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크라프테 전쟁 - 겹쳐드는 길 (2)
혁명 프랑지아, 수도 뤼미에르.
나는 초대받은 저택에서 만찬을 대접받는 중이었다.
전채로 나온 달팽이를 풍미 깊은 소스와 함께 즐긴 뒤 살짝 익힌 푸아그라의 지방질이 입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감각을 즐긴다.
거기에 소고기의 안심 중에서도 가장 질 좋은 부위로 만든 스테이크를 즐기면서 와인을 곁들이는 호사까지.
나오는 요리마다 다른 와인을 내와 맛의 조화를 안배했고, 심지어 식사에 늘 곁들여먹는 빵조차도 평소에 먹던 것과는 격이 다른 부드러움과 깊은 맛을 자랑한다.
정말 작정하고 구했을 고급 식재료들을 타협하지 않는 주방장이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다뤄서 내놓아, 깊고도 다채로운 맛의 향연이 혀를 아주 즐겁게 해준다.
……너무 즐거워서, 좀 과한데.
나라도 매일같이 이런 식사를 하고 살면 전장에서 먹는 밥은 못 먹게 될 것 같아.
나는 와인이 찰랑거리는 잔을 흔들며, 내심 기대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모리스 탈레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주, 훌륭하군요. 솔직히, 미식에 있어서는 귀족들도 총재의 안목을 따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원래부터 정보로는 알고 있었는데, 심지어 설탕마저 사치라고 맛대가리 없는 싸구려 차나 마시던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와는 아주 극과 극을 달리니 참 적응하기 어렵네.
내 생각이야 어쨌건, 탈레랑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여 정성껏 준비했는데, 그리 말씀해 주시니 기쁘군요. 주방장도 아주 뿌듯해할 겁니다.”
“이만한 대접에 만족하지 않을 손님은 없겠죠. 총재의 노력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뭐, 하다못해 나나 식사에 별 관심이 없는 크리스틴조차 손님을 초대한 만찬은 되도록 호화롭게 준비하는 편이니까.
저래도 혁명당 총재다.
시민들의 지지를 아주 잃을 정도로 부패한 사람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미식에 한해서 좀, 좀…… 열성적일 뿐이겠지.
나는 헛기침을 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동방 제국과의 이야기를 잘 이끌어주셨더군요. ……장담하신 것처럼.”
탈레랑도 입꼬리를 슬며시 비틀어 올렸다.
“후작님께서도 이베리카 전쟁을 승리로 끝내셨더군요. ……장담하신 것처럼.”
우리는 잠시 마주 보았고, 내가 물었다.
“이번에도 무승부입니까?”
“그렇게 된 것 같군요.”
우리 모두 픽 웃은 뒤, 탈레랑이 냅킨을 들어 느긋하게 입가를 닦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후작님께서 요청하신 동방 제국의 화병기 기술교류와 도입은 저쪽에서 고려 중입니다. 프랑지아에 주재 중인 저들의 대사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면, 제법 가능성이 있는 것 같군요.”
“……그건 좀 굉장하군요.”
저들의 화병기 기술을 받아오라는 건 솔직히 농담이었는데.
탈레랑은 의자에 등을 기대더니 입을 열었다.
“반의반 정도는 후작님이 성사시킨 일이기도 하죠.”
“제가 말입니까?”
탈레랑은 검지를 들어서 까닥거렸다.
“이베리카에서 악마들의 음모를 분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거요. ……절반의 성공 정도입니다만.”
전쟁이야 이겼다지만, 그레모리의 예견대로 드론은 결국 헛소문으로 치부되었다.
애초에 말만 듣고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존재들인데다, 드론들 모두가 육체조차 남기지 않고 가루로 흩어져 버려서 증거도 없다.
혁명군이나 이베리카 형제국의 증언이야 있지만, 우리나 그쪽이나 중앙 대륙의 다른 인간 국가들에겐 각각 불온한 국가이자 이교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걸 떠나서, 중앙 대륙에서는 그 드론의 실체가 워낙 끔찍해서 더더욱 허황된 이야기라며 부정하려 드는 모양새였다.
대륙에는 이미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엮이며 재미 보고 저들과 연계된 자들이 많은데, 저런 걸 공론화시켰다간 자신들의 이권이 날아가 버리니까.
혁명군 총사령관인 내가 작정하고 아키텐 상단의 로비를 동원해가며 공론화시키면 또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만…….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일에 그러지 않아도 바쁜 크리스틴까지 동원하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크라프테에 맞설 준비를 하고 그레모리에게 빚을 지워두는 쪽이 나중을 위해 낫겠지.
“동방 제국에서도 부정적인 여론이 많다고 들었는데, 아닙니까?”
