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크라프테 전쟁 - 유산
바후아, 혁명군 주둔지.
나는 맞은편에 앉은 에리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채권 판매와 모금된 성금이 굉장한 모양입니다, 여왕 폐하.”
“다행이네요.”
에리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덧붙였다.
“솔직히, 조금은 걱정했는데요. 별로 호응 없으면 어쩌나, 하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본인이 가진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시는 건 문제입니다.”
에리스는 전장에 나와서 할 일이 없는 사이, 국민들에게 국가적 위기에 맞서 전쟁 수행을 위한 채권 구입과 성금을 호소하는 글을 써서 발표했다.
그렇지 않아도 프랑지아인들은 혁명으로 이룩한 국민의회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직접 최전선에 나와 기적을 펼치며 혁명군을 보호하는 성녀왕 본인이 크라프테의 위협으로부터 국민과 의회를 지키기 위해 도움을 호소한 거다.
국민들의 참여는 열렬하다 못해, 동참하지 않으면 애국심이 의심받을 지경인 것 같던데.
“……중앙당에서는 화 안 내시나요?”
에리스의 질문을 받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덕분에 제가 조금 고생하기는 했죠.”
에리스의 호소문을 발표하고 신문에 기고한 것은 혁명당이다. 중앙당이 아니라.
당연히 중앙당 총재 앙쥬 백작부터 시작해서, 중앙당은 뒤집어지긴 했다만…….
에리스가 눈을 굴리며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네 선택이 옳아, 에리스. 너는 중앙당이 옹립한 여왕이 아니라 국민에게 선출된 여왕이니까.”
여왕의 호소문을 중앙당의 귀족이 아니라 누구보다 급진적이고 여왕 옹립에 반대했던 혁명당에서 발표한 순간, 국민들에게 이 전쟁이 혁명과 국민의회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확실하게 각인되었을 거다.
“너는 잘하고 있어. 그러니 내 눈치 보지 말라고. 이미 내 후원은 졸업하고, 국민을 섬기는 여왕님이잖아.”
에리스는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네, 고마워요, 라파예트 후작님. 당신이 보기에도 제가 잘하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그러고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더니, 어느새 여왕의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총사령관께선 최근 성적이 조금 부진하시네요.”
“……송구합니다, 여왕 폐하.”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
다른 곳도 아니고 적에게 점령당한지 한 달도 안 된 자국 영토에서 매복에 당할 줄이야.
지금껏 패배를 모르며 중앙 대륙 최강의 중기병으로 그 명성을 떨친 프랑지아 흉갑기병대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
기병대 사령관으로서, 특히나 정찰전에서는 지금까지 무패의 전적을 자랑하던 제롬 모렐이 한 방 먹을 줄이야.
그 여유작작하던 모렐이 경악에 빠진 채 달려와 나에게 사죄하던 모습이 떠올라서, 입가에 쓴맛이 감돈다.
“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시 없을 겁니다.”
에리스도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
“그러셔야죠. 겨우 일주일 만에 벌써 2번이나 패배했어요. ……그렇게 희생된 군사들의 숫자는 세고 싶지도 않고요.”
“명심하겠습니다.”
이제야 크라프테의 대왕의 의도를 정확히 알 것 같다.
저자는 상대가 자신 있어 하는 부분을 정면에서 부수는 걸 지극히 선호하는 거다.
알자스 공격?
확실히 허를 찌르는 일격이기는 했다만, 알자스를 빼앗겼다고 우리 방어선이 무너진 것은 전혀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최전선인 알자스 로렌 중 핵심지역은 로렌이고, 우리도 그래서 알자스를 넘은 크라프테군이 무리하더라도 기습적으로 진격해올 걸 우려했던 거다.
알자스만 뺏긴다고 뭐 대단한 일 벌어지는 거 아니니까.
그런데 대왕은 무리하게 바로 들이칠 도박을 할 생각이 없으면서도, 굳이 알자스를 먼저 공격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건 우리의 허를 찌른 일격이 아니라, 혁명군의 ‘방어의 명장’이 자신하는 ‘미르보선’을 정면에서 압살해 버린 거다.
샤쇠르들과의 정찰전도, 굳이 정면에서 응수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저들도 후사르를 사격 경기병으로 육성해내긴 했지만, 결국 맞교환을 벌이다 보면 손해 보는 건 병력도 적고 원정군인 저쪽이다.
그러나 저들은 정찰전이 혁명군에게 자신 있는 분야이기에 응했고, 중기병대를 먼저 투입해 일부러 중앙대륙 최강을 자부하던 우리 중기병대를 끌어내 매복으로 타격했다.
믿던 분야에서 이미 2번이나 패배한 혁명군은 당연히 위축되었지만, 크라프테군은 그 충격을 살리기 위해 바로 진격해오지도 않았다.
