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크라프테 전쟁 - 겹쳐드는 길 (1)
마도왕국 홀란트의 외곽.
어두워진 밤을 모닥불의 불빛이 밝히고 있었다.
루이스가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자, 남자가 능숙한 솜씨로 모닥불에 꽂혀 다 익은 꼬치를 끄집어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아, 고, 고맙습니다.”
루이스는 남자가 건네주는 꼬치를 받아들고, 심란한 얼굴로 가죽이 벗겨지고 꼬치에 꿰여 구워진 토끼를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되기 전에는 제법 귀엽고 덩치도 있었는데, 가죽을 벗기고 구워놓으니 훨씬 작고 쪼그라들어 보기가 영…….
루이스는 시선을 돌려, 아무렇지도 않게 꼬치에 꿰인 토끼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레옹 듀랑이라 소개한 용병은 루이스의 시선을 느꼈는지 씩 웃었다.
“부잣집 도련님이 먹기엔 좀 그러신가? 그래도 먹어두는 쪽이 좋을 겁니다. 프랑지아로 갈 새 마차를 잡으려면 다음 마을까지는 걸어가야 하니까.”
“그, 그러네요.”
루이스는 눈을 질끈 감고 고기를 뜯었다.
조금 가늘면서도 단단한 고기의 맛은 그러지 않아도 잔뜩 긴장하며 마력을 쓴 루이스의 입을 사로잡았고, 루이스는 그것을 허겁지겁 먹다가 멋쩍어하며 말했다.
“그래도 맛은 괜찮네요…….”
“토끼 고기는 그래도 이런 평원에서 잡을 수 있는 것 중엔 좀 먹을만한 편입니다. 두 마리나 잡다니 운이 좋았죠.”
“그렇군요…….”
“뭐 용병이 신경 쓸 일은 아니긴 한데, 보아하니 여행 경험도 거의 없어 보이시는데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 그러게요…….”
루이스의 어깨가 쳐졌다.
11살 이후 마탑의 학생이 된 이후, 루이스는 아키텐 가문에 있을 때의 위축된 감정과 긴장감을 거의 잃어버렸다.
누이는 그녀가 보낼 보호가 동시에 감시처럼 보일 거라는 사실을 잘 알아서인지 그에게 사람을 붙이지도 않았고, 대신 마탑에서 루이스에게 신경 써줄 만큼 충분한 기부를 하는 선에서 그쳤으니까.
“실수했네요.”
루이스는 씁쓸하게 말했다.
한 사람의 당당한 마법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마탑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죽을 뻔했다.
고작 아키텐 상단과 마주치기 싫어서 혼자 육로 여행을 나왔다가 습격당했다는 사실을 알면 누이는 뭐라고 할까.
……그 정도라면 차라리 다행이지, 혹시나 이 습격을 누이가 알고도 묵인한 거라면? 그러면 멋모르고 마탑에서 나온 자신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루이스는 토끼 고기를 씹다 말고 풀이 죽었다.
마탑의 초급 과정을 조기 졸업한 우수한 인재라고는 해도, 고작 16살에 불과한 루이스에겐 가혹한 상황이었다.
그런 루이스를 보던 레옹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입을 열었다.
“뭐, 습격 받는 사람이 늘 그렇듯 사연이 있으신가 본데.”
루이스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레옹이 말을 이어 나갔다.
“용병 나부랭이가 하는 말이니 반쯤 걸러 들으십쇼. 인생이란 어찌 흘러갈지 모르는 일입니다. 제 이야기긴 한데, 저도 프랑지아 귀족 출신이거든요.”
“아, 그랬나요.”
어쩐지 프랑지아의 억양에 은근히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싶었다.
루이스가 그렇게 납득하고 있자, 레옹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귀족이라고 해봐야 별건 아니고, 작은 가문의 차남이었죠. 염병할 큰형님은 머리 좀 굵어지니까 자기가 받을 것밖에 없다고 대놓고 견제하질 않나, 제에기.”
레옹의 말투가 제법 실감 나서, 루이스는 슬며시 웃어버렸다.
“결국 못 버티고 노잣돈 챙겨서 집 나왔죠. 솔직히 저도 무모했습니다. 내가 막 집 나왔을 땐 딱 고용주님만큼 아무것도 몰랐거든. 덕분에 아주 개고생을 했지. 처음엔 그래도 귀족이라고 점잔 좀 떨었는데 염병, 굶어 뒤질 판인데 귀족의 체면이 다 뭐람.”
“하하하…….”
루이스의 표정이 좀 풀어지자, 레옹도 슬며시 마주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 염병할 인생이 참 묘하다고, 프랑지아에서 혁명이 터지더랍니다. 그 쥐꼬리만한 작위랑 영지 독식하겠다던 형 놈은 거기 휘말려 죽어버리고, 가문도 망했지. 제일 개고생하고 밑바닥 인생일 것 같던 나만 그럭저럭 살고 있지 뭐야?”
루이스는 거기서 잠깐 멈칫하더니 물었다.
