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50화 (150/258)

150화. 크라프테 전쟁 - 압도 (2)

강가에 도달한 크라프테군은 들고 온 조립식 부교로 강가에 놀라운 속도로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그걸 본 루이스 다키텐이 지팡이를 하늘로 들어 올리자, 순식간에 먹구름이 모여들었고-

“하아아앗-!”

루이스가 마력을 집중하며 지팡이를 내리긋자, 그대로 천둥소리와 함께 작렬한 번개가 만들어지고 있던 다리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오, 오오오-!”

자연의 재앙을 마력으로 불러일으키는 광경에 혁명군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크라프테군은 조금 놀란 듯 멈칫했을 뿐 이내 다른 다리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젠장, 저놈들은 공포도 없나?”

페터 드 카젤은 그 광경을 보며 탄식했다.

“다키텐 소위님. 다리를 계속 놓고 있는데요…….”

“허억, 허억, 잠시, 잠시만…….”

듀랑 하사의 말에도, 루이스는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사실상 설치되는 부교를 파괴하는 것이 가능한 건 루이스의 마법 정도인데, 어린 마법사가 아무리 애써도 도저히 다 파괴할 수 없을 숫자의 부교가 빠른 속도로 놓이고 있다.

루이스가 개고생을 하고 적 곡사포와 척후병이 아군 진지를 유린하고 있는 가운데, 후방의 데미앙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포병대 전부 내보내서 포격시켜! 어서!”

“옛!”

지젤 다비가 보낸 전령의 명령에, 참호에 숨어있던 포병대는 다급하게 견인포를 끌어내서 포격 준비를 시작했다.

“영차, 영차-!”

“끄으응, 더럽게 무겁네!”

하지만 말까지 동원해서 옮겨도 대포의 무게가 만만한 게 아니어서 꺼내는 것만 해도 시간이 꽤 걸렸고.

“발사 준비해! 어서!”

“허, 허억, 포격이-!”

“으아아악!”

힘겹게 대포들을 꺼내서 포격을 준비하기가 무섭게, 크라프테군의 직사포가 날려댄 포탄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아도 참호에서 대포를 끄집어내느라 고생하며 힘이 빠진 포병들은 엄청난 명중률을 자랑하는 크라프테 포병대의 화망에 노출되었고, 제대로 포격 몇 번 해보기도 전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 소식을 전달받은 데미앙 드 미르보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염병하아아알알-! 저 망할 대왕이 작정하고 기다리고 있었구나!”

곡사포로 정확도 높은 포격을 가하는 자들이 직사포라고 못 다룰 리가 없다.

참호 선에다 직사포를 쏴서 헛치는 대신, 포격에 대응하기 위해 이쪽이 포병을 동원할 걸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던 거다.

미리 포병대를 방열해뒀다면 어느 정도 대응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제국과의 전쟁처럼 적들이 더 많은 직사포를 끌고 올 상황에 대비해 참호 속에 숨겨둔다는 게 제대로 역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낮에만 해도 없다고 했는데 야간 행군을 해 와서 새벽에 기습한다는 걸 어떻게 예상해!

그 와중에도 부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백작 각하! 이대로면 적들의 도강을 허용하게 됩니다!”

창백하게 질린 지젤 다비의 외침을 들은 데미앙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제국을 상대로 이미 한 번 재미 본 전략을 재활용하려고 한 것이 패착이었나?

이쯤 되면 이건 우발적으로 이쪽으로 온 것이 아니다.

저들은 데미앙 드 미르보가 ‘미르보선’에 의존한 방어태세를 갖출 거라고 예상하고, 정확히 그걸 파훼하려고 준비해서 공격해온 거다.

“우리, 원군 요청한 지 몇 시간이나 지났지?”

“……2시간 지났습니다. 각하.”

로렌의 본대나 프랑슈콩테의 2진에서 전령 받고 출진을 준비한다고 해도, 도달할 때쯤엔 이미 전투가 막바지에 달했을 상황이다.

아니, 막바지는 무슨.

상대는 본대가 다 몰려온 크라프테의 최정예다. 저걸 상대로 뭐 얼마나 오래 버틴다고.

원군이 도착한다면, 이미 그의 군대가 궤멸적으로 패배한 뒤겠지.

마른침을 삼킨 데미앙이 입을 열었다.

“무, 물러나.”

“예?”

“적들이 도강해서 교전하기 시작하면 참호에서 빠져나오다가 다 쓸려! 전군 후퇴 명령해! 알자스를 내주고 2선으로 후퇴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각하?”

지젤 다비가 드물게 그의 안위를 걱정해 줘서, 데미앙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소리쳤다.

“어쩔 거야! 여기서 다 죽을 순 없잖아!”

라파예트 후작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자비라도 빌어보는 수밖에!

* * *

로렌의 수도, 낭시.

혁명군 사령부.

나는 꽤나 낙담한 채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6시간.