저 망할 대왕, 진짜로 전쟁을 체스 게임처럼 즐기고 있는 거다.
“이제 더 이상 떠보는 작전 따위는 하지 않겠습니다.”
인정하지.
부끄럽지만, 우리는 전술적인 부분에서 저 대왕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없다.
“프랑지아가 낼 수 있는 모든 여력을 쥐어 짜내서…….”
레오폴트 대공은 말했다. 다음 패 따위를 예비하는 식으로는 저 대왕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고.
“단 한 번이라도 대등한 전투를 이끌어내 보이겠습니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단 한 번을 요청했다.
단 한 번. 승리가 아니어도 좋다.
크라프테군도 무적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줄, 무승부만이라도 낼 수 있다면.
“그렇게만 한다면, 이 전쟁은 이길 수 있습니다.”
저 무적 같아 보이는 크라프테에게도 한계가 있다.
전쟁기계 그 자체로만 보이는 저들의 상비군은 소모된다고 바로 재보충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저들의 인구와 국력이 프랑지아의 절반에 불과한 이상, 저들의 상비군만 어떻게든 크게 손실시켜 소모전 양상으로 갈 수 있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왕 폐하, 라파예트 후작 각하. 루이 드제입니다.”
“들어오세요.”
에리스의 허락을 받고 들어와 경례하는 드제는 드물게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게…….”
드제는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입을 열었다.
“크라프테의 대왕이 티타임에 여왕 폐하와 라파예트 후작 각하를 초대했습니다.”
우리 둘 모두 어벙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뭐?”
“네?
* * *
크라프테의 점령지와 혁명군 방어선의 중간지점.
오랜만에 보는 카를 2세는 임시로 설치한 테이블에 앉아 여유작작하게 손을 흔들었다.
“어서 오라. 프랑지아의 여왕, 라파예트 후작. 이 늙은이의 초대에 응해주다니 기쁘군.”
대왕의 옆에 앉아 있는 건 호위역인가 싶었는데, 중장 계급장을 달고 있는 걸 보니 아니다.
아마도 대화 내용을 기록하려고 데려온 듯한 서기관이 있고…….
그 뒤에는 대위 계급장을 단 크라프테군이 혁명군의 군복을 입은 남자를 옆에 세워두고 있다.
혁명군?
아는 얼굴이다.
이베리카에서 드론으로 변한 동생을 베어버렸던 부하.
이름이 뭐였더라.
……바셰였던가.
조제 바셰.
얼굴이 엉망인 걸 보니 꽤나 저항한 모양인데, 지난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건가.
내 시선을 받은 바셰 대위는 송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초대해 주셔서 기쁘네요, 크라프테의 대왕님.”
에리스는 베일을 두른 채로 답했지만, 말과 달리 목소리에는 아주 냉기가 풀풀 감돈다.
대왕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에리스와 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커피는 즐기시는가?”
“아니요.”
대왕은 에리스의 단호한 즉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픽 웃었다.
“그건 유감이군. 그럼 홍차라도 대접해드리지. 라파예트 후작은 짐의 특제 커피-”
“저도 여왕 폐하와 같은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대왕은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마지못하다는 투로 손짓했다.
그러자 중장이 직접 에리스와 나에게 홍차를 따라주었다.
“하인리히 왕자일세. 짐의 조카지.”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여왕 폐하,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 각하. 하인리히 폰 크라프테입니다.”
“……반가워요.”
“영광입니다. 전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자가 남부군 사령관인가. 군사적 재능도 제법이라고 들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대왕이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 발언을 던졌다.
“짐의 후계자지.”
나와 에리스 둘 모두 굳어버렸다.
대왕에게 자식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소문만 무성하고 크라프테 국내에서조차 공표되지 않은 후계자를 이런 식으로 알리다니.
아니, 그런데 적성국인 우리한테 그걸 알려서 뭐 어쩐다고?
내가 의아한 얼굴로 보고 있자, 대왕이 느긋하게 자신의 특제 커피를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라파예트 후작. 그대들 혁명군의…….”
대왕은 우리 뒤에 서 있는 조제 바셰 대위를 흘긋 보더니-
“열성적인 바셰 대위가 아주 강력하게 주장하던데.”
씩 웃으며 물었다.
“‘드론’이라는 건 실존했나?”
나는 절로 실룩거리려는 입가를 억누르느라 고생 좀 했다.
크라프테 왕국 또한, 드론을 허황된 이야기라고 부정했을 텐데?
“제 눈으로 직접 봤고, 싸웠습니다. 인간의 마력을 다 빨아내고 꼭두각시로 만든, 끔찍하기 그지없는 악마들의 피조물이었죠.”
