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크라프테 전쟁 - 압도 (1)
프랑지아 동부, 로렌의 주도 낭시.
나는 손으로 미간을 매만지며 걸음을 재촉했다.
자신들만으로 충분하다고 호언장담하던 인간들의 낯짝이 참 볼 만했지.
덕분에 수도 무기고는 화려하게 불타올랐고, 수도에서 훈련받을 예비대 3만 병력이 쓸 장비의 최소 50%가량이 소실되었다.
뭐? 있을지도 모를 위협 때문에 육군의 일에 해군이나 일개 상단의 손을 빌릴 수는 없다고?
나는 크리스틴과 함께 뒤늦게 협조적이 된 군의 수도시설 전체를 뒤집어엎었고, 적의 첩자 몇이 발각되었다.
하지만 이미 숨어든 첩자들이 이런다고 다 찾아졌을 리도 없지.
정말 한숨만 푹푹 나오고, 피곤하다.
나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낭시에 위치한 혁명군 사령부에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라파예트 후작 각하!”
북부군 사령관 루이 드제, 그리고 남부군 사령관 데미앙 드 미르보를 비롯한 지휘관들이 모두 모인 자리.
다들 이미 내게서 하달된 보안 강화 명령으로 내 심기가 좋지 않을 거라고 직감했는지, 바짝 긴장한 태도들이다.
“각자 부대 확인은 했나?”
“옛!”
“물론입니다, 후작 각-”
저 혼자 길게 말하려던 데미앙이 찔끔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래도 눈치들은 있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시작하지.”
“옛, 후작 각하!”
혁명군 총참모장 알렉상드르 베르테르가 나섰다.
“크라프테군은 현재 군을 셋으로 나누어 진군해오고 있습니다.”
뭐, 역시나 20만쯤 되면 한곳으로 몰아넣기엔 상당히 많은 병력이다.
전선으로의 배치가 여의치 않아지는 건 차치하고, 보급 문제 때문에라도 대병력의 밀집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낳으니까.
우리도 이미 군을 여럿으로 나누어뒀으니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하인리히 왕자가 지휘하는 군대가 6만으로, 저들이 남부군이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게르하르트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가 다시 6만으로, 북부군이라 지칭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머지 8만이…….”
“중부군, 대왕이 직접 지휘하겠군.”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
“그래서, 공세 예상은? 미리 모인 지휘관들끼리 토론은 충분히 했겠지?”
베르테르와 드제, 그리고 미르보가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목소리로 말했다.
“주공은 로렌 방면이겠지요.”
“흠.”
“병력도 많고, 부대를 둘이 아니라 셋으로 나눈 걸 보자니 메츠와 모젤 평야를 동시에 압박하고, 여차하면 숲 지대를 지나 베르됭 요새까지 압박하려는 의도일 수 있습니다.”
확실히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럴 텐데, 그렇게 되면 사실상 게르마니아 제국의 레오폴트 대공이 선택했던 전장과 같은 곳에서 교전하게 된다.
문제는 저 대왕이 그렇게 일반적인 범주로 예측 가능한 인사냐는 건데. 애초부터 프랑지아와 제국의 국경 자체가 비좁아서 공격 루트가 제한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나는 데미앙 드 미르보를 보며 물었다.
“남부, 알자스 방어선 준비는 충분한가? 적의 주공이 몰릴 가능성도 상정은 해두어야 하는데.”
일단 적들이 붙인 이름으로 볼 때, 데미앙이 상대하게 될 건 하인리히 왕자의 남부군으로 추정되는데…….
데미앙도 그걸로 자신이 최소한 대왕을 상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자신 있는 태도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후작 각하! 알자스 방면은 라인강을 끼고 방어하는 만큼, 게르마니아 제국과의 전쟁 때 급조된 것과는 달리 더욱 철저히 준비된 ‘미르보 선’을 통해 철통같이 수비하겠습니다!”
……절로 떫은 표정이 지어진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만은 아닌 듯 상당수의 장군들이 떨떠름한 얼굴들을 하고 있다.
무슨 방어선에 자신 있게 자기 이름을 붙이냐고…….
나는 심란한 얼굴로 데미앙을 바라보았다.
이 인간을 믿고 맡겨도 되나.
하긴, 그래도 제국과의 전쟁에서 강을 끼곤 대놓고 참호를 파고 숨어버린 채 방어한다는 전술이 제법 잘 먹히긴 했지……?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상대는 제국군이 아니라 크라프테군이야. 절대 방심하지 말고 만전을 기하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라파예트 후작 각하! 이 ‘방어의 명장’ 데미앙 드 미르보를 믿어주십시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뻔뻔하게도 자기 입으로 저런 소리를 하는 데미앙을 바라보았다.
……내가 저딴 놈을 믿고 크리스틴이 애지중지하는 루이스를 맡겼다니, 벌써부터 회의감이 드는데.
