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크라프테 전쟁 - 겹쳐드는 길 (3)
혁명 프랑지아 왕국, 수도 뤼미에르.
아키텐 상단의 뤼미에르 본부.
“돌아왔습니다, 누님!”
“루이스.”
크리스틴은 깊이 안도하며 다가가, 루이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 엇, 누, 누님…….”
배다른 동생이 딴에는 머리가 굵었다고 제 누이에게 안긴 채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지만, 크리스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루이스에게 호위를 붙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루이스가 불편해할까 봐 두 명만, 그것도 거리를 두고 몰래 호위하도록 지시해두었었다.
그런데 루이스가 육로로 마차여행을 떠나버리면서 일시적으로 놓쳐버렸고, 호위들은 한참을 찾고서야 뒤늦게 루이스가 탄 마차가 습격받았다는 보고를 올렸다.
평소 같았으면 호위가 정기적으로 보내와야 할 보고가 늦어지는 시점에 바로 눈치챈 크리스틴이 대응을 했을 텐데, 크라프테와의 개전이 임박한 상황에 정신이 없어서 파악이 늦었다.
“저, 저기, 누님.”
품에 안긴 루이스가 어정쩡하게 굳은 채 다시 그녀를 불러서, 크리스틴은 그제야 팔을 풀고 루이스를 놔주었다.
“무사했구나.”
“그, 예. 운이 좋았죠.”
“……아키텐 상단이 많이 불편했니?”
“아, 그게, 음…….”
루이스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누님. 제가 경솔했습니다.”
크리스틴은 조금 심란한 기분으로 이제는 그녀보다 키가 조금 커진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크리스틴은 늘 그랬듯 익숙하게 감정을 억제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그쪽은 누구시죠?”
크리스틴이 보낸 눈초리는 제법 싸늘했지만, 그걸 받은 장본인은 익숙하다는 듯 태연하게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키텐 백작 각하. 레옹 듀랑이라고 합니다. 프랑지아 출신으로, 최근에는 마도 왕국 홀란트와 게르마니아 제국을 돌아다니며 일한 용병입니다.”
“저, 저를 습격에서 구해주고 여기까지 데려와주신 분이에요.”
크리스틴도 사전에 보고받아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물은 건.
“수고하셨어요, 용병 듀랑. 아키텐의 일원으로서 루이스를 무사히 데려와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죠. 루이스에게 고용되셨겠지만, 그와는 별도로 아키텐 상단의 이름으로 추가 보수를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당분간 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듀랑은 휘파람을 불더니 조금 더 정중해진 태도로 답했다.
“감사드립니다, 아키텐 백작 각하. 후한 보수는 언제나 환영이죠. 과연 이 의뢰를 받은 건 지극히 행운이었군요.”
크리스틴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듀랑을 바라보았다.
생각한 것에 비해 깔끔한 태도고, 미련도 남기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도 알아들은 것 같으니, 크리스틴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곤 그에게서 신경을 끄려고 했다.
“어, 누님.”
“응? 왜 그러니, 루이스?”
그러나 그때 들려온 루이스의 부름에, 크리스틴은 듀랑을 볼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부드러운 태도로 미소지어 보였다.
“듀랑 씨는 제가 개인적으로 계속 고용하고 싶은데요.”
그 말을 듣고는 미소가 뻣뻣하게 굳어버렸지만.
* * *
루이스와 듀랑이 물러간 후.
크리스틴은 그녀의 가신들이 올린 정보들을 살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루이스가 마차 습격으로 실종되었다가 마을에 도착하여 서신을 보낸 후, 크리스틴은 그걸 받자마자 용병 레옹 듀랑에 대한 모든 것을 파악해둔 뒤였다.
본명은 리샤르 드 뒤헝.
프랑지아 기사 가문의 차남으로 후계자인 장남에게 견제 받다 가문을 떠났고, 가문은 혁명 당시 붕괴.
루이스가 들었다는 과거와도 대충 비슷하고, 본인의 주장대로 마도 왕국 홀란트와 게르마니아 제국에서 용병 레옹 듀랑이 활동한 기록이 있다.
중간중간 비는 시간이 길고 행적이 불분명한 건 떠돌이 용병이라는 특성상 이상할 건 없고, 적어도 용병 레옹 듀랑이 실존 인물이라는 것까진 확실하다.
크리스틴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하필이면 루이스가 육로로 여행을 떠나자마자 습격을 받았고, 때마침 암살자들을 단독으로 잡아내기에 충분한 실력의 용병이 지나가다가 구해주었다?
크리스틴으로서는 루이스가 실종되어 가슴이 철렁했다가 안도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분명히 정보상으로 앞뒤가 다 맞고 문제도 없다.