대왕이 답했다.
“나의 신하들은 우리와의 전쟁을 피하겠다고 그대들이 지어낸, 허황된 이야기라고 하던데.”
“그들에겐 외국의 국민들 몇쯤 악마의 꼭두각시가 되는 일 따위, 자신들이 악마들과 거래하며 얻는 달콤한 과실에 비할 바는 아니었나 보죠, 폐하.”
카를 대왕은 나와 에리스의 얼굴을 살피는 듯하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 사실인가 보군.”
“사실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대왕 폐하. 지금이라도 헛된 피를 흘리는 전쟁을 중단하고, 우리와 함께 저 악마들에 맞서 보시겠습니까?”
“하하, 하하하…….”
대왕은 웃음을 흘리다가 물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공격할 수단이 있나?”
내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대왕이 빠르게 덧붙였다.
“‘라스’사의 함대를 무너트리고 저들의 본토를 침공할 정도의 해군이 있는가? 태양이 뜨지 않는 섬으로 진입한 군대의 보급을 유지할 역량은?”
“프랑지아 단독으로는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우리는 그를 위해 동방 제국과의 협력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준비 기간은 필요하겠지만, 크라프테와의 전쟁만 아니라면 가능성은-”
“짐이 죽은 다음에, 어쩌면 악마들에 맞설 기회를 잡을지도 모를 가능성이겠지.”
내가 말문이 막힌 사이, 대왕이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렇기에 짐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세. 짐에게 중요한 건, 짐이 살아 있는 동안의 누릴 전장이니.”
“대왕이라 불리는 자가 악마들의 선봉장 노릇이나 한다니, 그 칭호가 부끄럽- 읍! 우욱! 우우욱!”
뒤에서 격분하여 소리치던 바셰는 그를 붙잡고 있던 대위가 입에 재갈을 물리자 울부짖었다.
그 광경을 본 대왕이 어깨를 으쓱하자, 에리스가 주먹으로 탕- 소리 나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또, 고작. ‘흥미’ 때문에 우리를 불러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 건가요? 대왕님.”
카를 2세는 손으로 턱을 매만지더니 답했다.
“아니, 아닐세. 짐은 짐의 마지막 공연을 장식할 화려한 무대를 갈망해 왔다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짐과 크라프테 왕국이 악마들의 꼭두각시 취급을 받는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아.”
어쩌겠다는 거지?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자, 카를 2세가 입을 열었다.
“하인리히.”
“대왕 폐하.”
하인리히 왕자가 바로 허리를 숙여 보이자, 대왕은 서기관에게 슬쩍 손짓했다.
대화 내용을 기록하기 위해 데려온 건가 했더니, 정작 구경만 하고 있던 서기관은 그제야 펜을 들었다.
“크라프테 왕국의 대왕이자 제국 변경백, 카를 2세가 명한다. 혁명 프랑지아 왕국이 크라프테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크라프테의 차기 국왕은 향후 30년 이내에 혁명 프랑지아 왕국이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전쟁 시 동맹으로서 참전할 것을 보장하도록.”
하인리히 왕자가 당황하는 걸 보니 사전에 이야기된 것조차 아닌 것 같은데, 터무니없는 내용을 기록시킨 대왕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덧붙였다.
“짐에게는 친자가 없는바, 차기 국왕은 이 조건에 동의하는 경우에만 짐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노라.”
심지어 서기관조차 멈칫하고 있자, 대왕이 짐짓 느긋한 어투로 말했다.
“왜 그러는가, 제대로 기록하라.”
서기관이 조금 떨리는 손으로 마저 적어 내리자 카를 2세는 하인리히 왕자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하인리히 왕자는 바로 그의 앞에 부복하며 답했다.
“……대왕 폐하의 뜻을 받듭니다.”
카를 2세가 손짓을 하자, 뒤에 서 있던 크라프테군 대위가 조제 바셰의 재갈과 포박을 풀어주고는 그를 우리 쪽으로 떠밀었다.
그제야 나와 에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린 대왕이 입을 열었다.
“인간의 일개 왕국에게조차 패배한다면, 저 강대한 악마들에게 맞서겠다는 것은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는 자들의 공허한 망상에 불과할 터.”
더없이 희열에 찬 얼굴로 웃으며.
“에실리스테 여왕, 라파예트 후작. 짐은 그대들에게 큰 기대를 품고 2년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니 짐을 실망시키지 말라. 그대들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보여라.”
대왕이 선언했다.
“짐을 꺾어, 그대들이 이 대륙을 이끌고 저 악마들에게 맞설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라! 그리하면 크라프테 왕국 또한 기꺼이 그대들의 깃발 아래에서 악마들에 맞설 것이니, 그것이 짐이 그대들을 위해 남길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