의외로 크리스틴은 찬성했었다.
그게 뭐 저놈을 고평가해서는 아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루이스와 제 목숨만은 건사하려고 들것 같다’라는 이유였지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러면 대왕과 주공이 로렌 방면에 집중될 것을 전제로 한 방어계획을 짜고, 유사시 알자스로 주공이 쏠리더라도 빠르게 증원할 수 있도록 준비하도록 하지.”
그래. 그래도 저 참호선의 효과는 어느 정도 입증되었고, 인간이 좀 못 미더워서 그렇지 데미앙의 방어전 전적이 우수한 것도 사실이다.
혹시나 알자스에 공세가 집중되어도 데미앙이라면 증원이 올 때까지는 버티겠지.
* * *
그리고 며칠 뒤, 새벽.
이제 막 어슴푸레하게 동이 터올 시간의 알자스 전선.
데미앙 드 미르보가 야심 차게 준비한 ‘미르보선’.
하품을 하며 경계근무를 서던 혁명군은 안개 너머로 접근 중인 무리를 보고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어어, 저, 저거 뭐야!”
“허, 헉! 적습! 적습!”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지고, 곤히 잠들었던 군사들이 헐레벌떡 일어나서 본 것은 지평선을 뒤덮으며 접근하고 있는 검은 군복의 물결이었다.
“뭐, 뭐야, 샤쇠르들이 어제 낮에만 해도 근처엔 없다고 했는데!”
자다가 깨서 경악을 금치 못하는 데미앙 드 미르보의 옆에서, 마찬가지로 다급하게 달려온 지젤 다비가 말했다.
“거리를 두고 있다가 밤사이 행군해온 것 같습니다.”
“미친, 저 정도 병력이 대열 안 꼬인 채 행군해 와서 도강 전투를 이어서 하겠다고? 그게 돼?”
지젤 다비는 망원경으로 강 너머에서 피로감 따위 보이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접근해오고 있는 크라프테군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크라프테군은 되나 보죠.”
“에에이, 어쨌거나 미르보선은 굳건하다! 엄폐한 채 강을 끼고 막으면 능히 저지할 수 있-”
데미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포성이 울렸다.
“전원, 참호에 엄폐하라! 저 멍청이들에게 포탄 낭비나 시켜줘라!”
혁명군은 자연스럽게 참호에 숨어, 포탄이 머리 위로 지나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포탄이 대기를 가르며 지나가는 소리 대신, 무언가 더 느릿느릿하지만 확실하게 가까워지는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본 혁명군은 보았다.
포물선을 그리며, 그들의 머리 위로 낙하하고 있는 포탄을.
“저게, 뭐-”
혁명군이 뭔지 파악도 하기 전에,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든 포탄이 폭발하며 불꽃과 파편을 흩뿌렸다.
“으, 으아아악-!”
“아아아아! 내 팔, 내 팔이이-!”
크라프테군의 곡사포가 쏘아댄 폭발탄은 그저 땅을 깊이 팠을 뿐인 데미앙의 참호선에 숨은 병사들의 머리 위에서 폭발하며 유린했다.
“미, 미친, 곡사포라고?”
데미앙은 기가 찼다.
혁명군이라고 곡사포를 개발하지 않은 건 아니다.
야전이나 공성전에서의 살상 목적으로 실험용 곡사포를 개발해, 여러 차례 실험도 해봤다.
그러나 그냥 직사로 쏘면 되는 일반 대포와 달리 탄도학의 정수를 필요로 하는 대포라, 정말로 숙련된 포병들이 아니면 제대로 맞추기도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나 저들은 그 곡사포로 쏜 포격의 상당수를 데미앙의 참호선 위에다 때려 부어 병사들을 살상하고 있다.
“밥 먹고 대포만 쐈나, 미친놈들 아니야 저것들!”
“어떻게 합니까, 백작 각하?”
“버텨! 어차피 곡사포탄만으로 병사들을 다 죽일 순 없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어림잡아 쏘고, 미리 조작해둔 신관으로 머리 위쯤에서 폭발시키는 병기다.
정확히 참호 위에서 터지는 포탄에는 속수무책이고 실제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지만, 그렇게 정확하게 쏜 포탄이 많은 건 아니고 조금만 빗나가도 참호의 보호는 어느 정도 유효하다.
“본대로 전령 보내고 증원이 올 때까지만 버텨! 강을 끼고 있으면 충분히 가능하다!”
“……백작 각하?”
다급하게 떠들던 데미앙은 지젤 다비가 건네주는 망원경을 받아들고,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크라프테군이 길고 두꺼운 무언가를 들고 옮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뭐야, 저건 또.”
“……미리 만들어둔 부교 같습니다. 아마도, 애초부터 기습적으로 라인강을 건널 작정으로...”