데미앙 드 미르보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가 패퇴하고, 놀라운 속도로 라인강을 건넌 크라프테군이 알자스 전역을 확보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하.”

남부군, 중부군, 북부군.

다 속임수였다.

아니면 저들 딴에는 그냥 대충 구분상 붙인 이름일 뿐인데 우리가 지레 우리 식대로 해석해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공격해올 거라고 착각한 거던가.

크라프테의 20만 병력 전군이 데미앙 드 미르보의 ‘미르보선’을 짓밟아 으깨버리고 알자스로 밀려 들어왔다.

우리가 예상한 주공 방면인 로렌으로는 한 명의 병사조차 오지 않았다.

로렌으로의 공세를 예상한 우리 장군들이 무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군사학이나 전략적 상식으로 볼 때 그게 당연한 예상이다.

전략적 관점으로 볼 때 알자스에 모든 병력을 몰아넣는 것은 상당한 하책이니까.

이후의 공격 루트가 지극히 제한되니 예측하기도 쉬워지는 데다, 만약의 경우라도 패배하게 되면 바로 점령지를 다 빼앗기고 물러나야 한다.

20만의 대군이 강을 건너 물러나야 하니 타격도 엄청날 거다.

그러나 그건, 전략적인 관점에서 안정성을 볼 때의 이야기고.

이제 슬슬 카를 2세가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다.

저자는 애초부터 질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전략적인 안정성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냥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걸 다 깨부수며 진군하면 그 외의 사항 따위는 알 바 아닌 거다.

-대왕에 맞설 때, 미래나 전략은 고려하지 말게. 그런 걸 고려하고 다음 패를 예비하며 싸우는 순간 그자의 앞에서 부러지고 말 것이니, 매 순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모든 걸 쏟아부어서 저항하게.

나는 이제야 비로소, 레오폴트 대공이 해준 말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저들은 그야말로 작전적 우수성과 군사적 정예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전술 우위만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군대다.

예비대? 다음 수?

저들의 머릿속에 그런 게 있기는 할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저들은 우리의 허를 제대로 찔렀다.

라인강을 끼고 꽤 버텨 줄 거라 기대한 알자스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우리가 기껏 북쪽에서의 공격을 예상해 철저하게 준비해둔 메츠 요새나 로렌, 베르됭의 방어선은 쓸모없어졌다.

이제 우리는 완전히 새로 짠 방어계획으로 저 크라프테에 맞서야 한다.

와중에 ‘방어의 명장’이니 ‘딜루스의 수호자’니 칭송받으며 사실상 혁명군의 이인자 취급이던 데미앙이 초전부터 허무하게 박살 난 덕분에 혁명군의 사기도 엄청나게 흔들렸고.

나는 절로 피로감을 느끼며, 손을 들어 눈가를 쓸었다.

레오폴트 대공을 상대로 싸울 때도, 심지어 파이몬과 싸울 때도 이렇게 벽 같은 느낌을 받아보진 못했는데 말이지.

“후작 각하…….”

걱정스러운 드제의 목소리에,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명했다.

“전 부대에 집결 명령 내리지.”

결국 저 대왕이 바라는 건 의도적으로 다음 진격로를 좁혀서라도, 나와 제대로 장엄한 전투를 치러보고 싶다는 거지.

데미앙 드 미르보는 군사들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애걸복걸하며 자비를 갈구하고 있지만, 그게 그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든 실제로 군사들을 살리기 위해서든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데미앙이 이끌던 군대가 크라프테군에게 정말 가루로 박살 나버렸으면 순식간에 전력 차가 벌어졌을 테니까.

“다행히 미르보 백작이 군대나마 건사해주었으니 일전을 벌여볼 만합니다.”

크라프테군에 비할 바는 아니라도 우리도 정예도는 상당하다.

혁명 수호대와 흉갑기병대는 저 이베리카에서 드론들에 맞서 싸운 역전의 용사들이고, 병력으로는 우리가 저들을 한참 상회한다.

지금쯤 프랑지아에 진입했을 이베리카 형제국의 군대도 곧 오겠지.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한번 붙어보죠. 어디 그 크라프테군이 얼마나 대단한지 봅시다.”

* * *

크라프테 왕국의 수도, 미텔부르크.

크라프테의 정부 청사는 대왕이 군 관계자들을 전부 끌고 나가버리면서 한적해져 있었다.

국가가 군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가 국가를 소유한다는 평이 있을 만큼 크라프테는 정계조차 과반수를 군 관계자들이 잡고 있었으니까.

그 텅 빈 정부청사에서, 부재중인 대왕을 대신해 국가의 대부분을 총괄하는 재상 유스틴 폰 비텐펠트는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역시나 카를 2세, 그가 섬기는 대왕.

알자스에서 혁명군이 자랑하는 ‘방어의 명장’을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밀어내며 승리를 거두었다.

상대의 판단이 빨라서 기대만큼 큰 피해를 입히기 전에 물러나 버린 것은 좀 아쉽지만, 초전부터 명성이 드높은 장군이 패배하며 적의 사기는 꽤 흔들렸을 터.