“적어도 차르는 꽤 신빙성 있는 정보로 받아들이더군요. 그 덕분에 우리에 대한 지원이 긍정적으로 검토되는 중이고.”
“그건 기쁜 소식이군요. 하지만 차르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좀 더 빠른 지원이 가능한 것 아닌지?”
탈레랑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엘프들도 결국 정치하는 집단입니다. 차르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게 바로 국론이 되는 건 아닌 모양이더군요. 저들은 수명이 긴 만큼 기득권 세력의 권한이 강합니다. ……뭐, 외부인인 제가 전부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개중에는 동방 제국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더 집중하는 자들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하하, 그것참…….”
하긴,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데 엘프는 수백 년 고인 물들이잖아?
그쪽도 그쪽 나름대로 사정이 많나 보네.
“이런 말 하려니 조금 민망하지만 되도록 서둘러주시죠, 총재. 크라프테는 강적이고, 저는 가급적 이번 전쟁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하고 싶습니다.”
탈레랑은 와인 잔을 비우며 답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후작님. 하지만 제가 독촉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이해하고 계시겠지요.”
“그거야, 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른 화제를 꺼냈다.
“……하지만, 총재께서 바로 도와주실 수 있는 사안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이번엔 탈레랑이 한숨을 내쉬더니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거 말입니까…….”
나는 탈레랑의 표정을 보고 직감했다.
이거야, 우리도 동방 제국 꼴 보고 뭐라 할 처지가 아닌가 보군.
* * *
다음 날.
프랑지아 혁명군 총사령부.
나는 내가 이베리카에 다녀오는 동안 총사령관 대리로서 크라프테와의 전쟁에 대비한 준비과정을 총괄한 북부군 총사령관 루이 드제와 대면하고 있었다.
수도에서는 드물게 해군 제독의 정복 차림을 한 크리스틴도 함께.
“그동안 정말 수고해 주었어, 드제 사령관. 그대는 언제나 내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지.”
성실성과는 담쌓은 데미앙 드 미르보 놈과는 다르게 말이야. 뭐, 이번에 조금 변한 것 같기는 하지만.
“하하,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하지만, 한 가지 사안은 영 잘 풀리지 않아서…….”
드제는 크리스틴의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우리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송구합니다, 후작 각하, 그리고 아키텐 백작 각하.”
“아니요, 그건 드제 사령관님의 잘못은 아니니까요.”
크리스틴은 가볍게 답해주었지만, 나는 슬며시 미간을 구겼다.
내가 드제에게 요청한 사안은 크게 묶으면 두 가지였다.
첫째는 크라프테에 맞선 전쟁을 위한 혁명군 강화 계획안.
이 부분은 드제가 빈틈없이 처리해냈다.
혁명군은 예비군을 대폭 확충하며 기초 군사 훈련도 충실히 마쳐, 우리는 기존 상비군에 더하면 무려 25만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닥쳐온 혁명과 전쟁에 따라 주먹구구식으로 운용할 수밖에 없던 부족한 장교진의 문제도 그랑제콜 과정과 정전기간을 이용해 집중적으로 보강 교육을 하며 어떻게든 만회해냈다.
결과적으로 혁명 직후 준비 기간이 부족했던 제국과의 전쟁 시기에 비하면, 혁명군의 전력은 거의 2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우려되는 질의 문제는 내가 이베리카 반도에서 가장 핵심인 포병대와 기병대, 혁명 수호대 등의 상비군에게 충분한 경험을 시켜줬으니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면 어느 정도 만회 가능할 거다.
문제는 두 번째였다.
“역시 군 내에서는 반감이 심한 건가.”
“예,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후…….”
내가 한숨을 내쉬고 있자, 드제가 말했다.
“수도에서 발리앙에게 맞서던 때와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후작 각하. 그때는 처음부터 후작 각하를 따라 공화국에 가담한 귀족의 군대가 주축이던 남부군만을 다뤘지만, 우리는 지금 혁명군 전체를 총괄하고 있으니까요.”
드제는 그렇게 말하곤 슬며시 크리스틴의 눈치를 살폈고, 크리스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어차피 라파예트 후작님과 한배를 탄 몸이니, 가감 없이 말해주셔도 상관없어요.”
드제는 어색하게 웃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북부군과 기존 수도 및 여타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군부는 자신들이 아키텐 백작님에게 협조하여 그 영향을 받는 것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씁…….”
역시 그런가.
“혁명 초기 남부군에서야 아키텐 백작님께서 라파예트 후작님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내가 부재중에 크리스틴이 내가 서명한 명령장을 가지고 수도의 남부군을 움직여 라파엘 발리앙에게 맞서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부군도 규모가 한참 커졌고, 아예 아키텐 백작님과 엮일 일이 없던 북부군과 후방에서 행정업무를 맡은 군부는 아키텐 백작님의 관여를 일종의…… 기득권 다툼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키텐에 제대로 협조를 해주지 않는 거군.”