“……그럼 혁명군을 원망하시나요?”
레옹은 잠깐 멈칫했지만, 손으로 수염이 까끌까끌한 턱을 긁더니 답했다.
“처음에 소식 전해 들었을 땐 좀 싱숭생숭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까놓고 떠난 가문 조져놨다고 내가 원망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고.”
“그렇군요.”
루이스가 조금 안도하며 답하자, 레옹은 씩 웃었다.
“뭐, 그냥 밑바닥 용병 나부랭이의 경험담입니다. 망한 줄 알았던 인생이 알고 보니 좀 낫더라는 그런 흔해빠진 이야기죠. 거 고용주님은 번드르르하게 마탑에서 교육도 받고 한 것 보면 차남이어도 나보단 좀 나은 처지 같은데,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마시라고 한 이야깁니다.”
“그래요…….”
루이스는 수긍했다.
기실 그가 이렇게 마탑에서 교육도 받고 있는 것은 누이의 배려 덕분이다.
아니. 애초에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해한 시점에, 누이가 그를 반역죄로 묶어서 같이 처단했어도 감히 반대할 사람은 없었을 거다.
누이 덕분에 살아남아 마법사까지 되어놓고, 습격 한 번 당했다고 이제 와서 누이가 변심했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니 그렇게 바보 같은 고민이 어디에 있지?
레옹 듀랑이야 그냥 고용주를 안심시키려고 용병들이 흔히 떠드는 과거사 같은 거였겠지만, 루이스는 깊은 감사를 느꼈다.
한결 나은 처지인 루이스가 이렇게 말하면 레옹은 불쾌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땅에서 은근히 비슷한 처지인 사람을 만나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인연인가 싶고.
루이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입을 열었다.
“고맙-”
“그런데요, 고용주님.”
“예?”
“선금은 확실히 받았지만,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프랑지아까지 모셔다드렸는데 아키텐이 고용주님을 죽이려고 든 거라서 내어줄 돈이 없다고 한다던가, 그런 건 아니겠죠?”
“……만약 그러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레옹은 턱을 매만지더니 답했다.
“그럼 지금부터 고용주님 잡아다가 습격자들 찾아볼지, 아니면 선금은 받았으니 곱게 놓아드리고 갈 길 갈지 고민해 봐야겠죠?”
루이스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밑바닥 용병 나부랭이에게 동질감은 무슨!
“……설사 아키텐 가문이 안 줘도 받은 용돈 예금해둔 게 어디 간 건 아니니까 의뢰비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루이스의 싸늘한 말에, 레옹은 히죽거리며 웃으며 답했다.
“이야, 대상단 가문은 용돈부터 스케일이 다른가 봅니다. 그것참 안심되는 말씀이시군요! 하핫, 프랑지아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루이스는 헛웃음을 흘리곤, 휙 몸을 돌리며 말했다.
“고용된 몸이시니 불침번 정도는 서주실 거죠?”
“하핫, 물론입죠. 오히려 고용주님이 불침번 서겠다고 고집부리시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끝까지 얄미운 소리에, 루이스는 모포를 덮고 누워버렸다.
긴장감이 풀리고 피로해서인지, 루이스는 얼마 가지 못해 곯아떨어졌다.
레옹 듀랑은 픽 웃으며 그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을 흘긋 보곤, 허리춤에 찬 단도를 하나 꺼냈다.
제법 긴 시간 빡세게 훈련받았는데도, 토끼 따위 잡는데 한 발이나 헛쳤단 말이지.
기사 출신인 주제에 이런 걸 암살자 이상으로 던져대며 그 유명세를 떨칠 정도면, 라파예트 후작은 대체 얼마나 긴 시간 수련한 걸까?
그와 동년배인 그 후작은 대체 언제부터, 어떤 경험을 했기에 그들이 대를 이어 지켜온 가치관을 그토록 손쉽게 부정하고 저 혁명군을 이끌고 있지?
레옹은 손에 든 단검을 허공으로 휙 던졌다가 떨어지는 것을 잡아채고는, 다시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한 번 완전히 벗어났던 길이, 다시금 겹쳐든다.
프랑지아.
……오랜만에 돌아가게 될 고국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 * *
혁명 프랑지아, 수도 뤼미에르.
이제 막 초여름에 접어든 시점.
‘빛’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도시의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시가지는 평온하고 화려하여, 혁명의 수라장을 지나고도 중앙 대륙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도시에도, 아니 그런 도시이기에 그만큼 거대한 빈민가가 존재한다.
“우와아, 여왕님!”
“바보야, 여왕 폐하!”
“여, 여왕 폐하!”
코흘리개 어린이를 타박 주는 어린 소녀의 앞에서, 에리스는 자못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여왕님이든 여왕 폐하든, 성녀님이든 뭐든 좋으니까 사이좋게 지내렴. 자, 여기 빵.”
“우와아, 오늘은 4개나! 감사합니다, 여왕 니…… 여왕 폐하!”
에리스는 기뻐하는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주었다.
