고 흥미가 동한 프로젝트라 할인도 제법 해드렸습니다.”
에리스는 마법사에게 재차 물어보는 대신, 내 옆에 있던 크리스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이게 얼마죠?”
크리스틴이 여상하게 답했다.
“대금 지불은 국민의회에서 했습니다, 여왕 폐하.”
“국민의회에 무슨 돈이 있어서요?”
“여왕 폐하께서 독려해 주신 채권 판매와 성금, 그리고…….”
크리스틴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덧붙였다.
“아키텐 상단이 매입한 국채의 판매액으로요.”
“아키텐 상단이 대체 얼마나 사들였는데요?”
“음…….”
크리스틴은 부채를 펼쳐들고는 살랑거리더니 답했다.
“국민의회의 5년 치 예산 정도?”
“미, 미, 미치셨어요?! 그게 대체 얼마예요! 전쟁 이겨도 다 못 갚아요!”
에리스의 동공이 거의 지진을 일으키고 있자, 크리스틴이 아주 느긋하게 답했다.
“기밀 사안이었지만 이건 국민의회에서도 찬성한 일이니, 그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만기는 국민의회의 상황을 봐서 조정해 줄 의향도 있고, 어차피 전쟁에서 지면 아키텐이 입을 타격도 그에 못지않을 거니 상관없습니다, 여왕 폐하.”
그래도 에리스가 그녀 앞에 놓인 수정을 보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어서, 내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아무리 힘을 써도 능력이 부족하여 구할 수 없는 자들이 있어 항상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폐하의 앞에 저들에 맞서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을 법한 거대한 힘이 있습니다.”
나는 흔들리는 에리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물었다.
“폐하시니까, 이 전쟁에서 쓰러질 이들과 이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프랑지아가 겪을 고통이 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죠.”
“아하하…….”
에리스는 탕- 소리 나게 상자가 올려진 테이블을 두 손으로 내려치더니, 전의가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
“그럴 리가요. ……고마워요, 라파예트 후작님, 아키텐 백작님, 그리고 요한 대주교님. 이 정도 해주셨으니 그 재수 없는 대왕에게 한방 꼭 먹여주죠, 우리.”
나도 씩 웃으며 에리스에게 답했다.
“물론입니다, 여왕 폐하.”
에리스는 나에게 싱긋 웃어 보인 후, 어느새 소심한 얼굴이 되어서 크리스틴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키텐 백작님이 이렇게까지 애국심이 투철하셨는지는 몰랐는데, 기왕이면 조금만 탕감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제가 파산이라도 하길 바라시나요, 여왕 폐하?”
“아,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요…….”
아주 상냥하게 웃으며 답한 크리스틴의 앞에서 바로 찌그러졌지만.
좀 정리된 것 같자, 옆에서 대기 중이던 마법사가 친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해결되셨나 보군요. 사실, 대금은 이미 받았고 반품이 안 되는 10가지 사유를 준비 중이었답니다.”
“아하하…….”
에리스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이런 도둑놈들’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연구비를 물처럼 쓰느라 금전 감각도 양심도 팔아치운 마탑의 마법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도 고가품이니만큼, 여왕 폐하께 최적화되도록 조정해드리는 서비스 정도는 제공하겠습니다. 테스트를 위해, 가볍게 신성력을 주입해 보시겠습니까?”
“주, 주입한다고 하나 소모되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나는 거의 덜덜 떨고 있는 에리스와 정색하는 마법사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일국의 여왕 폐하씩이나 되는 것치곤 방랑하는 음유시인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가, 고가품 앞에서 약한 것이 은근 귀엽네.
절로 흐뭇한 미소가…….
“아니, 저는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크리스틴.”
크리스틴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저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피에르?”
크리스틴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방금까지 느긋하게 살랑거리던 부채를 부러뜨릴 것처럼 쥐고 있지만 않으면.
우리가 그러는 사이, 에리스는 마법사가 시키는 대로 수정을 가볍게 손 위에 얹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찬란한 금빛의 기운이 방 전체를 뒤덮으며 퍼졌다.
“오오오……!”
요한 대주교가 바로 무릎을 꿇으며 성호를 긋고, 마법사는 물론이고 심지어 크리스틴까지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천사의 날갯짓처럼 허공을 유영하는 금빛의 오라가 방 전체를 어루만지듯 찬연하게 움직인다. 여태껏 에리스가 보여준 어떤 신성력도 이 정도 수준에 이르지는 않았었다.
성스럽다는 표현 외에는 어떤 말로도 그려낼 수 없을 법한 광경에, 나도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굉장하군.”
“이, 이거 진짜 써버린 거 아니죠?!”
……그 경건한 분위기는 비명 같은 에리스의 외침에 산산조각 나버렸지만.
“아, 아닙니다. 실제로 소모하면 이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위력일 겁니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답한 마법사의 말에 에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수정을 상자에 다시 넣더니, 냅다 크리스틴에게로 달려왔다.
“앗……!”
크리스틴이 당황하는 사이 그녀를 덥석 끌어안은 에리스가 외쳤다.
“역시 돈은 최고에요! 크리스틴 언니는 신이고!”
“시, 신이시여…….”
성녀왕의 입에서 나온 실로 신성모독적인 발언에, 요한 대주교가 가슴을 움켜잡으며 성호를 그었다.
하하, 개판이구만.
그래도…….
이만하면 확실히 할만하지.
어디, 대왕이 신이 내린 비대칭 전력과 돈지랄의 맛을 보고 뭐라고 할지 한번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