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크라프테 전쟁 - 선봉
로렌, 낭시.
크라프테군에 맞서 처음으로 교전하고 바로 낭시로 물러난 남부군의 사기는 지극히 저조했다.
강까지 끼고 구축한 방어선이 단번에 돌파 당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과 공포인데,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크게 활약한 데미앙 드 미르보와 그의 ‘미르보선’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특히나 일선에서 크라프테군의 위용을 직접 목격한 남부군이 목격담을 전하기 시작하자, 혁명군 전체의 사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루이스 다키텐은 무력감을 곱씹으며 막사 한편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처음이니까 이해합니다만, 그런 일로 일희일비해서야 이 짓 오래 못 해먹습니다. 전 기분전환 겸 산책이나 하고 옵죠.
듀랑 하사는 그리 말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굴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루이스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상대가 강적이었다는 것도 알겠고, 우리가 허를 찔렸다는 것도 이해했다.
하지만 누이를 돕기 위해, 그 누이가 사랑해 마지않는 라파예트 후작에게 보탬이 되겠다고 그 고생을 해서 마법사가 된 건데.
나름 마탑에서 재능이 있다는 취급도 받았고, 실제 성적도 우수했다. 조기졸업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자는 그를 만류했지만, 루이스는 은연중에 그래도 이 정도면 뭐라도 도움이 될 거라는 자신감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그가 제아무리 열심히 발악을 해도, 거대한 전장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기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아군이 무참하게 패배하는 동안 루이스가 낸 성과라곤 부교 몇 개 부숴서 적의 도강을 조금 늦춘 것뿐.
“하아아...”
절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올 즈음,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키텐 소위,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아, 네, 넷!”
루이스는 벌떡 일어나, 들어오는 소령에게 경례했다.
지젤 다비는 경례를 대충 받아주더니 편히 있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리곤 루이스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픽 웃었다.
“역시나 충격이었나 보네요.”
“아, 그게...”
루이스는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저 때문에 오신 겁니까? 죄송합니다.”
지젤 다비는 씩 웃으며 답했다.
“아키텐 소위 때문에 온 건 맞는데, 죄송할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저도 지시받고 온 거니까. 우리 귀한 마법사님 사기 꺾이면 안 된다고, 어딘가의 장군님이 하도 닦달을 해서.”
“하하하...”
루이스가 작게 웃자, 지젤도 웃으면서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전장에서 패배는 언제나 겪을 수 있는 일이고, 지난 전투에서 아키텐 소위는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으니까.”
“그런가요...”
“오히려 저는 아키텐 소위를 칭찬해 주고 싶은데.”
“예?”
“첫 실전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총탄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당황하지 않고 제 역할을 다 한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하죠.”
“...그렇습니까.”
루이스는 씁쓸하게 답했다.
귀하게 자라 마탑에서 교육받다 온 도련님에게, 상부에서도 애초에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 무리도 아니긴 하다.
루이스 다키텐이 처음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본 것은 8살 때.
어머니와 가신들이 눈앞에서 처형당하는 모습이었다.
그때부터 거의 한 달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그 뒤로도 몇 년간은 잊을만하면 악몽으로 등장했다.
만약 그가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전장에서 지금보다도 더 추태를 보였을까?
루이스가 상념에 잠겨 있자, 눈앞에 작은 병이 하나 들이밀어졌다.
“어, 다비 소령님?”
“마셔요, 꿀물이니까. 귀족가 도련님에겐 별것 아닌지 몰라도, 전장에선 꽤 호사니까 감사히.”
“아, 가, 감사합니다.”
루이스는 데워서 담아 온 건지 아직까지 미지근한 온기를 머금은 음료를 마셨다.
입가에 달달함이 번지고 목을 타고 부드럽고 따뜻한 액체가 넘어가는 감각에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네요.”
지젤은 픽 웃으며 답했다.
“좀 나아지는 것 같으면 여기서 궁상떨고 있지 말고, 진중이라도 돌아보세요. 그래도 특별 취급 받는 고급 인력이시라 평시엔 임무도 없잖아요?”
“특별 취급, 인가요. 그래서 제게 경어를 쓰시는 건가요?”
“뭐, 그렇죠. 소위라고는 해도 마탑까지 졸업한 고위 마법사니 군에서는 고급 인력이고, 덤으로 그 아키텐 가문의 도련님이시니까요.”
루이스는 조금 주저하더니 말했다.