크리스틴이 추가금을 줄 테니 이 일에서 손 떼라고 했을 때도, 듀랑은 바로 알아듣고 깔끔하게 그러려고 했다.
듀랑의 굳이 깊게 엮이지 않으려는 용병다운 태도에 역으로 신뢰감을 느끼고, 그의 과거사에서 동질감을 느낀 루이스가 오히려 붙잡았지.
루이스 입장에선 죽을 뻔했다가 구해진 거고, 여행에 대해 아무 노하우도 없었을 루이스가 긴 여행길 듀랑에게 도움받으며 친밀감을 쌓은 것도 이상하지 않다.
적어도 용병 레옹 듀랑 본인에겐 깔끔하리만치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게 더 부자연스럽다.
크리스틴의 정보 수집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한참 전에 프랑지아를 떠났을 용병의 과거사를 추적하는 일인데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면 그뿐이지만…….
크리스틴은 리샤르 드 뒤헝의 조사 결과를 보고는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하필이면 루이스가 동질감을 느낄만한 과거를 가진 프랑지아 출신 용병이, 그 행적도 의심할 여지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채 접근했다?
그게 우연이라고?
적어도 크리스틴은 그런 식으로 낙관하는 성정이 아니다.
심지어 그녀 자신부터가, 당장은 아니라도 미래에 패로 쓰기 유용해 보이는 자들은 일단 투자 삼아 확보해두는 습관을 가졌다.
급조된 패로 할 수 있는 일 따위 한정적이니까, 정보조직을 다루는 자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태도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녀와 동류의 적이라면.
루이스 다키텐의 행적과 성격에 대해 파악한 뒤, 미리부터 준비해둔 패 중에 이런 일에 쓰기 가장 적합한 신분을 고른 거라면.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이가 맞물리듯 맞아떨어져, 자연스럽게 침투시키는 것도 가능할 터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 노력으로 성공한다는 보장조차 없는 이런 방법은 쓰지 않겠지만, 이쪽 세계의 인간이라면 이것조차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그뿐인 무수한 패 중 하나일 테니.
문제는.
크리스틴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만약 이게 공작이라고 한다면, 왜 하필 루이스지?
이런 식으로 치밀하게 준비된 공작을 벌인다면, 그 대상이 굳이 루이스여야 할 필요가 없다.
크리스틴이 루이스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들, 루이스가 프랑지아라는 국가 기준에서 무슨 가치가 있냐면…….
전혀 없다.
만약 이게 크라프테의 공작이라고 치면, 이렇게까지 해서 루이스에게 요원을 붙여서 프랑지아와의 전쟁에 무슨 이득이 있을지 크리스틴조차도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그게 저 레옹 듀랑이 첩자인지, 그게 아니라 단순한 우연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이유다.
그래서 좀처럼 무언가를 청하지 않는 루이스의 부탁을 크리스틴이 섣불리 거부할 수 없게 하고 있다.
크리스틴도 그녀가 루이스에게는 좀 무르다는 것을 자각은 하고 있다.
그래도 아키텐에서 늘 위축되어 있던 동생이 모처럼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인데, 그걸 그 아이가 납득할 수 없는 사유를 대며 내치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결국 한참을 망설이던 크리스틴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루이스는 모처럼 마탑을 조기졸업하고 귀국해선, 자신도 도움이 되고 싶다며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소리를 했다.
저 레옹 듀랑의 출신이 의심스럽기 이전에 실력은 확실한 듯하니, 전장에 설 루이스의 목숨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크리스틴으로서도 그건 환영이다.
게다가…….
크리스틴은 편지지를 꺼내, 피에르에게 보낼 내용을 적어 넣기 시작했다.
의심되는 자라면, 차라리 그 존재를 알고 손이 닿는 곳에 두는 편이 차라리 안전할 수도 있는 법.
* * *
완연히 가을로 접어든 시점.
크라프테 왕국과의 개전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수도 뤼미에르에서 혁명군 총사령관 피에르 드 라파예트의 명의로 예비군 총동원령이 선포되었다.
그렇게 각지에서 동원된 혁명군이 혁명 프랑지아 왕국의 동부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쟁에 동원될 혁명군만 무려 25만에 달하는 대병력.
이베리카 형제국에서 보내올 증원군까지 합치면 도합 30만에 달할 압도적인 군세.
이에 맞서, 크라프테 왕국에서도 20만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했다.
국토와 인구의 규모만 보면 프랑지아의 절반에 불과한 국가임에도, 저 병력 중 정예 상비군의 비율은 프랑지아를 아득히 압도한다는 사실이 혁명군의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정식으로 혁명군의 일원으로서 입대한 루이스 다키텐도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괜찮으십니까, 고용주님?”