“바로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 이렇게 말씀드리기 굉장히 송구하나, 아키텐 백작 각하께서는 젊은 여성 귀족이자 대상인이라는 것만으로도 마초적인 집단인 군대의 반감을 삽니다. 그런데 심지어 해군 제독이 되셨죠. 해군이 자신들의 영역에 손대는 걸 좋아하는 육군은 아마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이쯤 되자 나도 슬며시 시선을 돌려 크리스틴의 눈치를 살폈지만, 크리스틴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게다가 거의 다 당신의 라인인 장성들과 달리, 군 규모를 확충하며 새로 채워진 장교들 중에는 혁명당이나 자유당의 영향을 받아 귀족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아요.”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지 않아도 탈레랑 총재와 브리소 총재에게 협조를 구해보긴 했는데…….”
크리스틴은 쿡, 하고 작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아마 그 총재들 중 당신만큼 당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걸요. 총재 개인을 움직여서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에요. 결국 이건, 전혀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이 한데 뭉쳐 탄생한 군대를 급속도로 팽창시키는 과정에서 따라올 수밖에 없는 문제니까요.”
“쯧.”
나는 절로 혀를 찼다.
대놓고 크리스틴에게 첩보전을 예고한 자가 있다. 크라프테 왕국의 재상, 유스틴 폰 비텐펠트.
크리스틴의 보고를 통해 알아낸 것으로는 태생부터 전쟁을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정보조직을 이끌고 있다지.
우리도 저들에게 대비하기 위해서는 크리스틴이 이끄는 아키텐과 군을 긴밀하게 공조시켜 방첩 체계를 구축해야 할 텐데, 정작 군에서는 크리스틴을 꺼림칙해 하며 거부하고 있다.
“총사령관의 권한으로 찍어 눌러서라도 강행해야 하나.”
드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송구하나 그리 현명한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후작 각하. 자칫하면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혁명군 총사령관이 치마폭에 쌓여서 군을 좌지우지한다는 소리 듣기에 딱 좋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도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네요. 크라프테의 첩보전은 아직 가시화된 위협이 아니고, 그렇지 않아도 발리앙 축출 후 너무 굳건해진 당신의 권력을 경계하는 의원들은 많아요. 가장 위험한 전쟁을 앞두고 국론을 분열시켜서 좋을 건 없겠죠.”
크리스틴까지 한마디 보태서, 나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해본 소리일 뿐입니다.”
적국의 테러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걸 막기 위해 육군 소속도 아닌 상인 귀족이자 제독에게 적극 협조하여 기밀 사항까지 전부 까발려라?
솔직히 거부해도 할 말 없지.
하지만, 크리스틴에게는 면목이 없네.
“……미안합니다, 크리스틴. 이렇게 된 이상, 아키텐이 관리하는 보급 분야라도 철저하게 부탁드리죠. 저도 나름대로 육군 내부의 보안을 강화해 보겠습니다.”
그런다고 크리스틴이 고평가한 작자의 수작을 다 막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문제이긴 한데…….
“그건 맡겨주세요. 그리고…….”
크리스틴은 슬며시 미소 짓더니 말했다.
“저라고 당하기만 할 생각은 없어요. 하나를 내어주면, 하나는 가져와야죠.”
“하하, 든든하군요.”
확실히, 크리스틴의 계획이 성공한다고 치면 크라프테는 생각도 하지 못한 뒤통수를 얻어맞겠지.
“그럼, 모을 수 있는 패는 다 모았고…….”
나는 크라프테 왕국이 속한 게르마니아 제국과, 프랑지아의 접경지대인 알자스-로렌 지역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도 전초전의 전장이 될 지역.
상대는 인류 최강의 군대와 중앙 대륙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는 대왕.
저곳 주민들도 참 수난이군.
“남은 건, 까보는 일뿐인가.”
천천히 눈을 감으면.
-2년간의 유예를 가치 있게 이용하길 바라지. 그대들의 결의에 걸맞은 전쟁을 기대할 테니, 짐을 실망시키지 말라!
지팡이에 의지해 다닐 힘없이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의 노인인 주제에, 그 지팡이를 지휘봉으로 쓰며 정정하다 못해 광기까지 느껴지던 대왕의 얼굴이 떠오른다.
살면서 그 정도로 강렬한 인상의 인간을 만나볼 일이 몇 번이나 있을지 모르겠는데.
눈을 뜬 나는 드제, 그리고 크리스틴과 한 번씩 마주본 후 말했다.
“그 대왕이 패배를 겪으면 어떤 얼굴로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되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