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48화 (148/258)

148화. 크라프테 전쟁 - 개전

크라프테가 예고한 2년간의 정전 기간이 끝나기 하루 전.전운과 긴장감이 감도는 프랑지아의 수도 뤼미에르.

나는 혁명군 사령부에 방문한 에리스와 세 명의 총재들 앞에서 작전지도를 가리키며 상황을 설명하는 중이었다.

“최전선인 알자스에 6만, 로렌에 8만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카를 2세의 성향으로 보아 정전 기간이 끝나자마자 기습적인 공격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선제 배치했지만, 적의 배치 상황과 크리스틴이 수집한 정보로 볼 때 그런 기미는 없다.

“군사들이 고생이 많네요. 전쟁이 시작도 하기 전부터 대응태세를 갖추고 있으니…….”

에리스가 말해서, 나도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기초훈련을 마쳤다고는 해도 급하게 팽창시킨 군대입니다. 지난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신병들에게 미리 전장의 지형을 익히게 하고, 지역 요새화와 훈련을 진행하고 있으니 낭비는 아닙니다.”

대왕의 기습을 우려한 건 확실히 기우였긴 하지만, 뭐든지 대비했다가 허탕 치는 것이 허를 찔리는 것보단 나은 법이니까.

아니, 오히려 그 대왕이 고대하던 전쟁일 텐데도 태평하게 정전 기간 다 채운 뒤에야 선전포고하고 진격할 태세라는 것이 더 신기하지.

나는 다시 작전지도를 짚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현재 동원하여 집결 중인 11만의 병력 중 8만은 2선인 바후아와 프랑슈콩테에 각각 4만씩 배치할 계획입니다.”

중앙당 총재 앙쥬 백작이 손으로 턱을 매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북부와 남부 모두에 예비대를 배치해두고 방어하는구려.”

“맞습니다, 백작님.”

게르마니아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적들이 수도 뤼미에르로 진격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북부에 병력을 집결시켰었다.

그랬다가 레오폴트 대공에게 허를 찔려 알프스 왕국과의 교역로를 인질로 잡혀 끌려나가야 했지.

“게르마니아 제국과의 전쟁 때와 달리 이번에는 병력도 충분하니, 북부방면 요충지인 바후아와 남부방면 요충지인 프랑슈콩테에 병력을 두어 유사시 2차 방어선으로 기능하게 될 겁니다. 두 지역의 거리가 가까우니 유기적인 지원도 수월합니다.”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혁명당 총재 탈레랑이 물었다.

“하면, 나머지 3만은 어디에 배치됩니까?”

“그들은 비교적 연령대가 높거나 훈련이 덜 된 병력입니다. 수도 뤼미에르에 배치해 좀 더 훈련을 진행하고, 유사시 최후의 예비대로 쓸 계획입니다.”

저런 이들은 애초부터 전투에 투입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전쟁이란 것이 그렇게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진 않는 법이지.

“25만…….”

작전지도를 들여다보던 에리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딱히 답을 요구한 것도 아니라, 혼자 되새기는 듯한 흐릿한 음성.

여전히 왕관 따위는 쓰지 않고, 예전부터 입던 백색의 로브만을 입은 여왕이.

옥좌가 아니라 전장에서 군사들과 함께 싸울 에리스가 짊어질 책임의 무게.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선 이들의 숫자다.

“만전을 기했습니다, 여왕 폐하.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습니다.”

내 의도가 전해졌는지, 에리스는 살며시 웃으며 답했다.

“알고 있어요. 언제나 믿고 있습니다, 라파예트 후작님.”

“영광입니다, 여왕 폐하.”

에리스에게 답한 내가 뒤로 물러나자, 제독의 정복을 입은 크리스틴이 나섰다.

“해군은 게르마니아 제국 북부에서 크라프테 왕국의 해안가에 이르기까지 통상 파괴 작전을 수행합니다.”

굉장한 육군을 보유한 크라프테 왕국이지만, 원래는 게르마니아 제국의 내륙국으로 시작한 나라다.

그나마 저들의 수도에 가장 가까워 발전한 항구 슈테틴도 원래는 노던 연합 왕국의 영토였던 걸 감안하면, 저들의 해군력이 보잘것없는 것도 자연스럽지.

크리스틴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했다.

“적어도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저들의 해상 교역은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겁니다.”

애초부터 체급에 비해 비대한 군대를 유지해온 나라다. 해상 교역이 끊긴 채 장기전으로 가면 저들이 꽤나 고달파질 거라는 건 자명하겠지.