그럴 때마다 하얀 장갑을 낀 손에서 빛이 나서, 미약하게나마 축복을 걸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에리스와 그녀를 돕는 이들이 빈민가의 주민들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던 빈민들은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할 때쯤에야 모두 돌아갔다.
“고생하셨습니다, 여왕 폐하.”
“으우으으으-!”
내가 다가가서 말하자, 에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쭉 펴면서 기지개를 켜더니 한 템포 늦게 대답했다.
“저도 고마워요, 후작님. 이번에는 중앙당에서도 좀 지원해 주신 덕분에 넉넉하게 나누어줄 수 있어서, 다들 좋아하더라고요.”
“그렇습니까.”
나는 흘긋 시선을 돌려 저 멀리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빈민 아이들과, 그들이 사는 빈민가를 바라보았다.
포르투 항구에서 보았던 그 지저분하고 거미줄 같던 곳과 구조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래도 최소한 죽지 못해 살아 있던 얼굴들과 달리, 이곳의 빈민들은 그럭저럭 사람 사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네? 후작님이 사주신 비~~~싼 아티팩트 덕분에 전혀요. 사치는 안 된다지만, 전 이거 없으면 두 번 다시 여름을 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얼굴은 베일로 가려져 있는데도, 에리스가 헤실헤실 웃으며 말하고 있을 얼굴이 연상되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되었다.
오히려 에리스가 내 얼굴을 살피는 듯하더니, 손을 들어 올려 아마도 입가일 부분을 가리며 말했다.
“음~ 우리 무자비한 총사령관님께서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셔서 구호 활동도 지원해 주시고, 따라와서 구경하고 하시는 걸까요~?”
“……그냥, 머리로 아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 사이에 괴리가 크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에리스는 쿡쿡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빈민들을 위한 학교 도입 안건도 입장을 바꾸신 거고요? 원래는 반대하셨잖아요. 전시에 그런 당장의 실효성도 의심되는 정책에 배정할 예산 같은 건 없다고.”
“아아, 뭐…….”
내가 대충 답하자, 에리스는 베일 너머의 보랏빛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이베리카에서 무엇을 보고 오셨나요?”
“……선택도 하지 못하고 그저 주어진 비참한 신세에서 벗어나 운명을 바꾸려고 발버둥 친 끝에, 결국 성공해낸 이들을 보고 왔습니다.”
포르투의 그 비참하고 참혹하던 빈민가도, 크록스의 치세 아래에선 조금이라도 바뀌겠지.
설사 완전한 성공을 이룩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차악으로 바꿀 수는 있을 거다.
“인상적이셨나 보네요.”
나는 에리스의 말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제가 구체제가 아니라 혁명을 선택한 것 또한, 그들처럼 최악을 피하고 조금이라도 나은 길을 가기 위해서였다는 걸 다시 상기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작은 투자로 바꿀 수 있는 건 바꾸려고 해야 한다는 것도.”
공화국에 성공적으로 투신하며 혁명의 수호자라 불리며 에리스를 여왕으로 옹립하고, 수차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어느덧 잊어버렸던 것을.
내 말을 들은 에리스는 잠시 조용히 있더니, 손으로 베일을 걷어 내렸다.
“눈 안 아프십니까?”
에리스는 석양의 강한 빛에 슬며시 얼굴을 찌푸리더니, 눈을 몇 번 깜빡이고서야 익숙해졌는지 느릿하게 답했다.
“이 말은 꼭, 얼굴 제대로 마주 보며 해주고 싶어서요.”
그리곤 석양의 붉은빛을 그대로 투영해, 보라색으로 신비하게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후작님이 제 후원자셨던 것, 그리고 의회의 한 축을 잡고 혁명군을 이끄는 분이시라는 것. 그 모두가 저와 이 나라 사람들에게 아주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피식 웃으며 에리스의 후드를 눌러, 그녀의 눈가를 햇빛으로부터 가려주며 답했다.
“저야말로, 제가 찾던 4왕녀가 당신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곤 조금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그리고 이 나라가 여왕 폐하께서 바라시는 길로 가기 위해서는 넘어서야 할 관문이 아직 남아있죠.”
“……크라프테.”
나직한 음성에, 나는 언젠가 그녀에게 물었던 것을 다시 물었다.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여왕 폐하. 적은 이 시대 최강이라 불리는, 전쟁을 위해 태어난 국가 그 자체입니다. 여왕 폐하께서는 다시금 국민들을 저들에 맞선 전장으로 이끌 각오를 다지셨습니까?”
에리스는 천천히 답했다.
“언제나. ……그러기 위한 여왕이니까요. 당신은요, 후작님?”
내가 답했다.
“저 또한.”
크리스틴에게 약속한 미래를 거머쥐기까지 앞으로 겨우 한 발.
애초부터, 그러고자 여기까지 왔다.
그걸 위해 원래라면 그저 성녀로서 살다가 배신당해 죽었을 에리스의 길을,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겹쳐 놓았으니까.
“적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반드시 폐하와 이 나라에 승리를 바치겠습니다.”