“괘, 괜찮습니다. 듀랑씨.”
“오, 이제 듀랑 하사입니다.”
“그, 그래요. 듀랑 하사. 그런데, 그러면 저도 고용주가 아니라 루이스 소위라고 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듀랑은 픽 웃으며 답했다.
“예, 혁명군 마법사 아키텐 소위님.”
“아, 루이스가 아니라 아키텐.”
루이스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심호흡을 했다.
“누님의 이름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데…….”
“하하, 어느 군대에서든 마법사는 고급 인력입니다. 마법사라곤 어중이떠중이만 있는 프랑지아에서 마탑의 정규과정을 졸업한 아키텐 소위님 정도면 오히려 지휘관도 대환영일 거니 너무 긴장하지 마시죠.”
“후우, 감사합니다. 듀랑씨, 아니 듀랑 하사…….”
루이스는 자신을 흘긋 흘긋 보는 사람들을 지나쳐, 목적지인 지휘 막사의 입구 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 뒤 각 잡힌 태도로 경례하며 소리쳤다.
“자유, 평등, 박애를 위하여, 국민의회와 여왕 폐하께 충성을! 금일부로 남부군 사령부에 배속된 루이스 다키텐 소위가 신고-”
열심히 소리치던 루이스는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장군에게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오오, 이제 왔군! 어서 오게! 하하하하! 반갑군, 반가워!”
“예, 예?”
그리곤 어벙한 얼굴로 만면에 미소를 지은 남자를 보며 반문했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턱 막았다.
“잘 와주었네, 루이스 다키텐 소위! 이 몸이 바로 자랑스러운 남부 혁명군 사령관,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이라네! ‘방어의 명장’, ‘딜루스의 수호자’ 이 몸을 칭송하는 이름은 물론 들어봤겠지?”
“예, 예? 어…….”
당연하지만 마도 왕국에서 이제 막 귀국한 루이스가 알 리가 없었다.
루이스가 어리바리하거나 말거나, 데미앙 드 미르보는 함박웃음을 지은 채 쉬지 않고 떠들었다.
“우리끼리만 하는 이야기지만, 이 몸의 능력을 알아보고 남부군 사령관 자리에 천거해주신 분이 바로! 아름답고 현명하시며 타의 모범이 되시는 아키텐 백작님이었지! 하하하! 이제는 아끼던 동생까지 보내주셨으니, 이것이야말로 아키텐 백작님이 이 데미앙 드 미르보를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 아니겠나?”
“예, 예…….”
루이스가 첫 대면부터 상관에 대한 경의를 잃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게 떠들던 데미앙 드 미르보는 반짝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아키텐 백작님의 귀한 동생이 머무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이 데미앙 드 미르보가 친히! 각별히! 세심하게! 신경 써주도록 하겠네! 그대는 머무는 동안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하하하!”
“여, 영광……입니다. 사령관 각하…….”
데미앙은 완전히 당황해하는 루이스와 악수하고선 등을 돌렸다.
그제야 루이스의 눈에 그런 데미앙을 매우 심하게 유감스럽다는 눈으로 보고 있는, 소령 계급장의 여자가 들어왔다.
무려 영관급 여장교. 당연히 처음 볼 텐데, 어째 눈에 익어서 들여다보고 있자 상대가 헛기침을 했다.
“앗, 시, 실례했습니다, 소령님! 루이스 다키텐 소위입니다!”
그러자 상대가 짐짓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환영합니다, 루이스 다키텐 소위.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 각하의 보좌이자 참모를 맡고 있는 지젤 다비 소령입니다.”
루이스는 그제야, 어째서 그녀가 눈에 익었는지 깨달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은인의 존함이라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맹세코, 결코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엘렌 다비, 네 의지를 과대평가하는구나. 고문에 견디는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기라도 했니? 인간의 의지는 네 생각보다 나약해. 네가 죽는 순간, 네 어린 동생들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은 있니? 그 정도 각오라면 지금 그만두는 것이 네게 좋을 거란다. 내겐 너 말고도 쓸 패가 많으니.
누이의 말을 듣고 오기가 찬 눈으로 올려다보던 사람. 그녀의 고집스러운 눈매와 닮은 소령이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르보 백작 각하께서 다소……. 개성이 과하시긴 하지만, 능력은 있는 분이십니다. 잘 적응하실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죠. 저 또한, 아키텐 백작 각하께 신세 진 바가 있으니까요.”
루이스는 지젤 다비가 악수를 청하는 손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그녀와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비 소령님.”
그렇게 말하는 목에 어쩐지 가시가 박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