“중앙해까지 차단할 수는 없소? 그렇게 되면 아예 게르마니아 제국의 남부를 통한 교역로도 차단할 수 있을 텐데.”

앙쥬 백작이 끌끌거리며 묻자, 크리스틴이 답했다.

“중앙해는 비교적 넓고, 프랑지아 해군의 주 거점과도 거리가 멉니다. 이권이 엮이는 나라도 많고요. 드는 수고가 더 아깝죠.”

크리스틴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덧붙였다.

“게다가 게르마니아 제국을 통한 교역은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흠?”

앙쥬 백작의 의문에 대한 답은 외교 전문가인 탈레랑이 대신해 주었다.

“게르마니아 제국과 크라프테 왕국은 꽤 긴 시간 적대해온 관계입니다. 비록 이번 전쟁에서 크라프테 왕국이 제국의 편에서 싸우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둘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건 아니죠.”

애초부터 이 전쟁 자체가 크라프테 왕국의 이해보다는 대왕 개인의 의사로 인해 벌어지는 거지만, 어쨌든 저들의 전쟁이 된 이상 크라프테 왕국은 저들의 이권을 차지하려고 하겠지.

“일단 제국의 현재 제위를 쥐고 있는 주덴라이히 대공국이 시작한 전쟁이긴 하나, 전쟁에서 수월하게 이겨봐야 제국 내에서 크라프테 왕국의 입지가 높아질 뿐입니다.”

나까지 부연설명 하고서야, 앙쥬 백작이 이제 좀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아, 그렇군. 그러면 제국을 통해서 수입하는 물자는 일부러 적게만 주거나 비싸게 받아먹겠구려.”

크리스틴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우리 통상 파괴 작전의 목적에 부합합니다. 어쨌든, 크라프테 왕국의 교역을 제국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저들의 국력을 깎는다는 결과를 낳을 테니까요.”

황제는 몰라도, 황후는 이 정도 판 깔아주면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할 위인은 아니거든.

일단은 전쟁 중이지만 그런 상황이라도 적대적 공생관계가 성립되지 못할 건 없지.

“일단은 통상 파괴 작전에 전념하되, 전황이 어느 정도 진전을 보이면 추가 공작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때면 탈레랑 총재님의 도움이 필요하겠죠.”

“하하, 활약할 기회가 빨리 온다면 좋겠군요.”

크리스틴은 너스레를 떠는 탈레랑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나는 슬며시 시선을 돌려,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자유당 총재 니콜라 브리소에게 말을 걸었다.

“브리소 총재님은 의문점이나 의견이 없으신지요?”

니콜라 브리소는 무슨 생각 중이었는지 조금 놀란듯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아니오. 글이나 쓰던 자가 군사 문제에 관여해서 무엇하겠소. 육군과 해군을 지휘하는 분들이 이리 믿음직하시니 안심이라오.”

나는 영 씁쓸한 표정의 브리소를 잠시 바라보았다.

공화국 초창기부터 온건파의 수장이었고, 국민의회에 총재정부가 들어선 이후로도 보수적인 귀족 앙쥬 백작과 급진적인 혁명당 총재 탈레랑의 중간쯤 되는 성향으로 자리를 지켜온 사람.

하지만 이런 위기의 시대에 그런 행보와 위치는 색채가 불분명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총재로서의 영향력도, 당의 인지도도 국민의회에서 가장 미약하고.

앙쥬 백작도 총재로서는 탈레랑에게 존재감이 크게 밀리지만, 중앙당엔 나와 크리스틴이 있으니까.

브리소 총재는 그나마 크라프테와의 정전 협정 체결 당시 모처럼 국민의회의 대표로 참석했지만, 이미 답을 정해놓고 나온 대왕 앞에서 제대로 협상도 하지 못했지.

안쓰럽긴 하지만 혁명군에서 처음으로 나와 크리스틴에게 관심을 가져주었고 꽤 긴 시간 협조해온 사람이니, 나름대로 예를 갖추어 답했다.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재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하지요.”

그러자 니콜라 브리소는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 * *

야심한 밤.

나는 크리스틴을 품에 끌어안은 채,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쓸어내렸다.

유려한 곡선을 따라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을 느끼고 있자, 귓가에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지러워요.”

차분하면서도 귀에 진득하게 감기는 듯한, 사랑하는 사람의 소리.

“하하.”

손을 떼고, 대신 땀으로 들러붙은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자 크리스틴이 내 가슴팍에 파고들더니 말했다.

“이제 내일이면 또, 한동안은 못 보겠네요.”

나는 낮게 웃으며 답했다.