“저는 별로 그런 특별 취급을 받고 싶지 않은데요...”
“그래? 그럼 소위답게 대해줄까?”
바로 태세 전환한 지젤의 말투에 루이스가 약간 어벙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지젤은 씩 웃더니 팡- 소리 나게 루이스의 등짝을 후려쳤다.
“으악?!”
“아키텐 백작님 덕분에 호사스러운 교육도 받고 온 주제에 무슨 세상의 불운을 다 가진 것처럼 굴고 있나! 일어나, 소위!”
“네, 넷!”
루이스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자, 지젤이 양손으로 루이스의 어깨를 잡더니 우둑 소리 나게 폈다.
“으아악!?”
“어깨 펴! 고개 들고, 허리 똑바로 세워! 군인 취급받고 싶으면 군인답게 굴어!”
“네, 네, 넷! 알겠습니다!”
루이스가 기겁해서 자세를 바로잡자, 지젤은 그의 자세를 이리저리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좀 낫군. 앞으로는 계속 그러고 다녀, 소위. 궁상맞게 찌그러져 있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그새 힘 빠지는 꼬락서니 하곤! 아직 부족한가?”
“넷, 알겠습니다!”
루이스가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로 하며 힘차게 대답하자, 지젤은 그제야 픽 웃으며 루이스의 어깨를 툭툭 쳐주곤 입을 열었다.
“소위가 뭐라고 생각하든, 소위가 가진 능력은 제법 유용한 게 사실이야. 미르보 장군님도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고, 지난 전투에서 소위에게 도움받은 것도 있어. 아마 앞으로도 이래저래 많은 요구가 있겠지.”
루이스가 마른침을 삼키고 있자, 지젤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너무 초조해하지 마. 우리도 소위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하진 않고, 책임감만 느끼며 위축되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해. 그래도 영 고민이면 언제라도 나한테 찾아와도 좋아. 미르보 장군님이 날 볶는 건 차치하더라도, 나도 개인적으로 소위는 잘 챙겨줄 테니까.”
“가, 감사합니다. 그...”
“응?”
“사람을 다루는 것에 익숙하시구나 싶어서요.”
지젤은 눈을 깜빡이더니 답했다.
“동생들이 좀 많거든. 원래는 위로 언니가 있었는데...”
루이스는 그제야 아차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지젤은 약간 눈을 굴리는 듯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어린 동생들 버리고 도망갈 것 같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사라졌어. 그래서 애들 돌보는 건 많이 해봤지. 그래도 운이 좋아서... 아니.”
지젤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씩 웃으며 답했다.
“어쩌면 언니 덕분인지도 모르겠는데, 다행히 우린 배곯을 걱정은 없었어.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소위. 평민 집안에선 꽤 흔한 이야기거든.”
“아, 그. 동정심 같은 걸 품은 건 아닙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랬으면 한 대 더 패줬을걸.”
별생각 없이 가볍게 말하는 지젤을 보며, 루이스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 * *
낭시의 혁명군 사령부.
알자스 방면에서 후퇴해온 군대를 포함해, 각지에 분산 배치되어 있던 혁명군이 내 지시를 받고 집결하고 있는 상황.
나는 알자스에서 물러나, 내 앞에서 마른 침만 연신 삼키고 있는 데미앙 드 미르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
“예, 옛! 라파예트 후작 각하!”
“남부군 사령관.”
“예...”
“...알자스 방면군 방어 책임자.”
“...”
나는 일부러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할 말 있나?”
“소, 송구합니다. 후작 각하. 하지만 그 상황에서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거기서 크라프테군을 상대로 싸웠다간 제 병력은 증원이 오기도 전에 전멸을 면하지 못했을-”
“아, 판단은 훌륭했어.”
내 말을 들은 데미앙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덕분에 그대의 군대는 전력을 어느 정도 온존할 수 있었고, 우리는 크라프테를 상대로 회전을 치를 생각이다.”
“회, 회전이요...”
데미앙이 다시 급격히 위축되는 것 같아서, 나는 픽 웃었다.
“시가전으로 방어에 임하는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우리 측 병력이 너무 많고 적들이 대량의 곡사포를 가지고 있어. 자연히 도시 피해가 심각해질 테니, 붙어보기도 전에 선택하기엔 부담이 크지.”
“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하지만 무려 ‘방어의 명장’인 그대가 초전부터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주한 탓에 혁명군의 사기가 영 저조해. 그래서 말인데.”