“X발. 그래봐야 다리로 건너오며 사격에 노출되면 지들이 별수 있나! 카젤에게 전달! 무슨 일이 있어도 강을 사수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아아, 아키텐 소위도 보내! 마법사니까 부교를 부수든 뭘 하든 해보라고 해!”
“넷!”
지젤이 달려가 전령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흘긋 보고 데미앙은 불안 초조한 얼굴로 망원경을 들었다가, 이내 기겁했다.
저 멀리, 적진에 왕실 홀을 쥔 독수리 기가 나부끼고 있다.
“시, 시X…….”
그걸 본 데미앙은 충격과 공포로 몸을 떨며 작게 뇌까렸다.
“대왕이 왜 여기 있어.”
* * *
“헉, 허어억…….”
루이스 다키텐은 참호 안을 정신없이 달리다가, 하늘에서 들리는 익숙한 굉음에 반사적으로 손을 위로 뻗었다.
그와 동시에 포탄이 폭발하며 흩뿌린 불꽃과 파편이 루이스가 펼친 마력 장벽을 뒤흔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아, 아니 소위님.”
얼떨떨해하는 병사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뒤, 루이스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전황이 아주 개판이구만요.”
뒤에서 따라 달리는 듀랑 하사가 말했다.
루이스가 보기에도 그렇다.
곡사포로 쏘아대는 폭발탄은 데미앙의 생각대로 참호 안에 있는 군사들을 전부 쓸어버릴 정도의 파괴력이나 정확도를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미르보선’.
데미앙이 제국과의 전쟁에서 펼친 활약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던 참호선이 그들을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하는 상황, 거기에 생판 처음 보는 신병기가 준 심리적 충격은 예상보다도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병사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위축되어 있고, 빠르게 접근 중인 검은 군복의 물결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보고 있거나 아예 참호에 웅크리고 덜덜 떠는 자들도 있었다.
“사격 준비, 사격 준비! 언제까지 참호 안에 웅크리고 있을 거야! 그런다고 날아갈 머리가 안 날아가는 거 아니다! 총 들어! 적에게 겨눠!”
하사관들이 째지는 소리를 내지르며 병사들을 다그치고 있는 광경을 지나쳐, 루이스는 페터 드 카젤 장군에게 다가갔다.
“카젤 장군님! 루이스 다키텐 소위입니다! 미르보 사령관 각하의 명으로 지원병으로 왔습니다!”
“아, 고위 마법사! 좋아, 딱 좋을 때 와주었군. 적들은 도강하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어야 할 거다. 어쨌든 참호를 낀 우리 병사들은-”
카젤의 말은 터져 나온 총성에 막혔다.
“뭐야,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도 전에 발포하는 머저리는 어떤 놈이야!”
“아, 아닙니다, 장군님!”
“뭐가 아니야?”
“적들입니다! 적들이 사격 중입니다!”
“무, 어엉?”
그 순간 멀리서 다시 총성이 들려오고, 참호에서 머리만 내놓고 총을 겨누고 있던 병사가 퍽 소리와 함께 참호 안으로 고꾸라졌다.
“헉……!”
루이스와 카젤 모두 그 병사의 미간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광경을 보고 기함했다.
그사이 참호 밖으로 고개를 내민 듀랑 하사가 슥 보더니 말했다.
“슛첸이군요.”
“무, 뭐?”
“제국에선 나름 명성 있는데, 크라프테군이 운용하는 척후병입니다. 강선인가 뭔가 하는 걸 새긴 총으로 전열보병보다 먼 거리에서 정확한 사격을 할 수 있죠.”
그 순간, 듀랑 하사의 앞에 마력 방벽이 번쩍이더니 팅- 소리를 내며 총알을 막아냈다.
“이렇게요.”
히죽 웃으며 다시 허리를 숙이는 듀랑 하사를 보며, 카젤도 루이스도 할 말을 잃었다.
루이스도 마력 방벽을 두른 채 고개를 들어, 강 건너편에서 전열보병의 사격으로는 명중을 기대하기 어려운 거리에서 자세를 낮춘 채 정조준 사격을 해대는 적 병사들을 볼 수 있었다.
적들이 도강을 개시하면 일제사격으로 저지하기 위해 참호 위로 머리를 내놓고 있던 병사들이 적의 척후병들에게 하나둘씩 저격당해 쓰러진다.
그러지 않아도 곡사포의 포격에 위축되어 있던 군사들은 일제사격은커녕 머리를 내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참호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다.
곡사포의 포격과 슛첸들의 저격으로 참호선의 혁명군을 몰아넣고 부교를 운반하며 성큼성큼 접근해오는 크라프테군의 위용.
그 광경을 본 페터 드 카젤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내뱉었다.
“……미친 전쟁기계 놈들. 저런 걸 어떻게 막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