“이미 오늘이죠.”

자정은 아마 넘었을 테고.

그 크라프테의 대왕이라면 오늘 아침 대사가 선전포고문을 건네줘도 이상할 것 없겠지.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크리스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당신을 믿어요, 피에르. ……그래도 조금은 조심해 주세요.”

“그거, 앞보다 뒤가 핵심인 거죠?”

대답 대신 웃음을 터트린 크리스틴에게, 나도 말해주었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저도 당신을 믿습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작전회의에서야 통상 파괴 작전만 말했다지만, 크리스틴은 아키텐 상단을 통한 혁명군 전체의 보급품 조달과 첩보전까지 담당한다.

이렇게라도 말해두지 않으면 그녀는 분명히 자신의 건강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양 굴겠지.

크리스틴도 알아들었는지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칠흑 같은 눈동자가 나를 보며 부드럽게 휘고, 속삭이듯 답했다.

“당신과 저를 위해 일하는 건 꽤 기쁜데, 그래도 당신의 부탁이라면 조금은 참아볼게요.”

그런 그녀가 못내 사랑스러워서 입을 맞추려는 순간.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무슨-”

헐레벌떡 발코니로 나서자, 저 멀리에서 불기둥이 치솟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저긴…….”

살짝 떨리는 크리스틴의 목소리에, 내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답했다.

“무기고군요.”

염병할, 이래서 육군의 영역이고 뭐고 간에 어떻게든 크리스틴에게 맡기고 싶었는데.

나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 수도 무기고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

이 미치광이 대왕이 아침도 아니고 자정 넘자마자 참 거지 같은 걸로 선전포고하네.

* * *

크라프테 왕국, 수도 미텔부르크 인근 별궁.

크라프테의 대왕, 카를 2세는 각 잡힌 군복을 차려입고 모자를 눌러 쓴 채 언제나 들고 다니는 지팡이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그는 장난기 넘치고 검소한 국왕에서 전장의 지휘자로 변모했다.

재상에게 화려한 선전포고를 명했으니, 지금쯤은 저들도 받아보았을 터.

지루하기 짝이 없는 평화와 기다림의 시간은 끝나고, 갈망해 마지않던 철과 피의 시간이 왔다.

대왕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었다.

같은 공간의 공기이나, 같지 않다.

존재하지 않는 화약의 매캐한 내음이 느껴질 것만 같다.

어제까지만 해도 권태롭던 몸에 주체할 수 없는 활력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끼며, 대왕은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대왕께선 지금도 위대한 명군으로 칭송받고 있죠. 만약 이렇게 일으킨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그래서 미래를 위한 명예가 아니라 지금껏 남긴 명군이라는 이름조차 잃는다면 이건 아무 가치 없는 전쟁이 아닌가요?

어린 순백의 여왕은 그리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평화 속의 명군이라는 평가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이며, 투쟁을 그만둔 짐승은 이빨 빠진 가축으로 전락할 뿐이다.

대왕은 현재에 안주하며 만족한 채, 그저 죽음을 기다릴 뿐인 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그에게 일평생은 투쟁이었고, 그 자신의 증명이었다.

국민에게 헌사 받은 대왕이라는 칭호에도, 그가 이룩한 크라프테라는 국가조차도.

그것을 대신할만한 가치 따위는 없다.

대왕은 발코니에 나서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짐의 군대여-!”

도열해 있던 수만의 군사들이 완벽하게 일체화된 자세로 총을 돌려,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쿵-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병기로서 하나 된, 거대한 울림이 대왕에 대한 답을 대신한다.

“이것은 짐의 마지막 전쟁이다. 그대들은 짐과 같은 전장에 설 마지막 군사들이다.”

제국을 꺾었을 때, 그는 대왕의 칭호를 헌사 받았다.

그러나 부족하다.

그것은 한때의 강국이었으나 쇠락해가던 자들에게 소국의 입장에서 거둔, 불완전한 승리에 불과했다.

“그대들과 이 영광을 누릴 수 있어 기쁘도다.”

그랬기에 그 승리에 안주하지 않았다.

왕국 제1의 일꾼을 자처하며 국가를 위해 봉사하며, 일개 제국의 소국을 대륙 제일의 군사 강국으로 끌어올렸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적은 프랑지아의 혁명군! 우리의 전설을 마무리 지을 상대로서 부족함이 없노라!”

연주할 것은 강철의 노래.

새길 것은 피로 물든 탄식.

“출진하라, 제군!”

대왕은 희열에 차서 선언했다.

“이 대륙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영광을 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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