데미앙은 ‘방어의 명장’이라는, 평소 같으면 제 입으로 자랑스럽게 떠들 이름에 어깨를 움츠러트리더니, 이어진 내 말을 듣곤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예?”
“다음은 나 말고 다른 분이 설명해 주실 거야.”
“예, 예?”
데미앙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다른 쪽 문이 열리고 익숙한 백색의 로브를 입은 사람이 들어섰다.
“히, 히이익, 여, 여, 여, 여왕 폐하!”
데미앙은 내 앞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기겁하며 그대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에리스가 뭐 딱히 권위적인 여왕도 아닌데 저러는 걸 보자니, 정말로 데미앙이 여성 공포증이 맞기는 한가...
아니 정확히는, 크리스틴과 에리스를 두려워하는 건가.
“전투 전에, 제가 직접 미르보 백작님과 남부군을 축복하는 의식을 진행할 거예요.”
에리스의 청아한 목소리에, 데미앙은 머리를 들지도 못한 채 답했다.
“여, 영광, 영광,입니다. 군사들도 기뻐할...”
“그리고 제가 백작님의 군대와 함께 선봉에 섭니다.”
“예, 예?!”
데미앙은 기겁하며 고개를 쳐들고,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솔직히 처음 들었을 땐 나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으니까, 이번만큼은 데미앙을 동정하고 싶은 기분이다.
에리스는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로 데미앙의 앞까지 다가가, 데미앙에게 손을 뻗었다.
데미앙이 거의 혼이 나간 얼굴로 에리스의 손을 잡자, 에리스는 자연스럽게 그를 일으켜 세웠다.
키 차이 때문에 에리스가 올려다보고 있는데도, 오히려 데미앙이 아래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난다.
“혹시나 해서 여쭈어보겠지만, 백작님께서는 정말로 군사들의 생명을 구하고 프랑지아를 지키기 위해 물러나신 거겠죠?”
“그, 그렇습니다, 여왕 폐하.”
“신께 맹세코?”
“맹세합니다, 여왕 폐하!”
에리스는 로브의 후드를 걷었다,
긴 은빛의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에리스는 장난기 가득한 보랏빛 눈동자를 한 채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요. 혹-시라도 백작님께서 겁이 많아서 물러나신 거였으면, 함께 나서기 전에 ‘회개치료’를 다시 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고 걱정이었어요.”
데미앙은 이제 숫제 딸꾹질을 하며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회개치료?
아, 그... 채찍질?
“제가 백작님을 믿고 함께 나서도 되겠죠? 백작님께서는 이 나라와 승리를 위해, 기꺼이 저와 함께 선봉에 나서주실 거죠?”
“무, 무, 물론입니다, 여왕 폐하! 이 데미앙 드 미르보, 신명을 다 바쳐 여왕 폐하와 프랑지아를 위해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하겠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더 절박하게 외치는 데미앙 드 미르보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전투 의지 이전에 생존을 위한 결의에 가까웠다.
데미앙의 답을 들은 에리스는 보랏빛의 눈동자를 휘며 웃더니,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러면, 군사들의 사기 문제는 많이 해결되겠죠?”
아, 골치야.
그래.
상대가 크라프테군이 아니라 마왕군이여도, 성녀왕이 최전선에서 기적을 펼치고 있는데 그걸 내버리고 도망칠 수 있는 군대 따위 없겠지.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답했다.
“예, 여왕 폐하. 군사들의 사기 문제는 해결되겠죠. 그 대신 국민의회가 제 멱살을 잡고 흔들 것 같다는 사소한 문제점이 있긴 합니다만.”
에리스는 내 말에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건 후작님께서 어떻게든 해주실 거라 믿어요. 제 후원자시니까.”
...원래 장난기 넘치긴 했지만 이렇게 변한 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우리 성녀를 잘못 키운 모양이야.
나는 옆에서 거의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데미앙을 흘긋 본 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뒤 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가 충성을 바치는 여왕 폐하시니, 책임은 다 해야지요.”
내 답을 들은 에리스는 보랏빛의 눈동자를 반짝이며 기운차게 답했다.
“좋아요. 꼭 이기죠, 우리!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대왕에겐 절대 지고 싶지 않으니까!”
어째 혁명군에서 우리 여왕님이 사기가 제일 높으신 것 같은데...
누구보다 보호받아야 할 여왕이 선봉에서 버티겠다는데, 답 있나.
군대고 장군이고 사령관이고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