전황은 매우 순조롭다.

그러나 비텐펠트는 그래서 찜찜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키텐의 검은 마녀, 크리스틴 다키텐.

명목상은 아키텐 상단의 주인이자 국민의회의 일개 의원이면서 제독에 불과하지만, 프랑지아의 막후에서 암약하며 온갖 정치적 공작과 정보전을 전담해온 흑막.

얕보았냐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이게 전쟁에서의 정보전인 이상, 그가 유리하다고 확신했을 뿐이다.

실제로도 저들의 공작은 거의 전부 봉쇄당하고 있었고, 비텐펠트는 잡아들인 아키텐의 요원들에게서 추출해낸 정보로 크라프테에서의 정보전을 통제하는 ‘머리’를 잡아들이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딱 그 시점에 크라프테군에 가해지던 거의 모든 공작이 중단되었다.

아주 깔끔하리만치, 마치 여기서 더 하면 초래될 결과를 예측했다는 듯.

비텐펠트는 손으로 슥- 안경을 추워 올렸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큰 피해를 입기 전에 발을 빼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다.

정보조직을 관리하는 자로서, 자신의 상황을 저 정도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텐펠트는 오히려 저 검은 마녀를 칭찬해 주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2년, 2년이다.

대왕이 보장해 준 기간 동안 이어진 첩보전.

그동안 비텐펠트는 나름의 성과를 이루었다.

대거 충원되는 혁명군의 내부에서 파벌 갈등이 일어나도록 조장했고, 개전을 알린 수도 무기고 폭파는 엄청난 실질적 피해다.

그동안 아키텐의 검은 마녀는 뭘 해냈지?

어느 정도 첩자를 심고 정보를 캐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럴싸한 공작 하나 성공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2년간 일방적으로 휘둘려놓고, 더 이상 파고들면 피해를 볼 거라는 판단하에 깔끔하게 발을 뺀다?

심지어 크라프테군이 당장 프랑지아의 국토로 진격해 들어가고 있는데?

“이거, 어쩌면…….”

비텐펠트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것은 차마 그가 직접 입으로 내뱉기는 꺼림칙하다.

혹시, 그가 저 검은 마녀와 놀아준 것이 아니라 저 검은 마녀가 그와 놀아준 건가?

* * *

그리고 그 시각, 프랑지아의 수도 뤼미에르.

크리스틴 다키텐은 차가운 얼굴로 중앙 대륙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백작 각하, 크라프테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요원들 전원의 귀환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래. 수고했구나, 리나. 그들에겐 유급 휴가를 주렴.”

비록 그런 곳까지 내몰릴 만한 짓을 저질러서 내몰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크라프테에서 공작을 벌이면서도 어떻게든 지금까지 살아남을 능력은 있는 이들이다.

경고도 충분했을 테니, 재활용할만한 가치는 차고 넘친다.

“네, 알겠습니다. 백작 각하.”

전속 시녀이자 정보조직을 관리하는 오른팔이 물러난 뒤, 크리스틴은 지도에 놓인 말을 손으로 톡- 톡- 두들겼다.

크라프테군에 대한 군사 공작은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대부분 실패했다.

최대의 성과가 크라프테에서도 위기를 감지하고 그것을 피할 줄 아는 유능한 요원들을 걸러내고, 그들이 가져온 정보를 취합하는 수준.

그래도 저들은 훌륭하게 역할을 다했다.

저들의 재상으로 하여금 크리스틴이 크라프테군에 대한 침투 및 파괴공작에 열을 다하고 있다고 믿게 할 정도로 치열하게, 많은 희생을 내며 공작을 계속해 왔다.

애초에 침투시킨 공작원만 해도 수백 단위가 넘어간다. 공작원을 육성하는데 드는 돈이 만만한 것도 아니니, 저들은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애초에 군대가 국가를 움직이는 나라에서 예산을 짜내어 정보조직에 투자하는 돈과, 그 2배가 넘는 체급의 프랑지아 경제를 쥐고 흔드는 상단의 관리자가 투자할 수 있는 돈의 차이에 아득한 격차가 있다.

거기서 비롯된 차이가, 크라프테의 재상을 묶어둔 채 크리스틴이 다른 공작을 벌이기 충분한 여력을 남겨줬을 뿐이다.

게다가.

크리스틴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저들이 태생부터 군대를 지원하기 위한 조직이기에 아키텐의 공작원들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하는 법.

씨앗은 충분히 뿌려졌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크리스틴은 손을 뻗어, 지도에서 피에르가 있을 로렌을 쓸어내렸다.

단 한 번.

크라프테와의 전쟁에도 승산이 있을 수 있다는 단 한 번의 증명만 보여준다면.

저 무적처럼 보이는 크라프테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도 가능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냈으니, 남은 건 피에르가 해낼 것이라 믿고 기다리는 것뿐.

……언제나 그러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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